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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희생지’ 를 찾은 유족들 [사진제공=전북도민일보]
성홍제(71) 씨에게는 부친의 기억이 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병사했다고 들었다. 작년 초 고향 선배의 전화를 받고서야 부친이 전주형무소에서 돌아간 사실을 알게 됐다. “YTN에 나온 ‘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기사 봤는가. 우리 아버지와 자네 아버지가 같이 계셨을 거야.” 손위 형에게 물어보니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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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조사와 위령 시급
▲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 성홍제 회장(우측)이 전주 효자동 좌익 인사 학살 매장지를 찾았다 [사진제공=전북도민일보]
그의 부친은 1948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고, 그는 1949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50년 7월 초쯤 퇴각하는 한국 군경에 의해 다른 수감자 1,400여 명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단기형을 받은 좌익사범이었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된 여성 수감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농부였던 성 씨 부친의 죄목은 질서유지 위반 (보안법), “동네 사람 누구에게 20원, 또 다른 누구에게 100원씩 좌익활동비를 주었다”는 혐의다. 좌익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만으로 형기를 2년 남긴 상태에서 총살당한 후 암매장됐다.
가족들은 막내인 성 씨에게 부친의 사망 이유를 철저히 숨겼다. 제적 사유는 병사로 기록했다. 연좌제는 갑오경장 때 폐지됐지만, 1980년대 초까지 공공연히 살아있었다. 부친이 좌익사범인 사람은 사관학교 진학이나 공무원 임용, 공기업 취업이 불가능했다. 가족들이 부친의 사인을 세탁해준 덕분에 성 씨는 3사관학교에 진학해 소령으로 제대했다. 작년 3월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 조사 자료를 읽던 성 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좌익사범을 ‘처단’한 부대 중 하나가 자신이 7년 동안 근무했던 육군 7사단 헌병대였다.
성 씨는 다른 유족들을 찾아 나섰다. 2010년 진실과 화해위원회 조사 자료에 나온 74명의 유족 가운데 30여 명을 모아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재출범시키고 회장을 맡았다. 전북도와 전주시를 설득해 예산을 확보하고 올해 7월부터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과 산정동 소리개재 등에서 유해 발굴조사에 나선다. “이제는 좌우 따지지 말고 화합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용서하고 풀어야죠. 그러려면 국가가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유족들도 두려워 말고 나섰으면 좋겠어요.”
▲ 전주형무소 사건 관련 희생사진 /형무소 앞 연와공장 [사진출처=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한국전쟁 때 무고하게 희생된 전주형무소 수감자는 좌익만이 아니다. 전주를 점령했던 북한군은 퇴각을 앞둔 1950년 9월 26일과 27일 지역유지 등 우익 수감자 500여 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공산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북지역 위원장 등 중도적 민족 지도자들도 살려두지 않았다. 미군기가 집단매장지를 잘못 폭격하는 바람에 유해 가운데 300여 구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175구는 현재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돼 있다. 황방산 좌익 집단매장지와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곳이다.
우익인사 175위를 모시는 일은 이인철 (90)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대표가 이끌어왔다. 평안도 출신인 이 씨는 한국전쟁 때 경찰로 전주에 들어와서 북한군의 학살현장을 목격했다. 참혹한 킬링필드의 기억을 잊지 못해 자발적으로 위령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망인이 특정되지 않다 보니 합동 매장지가 점점 주인 없는 무덤이 돼가고 있다. “민간 차원에서 위령 사업을 끌어가는 데 한계가 있어요.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교훈을 삼기 위해 이제 정부 차원의 위령 사업이 시작돼야 합니다.”
▲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이인철 대표가 YTN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역사회는 혈연으로 얽혀 있다. 이념의 이름으로 반대세력을 살해할 만큼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전주형무소에서 좌우익 인사들을 살해한 세력은 외부에서 왔다. 남북한 양측의 정부군이다. 국가 기관인 형무소에서 초법적인 학살이 벌어졌지만, 지역사회는 이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반도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다만 멈춰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건은 봉인됐고 69년이 흘렀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좌익 인사들이 살해됐다. 하지만 좌우익 인사들이 모두 살해된 곳은 전주와 대전 등 일부에 그친다. 전주는 좌익 인사 매장지 발굴조사도 가장 늦었다. 1기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2010년까지 증언과 문헌 조사를 마치고 유해발굴과 화해조치를 권고했지만, 보수 정권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 학살 현장은 2003년 YTN이 한 유족의 발굴 현장을 단독촬영하면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온 가운데, 남북간 평화체제 구축 작업이 어렵게나마 진척되고 있다.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줄 절호의 기회다. 좌우익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위령제부터 시작하면 어떤가. 성 씨와 이 씨는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합동위령제 개최에 동의하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넘어 평화의 희년을 선포할 때가 왔다.
