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마지막 날...이별의 건배

이산가족 상봉 마지막 날...이별의 건배

2018.08.22. 오후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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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을출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대진 /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

[앵커]
60여 년 만에 허락됐던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이 끝났습니다.

[앵커]
오늘은 애끓는 이별의 순간이 이어졌습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두 분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2박 3일, 이제 막 익숙해졌을 텐데 다시 헤어져야 됐습니다. 교수님,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인터뷰]
그러게요. 슬픔의 총량이라고 하는 게 헤어지는 순간, 다시 만났다 다시 있다가 헤어지고 하는 게 아픔이라고 하는 건 계속 유지가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봐도 제 고모님이 아들을 군 작전 중에 순직해서 잃으셨거든요.

그래서 매년 현충원에 가셨는데 매년 따라갈 때마다 우시는 울음의 양이나 시간이나 그런 것들이 언제나 동일하거든요. 앞에 안 우려고 담배 반갑 정도 피우시고 그냥 버티고 하시다가 돌아섰다가 다시 또 나중에 비석 부여잡고 우시고 하는데 그게 늘 매해 그 슬픔의 총량이 똑같다는 걸 느꼈습니다. 주변 보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아마 이산가족 분들도 다 비슷할 것 같아요.

한 60년, 70년간의 그리움들이 묵혀 있던 것들이 이번에 2박 3일 동안 터졌는데 그런데 그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는 시간이 지난다고 사그라들거나 풍화되는 게 아니잖아요. 헤어져서 오시는 그 버스 안이 어떨지 참 막막합니다.

[앵커]
오늘 작별상봉이 있었는데 작별상봉이라는 말이 잔인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별을 하기 위해 만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렇죠. 사실 지구상에 전쟁으로 인해서 가족이 헤어지고 또 65년, 70년 넘게 서로 생사확인도 안 되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생사확인이 돼서만났는데 단 3일만 같이 지내고 또 헤어지고. 아마 지구상에 이런 비극적인 역사를 가진 나라가 아마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매우 가까운 북측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생사를 확인할 수 없고 다시 연락할 수 없다는 것.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런 비극적인 장면은 더 이상 봐서는 안 되겠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앵커]
오늘 마지막 만남이 오전 10시부터 이어졌습니다. 당초에는 오전 11시부터로 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남측의 요청을 북측이 받아들여서 1시간 당겨졌다 이러더라고요.

[인터뷰]
지금 남북 간의 관계가 괜찮은 상황이기 때문에 남측의 요구에 대해서 북측에서도 유연하게 반응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더 늘어난 게 참으로 잘된 일이죠.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 1시간이라도 더 보장됐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고. 현장에서 남북 당국자들이 실무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 현장에서 결정되고 1시간이 늘어나고 하는 것들이 남북관계가 잘 풀려나가고 있는 그런 하나의 좋은 증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앵커]
오늘 작별상봉을 하고 그리고 점심을 먹는 동안에 가족들은 서로를 걱정하고 또 앞으로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었는데 한신자 할머님은 딸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는데요.

[인터뷰]
아무래도 잘 걱정하는 것이 건강이겠죠. 왜냐하면 건강을 유지해야 또 다시 만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안부, 특히 건강 안부를 가장 묻고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 이번에 우리 쪽 이산가족 분들이 가장 북측의 가족에게 제공할 선물로써 가장 준비한 것이 의약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만큼 북쪽의 이산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고요.

또 이분들은 아마 헤어지고 난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해서 북측 가족에게 필요한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전달하고 싶어할 겁니다. 그런 부분을 우리 정부가 북측하고도 잘 협의를 해서 다시 상봉할 수 있는 기회는 마련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서신이라든지 또 건강 관련된 의약품은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과제라고 판단이 됩니다.

[앵커]
한신자 할머니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99세세요. 그런데 딸들이 77세 그리고 71세입니다. 그런 딸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그래서 찹쌀 같은 게 영양이 좋으니까 그런 걸 많이 먹어야 된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
한신자 할머니가 아마 보도에 따르면 어제 너무 피로하셔서 상봉장에 못 나셨다고 그래요, 단체상봉장에. 그 전날의 피로가 좀 있었고. 99세면 너무 고령이시잖아요.

