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났다'...68년 만의 재회

'드디어 만났다'...68년 만의 재회

2018.08.20. 오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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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앵커]
앞선 2015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 장면을 함께 보셨습니다. 다시 봐도 뭉클하네요. 이제 2년 10개월 만에 진행되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조금 전 오후 3시부터 시작됐습니다.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가족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세 분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오후 3시부터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됐습니다. 김주환 기자, 지금은 어떤 상황인가요?

[기자]
지금 아마 상봉은 계속되고 있고 저희 풀기자단이 신문, 방송 섞여서 금강산호텔에 들어가 있는데 거기서 바로 현장 송신이 불가능해서 요즘은 디지털 카드가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촬영편을 이용해서 CIQ를 넘어서 동해 CIQ 남쪽에 있는 풀 중계차로 옵니다.

거의 3시 40분쯤 현장에서 출발했다고 하니까 지금쯤 아마 남측 지역에 도착해서 각 방송사들한테 송출 준비를 하는 그런 상황일 것 같습니다. 다만 또 아쉬운 것은 풀 기자단 중에 촬영기자가 있고 취재기자가 있는데 취재기자들이 한 것을 거기서 팩스 마련이 안 됐다고 합니다.

이 팩스 역시 프린터를 해서 거기서 다시 이 프린트를 가지고 다시 남측 지역에 와서 각 방송사에다 송신하는 이런 형태로 해서 다소... 실제 진행은 만남은 3시부터 이뤄지고 있지만 시청자 여러분들이 화면으로 보는 것은 실시간으로 보지 못하고 아마 빠르면 5분, 늦어도 10분 아니면 만남의 현장을 시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그 화면은 저희가 들어오는 대로 바로바로 또 여러분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전체적인 일정을 한번 짚어볼까요?

[인터뷰]
크게 보면 오늘부터 2박 3일간 남측 가족이 북측 가족을 만나고요. 그리고 23일부터는 2박 3일 동안 북측 가족이 남측을 만나게 되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고정적인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틀을 보면 환영 오만찬이 있고요.

그다음에 단체 상봉이 있고 그다음에 개별 상봉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특징이라고 하면 객실에서 개별적으로 상봉하는 가족들이 식사를 하도록 지금 돼 있거든요. 그래서 20~22일까지는 우리 측 89가족이 북측 가족을 만나고요. 그리고 23~26일까지는 북측이 좀 적습니다.

83가족이 남측 가족을 만나게 되는데요. 원래 양측 100가족씩 서로 합의가 됐는데 이산가족 상봉 신청하신 분들이 매우 고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의, 타의에 의해서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부분들이 포기가 된 부분이고요.

그다음 북측 가족의 경우에는 사실 북측은 우리하고 상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냥 신청을 해서 개별적으로 상경을 해서 모여서 오면 되는데. 북측의 경우는 모든 분야까지 다 정부가 개입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모두 이동부터 시작해서 평양에서 숙박, 그다음에 여러 가지 재정비, 교육, 이동 이런 데 굉장히 어려움이 많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보다 가족 수가 줄어든 거죠.

[앵커]
오늘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20~22일까지 1차 상봉이 있고요. 그리고 24~26일까지 2차 상봉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측에서 신청한 경우 그 가족들이 만나고 2차 상봉에서는 북측에서 신청한 경우. 이렇게 만나는 거죠?

[인터뷰]
우리 측, 아까 조한범 박사님 말씀하신 대로 우리 측에서 신청한 89가족이 북측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요. 그다음에는 북측에서 신청을 한 83가족이 남측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을 하셨지만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이 과거와 좀 다른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가족끼리 하는 이야기가 모두 공개되는 그런 것보다는 가족들끼리 객실에서 따로 만날 수 있는, 보다 더 가족들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다는 점에서 과거에 있었던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는 조금 차별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이번에는 가족끼리 점심을 먹는 시간이 있어서 이게 이전과는 다르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전에는 어떤 식으로 만났던 건가요?

[기자]
사실은 지금 단체 상봉, 개별 상봉이 있었는데 북측에서는 좀 관여를 했죠. 관여를 하다 보니까 사실은 가족간의 속내보다도 북측 상봉자 중에서 체제선전을 하는 측면이 강했고요.

그런데 이번이 21번째 이산가족 상봉이 되는데 북측이 좀 유연성을 발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객실에서 가족들 간에 북측이 준비한 도시락을 먹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그러니까 북측 감시원들이 일일이 객실에 안 들어간다라는 전제 하에 가족들간에 그동안 못 나누었던 여러 사람이 있을 때 하지 못하는 그런 가족들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이 우 박사가 말씀하신 것처럼 연장해서 추가로 말씀드리면 그런 차별이 있다고 보는 거죠.

[앵커]
개별 만남이 단체 만남보다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는데 이 부분 역시 북측이 요구한 바다 이렇게 보면 될까요?

