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물가'의 추억...그때도 라면값 눌렀지만 더 올라

'MB 물가'의 추억...그때도 라면값 눌렀지만 더 올라

2023.06.29. 오전 07:00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MB 물가'의 추억...그때도 라면값 눌렀지만 더 올라
사진출처 = 문화체육관광부·농심
AD
신라면 950원…MB 때 이후 첫 인하

신라면 1봉지 950원·새우깡 1,400원. 농심이 다음 달부터 '국민라면'과 '국민과자' 가격을 모두 내리기로 했다. 각각 50원, 100원씩 싸지는 셈이다. 소비자 입장에선 충분히 체감할 만한 인하 폭이다. 삼양식품도 뒤따랐다. 삼양라면·짜짜로니 등 12개 대표 제품의 가격을 평균 4.7% 인하한다고 한다. 이어 오뚜기도 동참했다.

농심의 신라면 가격 인하 결정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이후 무려 13년 만이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뒤에 설명할 예정이다) 식품 업체들이 밝힌 가격 인하 이유는 뭘까? 가격 인하를 선도한 농심은 "제분 업체가 공급하는 밀가루 가격이 5% 내려 80억 원의 비용 절감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재룟값이 내려갔으니 당연한 얘기처럼 들린다. 시장 원리라면 80억 원만 내리면 된다. 그런데 가격 인하로 200억 원 상당의 회사 이익을 포기하겠다고도 덧붙였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이윤을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인데 어쨌든 그렇단다. 그럼 왜 이익을 포기했어야 했을까?

정부 압박에 '백기'

13년 만에 결국…"라면값 인하" 정부 압박에 농심 손들었다 (한국경제)
정부의 매운 압박에…신라면 13년 만에 "값 내려요" (한국일보)
농심, 정부 압박에 신라면값 내린다… 오뚜기‧삼양식품도 고심 (동아일보)
결국 백기 든 농심, 신라면 50원·새우깡 100원 내린다 (경향신문)
결국 백기들었다…농심 신라면·새우깡 가격 내린다 (KBS)

거의 모든 기사에 '백기'란 말이 등장한다. 업계의 백기를 들게 만든 신호탄은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쏘아 올렸다. 지난 18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2%대 물가 진입을 생각한다며 '라면값'을 콕 집었다. "지난해 9~10월에 기업들이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면서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며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부는 뒤로 살짝 빠지겠다는 뉘앙스다. 전체적으로 추 부총리의 발언 수위는 강하진 않았지만 정밀했다. 이게 바로 경제 수장 발언의 무게다.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업계의 가격 인하 결정 전날 농림축산식품부가 대한제분과 CJ제일제당, 삼양사 등 한국제분협회 회원사들과 간담회를 열고 밀가루 가격 인하를 요구했다. 밀가루 가격 인하가 이뤄져야 라면값도 내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예상대로 바로 다음 날 농심은 소백분 가격이 인하된다면 라면 가격도 인하한다고 밝혔다. 최소한의 '명분'을 얻은 거다.

13년 전 'MB 물가'…압박했는데 더 올라

앞에서 밝힌 13년 전 이명박 정부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때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년 대비 계속해서 치솟고 국제유가가 배럴당 130달러까지 뛰어오르던 상황이다. 이에 당시 정부는 생활 밀접 품목 52개를 선정해 업계에 대한 전방위 압박을 가했다. 라면, 쌀, 밀가루, 빵, 쇠고기 그리고 소주, 휘발유까지 포함됐다. 이른바 'MB 물가 지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통해 "물가 상승이 불가피한 부분도 있지만 정부가 노력하면 억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 부처에는 독려이고 기업에는 압박이었다. 현재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대기 당시 경제수석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통상적인 방법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기 어렵다"며 "물가와 전쟁을 한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말은 갈수록 거칠어졌다. 잘 안된다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 때 매주 경제 장관들의 물가대책회의가 열렸고 부처 차원에선 서민 생활 품목 가격을 거의 매일 점검했다. 그렇다면 가격은 잡혔을까? 아니 잡히지 않고 오히려 더 올랐다. 'MB 물가' 품목들의 5년간 물가 상승률은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1.6배에 달했다. "물가 상승을 정부의 노력만으로 안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참 뒤 MB가 회고한 말이다.

물가는 결국 '돈'…정부 압박의 한계

코로나 위기 때부터 시중에 대거 풀렸던 돈이 여전히 회수되지 않고 있다. 물가는 결국 돈 얘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물가 안정을 강조했을 당시 당정은 60조 원에 가까운 추경에 합의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회수해도 모자랄 판에 더 많이 푸는 격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 등 외부적인 불확실성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국제 물가는 우리 정부가 압박할 수도 없다.

돈을 회수하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한국은행은 2월과 4월에 이어 5월까지 3회 연속 금리를 동결했다. 거품 낀 아파트값의 경착륙을 막기 위함이 크다. 6월 현재 한미 금리 격차는 1.75%포인트. 한 번도 경험해 보진 못한 금리 차다.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6월 기준금리 동결 이후 연내 2회 금리 인상 가능성을 내비친 상황. 우리가 올리지 않으면 한미 금리 격차는 2%포인트 이상으로 벌어진다. 그럼 또 기록 경신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직접적인 가격 통제는 한계가 분명하다. '반짝 효과'는 거둘 순 있지만 정부의 압력이 느슨해지면 가격은 다시 오른다. 그게 시장 논리다. 기업 입장은 명확하다. 당장의 이윤은 포기할 수 있어도 이윤을 영원히 포기할 수는 없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가격 결정은 기본적으로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 피해를 보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지원이 바로 정부의 역할이다.

YTN 이대건 (dglee@ytn.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