그래서 남측에서 낳으셨던 딸, 69세의 따님이 나가서 북측에 원래 있던 언니들을 만나고 어머니가 못 나와서 참 아쉬워하고 하는 그런 장면이 어제 연출이 됐는데. 마음 같아서는 북측에 있는 딸들 품에 안겨서라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서 보고 싶으셨겠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나갈 정도로 고령인 상태에서 먼 길을 떠나서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시급히 그에 관련된 근본적인 대책들이 좀 마련돼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앵커] 찹쌀 같은 게 영양이 좋으니까 그런 걸 잘 챙겨 먹어라, 이 말을 듣고 들었던 생각이 사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기 같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엄마가 자식을 챙겨주고 싶은 그 마음을 보여준 대목이 아니었나 싶은데. 또 이기순 할아버님의 이야기도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애주가라고 하시는데 아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겠습니다. 소주 한잔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뷰]
저도 그 장면을 봤습니다. 봤는데 저도 아들을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참 애절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소주가 마지막 잔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더 슬펐겠죠, 현장에서. 그런 부분들인데. 모르겠습니다. 정말 저 소주를 사전에 준비를 해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작별을 준비를 하고 작별을 또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소주 한잔 하면서 하겠다는 생각을 미리 준비를 하고 갔다는 것 자체가 또 더 애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앵커]
소주잔도 화면에 나오는 걸 보셨는데 참 아들한테 너도 술 좋아하냐, 이렇게 물어보겠다. 갈 때부터 그런 말씀 하셨었거든요.

[인터뷰]
아마 여쭤보셨을 텐데요. 원래 남한에서 같이 혹은 북한에서 같이 이렇게 전쟁이 없어서 같이 살았다면 소주 한잔 부자 간에 기울일 일이 많았었겠죠. 그런데 그 한마디를 직접 물어보기 위해서 70년을 기다린 일이죠. 참 드라마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부모자식 간에 술잔 한번 기울이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요. 안타까움을 더하는데. 또 이금섬 할머니께서는 오늘도 아들의 손을 놓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잡고 싶으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특히 이분도 연세가 많으시다 보니까 아무래도 사실 꿈 같은 일이 펼쳐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렇게 어렵게 만났는데 다시 헤어진다는 생각이 아마 또 다른 꿈같이 느껴질 겁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분들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게 지난 20여 차례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있었는데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한 번 만나고 와서 우울증 같은 걸 이렇게 다 경험을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더 오히려 만나지 않았을 때에 비해서 만난 이후 더 후유증이 심한 이런 상황들이 계속 이어져 왔기 때문에 앞으로 주변 가족들이 저분의 후유증을 좀 함께 치유하는 그런 노력들을 가족들이 함께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이금섬 할머니는 92살이세요. 그런데 아들이 지금 71살입니다. 피난길에 올랐다가 따라오던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가족들이 헤어지게 된 그런 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도 또 눈에 띄는 가족이 있었는데 신재천 할아버지 가족입니다. 북한에 있는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동생 신금순 씨를 만났는데 개성에 그 동생이 살고 있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김포에 살고 있고요. 이게 차로 40분 거리라고 하더라고요.

[인터뷰]
그렇죠. 지도를 보시면 아주 가까운 거리죠. 다리가 있으면 40분보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거리고 실제로 40분 거리라고 하면 우리 보통 생활할 때 도시 생활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인데. 금방 매일 볼 수도 있고 그냥 연락해서 밥 한끼 먹을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는 건데 이제 지금 오늘 헤어지셨으니까 앞으로 언제 만날지 모르고 그 40분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갈 수 없는 길을 서로 망망대해 보듯이 바라보면서 또 하세월을 하셔야 되는 것이죠.

임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후유증, 우울증들이 예전에도 많이 보고가 되었거든요. 예전에도 20차례 상봉들을 한 그 후에 차라리 만나지 말았을걸이라고 하는 그런 탄식들이 많았었는데 이번에는 좀 그 후유증 없이 이번에는 새로운 국면들이니까요, 주변 정세들이. 이번에는 좀 더 근본적인 대책들이 계속 마련됐으면, 신속히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는데.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바로 사진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측 보장성원들이 테이블마다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고 하는데 글쎄요, 그 사진이 앞으로 아쉬움을 다 달래줄 수 있을까요?

