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맛집] 사극 속 겨울나기는 갑부들 이야기?! 역사 속 겨울나기

[역사맛집] 사극 속 겨울나기는 갑부들 이야기?! 역사 속 겨울나기

2019.12.05. 오후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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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맛집] 사극 속 겨울나기는 갑부들 이야기?! 역사 속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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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뉴스FM, 조현지입니다’]
■ 방송 : YTN라디오 FM 94.5 (12:20~14:00)
■ 진행 : 조현지 아나운서
■ 대담 : 김준우 신일고 선생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역사맛집] 사극 속 겨울나기는 갑부들 이야기?! 역사 속 겨울나기





◇ 조현지 아나운서(이하 조현지)> 어르신들께 날씨가 너무 춥다고 하면 이정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라면서 옛날엔 전기장판이나 핫팩은커녕 솜바지 하나로 겨울 났다, 이런 얘기들 하시곤 하는데요. 궁금해집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엔 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푹 끓인 곰탕처럼 속을 든든하게 해줄 <역사맛집> 역사셰프, 신일고 김준우 역사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 김준우 신일고 선생님(이하 김준우)>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조현지> 오늘 오시는 데 많이 안 추우셨어요?

◆ 김준우> 많이 춥더라고요. 기온이 영하, 이런 식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보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체감 온도가 엄청 추웠습니다.

◇ 조현지> 특히나 여기 상암동은 ‘빌딩풍’이라고 하죠? 왠지 더 차가운 느낌이 느껴지는 그런 동네예요. 아무리 추워도 나는 패션피플, ‘패피’라서 내복은 절대 안 입는다, ‘얼죽코,’ 얼어 죽어도 나는 코트만 입습니다, 이런 분들도 계시던데 선생님은 어떤 편이세요?

◆ 김준우> 저는 코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누구보다도 빠르게 패딩을 입고, 누구보다도 늦게 패딩을 벗습니다. 너무 추위를 많이 타서요. 코트는 입으면 춥고 그래서 아예 빠르게 패딩을 입는 편입니다.

◇ 조현지> 그래요? 너무 의외의 대답이 나와서 당황했습니다. 사실 요즘 추위가 그냥 추위가 아니잖아요. 점점 더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덥고, 이러다 보니까 요즘 방한용품이라고 할까요? 이런 게 개발이 많이 되고 있는데요. 발열내의는 물론이고, 패딩도 구스다운, 신소재들까지 해서 다양한 제품들이 나오고, 목도리, 장갑, 핫팩. 핫팩도 요즘은 충전해서 쓸 수 있는 전기 핫팩도 있고요. 다양한 것들이 생기는데요. 옛날에는 우리 조상님들, 이런 게 없었잖아요. 정말 솜바지 하나로 보내셨다, 이 말이 맞기는 한데요.

◆ 김준우> 솜바지 하나로 보낸 사람은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복 하면 솜이 널리 퍼진 것은 얼마 되지 않거든요. 조선시대 들어와서야 조금씩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나마도 있는 사람들이 입을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정말 얼어 죽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실록에도 찾아보면 얼어 죽었다는 기록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일단 중종 때, 나름 조선 중기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중종 때 이런 기록이 있어요. “대간의 말에 의하면 민간에 얼어 죽은 자가 매우 많다고 했는데, 임금은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하고 있으니 이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서 중종 임금이 굉장히 한탄하면서 얼어 죽을 것 같은 사람들 얼마나 죽었는지 보고하고, 얼어 죽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하는 기록이 있고요. 현종 때, 조금 뒤로 갑니다. 임진왜란 끝나고, 병자호란도 끝나고, 조금 솜옷도 많이 퍼졌을 것 같은 그때도 얼어 죽었다는 기록이 꽤 많이 나와요. 그것도 도성이죠. 경성. 한양 안에서도 얼어 죽은 자가 많다고 아뢰니, 얼어 죽지 않도록 옷감을 지급하도록 하여라, 하는 기록이 나오고요. 조금 더 뒤로 가서 영조 때. 여기 구체적으로 아예 수치가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냐면 “도성 문밖에서 떠돌며 걸식하다가 얼어 죽은 사람의 숫자가 1백 명이 넘었고,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군인들 중에서도 얼어 죽은 사람들이 16명이나 되었다,” 라고 한 것이죠.