[기자]
그렇습니다. 지금 큰 틀에서 보면 지난 2015년 10월, 그리고 그 이전에 21번째 만남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시간대는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어제 우리가 속초 한화콘도에 모여서 금강산으로 이동하지만 사실은 북측에서는 평양에서 금강산 이동하기가 용이치가 않거든요. 그러니까 오전부터 만났으면 굉장히 좋겠죠. 그런데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오후 3시부터 상봉이 시작되는 형태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이전과 비교해서 더 깊은 얘기를 가족들끼리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전에는 상봉을 할 때 모두 공개된 장소에서 만났다, 이렇게 봐야 되는 건가요?

[인터뷰]
물론 그렇게 봐야죠. 왜냐하면 지금 김 기자님 말씀하셨지만 사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특히 우리 측은 사전에 신청해 놓은 사람들, 랜덤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정말로 추첨에 의해서 사실은 선별을 하는데 북한의 경우는 여러 검증 장치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들어오기 전에 김주환 기자님하고도 미리 말씀을 나눴지만 북한 측은 그러니까 북한 측이 선별한, 소위 북한에서 어느 정도 사실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만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상봉에서는 사실은 개별 상봉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북한 측의 감시요원이나 아니면 우리 측 풀 기자단에 공개된, 거의 반 공개된 상태로. 만남의 형태만 단체로 만나느냐, 개별이냐. 이런 거였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이번에 예정됐던 정말로 객실에서 북측 감시원들이 없는 상태에서 개별 상봉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사실 큰 변화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미묘한 변화는 있습니다마는 크게 보면 북측의 변화. 김정은 위원장 체제에서 변화된 흐름들, 특히 금년 4월 20일날 새로운 전략노선 선포한 이후로 변화를 본다고 그러면 지금 집단 탈북 여종업원 문제로 이산가족을 연계하는 듯한 그런 발언을 했지만 성사가 됐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는 생각보다 과거에 비해서 진일보한 형태로 이산가족 상봉 자체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런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큰 틀에서 보면 미묘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에서 북측의 변화가 느껴진다고 볼 수 있고요. 그것은 역시 큰 흐름에서 협상 국면으로 전환한 김정은 위원장의 어떤 전략적인 선택이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겠죠.

[앵커]
이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사실 출경 절차도 달라진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터뷰]
과거 우리 쪽 입장에서는 사실 크게 절차상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속초의 한화.우리는 사실 이동의 자유나 모든 것이 보장되기 때문에 거기서 모여서 단체로 출경을 하게 되는 그러한 절차를 간소화하면서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이번에 조명균 장관도 이야기했듯이 많은 가족을 못 모시는 그러한 상황이 있는 점은 북한에서의 여러 가지 관리의 문제가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고 북한 측에 있는 이산가족들이 금강산 행사장까지 오는 데 있어서의 절차는 사실 우리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 이번에 물론 조금의 변화가 있었고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앞으로 이런 부분이 더 발전이 되어야만 이산가족들이 보다 더 자유롭고 그다음에 간소한 절차를 통해서 상봉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이산가족 상봉, 지금 이전과는 다른 그런 상황이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봤는데 그렇다면 이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북한 내부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해질지 이것도 궁금하거든요.

[기자]
사실은 과거에 보면 북한 대내적인 매체가 몇 개 있습니다. 신문지상에 보도를 하는데 이번 만남을 가지고 북측이 노동신문이라든가 이런 데에 직접적으로 4면이 다. 북한도 우리로 말하면 정치면이 있고 경제면이 있고 있거든요.

국제면도 있고 그러는데 6면이 국제면이기는 하는데 미국과의 관계 안 좋은 문제 굉장히 비난 어조로 하고 사회적인 면인 4면 정도에 실린다는 것도 굉장히 큰 변화이고 만약 1면에 실렸다는 것은 지금 조 박사님 말씀하신 대로 굉장히 정책 변화로 볼 수 있고 남북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나름대로 자기들이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일단 내일 신문 혹은 내일자 노동신문을 봐야겠고 그 이후에... 참고로 북한은 신문이 일주일 내내 나옵니다. 우리처럼 하루 쉬는 게 아니고. 어떤 식으로 반영될지 두고 봐야 되겠죠.

[앵커]
어떻게 신문에서 다루는지 북한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다루는지도 잘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거의 3년 만에 진행이 되는 거거든요.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된 배경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일단은 우리가 2015년 추석이죠, 10월로 기억을 합니다마는 그때 상봉을 했을 때 북측이 상당히 전향적이었어요. 그때 북측 적십자위원장이 제 기억으로는 이산가족 상봉의 정례화까지 언급을 했었거든요.