[인터뷰]
이번에 보니까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가져와서 찍어주더라고요. 물론 화면으로 보기는 했지만 사진 화질이 꽤 좋고 그렇습니다. 아마 사실 어르신들은 동영상보다는 스틸사진을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더군다나 북측의 보장성원들이 사진을 찍어서 양쪽에 다 나눠주는 이런 모습들은 이전에는 제가 못 보던 모습인 것 같거든요.

그런데 북측에서도 휴대폰이 많이 보급이 돼서 아마 가족들이 휴대폰을 가져와서 동영상 찍고 또 별도의 사진도 찍고 있을 겁니다. 찍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산가족, 특히 고령 이산가족 입장에서는 그리움을 달래고 또 그런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가 계속 사진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이번에 상봉장에서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사진을 못 찾아서 안타까워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만남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 한 장이 앞으로 또 평생 동안 기억할 그런 추억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인터뷰]
이번에 또 특이한 점이 보도에 따르면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그걸 통째로 선물로 드린 사례들도 있다고 합니다, 남측에서. 그러니까 지금 저렇게 인화를 해서 가져가는 것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진의 모습이잖아요. 그리고 북측은 아직 뭘 많이 개방이 안 돼 있고 기술 수준이 낮으니까 디지털 파일 같은 것들을 많이 못 보겠지 생각을 하는데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것들을 통째로 넘겨줬을 때 자연스럽게 그걸 가져가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는 모습들이 포착이 됐다고 하네요.

그런 방식대로 새로운 시간이 좀 흐르면서 200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이 되었는데 그 후 지금 또 18년 정도가 지나면서 기술의 변화 속도에 맞춰서 추억과 상봉의 방식들도 조금 더 변화되는 모습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
그게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데요. 사실 우리 정부가 남아 있는 5만여 명의 많은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신속하게 상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상상봉을 추진해 왔거든요. 방금 말씀하신 대로 디지털 기술이 사실 북쪽에도 꽤 발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번거롭게 직접 만나지 않고 대면 상봉하지 않고 영상을 찍어서 그 영상을 서로 교환하는 방식으로라도 상봉을 하자. 그게 지금 우리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정책과제이기도 합니다.

[앵커]
오늘 이 영상을 보면서 들었던 좀 짠하고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각자 가져오셨던 옛날 사진 중에 흑백사진이 많았거든요. 그 흑백사진 속에는 굉장히 어릴 적의 모습이 담겨 있고 오늘 찍으신 사진, 컬러 사진 속에는 다 백발이 되어서야 찍은 고령의 많은 분들이 모습을 보이셨는데 그 중간 세월 함께 찍은 사진이 없습니다. 그런 부분이 좀 아쉽지만 그래도 오늘 찍은 사진이 이산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또 논란이 하나 있기도 했는데요. 이재일, 이재환 할아버지의 가족은 북에서 온 조카들이 진짜 조카가 맞는지 모르겠다, 이런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전시납북자 가족이신데 3형제가 계시는데 그중에 첫째 형님이 납북자라서 뒤에 남은 두 형제가, 동생들이 형님의 아들을 만나러 자식들을 만나러 간 거죠. 그러니까 조카들을 만나러 간 거죠, 이 두 분의 입장에서는. 갔는데 딱 봤을 때 이재일, 이재환 할아버지이신데 첫 상봉을 했을 때 형님의 사망 경위와 일시, 장소 같은 것들을 정확하게 얘기를 못 한다.

이게 맞느냐라고 해서 문제 제기를 하신 거죠. 그래서 북측에서, 북측 당국에서 호적도 가져오고 확인시켜주고 했는데 결국에는 화가 난 동생분으로 알려졌어요, 이재환 할아버지는 급기야 자리를 좀 뜨시기까지 하는 그런 상황이 펼쳐졌었고. 그렇지만 그다음 날에는 또 나오셔서 자리는 지키셨고 했는데 이재일 할아버지는 다시 또 확인을 해 봐야겠습니다마는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래도 맞는 것 같다고 얘기는 하셨다고 하는 보도가 또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조카들 만나고 또 여러 가지 확인도 하고 얘기들을 나누셨겠죠.