◇ 조현지> 사실 요즘에는 얼어 죽었다고 하는 표현이 너 그렇게 멋 부리다 얼어 죽는다, 이렇게 그런 말로나 쓰지. 갑자기 추위도 추운 거라고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조선시대 때는 솜이 그래도 있는 사람들한테는 방한용품이 됐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진짜 한복을 여러 겹 껴입는 것 정도? 그게 방한의 전부라고 봐야 했을까요?

◆ 김준우> 일단 우리도 추우면 여러 겹을 껴입듯이 조선시대 때도 여러 겹 껴입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남자들 같은 경우에는 가죽옷 같은 것을 덧대서 입는 갖옷이라고도 하고요. 중치막이라고 해서 위에 크게 덮는 게 하나 있고요. 누비솜옷, 말 그대로 솜 들어가 있는, 이것은 굉장히 고가의 방한용품이 되겠고요. 그다음에 여성들 같은 경우에는 무명 저고리, 치마, 이것은 기본일 거고요. 그다음에 솜버선, 양말인데 솜이 들어간 버선이죠. 그다음에 아얌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한복을 입으면 위에 모자 같은 것 쓰는 게 있잖아요. 그것은 아얌이라고 하고, 그것을 조금 더 길게 해서 귀까지 덮는 것을 조바위라고 하고요. 그게 조금 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게 있어요. 그것은 남바위라고 해요. 아무래도 추울 때는 귀가 따뜻해야죠.

◇ 조현지> 그렇군요. 지금 설명해주시는 것을 듣다 보니까 우리가 사극에서 봤던 그런 의상들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것들은 정말 양반집이나 있는 집에서나 입었던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우리가 너무 상류층 위주로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사실 요즘에 구스다운이 유행이잖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롱패딩이 유행이라고 했는데.

◆ 김준우> 맞아요. 엄청 입고 다녔죠.

◇ 조현지> 올해는 또 숏패딩이 유행이래요. 게다가 구스다운이 가격이 만만치가 않잖아요. 솜도, 아까 조선시대때는 누비솜옷이 비쌌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가격이 어느 정도나 했을까요?

◆ 김준우> 일단 기록에 이게 남아 있습니다. 18세기, 조선 후기죠. 이때 황윤석이라는 사람이 쓴 <이재난고>라고 하는 책에 보면 누비솜옷 같은 경우에는 고급은 상평통보 4개, 넉 냥 정도고 평민이 있던 약간 B급, 조금 더 급이 떨어지는 누비솜옷은 절반가량인 두 냥이면 살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보통 많이 물어보죠. 한 냥이 도대체 얼마에요? 라고 물어보면 정확하게 따질 수는 없지만 보통 쌀값으로 비교를 합니다. 조선시대 때의 쌀값과 지금 현재 쌀값을 비교해보면 복잡한 계산을 뛰어넘었을 때 보통 한 냥에 5만 원 정도 내외로 계산을 해낼 수가 있어요. 그러면 B급 솜옷, 조금 더 평민들이 입었던 솜옷은 두 냥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10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고요. 그 당시 평민들, 머슴들이 한 달 정도 일하면 받는 품삯이 보통 일곱 냥 정도 된다고 해요. 그런데 누비솜옷을 사려면 두 냥을 내야 하니까 꽤 많이 비싼 편에 속한 것이죠.

◇ 조현지> 그러면 일곱 냥 중에 두 냥 정도를 써서 솜옷을 마련해야 하는데, 또 가족들이 있으니까.

◆ 김준우> 그렇죠. 혼자 입을 수 없죠. 자식이 추워하고 있는데.