그렇게 본다고 그러면 물론 안타까운 얘기입니다마는 우리는 이산가족 상봉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북한은 남북관계나 아니면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는 데 활용하는 경향을 보여왔거든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사실 남북관계가 전면적으로 경색이 됐죠. 개성공단 중단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올해 상봉을 본다고 하면 큰 틀에서 보면 물론 변화는 작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보기에 2017년 9월에 핵실험 마지막 했죠. 11월에 마지막 ICBM 발사했고요.

1월에 파격적인 신년사를 발표했죠. 남북관계,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그리고 정말로 참가했고 4월 20일날 새로운 전략 노선을 선택을 했습니다, 경제발전의. 그리고 4.27 판문점 회담을 한 거죠. 그리고 5.16 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회담.

그렇게 본다고 하면 지금 여러 가지 난항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김정은 위원장이 큰 전략적인 변화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물론 비핵화에 난항은 예상이 되지만. 그렇게 본다고 그러면, 물론 북한이 불만이 많아요. 미국에 대해서 종전선언 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남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불만을 얘기합니다.

특히 자신들이 원하는 속도로 빠른 속도로 남북관계를 안 하고 있다, 이런 불만을 제기하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는 북미 협상을 지속하고 있고 큰 틀에서는 남북관계를 가져가고 있어요.

그렇게 본다고 하면 이산가족 문제도 사실 여러 가지 난관이 조성됐지만 북한은 이것을 남북관계를 지속하려는 어떤 의지나 혹은 자신들의 어떤 의도를 관철시키는 그런 계기로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마는 이걸 계기로 아마 남북한 당국자들 간에 회동도 있을 거고 향후에도 이산가족 상봉은 지속할 개연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남북관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져가겠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선택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조금만 더 말씀드리면 김정은 위원장이 말하는 새로운 전략노선, 경제 발전에 있어서 남북경협. 남북관계 없이는 관철이 불가능하거든요. 그렇게 본다고 하면 우리도 남북관계가 필요하지만 김정은 위원장한테도 남북관계가 필요한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필요한 거죠.

[앵커]
지금 북한 금강산호텔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잠시 보여드렸던 화면이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시작할 당시의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잠시 뒤에 화면이 들어오는 대로 계속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개별 상봉이 참고로 5시면 끝납니다. 그래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가 19시부터 북측이 주최하는 환영만찬을 해서 그때 또 만나게 되는 거죠. 참고로 이산가족 하면 앞서 자료화면 보셨지만 원형 테이블에 번호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사전에 약속을 하죠. 북측 적십자 관계자들과 우리 측 적십자 관계자들이 약속을 해서 그 번호를 가지고 찾아가서 만나는 형태. 왜냐하면 앞서 거의 68년, 65년 동안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번호는 그 테이블 번호 누구누구는 몇 번 테이블이다, 서로 약속을 합니다. 거기에 마주앉게 되는 거죠. 아마 잠시 후에 저녁 만찬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서로 손을 잡고 식사를 같이하거나 그런 그림이 들어올 거라고 봅니다.

[앵커]
그런 화면들은 들어오는 대로 저희가 계속 보여드리도록 하겠고요. 앞서 위원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부분의 연장선상에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건 인권적인 문제고요. 이런 인권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였을 때 북한 역시 좀 전 세계로부터 얻을 게 많지 않겠느냐, 이런 시각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사실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것이 사람의 보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고 그다음에 굉장히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항상 정치적인 상황과 구분을 해서 우리가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남북한의 정치적 관계가 경색될 경우에는 이산가족 상봉까지도 같이 중단이 되는 사태가 계속해서 반복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금강산에서 저희 민간인이 피살되거나 천안함 사건. 이렇게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이산가족 상봉도 중단이 되고 그래서 다시 재개했다가 2015년 10월에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었는데 다시 2016년 1월에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하고 또 국제적인 제재가 또 가해지면서 다시 또 이산가족 상봉 역시 다시 취소되는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조한범 박사께서도 말씀하신 대로 과연 이러한 인도적인 문제에 관련된 이산가족 상봉이 앞으로 남북 간에 관계가 발전되면서 이것이 문제가 없다면 더 좋겠지만 이 남북 간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이러한 국제적인 정치적인 상황과는 별개로 인도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그러한 의식이 남과 북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앞으로 이번 이산가족 상봉이 또 어떤 새로운 계기가 될지 주목되는 그런 상황입니다. 저희가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 화면은 조금 전에 북한 금강산호텔의 모습입니다. 지금 북측 가족들이 먼저 나와서 기다리는 것 같죠?

[기자]
가족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죠. 앞서 잠깐 화면이 지나갔습니다마는 테이블 번호. 이번에는 남측 가족들이 신청을 해서 그런데 다만 부자 상봉이나 부모, 자식 간의 쌍은 7쌍밖에 안 되고요. 남매나 자매는 20쌍. 그러니까 지금 13만여 명의 적십자사 등록 중에 이미 7만여 분이 돌아가셨고요.