[앵커]
결국 첫째 날 단체상봉에서는 한 분만 형제분 중에 한 분만 남아서 북에서 온 가족들을 만난 그런 상황이었는데 상봉을 포기하지는 않으셨어요. 결국 같이 만나서 자리를 지키고 조카들과 얘기도 나누고 했는데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실 북에서 가져온 큰형의 사진이라고 하면서 가져온 사진 속의 모습이 큰형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형님이 돌아가신 날짜나 이런 것들을 왜 조카들이 잘 모르느냐. 그러면서 좀 의심을 한 의문을 가진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이런 경우가 좀 있었나요, 어떻습니까?

[인터뷰]
있었죠. 과거에도 있었죠. 제가 오랫동안 이산가족 상봉행사도 지켜봤지만 이런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요. 부모자식 간에는 대부분 바로 알아봅니다. 대부분 바로 알아보고 이러는데 형제 또 삼촌 이상의 가족 관계에서는 서로 확인이 안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부모자식 간에 비해서 그런 서로가 느끼는 정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저도 느꼈는데요. 그리고 본인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과 상대방이 알고 사실과의 차이라는 게 굉장히 크고요.

그리고 이게 정말 우리가 형제간이라는 거 입증하는 자료가 굉장히 제한적이거든요, 사실. 그게 사진하고 겨우 호적 이런 건데 호적을 또 불신하는 그런 경향도 있습니다, 사실. 일부 북쪽 사람들은. 그러다 보니까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건데 하여튼 희한한 것은 부모자식간은 어떻게 해도 알아봅니다.

이런 많은 자료가 없어도. 그게 제가 과거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지켜보면서 발견했던 아주 흥미로운 그런 대목이었습니다.

[앵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리고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다 보니까 이런 일이 또 생기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이별을 앞두고 가족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오늘 작별상봉 뒤에 함께 마지막일지 모르는 점심을 함께하는 모습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함께 보고 오겠습니다. 북한에서 열린 마지막 작별상봉. 먼저 김봉어 할아버지 가족님의 모습인ep요. 부인인 이신옥 할머니와 방북해서 동생과 조카를 만났습니다.

[앵커]
이어서 김병오 할아버지의 가족입니다. 여동생을 만났는데요. 평소에 자랑을 많이 하셨다는데요. 기쁨도 잠시 또다시 재이별의 순간을 맞았습니다. 결국에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앵커]
동생이 통일돼서 1분이라도 같이 살다 죽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 보고 계십니다. 김혜자 할머니와 동생 김은하 할아버지입니다. 현장음을 들어볼까요. 손가락을 걸고 다시 만나자, 약속하기도 하고 또 먹을 것을 입에 누나가 넣어주네요, 동생 입에.

[앵커]
이어서 이금섬 할머니입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의 얼굴 68년이 지나서 하얀 백발이 되어서야 만났습니다. 함께 옛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모습 보고 계십니다.

[앵커]
이번 상봉장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고 계시군요.

[앵커]
옛 사진이 아니고요.

[앵커]
이어서 안종호 할아버지의 가족입니다. 안 할아버지, 지금 연세가 100살입니다. 휠체어에 탄 채 북측 가족과 상봉하는 모습을 보고 계신데요. 70살 딸과 만나는 장면을 함께 보셨습니다. 오늘 행사가 1시간 연장됐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길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2박 3일이라는 이 시간이 60여 년 헤어졌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지 않습니까?

[인터뷰]
사실 상봉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되거든요. 이번에 21차례 만났지 않습니까? 그때 처음 만났던 시기가 1985년입니다. 그러니까 36년 동안 21차례밖에 안 만났습니다. 그리고 일회성 이벤트로 대부분 끝났고요.

지금도 이 슬픈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분들이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된다, 다들 주장을 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보면 이산가족 분들 입장에서는 과거의 사례로 봤을 때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판단들을 다 하고 계시는 거거든요.

그래서 북한이 이번에 나름대로 굉장히 성의 있는 조치도 하고 또 유연성 있게 이산가족 가족들을 좀 더 많이 만나게 하기 위해서 유연성 있는 그런 조치를 취해 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해야 된다고 저는 보고요.