◇ 조현지> 그 옛날에는 자식도 많이 낳았잖아요. 이게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저 오늘도 따뜻하게 여러 겹 껴입기는 했는데, 이렇게 따뜻하게 입고 있는 게 사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고 하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겨울옷은 조금 비쌌구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사실 솜이라는 게 보편화된 게 조선시대에서도 중기 이후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우리가 흔히 문익점이 고려 때 붓통에 목화씨를 숨겨 왔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솜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보편화되는 데 오래 걸린 건가요?

◆ 김준우> 일단 보통 통상적으로 이야기할 때는요. 고려 말 때 들어와서 조선 전기 때부터 목화농사는 쭉 퍼져요. 그러면서 솜도 중기쯤 접어들면서 확산되는데요. 요즘 학계에서는 또 다른 말들이 나오고 있어요. 일단 고려 말에 문익점이 들어오기 전부터 목화가 있었고, 면 옷이 있었다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백제 유적지, 충남 부여에 있는 능산리 절터에 보면 그때 면으로 만든, 목화로 실을 뽑아서 만든 면직물이 출토가 됐어요. 이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 라고 했을 때 보통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전에도 목화는 있었고, 그것으로 옷감을 만들었지만 이게 원래 인도 쪽이 원산지거든요. 굉장히 사시사철 덥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게 자라기가 힘든 목화였을 것이고,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아마 개량품종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목화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조현지> 그렇군요. 유물이 출토되면서 그 전에도 있을 수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생겨나니까 역사 교과서도 바뀔 수도 있겠다.

◆ 김준우> 나중에 엄청 바뀌어 있을 겁니다.

◇ 조현지>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이 그게 다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또 한 번 드네요. 그리고 솜 전에는, 더 옛날로 가면 선사시대도 있고 그런데요. 그럴 때는 사냥해서 동물 가죽이나 털을 벗겨서 모피 입고?

◆ 김준우> 그렇죠. 그게 기본적인 옷이었죠. 더워도 어쩔 수 없이 입어야 하는 옷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죽으로 된 옷들을 방한용품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죽옷이 귀하잖아요. 오늘날도 귀하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도 구하기 힘든 옷이기 때문에 방한을 뛰어넘어 나름 신분을 과시할 수 있는 옷으로서 이 아이템이 사용된다는 거죠. 요즘에도 모피, 이런 것을 입으면 저 사람 잘사나 보다, 이렇듯이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용도로 가죽옷, 모피들이 사용됐다는 거죠.

◇ 조현지> 정말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런 것을 입었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잘 따져보면 그것을 누가 잡아서 누가 입었겠나, 하는 생각을 하면 그것도 참 귀한 거였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분들이 그래도 우리나라는 온돌이 있어서 얼어 죽는 사람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얼마 없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지금도 우리나라의 자랑 아니겠습니까? 아랫목에서 뜨끈하게 지지는 거요.

◆ 김준우> 거기 누워있으면 정말 혼연일체가 되죠.

◇ 조현지> 그러니까요. 방바닥이 잡고 놔주지를 않잖아요. 이 온돌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 김준우>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온돌이라는 장치인데요. 이거는 기록으로 따져보면 고구려에서 발견됩니다. 유적도 그렇고요. 고구려에서 시작해서 점차 남쪽으로 전파됐다고 하는 게 통설이 되겠고요. 고려 중기 전까지는 평민들 쪽으로. 그런데 중기 이후에는 상류층들 쪽으로 조금씩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요. 이게 전체적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 때 일반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조현지> 되게 의외인 게 온돌이 평민부터 시작해서 상류층으로 갔다는 게 신기한데요. 상류층이 늦게 온돌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 김준우> 일단 상류층들은 그 온돌보다는 침대? 그 당시에는 침상이라든가, 혹은 와탑, 이렇게 불렀거든요. 그래서 좌식보다는 입식, 이런 식의 생활을 했고요. 그러다 보니까 고려시대 때 온돌이 없다 보니 춥잖아요. 방바닥이 차갑고. 그래서 그때 방한을 하기 위해서 썼던 것을 보면 고려시대 때 이규보가 쓴 말, “채색 담요를 두루 깔아 땅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까 카페트를 온통 깐 거죠. 그다음에 이숭인이라는 사람은 “화로는 붉고 붉은 담요는 따듯하니 잠이 바야흐로 깊이 들었다.” 그러니까 화로가 필요한 거죠. 온돌에서는 화로가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거든요.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화로가 없으면 고려시대 때는 굉장히 추웠던 거죠. 벽난로처럼. 그다음에 모전이라고 해서 가죽으로 만든 카페트, 이런 것들이 고려 때 상류층들에게 비일비재하게 있었던 용품입니다.