한 5만여 명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 90세 이상은 21%, 80대 40% 해서. 사실은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테이블 번호가 없으면 모릅니다, 누구인지. 그런데 아들을 만나는 이가형 할아버지는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해서 뭉클하게 했죠. 지금 벌써 상봉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네요.

[앵커]
지금 이미 가족들이 만나는 그 장면을 함께 보고 계신데 이금섬 할머니 가족입니다. 92살이세요.

[기자]
이금섬 할머니도 역시 아들을 만나는 걸로 돼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테이블 번호를 봐야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데 맞습니다.

아들이었는데 좀 특이한 케이스로 돼 있죠, 이금섬 할머니는. 남편이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다가 거기서 북송선을 타고 간 특이한, 전쟁 때.

[앵커]
현장 소리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 리상철 씨 그리고 손자며느리 김옥희 씨를 만나고 있는데 아들이 71살입니다.

[기자]
그렇죠. 지금 71살이 됐으니까 정전을 기준으로 하면 65년 만에 만나는 거고요. 한국전쟁 개시로 시작하면 68년 만의 만남이죠. 그러니까 3살짜리 아들이라든가. 주로 우리가 북측 사람들이 피란 내려올 때 1.4후퇴라고 많이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배를 타야 되는데 이금섬 할머니 역시 본인은 탔는데 남편과 아들은 순번을 기다리느라 못 탔기 때문에 헤어졌고. 다른 배로 한 달만 헤어지자고 했는데 68년이 갔고. 이런 굉장히 한이 서린 사연들을 다 갖고 있죠.

[앵커]
68년 만에 아들을 만났고요. 68년 만에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가족의 모습이 나오고 있는데요. 유관식 할아버지.

[기자]
딸을 만났습니다. 딸을 만났는데 유복자 딸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하죠. 유복자 딸이 있었는데 이번에 알게 됐다. 딸과 사촌을 만나는 그런 장면이죠.

[앵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피난길에 올랐다가 헤어지게 됐는데 딸이 뱃속에 있었던 사실을 여든아홉이 돼서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앵커]
이번에 인터뷰 내용을 보니까 양갱을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양갱이 없었는데 이제 딸을 만나러 가면서.

[기자]
그때도 사실은 일본식 식품인데 굉장히 부유한 집에서나 그걸 먹었는데. 그래서 그런 인터뷰 내용 중에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이건 사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직 화면에 안 나오지만 이번에 최고령자 할아버지는 신발을 무려 30켤레나 샀다고 그러죠. 북에 있는 손자, 손녀들 나눠주라고.

[앵커]
이관주 할아버지 가족의 상봉 모습도 함께 보셨습니다. 두 명의 조카를 만나는 모습 보여드렸습니다.

[기자]
7남매가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에 있는 형제는 모두 사망을 확인했는데 조카 이광필, 이금순이라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됐죠.

[앵커]
전쟁 때 피난오면서 7남매가 흩어진 그런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계십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가족은 이달영 할아버지의 가족입니다. 이북동생들을 만나러 나오셨는데요. 국군포로 가족인데요.

[기자]
가장 이번에 좀 특이했죠. 사실은 이복동생과 상봉했는데 국군포로 한 분이었죠. 이달영 할아버지는 국군포로였고 이번에 전시 납북자. 그러니까 한국전쟁 때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북으로 후퇴를 하면서 끌고 간 사람들이 있죠.

전시납북자라고 하는데 네 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전에 조심스럽게 북측에 얘기해서 양측이 합의해서 공개해도 좋다고 해서 공개하는 부분이죠.

[앵커]
지금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 이북에 있어?]
[인터뷰 : 네.]
[인터뷰 : 아들은 하나...]
[인터뷰 : 아들이 의사 하고 있어.]

[앵커]
이영부 할아버지 가족인데요. 전시 납북자 가족입니다.

[기자]
원래 고향이 평북 용천인데 아버지와 헤어질 때 10살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109살인데. 과거 2015년과의 차이를 본다라면 북측 상봉자들은 앞서 조 박사님 설명하신 대로 북측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굉장히 이런 걸 주렁주렁 달고 나왔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외형적이지만 그 모습은 단편적이지만 그런 모습은 좀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슴에 김일성, 김정일 배지는 착용한 모습은 보이는데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 그런 모습은 현재로서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앵커]
지금 보고 계신 가족은 이종건 할아버님이셨고요. 사진을 서로 또 함께 보는 모습도 전해드렸습니다. 이어서 이수남 할아버지 가족인데 이 가족 같은 경우 이수남 할아버지와 또 형인 이종식 할아버지. 형제가 같이 북한에 있는 첫째 형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기자]
원래 고향이 서울이었는데 50년 8월 형이 용산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인민군들한테 강제로 끌려갔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있던 친구가 그 사실을 알려줬고 그래서 이번에 이수남 씨 형인 이종성, 그리고 형수도 만나는 그런 장면입니다.