다만 앞으로 이산가족의 상봉 이런 방식이나 이런 것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된다. 특히 이런 장면을 보면서 이번에 선발되지 못한 또 수많은 이산가족분들이 계시거든요. 이분들도 최소한 생사확인이라도 되도록 남북한 당국이 협상을 해야 된다, 이렇게 저는 꼭 주장을 하고 싶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봉의 정례화는 남북관계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속되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같은 경우는 사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때는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횟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경색이 되면서 결국 일회성 이벤트로 그쳤는데 앞으로 남북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이 된다면 이런 상봉 행사가 1년에 구정이라든지 추석이라든지 1년에 2차례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1년에 10차례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희망을 갖고 또 우리 정부도 좀 더 강한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이산가족분들이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도록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이미 만난 분들도 최소한 서신교환은 가능한 그런 환경을 만들어야 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앵커]
이산가족 상봉행사 이후에 남은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는 말씀으로 정리가 되는데요. 오늘 가족들은 주소와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서로 찾아가자 이런 마음이겠죠?

[인터뷰]
그렇죠. 그 주소와 연락초만 받아들고 지금 돌아오는 버스, 북측은 북측대로 돌아가고 있을 건데 버스 분위기를 상상을 해 보자면 아마 장례 치르고 돌아오는 영구차 같은 느낌일 것 같아요. 사실상 못 만난다고 생각을 하고 지금 돌아오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런 경우는 가족의 장례를 치르고 산에 묻고 돌아오고 가슴에 묻고 돌아오시는 거죠. 가슴에 묻고 돌아오는 그런 영구차 같은 분위기일 텐데 말씀하신 대로 서신교환, 만나신 분들은 서신교환이라도 하고 기술의 진일보를 활용해서 상봉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북측이 좀 준비가 되면 우리가 또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통신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 물리적으로 먼 길을 가서 서로 만나는 게 우리보다는 사실 북측의 부담이 더 크거든요. 우리는 확인을 해서 만나시겠느냐 확인을 해서 간단하게 안내 교육을 하고 버스에 태워서 모시고 가서 2박 3일 행사만 하면 되는 것인데 북측에서는 지문에 따르면 한 달 이상씩 교육을 시키고 때 뺀다고 하죠. 양복도 입히고 단체 선물도 준비해야 되고 또 여러 가지 상태를 점검해야 되는 게 한 달 정도 이상씩 걸린다고 합니다.

북측의 부담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이 많이 획기적으로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면이 많은데 좀 기술의 진일보를 바탕으로 해서 북측에 만약에 개성연락사무소가 개소가 된다면 거기에 화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신시설, 북측 입장에서는 통제된 통신시설이죠. 그걸 북측 가족들이 거기까지만 와서 연결하면 남측 가족들은 집에서 휴대폰으로 화상통화, 그런 방식들을 통해서 상시화, 정례화를 빈번하게 좀 더 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이렇게 점심식사 후에는 다시 헤어짐의 길에 올랐습니다. 남측 가족들이 귀환 버스에 오르는 이별 장면도 함께 보고 오겠습니다.

[앵커]
남측 가족들, 버스에 타고 있습니다. 북측 가족과 이제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올랐습니다.

[앵커]
지금 배웅하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현장음을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앵커]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참 진짜 안타깝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게 이게 지난 20여 차례 상봉 시에 마지막 작별상봉하고 거의 유사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참 이런 비극적인 장면을 우리가 계속 봐야 되느냐, 이런 문제 제기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어쨌든 이런 비극을 빨리 끝내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상봉문화를 만들어야겠다, 다시 강조를 하고 싶고요.

정말 북한도 아마 저런 번거로운 절차를 원하지 않을 겁니다, 북한으로서는. 비용도 좀 절감할 수 있고 시간도 절감할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상봉방식을 함께 찾아야 할 것같습니다.

[앵커]
통일이 빨리 돼서 꼭 만나자, 다시 꼭 만나자. 기둥 뒤에 숨어서 우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앵커]
앞서 가족들끼리 버스에 어느 위치에 탈 것인지 알려주기도 했다는데요.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손도 조금이라도 더 잡아보기 위해서였겠죠.

[인터뷰]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서 통일 빨리 이룩하고 흩어진 가족, 친척이라는 말 자체 없애자. 이거 우리 남북이 만나면 되는데 흩어진 가족 조사하고 뭐 있어. 다시 만나면 통일 되는 거지.

[앵커]
가족, 친척 상봉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자, 이런 얘기를.

