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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 폭파' 28년...김현희의 눈물
Posted : 2015-11-27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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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희, 전 북한 대남공작원

[앵커]
김현희 씨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러니까 다 아는 것 같지만, 저는 이번에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제가 잘 모르고 있구나, 모르는 게 많구나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평균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김현희 씨에게 제가 몰랐던 것들 대신해서 제가 묻도록 하겠습니다. 만나보겠습니다. 어서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잘 지냈습니까?

[인터뷰]
이제 내일모레가 11월 29일입니다. 그러니까 29일이니까 KAL기 폭팔 사건이 일어난 지 28주년이 됩니다. 그래서 세월이 그만큼 많이 지나갔지만 그 아픔, 슬픔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고 다 말로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잊을 수 없고 그래서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서 희생자분들과 또 유가족분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앵커]
지금도 이맘때쯤 되면 그때의 일들이 계속 떠오르고 그러십니까?

[인터뷰]
아무래도 그렇죠.

[앵커]
어떤 생각들이 드시나요?

[인터뷰]
사건에 대해서 항상 상기되고 또 많이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앵커]
꿈에도 지금도 북에 두고 온 가족들도 그렇고요, 지금도 꿈에 나타납니까?

[인터뷰]
가끔 이제는 뭐... 아이들 키우고 바쁘니까 그 전보다는 덜합니다.

[앵커]
두 자녀가 사춘기죠?

[인터뷰]
사춘기가 돼서 조금 바쁘죠.

[앵커]
평양에서 태어나셨고요. 아버님은 외교관이시고 어머님은 교사이고 어릴 때는 아역배우 같은 것도 하셨다고 하고 북한 사회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아주 잘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셨는데 어떻게 해서 공작원이 되셨을까, 그게 궁금했습니다.

[인터뷰]
평양에서 나서 자라서 쿠바에 가서도 생활을 하고 이렇게 상류층에서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 평양외국어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무래도 보고 배운 게 외교관이기 때문에 외교관이라는 꿈을 가지고 평양외국대학교 일본어과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최고의 권력기관인 중앙당 또 거기에서도 대남부서인 대외정보조사부에서 공작원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아마 몇 차례 사전에 나와서 다 문건이라든가 출신성분, 학교생활 이런 것을 다 파악을 하고 그다음에 직접 면접도 하고 여러 명, 여러 학생들을 뽑고 면접을 하고 또 시당에 불러서 여러 가지 면접심사를 거쳐서 소환되었습니다.

[앵커]
그런데 공작원이라는 것이 때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실제로 그런 일도 하셨고요. 그런 곳인데 그렇게 출신성분이 좋고 그런 젊은이들이 그걸 선뜻 하겠다고 합니까?

[인터뷰]
제가 소환될 때만 해도 어디에 가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공작원이 되는 것은 몰랐고 그저 저녁에 와서 갑자기 다 문건을 다 떼어놓고 승용차에 실려서 갔거든요. 그리고 부모님도 제가 뭘 하는지 몰랐고 그냥 중앙당 하면 북한에서는 최고의 권력기관이고 하여튼 좋은 곳이라고. 그래서 뽑혀서 가니까 좋은 곳에 간다고만 생각을 했지 공작원이라는 거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앵커]
왜 뽑히셨을까요. 그것 때문에 운명이 바뀌고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운명도 바뀌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당시 김일성의 대남분야를 김정일이 맡으면서 해외 공작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리려져서 특히 납치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앵커]
일본인들이요.

[인터뷰]
네. 그래서 납치인들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일본인화 교육을 시켜서 침투시키기 위한, 일본인화. 침투시키기 위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똑똑하기도 하고 교육도 잘 받고 그런 젊은이들이 필요했군요.

[인터뷰]
네.

[앵커]
어느 순간 교육을 받으시다가 어느 순간 내가 테러에도 이용된다는 사실을,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순간에. 그때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인터뷰]
제가 7년 8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습니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이라는 공작원 전문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고 또 나와서 또 일본인화, 중국인화 교육도 해외에 나가서 실습도 했지만 저희가 소속돼 있는 곳은 원래 일본인 정보과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야로 많이 훈련을 받고 준비를 했는데 이렇게 이런 KAL기 폭팔 같은 것을 하리라고는 사실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87년에 88올림픽을 앞두고 그 부서에서 하라는 지시가 주어졌는데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속성으로 그러니까 위장을 시키기 위해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87년에 광저우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또 신분을 취득하기 위해, 중국인 신분 취득을 위해서. 중국 광저우에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저만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87년 10월에 김승일 조장과 함께 임무를 받았습니다.

[앵커]
그래서 항공기를, 여객기를 폭파하러 간다는 것을 알고 거기 가실 때 심경은 어땠습니까?

[인터뷰]
임무 자체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그러니까 이것이 두 개 부서 조작책동이기 때문에 이걸 막고 적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비행기 한 대를 제끼라는 임무였습니다. 부장이 나와서 직접 임무를 준.

[앵커]
제끼라.