[앵커]
이제 또 다른 가족 만나는 모습을 보고 계신데요. 이재일 할아버님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조카 두 명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현장음도 함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이분이 사촌이라는 말이지. 큰아버지라고...

[앵커]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고요. 전시 납북자 가족입니다.

[기자]
그렇습니다.

[앵커]
원래 헤어진 형을 만나려고 상봉을 신청했는데 형은 97년에 사망한 것으로 이번에 확인됐고요. 이번에 만나는 가족은 조카들입니다. 이번에 만나는 이산가족들을 보면 부모님이나 아니면 부인을 만나거나 남편을 만나는 경우는 굉장히 적고. 보통 조카나 좀 촌수가 멀어지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인터뷰]
이산가족을 처음에 등록을 정부가 받기 시작했을 때 약 13만여 명이 등록을 했는데 지금 올해 7월을 기준으로 7만여 분이 사망을 하시고 지금 5만 7000여 분 정도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갈수록 좀 더 가까운 촌수 내의 상봉을 할 확률은 점점 더 적어지는 거고요. 더군다나 우리 같은 경우에는 추첨 형식으로 하기 때문에 현재 5만 7000여 분이 생존해 있는데 이번에 100분을 원래 뽑기로 했으니까 사실 약 570:1 정도의 경쟁률이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런 규모로 한다고 하면 아직까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있는 많은 분들이 기회가 사실 언제 올지는 모르는 상황입니다.

[앵커]
지금 보여드리는 가족은 이금연 할머님의 가족입니다. 올케와 조카들을 만나러 나오셨습니다.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모습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68년을 기다렸습니다.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는데요.

지금 피난을 가다가 가족들과 헤어졌고요. 부모님 두 분은 1951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동생 4명 중에 3명이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만나는 가족은 올케와 조카입니다.

[인터뷰]
엄마, 삼촌.

[앵커]
지금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금강산호텔에서 진행되고 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오후 3시부터 진행됐습니다. 그 현장 화면을 보고 계십니다.

지금 현장 화면 보시면 사진을 참 많이 들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거의 가장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자]
사실은 89명이 방북을 했지만 가족들, 자녀분들, 우리 관계자까지 이번에 금강산호텔에 간 사람은 197명. 지금 그러니까 아버지가라고 설명을 하지 않습니까? 아마 아들이겠죠.

[앵커]
이번에 상봉 장소에 지금 유관식 할아버지 가족의 모습을 보고 계신데요. 아까 저희가 한번 소개해드렸었는데 딸이 있는 줄 몰랐다가 이번에 확인된 그런 경우입니다.

[인터뷰]
여담이지만 관계된 말씀을 드리면 2010년경 이명박 정부 때 속초시에서 혈맥잇기 사업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실향민들이 돌아가시잖아요.

그러면 돌아가시게 되면 그 후손들은 영원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래서 제가 그 작업을 참여해서 4000분의 실향민들을 녹음으로 녹취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거든요. 안타까운 얘기지만 제 가슴에 남는 게 저희가 녹취한 지 일주일 만에 그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분이 100세 가까운 분이셨는데 이게 왜 지금 심각한 상황이냐면 지금 저분들은 상봉을 하셨지만 지금 돌아가신 분이거나 향후에 상봉을 못 하시고 돌아가시게 되면 향후 후손들이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지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러한 방송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봉도 해야 되지만 저분들이 마지막까지 혈육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다양한 조치가 필요하거든요.

[기자]
추가로 말씀드리면 개인적으로 저희 돌아가신 부모님들이나 저도 실향민 2세인데 저희도 가족들끼리 적십자사에 다섯 번의 상봉 신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중요한 얘기는 등록이 14만 2000여 명이 등록이 돼 있는데 당사자인 7만여 명이 돌아가셨다고.

그러니까 저 같은 경우는 2세지 않습니까? 신청 자격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혈맥 찾기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러니까 신청을 하고 싶어도 우리 북한의 누군가 고모, 고모부, 큰아버지가 있다라고만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할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그런 실향민 2세라도 북측과 협의가 잘 돼서 그런 구조로 가야 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앵커]
지금 보고 계신 가족은 배순희 할머님의 가족입니다. 지금 82살입니다. 오늘 손녀딸과 함께 북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상봉장으로 갔는데요. 언니와 동생을 만나게 됩니다.

언니를 68년 만에 만났습니다. 아버지가 본인만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면서 동생들과 헤어지게 된 그런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에 황해도에 살고 있었고요. 아버지가 보급대로 뽑혀갈 수 있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함께 셋이서만 피난길에 오르게 됐다고 합니다. 언니와 동생 3명이 있었는데 언니 배순복 씨 그리고 동생 배순영 씨를 이번에 만나게 됐습니다. 얘기를 들어볼까요.