[인터뷰]
그렇죠. 지금 잠깐 앞에 북한 주민 이산가족분 뒤에 보장성원으로 보이는 분이 서 있었잖아요. 마지막 상봉 장면, 남측에서 작별 행사를 할 때는 대표적인 장면이 버스 창에 기대어서 손을 꼭 부여잡고 버스가 못 떠나도록 계속 울고 하는 모습들. 그런데 이제 북측에서 상봉행사를 할 때는 끝에 통제선이 보통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통제선을 못 넘게 되는데 아까도 나온 장면에 잠깐 보면 한 주민이 아주 감정에 겨워서 손을 흔들면서 버스 창에 손을 대려고 하니까 이제 보장성원들이 약간 뒤로 통제를 하는 모습들을 보였는데 북측에서는 여러 가지 그렇게 정말 부담이 되는 거죠. 그런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것을 아까 말씀드린 여러 가지 방안들을 통해서 좀 더 상시화시키고 정례화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앵커]
그런데 이번에 언론 보도를 보면 보장성원들의 분위기도 이전 이산가족 상봉 때와는 많이 달랐다고 해요.

[인터뷰]
그게 변화된 남북관계를 반영하는 거죠. 그리고 북측 보장성원들이 이런 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우리 남측의 취재진뿐만 아니라 고령 이산가족들이 보다 편안하게 상봉할 수 있도록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라. 그런 지시를 김정은 위원장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북측 보장성원 얘기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난 2015년 또 지난 2014년의 상봉 때에 비해서 한층 유연한 태도를 보여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앵커]
개별상봉도 그렇고 오늘 작별상봉도 그렇고요. 이산가족을 대하는 북한의 태도도 좀 달라진 면이 분명히 있어 보입니다. 이제 24일부터는 2차 상봉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인터뷰]
24일에 2차 상봉이 시작되는데 지금 변수가 태풍이 관통을 한다고 하는데 스튜디오 들어오기 전에도 임 교수님과 걱정스러운 말씀 나눴는데 이 태풍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행사가 과연, 실내에서 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이동 경로가 있기 때문에 과연 괜찮을지 걱정이 됩니다.

[앵커]
부디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는 와중에 또 이런 얘기가 전해졌습니다. 국방백서에 표기된 북한군은 우리의 적, 이런 문구를 삭제할 것을 검토하기로 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졌는데 이게 무슨 얘기인가요?

[인터뷰]
이건 당연한 수순으로 저는 받아들이고 있고요. 기본적으로 판문점 선언의 핵심이 이제는 상호적대적인 관계를 화해 협력의 관계 또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한다는 것이 핵심 정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산가족 상봉이 가능한 것도 결국 판문점 선언을 이행하는 그런 차원에서 이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우리가 봐야 되는 거고요.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라는 이런 부분들도 결국 판문점 선언을 남북한이 어느 한쪽이 이행을 하지 않는 한 약속이 취소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고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우리 국방부 차원에서도 국방백서에서 계속 적시해 온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이런 부분들을 없앨 필요성을 아마 느꼈을 겁니다.

그리고 판문점 선언에 보면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 완화에 대한 조항이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이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단한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고요.

그것은 향후 구체적으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런 현실 변화와 맞지 않다, 이런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지난 2000년에 남북 정상회담이 처음으로 열렸을 때 그 이후에도 국방백서에서 수년간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걸 삭제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국방백서에는 이렇게 기재가 돼 있다고 합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사이버 공격, 테러위협은 우리 안보에 큰 위협이 된다. 이런 위협이 지속되는 한 그 수행 주체인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다, 이렇게 표기가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 문구를 고쳐나갈 수 있는 건가요?

[인터뷰]
과거에 한동안 심각한 위험, 이렇게 표현들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주적이 있으면 부주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실 군의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면 다 적인 것이지 그게 주적이 있고 부주적인 적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니까 그런 걸 생각해 봤을 때 어느 대상을 꼭 집어서 주적으로 한다는 게 군의 본질상 그렇게 맞는 것인지 의문은 있습니다.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도 아랍군을 주적으로 표현하거나 그러지는 않거든요. 그냥 위협이 되는 것은 다 심각한 위협이고 그런 것이고.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들은 다 적인 것이죠, 군의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 남북 간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런 분위기, 앞으로 이산가족들에게 어떤 희망을 줄지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2박 3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다시 24일부터 상봉이 또다시 시작이 되는데요. 오늘 헤어진 가족들 후유증 없이 좋은 추억으로 잘 간직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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