◇ 조현지> 이때 상류층들은 뜨뜻하게 지지는 맛을 몰랐겠네요.

◆ 김준우> 몰랐죠.

◇ 조현지> 그러면 조선 정도 돼서 온돌이 집집마다 다 보급이 된 걸까요?

◆ 김준우> 그것도 조선 후기입니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이런 용품들을 많이 썼어요. 아까 고려시대 때 이야기했던 용품 있죠. 모전이라든가, 돗자리. 다 깔아야만 했었어요. 그리고 돗자리도 우리가 일본 가면 다다미 같은 두꺼운 돗자리가 있잖아요? 우리 기록에도 보면 그런 돗지리들이 퍼져 있었다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조선 후기 기록을 보면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져요. 일단 광해군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광해군이 “대궐 안에 늘 연기가 있어서 괴롭다, 선왕 때에도 그러했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선왕 때에는 정전 외에는 모두 마루였으니 연기가 어찌 많았겠습니까.” 이렇게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돌이 없었다는 거죠. 그런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고 다시 궁궐을 만들고, 이러다 보니까 이때는 온돌로 바뀌기 시작한 거고, 온돌로 바뀌다 보니까 연기가 많이 생긴 거죠. 그리고 기록에 또 보면, 조선시대 때도 온돌은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온돌에서 자지 않았다. 주로 나이 많은 사람들,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돌에 거처했다, 이런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대중화되고 있지 않고 있다가 조선 후기가 돼서야 집집마다 확산되었다는 거죠.

◇ 조현지>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온돌이 보편화되면서 건축 양식도 바뀌었을 것 같고요.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습관도 입식에서 좌식으로 바뀌었을 것 같고. 그리고 아궁이 하면 또 우리가 생각나는 게 거기 가마솥에 밥하고, 이런 거잖아요. 식생활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 김준우> 아궁이에서 불을 때야만 방이 따뜻해지는 거예요. 그 방바닥 밑으로 통로를 만들어서 그쪽에 연기가 빠져나가면서 데우는 거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불은 계속 때우게 돼요. 불을 때우다 보니까 그 불을 이용해서 요리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국물 요리 같은 것을 계속해서 데워서 나오게 되는 이런 국물 요리들이 우리 한국의 대표적 요리 특색으로 자리잡게 된 거죠.

◇ 조현지> 주모, 국밥 한 그릇이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오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지금 또 춥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들이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한테 다가온 거구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새삼 감사함도 느끼게 됩니다.

◆ 김준우> 당연한 것 중 하나가 우리가 한옥 같은 경우에는 창호지 문 발라놓고 생활하고, 중층은 없잖아요. 단층으로 생각하는데, 바꿔서 생각하면 온돌 이전에는 중층이어야만 해요. 바닥이 추우니까. 그러니까 몇 층으로 올라가서 집에 올라갈 때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이런 기록들이 나와요. 그리고 벽도 창호지로 넓게 바르면 춥죠. 그러니까 이게 좁게 되는 겁니다, 문 같은 것들. 그래서 겨울에는 그렇게 하고요. 여름에는 내려와서 살고요. 왔다 갔다 하는데, 이게 온돌 문화가 되다 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지게 된 거죠. 우리의 전통가옥도 어찌 보면 조선 후기 때가 돼서 새롭게 등장한 집의 형태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조현지> 건축 양식까지. 오늘 뜨끈뜨끈한 이야기들로 이야기하다 보니까 이 추위도 덜 춥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과거 옛 선조들은 어떻게 방한했을까,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역사맛집, 신일고등학교 김준우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김준우>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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