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조사와 위령 시급

전주형무소 억울한 죽음들, 조사와 위령 시급

2018.01.07. 오전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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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950년 여름, 전라북도 전주 형무소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우리 군경과 북한 인민군이 각각 천여 명의 재소자를 학살했는데, 법적 절차가 없었고 그 방법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내후년이면 70주년이 되는 전주 형무소 학살사건이 망각의 늪으로 빠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억울한 죽음에 대해 조사와 위령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송태엽 기자가 집중 취재했습니다.

[기자]
지금은 주택가로 변한 전주시 진북동의 전주형무소에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정원의 두 배가 넘은 천800여 명이 수용돼 있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전주에 진입한 7월 20일 이전에 이들 중 경제사범을 제외한 천4백여 명이 우리 군경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형무관이었던 이순기 씨는 학살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순기 / 전 전주형무소 형무관 (2003년 YTN 인터뷰·2016년 별세) : 7월 4일부터, 첫날 내가 비번날인데 그날 호기심에 한번 따라가 봤다고. 그랬더니 군인들이 거기서 구덩이를 파서 올려놓고 거기다, 앉혀놓고 30m 거리에서 집행하는 것을 내가 확인을 했다고….]

[홍성덕 /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1차 학살은 서울에서 이송된 158명 정도의 중형을 받았던 좌익들이 학살당한 거고요. 그다음에 2차, 3차, 4차에 걸쳐서는 거의 1년 미만의 형기로 수감돼 있었던 사람들까지 모조리 (학살한 것으로 기록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된 제주도 출신 여성 수감자 백여 명과 여순사건 관련자들도 희생자 가운데 포함돼 있습니다.

옛 공동묘지와 건지산, 소리개 재, 그리고 황방산에서 학살이 이뤄졌다는 증언이 남아있습니다.

두 달 뒤 북한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더 끔찍했습니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긴급히 퇴각하게 된 북한군은 9월 26일과 27일에 전주형무소에 갇혀 있던 지역 인사 천여 명을 즉결처분했습니다.

지역 인사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몰랐던 북한군은 총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마치 풀어줄 것처럼 희생자들을 한 명씩 불러내 흉기로 타살하기도 했습니다.

옛 전주형무소 바로 옆에 있는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에 벽돌공장이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바로 이곳에서 퇴각을 앞둔 인민군은 지역인사 400여 명을 집단 학살했습니다.

북한군은 민족 지사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습니다.

일제하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시도했던 반민특위 전북지역 위원장도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됐습니다.

[이인철 (89세) /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대표 : (왜 잡아갔어요, 이 사람을?) 그건 지방 유지니까…. 당이 조선 민주주의 그 무슨 당 아니잖아. 한독당이니까….]

남북 양측이 저지른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건은 2010년까지 존속된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증언과 문헌 조사를 했지만, 추가 조사나 유해발굴, 위령 사업 등 위원회의 권고는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자칫 이념논쟁에 빠져들까 봐 양측 유족마저 이 문제를 쉬쉬하고 있는 사이 지역사회의 깊은 상처가 68년 동안 감춰져 왔습니다.

[홍성덕 /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통일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보면 이제는 좌익이냐 우익이냐 하는 사상적 이념 대결이 이 사회를 지배할 수 없다고 봅니다.]

[국주영은 / 전라북도 도의원 : 좌네, 우네, 저는 이걸 따질 것이 아니고 같이 해야 된다고 봐요. 이것을…. 그러려면 행정에서 나서야 된다는 거예요.]

[이인철 (89세) / 6.25 민간인 학살연구회 대표 : 모셔야죠. 모신다는 형식을 추모회가 됐든지 뭐가 됐든지 한번은 모셔야 하는 거 아니냐….]

YTN 송태엽[taysong@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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