[인터뷰]
당첨이 된 거거든. 나이 많은 사람부터 먼저 그걸 한 거야. 그런데 이번에 됐다고 하니까. 그래서 내가 오래 살고 보니까 이런 일도 있구나.

[앵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들을 수 있었는데. 이산가족 상봉 이번에 참여하게 되신 분들의 사연을 보니까 80년대부터 신청을 하셨던 분들이 눈에 많이 띄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꿈을 꾸고 나서 이번에 선정이 됐다, 이런 말씀도...

[기자]
제가 그 사연집을 방송 들어오기 전에 거의 다 89분의 사연집을 다 봤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금 앵커께서 말씀하셨는데 꿈에 현몽이라고 하죠. 돌아가신 부모님이 나타났다거나 아버지가 나타나서 좋은 소식을 주고 나서 며칠 있다 됐다라는 경우가 7~8 경우가 나와요.

지금 이분의 경우도 그렇고. 그래서 관심 있게 읽어봤던 대목인데 그 자료 역시 적십자사가 기자들한테 언론사에 제공한 자료를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앵커]
하늘의 별따기다. 이런 표현들을 많이들 쓰시더라고요. 이번에 참여하게 되신 분들을 보면. 그런 걸 보면 상봉을 정례화한다거나 아니면 대상을 늘린다거나 이런 방안은 구상할 수 없을까, 어려운 일일까 이런 생각도 하게 되거든요.

[인터뷰]
지금 북한에서 상봉의 정례화라든지 규모를 확대하는 데 있어서 북한 측에서는 이산가족의 자료가 우리처럼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헤어질 때 어른이었던 당사자들이 헤어지고 난 다음에 자식대로 내려갔을 때 추적이 그렇게 우리처럼 쉽지 않은 부분 때문에 이렇게 상봉의 규모를 늘리거나 횟수를 늘리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 김주환 기자께서도 말씀하셨지만 형제들을 만나고 있는 분들은 그래도 그 당시에 이런 가족관계에 대한 인식이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된 분들은 지금이라도 형제 상봉이 되는데 그 당시에 아주 어렸던 분들이 부모대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는 추적한다는 것 자체가 이산가족이 남과 북이 떨어져 있는데 추적하는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아주 실질적인 행정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앵커]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릴 때마다 로또 상봉이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게 가족을 만나는 건데 로또에 비유를 한다는 게 가슴 아픈 일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사실은 우리 모두가 반성을 해야죠. 위정자부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에는 1972년에 기본협정을 맺었고. 물론 우리하고 상황은 다릅니다마는 결국은 만날 수 있었어요.

만날 수 있었고. 일정한 절차만 거치면 모두 만났고. 그러니까 독일말로 내적인 끈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게 통일의 원동력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지금 그렇게 본다면 사실 이번의 이런 형식의 이산가족 상봉은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지금 사실은 암암리에 다 알려진 얘기입니다마는 정말 절박하신 분들은 제3국에서 만납니다. 그러니까 브로커를 통해서 만나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런 걸 포함해서 상시적인 면에서. 그다음에 지금 스마트폰 하나면 전 세계가 연결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금 부모가 돌아가시면, 선대가 돌아가시면 후손들이 영원히 남남으로 그렇게 되면 사실 극단적인 경우로 서로 모르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비극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을 계기로 적어도 이산가족 상봉만큼은 전면적으로 다른 무엇보다 선행을 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것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할 필요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은 금강산의 이산가족 면회소를 상설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시 상봉. 그다음에 한 번 상봉도 어렵지만 한 번 상봉을 하면 또 후유증이 생겨요. 그러니까 다시 만날 수도 있고 그다음에 어렵다고 그러면 서로 상호부조도 할 수 있고. 대면 상봉뿐만 아니라 편지라든지 서신 교환 이런 것도 필요한 거죠.

[앵커]
지금 독고란 할아버지 상봉 장면 보시고 계신데 현장 얘기를 들어볼까요.

[인터뷰]
독고란 큰아버지 맞는가?

[앵커]
지금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조카가 인사를 하는 거죠?

[기자]
그렇죠. 아무래도 68년... 직계가 아니다 보니까 좀 서먹서먹하고 저희가 볼 때는 큰아버지를 만났는데 큰절을 할 줄 알았는데. 저도 순간적으로 큰절을 할 줄 알았는데 큰절을 안 하고 그냥 목례만 하는 그런 형태를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무리 봐도 북측 관계자들은, 북측 가족들은 북측에서 나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인데 2015년도하고 달라진 것은 훈, 포장을 가슴에 한 명도 달지 않았습니다.

[앵커]
지금 김종태 할아버지 가족인데요.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손을 놓치 않으시네요. 경기도 파주에서 살던 중에 전쟁이 나면서 큰형, 17살이었던 큰형이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후에 부모님과 나머지 8남매가 월남을 했다는 사연을 안고 있는데요. 오늘 김종태 할아버지 형수와 조카를 만나러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지금 형수와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죠.