송태엽 해설위원실장 [taysong@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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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홍제(71) 씨에게는 부친의 기억이 없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병사했다고 들었다. 작년 초 고향 선배의 전화를 받고서야 부친이 전주형무소에서 돌아간 사실을 알게 됐다. “YTN에 나온 ‘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기사 봤는가. 우리 아버지와 자네 아버지가 같이 계셨을 거야.” 손위 형에게 물어보니 사실이었다.
<관련기사>"두개의 학살, 군경이 죽인 유골은 방치"
<관련기사>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조사와 위령 시급
▲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 성홍제 회장(우측)이 전주 효자동 좌익 인사 학살 매장지를 찾았다 [사진제공=전북도민일보]
그의 부친은 1948년 전주형무소에 수감됐고, 그는 1949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50년 7월 초쯤 퇴각하는 한국 군경에 의해 다른 수감자 1,400여 명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 단기형을 받은 좌익사범이었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된 여성 수감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농부였던 성 씨 부친의 죄목은 질서유지 위반 (보안법), “동네 사람 누구에게 20원, 또 다른 누구에게 100원씩 좌익활동비를 주었다”는 혐의다. 좌익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만으로 형기를 2년 남긴 상태에서 총살당한 후 암매장됐다.
가족들은 막내인 성 씨에게 부친의 사망 이유를 철저히 숨겼다. 제적 사유는 병사로 기록했다. 연좌제는 갑오경장 때 폐지됐지만, 1980년대 초까지 공공연히 살아있었다. 부친이 좌익사범인 사람은 사관학교 진학이나 공무원 임용, 공기업 취업이 불가능했다. 가족들이 부친의 사인을 세탁해준 덕분에 성 씨는 3사관학교에 진학해 소령으로 제대했다. 작년 3월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전주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 조사 자료를 읽던 성 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좌익사범을 ‘처단’한 부대 중 하나가 자신이 7년 동안 근무했던 육군 7사단 헌병대였다.
성 씨는 다른 유족들을 찾아 나섰다. 2010년 진실과 화해위원회 조사 자료에 나온 74명의 유족 가운데 30여 명을 모아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재출범시키고 회장을 맡았다. 전북도와 전주시를 설득해 예산을 확보하고 올해 7월부터 전주시 효자동 황방산과 산정동 소리개재 등에서 유해 발굴조사에 나선다. “이제는 좌우 따지지 말고 화합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용서하고 풀어야죠. 그러려면 국가가 나서서 진상을 규명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유족들도 두려워 말고 나섰으면 좋겠어요.”
▲ 전주형무소 사건 관련 희생사진 /형무소 앞 연와공장 [사진출처=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한국전쟁 때 무고하게 희생된 전주형무소 수감자는 좌익만이 아니다. 전주를 점령했던 북한군은 퇴각을 앞둔 1950년 9월 26일과 27일 지역유지 등 우익 수감자 500여 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공산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북지역 위원장 등 중도적 민족 지도자들도 살려두지 않았다. 미군기가 집단매장지를 잘못 폭격하는 바람에 유해 가운데 300여 구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175구는 현재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돼 있다. 황방산 좌익 집단매장지와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곳이다.
우익인사 175위를 모시는 일은 이인철 (90)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대표가 이끌어왔다. 평안도 출신인 이 씨는 한국전쟁 때 경찰로 전주에 들어와서 북한군의 학살현장을 목격했다. 참혹한 킬링필드의 기억을 잊지 못해 자발적으로 위령 사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망인이 특정되지 않다 보니 합동 매장지가 점점 주인 없는 무덤이 돼가고 있다. “민간 차원에서 위령 사업을 끌어가는 데 한계가 있어요.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교훈을 삼기 위해 이제 정부 차원의 위령 사업이 시작돼야 합니다.”
▲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이인철 대표가 YTN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역사회는 혈연으로 얽혀 있다. 이념의 이름으로 반대세력을 살해할 만큼 서로 적대적이지 않았다. 전주형무소에서 좌우익 인사들을 살해한 세력은 외부에서 왔다. 남북한 양측의 정부군이다. 국가 기관인 형무소에서 초법적인 학살이 벌어졌지만, 지역사회는 이 사건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반도의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다만 멈춰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건은 봉인됐고 69년이 흘렀다.
한국전쟁 당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서 좌익 인사들이 살해됐다. 하지만 좌우익 인사들이 모두 살해된 곳은 전주와 대전 등 일부에 그친다. 전주는 좌익 인사 매장지 발굴조사도 가장 늦었다. 1기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2010년까지 증언과 문헌 조사를 마치고 유해발굴과 화해조치를 권고했지만, 보수 정권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 학살 현장은 2003년 YTN이 한 유족의 발굴 현장을 단독촬영하면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내년으로 다가온 가운데, 남북간 평화체제 구축 작업이 어렵게나마 진척되고 있다.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줄 절호의 기회다. 좌우익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위령제부터 시작하면 어떤가. 성 씨와 이 씨는 아직 만난 적이 없지만, 합동위령제 개최에 동의하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넘어 평화의 희년을 선포할 때가 왔다.
송태엽 해설위원실장 [taysong@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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