[기자]
그래서 지금 오랜만에 60여 년 만에 만났는데 왜 이렇게 서먹서먹할까 이렇게 의아해하시는 시청자분들도 있는데 과거 이산가족 상봉했던 분들을 만나면 감정이 아직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답니다.

그런데 저녁 상봉하고 그다음 날 아침 되면 감정의 응어리가 풀어져서 눈물바다가 되는 그런 상황이 보인다는 거거든요. 아직은 좀 서먹서먹할 겁니다, 이야기 보따리를 다 못 풀어놔서.

[앵커]
이야기 보따리를 다 풀어놓을 때쯤 감정이 다 교류가 될 때쯤에 다시 재이별을 하게 된다는 게 가장 슬픈 일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헤어질 때가 사실 가슴 아프죠. 지금 김주환 기자께서 말씀하시다 말았는데 지금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북측 분위기가. 지금 김일성, 김정일 배지 이외에는 훈, 포장은 지금 한 명도 발견할 수 없고요.

그리고 복장도 미묘하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좀 자유롭고 색상도 다양해지고 화려해진 것 같습니다. 정치색은 상당 부분 완화가 된, 물론 좀 더 두고 봐야겠습니다마는 일단은 느낌으로는 그런 판단이 드네요.

[앵커]
지금 김광호 할아버지 가족들의 상봉 장면을 함께 보고 계십니다. 7남매로 태어났는데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던 형제들과 아버지는 모두 사망을 했고요. 북한에 있는 남동생 한 명이 생존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남동생과 그 부인, 그러니까 남동생과 제수를 만나는 그런 모습을 보셨습니다. 역시나 사진을 함께 보면서 옛 추억을 되새기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얘기를 좀 들어볼까요.

헤어졌던 사연들을 보면 그때 일주일이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얘기를 듣고 가족 일부는 북한에 남아 있고 일부는 남한으로 내려오고. 이런 경우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인터뷰]
당시에 흥남에서 철수할 때의 사연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 당시에도 일시적으로 잠시 전쟁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가지만 터전이었던 곳을 완전히 버린다고 생각을 안 했던 것이죠. 그랬다가 전쟁이 길어지고 정전상태가 계속되면서 분단이 또 고착화되고 하면서 가족과 헤어짐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인데요.

그렇다고 본다면 과거에 터전이었던 곳을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더욱더 아픔들이 남아 있는 그런 상황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앵커]
동생이 10살이었는데 이제 78세가 됐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가족은 곽호환 할아버지의 가족들입니다. 조카들을 만나는 경우인데요. 전시 납북자 가족입니다.

[기자]
그렇습니다. 한국전쟁 동안에 납북이 됐을 가능성이 크죠. 지금 조카 곽정철과 곽영철. 그래도 과거에도 또 몇 차례 전시 납북자라든가 국군포로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2015년도에 그때 한번 우리 조업 중에 납북된 어선 가족들도 상봉이 이뤄진 적이 있었습니다.

[앵커]
아까 가족들이 들어올 때 보니까 반갑습니다. 이 노래. 많이 익숙한 노래인데 이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더라고요.

[기자]
그렇죠. 북측이 평양이나 금강산 가면 주로 많이 트는 노래인데 여러 가지 금강산의 정기적인 상봉장도 중요하지만 화상 상봉이라도 해서. 지금 스마트폰도 되고 북한도 인터넷이 되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전면적으로. 지금 한 5만여 분만 등록이 돼 있는데 북측은 관리를 우리하고 다른 방향으로 하니까.

북측은 체제상 이른바 성공한 사람 아니면 자기를 드러내지 않거든요. 체제에 살아오면서 불이익을 당하니까.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측면을 감안해서라도 당장 서신 교환이라든가 공영 메일, 요즘은 공영 메일도 있으니까 사실은 앞서 동서독 경우를 말씀드렸는데 동서독의 경우는 행복한 케이스였죠. 100만 명 이상이 만났고 서독 주민이 1972년도만 해도 조건만 맞으면 동독에 가서 30일 정도 체류도 가능했었으니까...

[앵커]
저희가 지금 3시부터 진행된 단체 상봉 모습을 전해 드렸는데 지금 오후 5시가 지나면서 단체 상봉이 막 종료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일정이 어떻게 되는 거죠?

[인터뷰]
환영 만찬이 있고요. 그리고 내일 개별 상봉, 객실 식사도 있고요. 지금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아까 북측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어려울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국내도 그런 분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제가 혈맥 잇기 녹취 사업을 해 보니까 우리가 반공독재체제를 거치면서 사실은 사연을 들여다보면 연좌제니 뭐니 해서 많은 사연들이 있기 때문에 북측의 가족을 만나고 싶어도 드러내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실제로 제가 녹취를 해 보니까 그게 드러날까 봐 그걸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앵커]
지금 정학순 할머니 가족 상봉 모습을 보고 계신데요. 얘기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정학순 할머니는 당초 친오빠를 만나고자 하셨었는데 이번에 생사 확인 결과 오빠는 사망한 것으로 확인이 됐고요. 오빠의 아내 그리고 그 아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지금 보시는 분은 한신자 할머니께서 두 딸을 만나고 계신 모습입니다. 북한의 딸들이 지금 일흔이 넘었습니다.

[기자]
우리가 남측 신청자들이 했으니까 이렇게 처음 만났는데 과거에 보면 의아해하시는 게 북측 관계자들을 이산가족 서너 번씩, 적게는 두세 번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24일부터 북측 관계자들을 찾지 않습니까? 북측의 대표자는 지금보다 더 성공한 사람들.

자기들이 요구해서 내 오빠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이런 경우가 있어서 과거 모 정치인 같은 경우 고모를 두 번 이상 만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건 남과 북의 구조상 문제이지만 저기에서 위정자라서 특혜를 주고 그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앵커]
한신자 할머니께서는 흥남에 살다가 갓난아기였던 셋째딸만 업고 내려왔고요. 첫째딸은 흥남 시누이집에 그리고 둘째딸은 시어머니께 맡긴 이후로 이렇게 68년 만에 얼굴을 마주보게 됐습니다.

[앵커]
딸들과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인터뷰]
눈물도 안 나와.

[앵커]
처음에 헤어질 때는 일주일이면 되겠지, 한 달이면 되겠지. 그러다가 30년이 되고 60년이 넘었다 이런 얘기들을 하시더라고요.

[기자]
실향민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지금 흥남 철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흥남 철수에서 거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거제 출생. 출생은 거제에서 했죠. 부산이나 이런 데 가신 분들은 온 가족이 다 내려왔거나 일가 친척 노력해서 성공하신 분들이 많고 동부전선부터 휴전선 근접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하면 휴전선 너머가 고향인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지금 말씀드리자면 일주일만 피난 갔다 올게. 일주일만 대피하고 올게. 그게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60년이 되고. 그래서 굉장히 한을 못 이겨서 술로 안타깝게 연명하셨던 분들도 없지 않아 있어요.

그래서 오늘 사연들 중에 보면 용매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연평도 위쪽에. 거기가 원래 한국전쟁 전에 우리 땅이었는데 전쟁이 끝나니까 연평도 북쪽에 있거든요. 북쪽에 있는 섬인데 지금 NLL 라인인데 북한 땅이 됐죠. 그러니까 이게 날씨 맑은 날 연평도에서 보인다라고 합니다. 지척에 있는데도 못 가는 경우가 있어서 이번에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앵커]
용매도 말씀을 해 주셨는데 이번에 사연을 보니까 용매도로 피난을 갔다가 헤어지게 됐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인터뷰]
심장이 나빠지잖아. 그런 생각... 그러다가...

[인터뷰]
원래 신청을 했을 때는 직계나 형제들을 신청했을 텐데 지금 보니까 워낙에 시간이 많이 흘러서 사망한 분들이 많다 보니까 조카들을 대신해서 보는 그런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앵커]
지금 홍정순 할머니 가족의 상봉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전시 납북자 가족이세요. 조카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보시면 대부분 고령이시고 90세 이상만 3분의 1에 달한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계신 게 나오실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하신 게 가장 감사한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기자]
지금 현지 시간 개별 상봉이 끝났을 것 같은데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화면상으로 보면 그 전에 조 박사님께서도 쭉 말씀하셨는데 북쪽 감시원들이 몇 명씩 있었어요. 곳곳에 있었는데.

그래서 의도적으로 체제 선전 이야기를 하고 그랬는데 지금 화면상으로 봐서는 그런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앵커]
이전과는 상봉하는 모습이 좀 자유로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평가를 해 주셨고요. 그렇다면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서 추가적인 계획이나 얘기가 오가는 부분이 있습니까? 전망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나요?

[인터뷰]
사실 이번의 이산가족 상봉은 사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즉 올해에 이산가족 상봉에 관한 부분은 양쪽이 합의를 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는데요. 그 이후에 남북관계 개선과 관련해서 아직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이 합의된 바는 아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물론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이야기가 진행될 수는 있겠지만 앞으로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가 어떻게 진전되느냐에 따라서 인도적인 문제인 이산가족 상봉 문제까지도 또다시 기회가 확대되거나 규모가 확대되는 문제도 논의는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저희가 오늘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 현장 화면을 보여드렸습니다. 지금 5시에 일단 첫 번째 상봉은 끝난 상황이고요. 이후 상황이 들어오는 대로 계속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세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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