[인터뷰]
네. 저에게는 첫 임무였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거의 8년 훈련을 받았지만 첫 임무치고는 너무도 큰 임무여서 그 당시에는 그냥 그 많은 공작원 중에서 그래도 당에서 수령님이 신임을 해서 이렇게 저에게 큰 임무를 주셨구나 하면서 감격하면서 이걸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때는 혁명전사였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나중에 붙잡히신 다음에 김정일이 직접 지령을 한 것이라고 폭로를 하셨는데 그 당시에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셨습니까?

[인터뷰]
아니요. 저희가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시를 했냐, 안 했냐 그런 얘기를 하는데 북한에서는 원래 총 한방을 쏴도 북한이라는 체제가 그러니까 총 한방을 쏴도 다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서 이렇게 사인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특히 대남부서는 김정일이 그때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준비를 하면서 김승일과 그 지도원이 같이 연구를 하고, 노선 연구하고 많이 했습니다. 저는 보조역할이고 그런데 노선이 안 좋다고. 바그다드가 전시상황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지나는 게.

그래서 김승일 조장이 아무래도 경험이 많거든요. 50년대부터 그런 대남활동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노선이 안 좋다고 계속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과장이 KAL858기 노선은 안 좋다고 이미 다 보고를 올려서 김정일의 비준이 났기 때문에 이 지역을 수정할 수 없다고 다음에 다른 노선을 하더라도 이번에는 그대로 하자라고 해서 사실은 그런 불만이 있었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앵커]
그래서 선반 위에 폭탄을 두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리셨고 그리고 바레인에서 붙잡혀서 지금 말씀을 하신 김승일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음독을 해서 숨졌고 함께 음독을 했지만 살아나셨고. 그래서 그때는 혁명전사로서의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셨는데 그 생각이 나중에 바뀌셨을 거 아닙니까. 어떻게 언제부터 어떤 식으로 바뀌었습니까?

[인터뷰]
바뀐 거는 한국에 와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거기에서 음독 자살을 했는데 죽지 못 하고 결국 한국에 오게 됐는데 한국에 와서 한 8일 동안은 계속 일본어, 중국어를 하고 한국 사람 아닌 척 연기를 했습니다.

[앵커]
마유미로요?

[인터뷰]
마유미를 연기를 했는데 그러면서 보고 듣는... 수사관들이 하는 이야기도 듣고 또 이렇게 물건도 보고 또 이렇게 나가서 보는 게, 모든 게 제가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알고 있던 남한이 아니구나. 북한의 교육이 완전히 거짓 교육이구나. 그것은 뭐 보면 압니다. 그걸 느끼게 됐고 그리고 KAL기 폭파가 통일을 위해서 아주 위대한 일이라고 이렇게 교육을 받고 그래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고한 동족상잔이구나, 그런 것을 느끼면서 죄책감도 들고 그러면서도 제가 아무리 거짓말을 중국인처럼, 일본인처럼 해도 사실 앞에서 정확한, 그런 정보와 사실 앞에서 더 이상 빠져 나갈 수도 없고 그리고 느끼는 것들, 북한이 잘못됐다는 거. 이게 동족상잔이라는, 이 KAL기로 인해서. 그러니까 그런 양심의 가책들을 느끼면서 그때는 뭐 이렇게 산다는 것은 느끼지 못 하고 죽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죽자 하는 이런 마음에서 결국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서 진실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앵커]
나중에 그래서 그렇게 정신이 드신 다음에 참 이 일이 2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금 얘기하시기에는 고통스러운 일일 겁니다. 정신이 드신 다음에 그때야 비로소 115명이 희생이 됐고 그중에 56명은 중동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귀국하던 길의 근로자들이었고. 그 사실을 아셨을 때는 참... 지금 말씀을 하신 죄책감들이 들었을 텐데 어떠셨습니까?

[인터뷰]
아니까 많이 괴로웠죠. 그리고 오로지, 그러니까 한 2년 간 검찰에서 수사를 받고 조사를 받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냥 사형 판결도 받았지만 그냥 죽는 것만이 속죄하는 길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앵커]
그러면 오히려 특별사면을 받았을 때도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하셨겠는데요?

[인터뷰]
네. 그러니까 살아야 되나, 이게 옳은 것인가 하는 그런 마음도 들고 북에 있는 가족들도 생각이 나고 또 유가족분들 생각도 나고 참 착잡했습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또 어떻게 죄인의 몸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런 마음도 들고 어떻게 속죄를 해야 되나. 그런데 어쨌든 이렇게 큰 죄를 지어서 당연히 마땅하게 죽어야 할 몸이지만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들이 저를 이렇게 특별사면으로 살려주신 것은 북한이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서 발뺌을 하고 우리 대한민국에 뒤집어씌우는 이런 상황에서 이 사건의 산 증인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아무리 어려워도 지키라고 이렇게 저를 살려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명감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앵커]
외교관이셨던 아버님 그리고 교사였던 어머님. 그리고 동생이 남동생,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동생들은 그래서 그 뒤에 그걸 자백하신 것을 알고 북한이 강제수용소로 수용했다는 얘기를 들으셨다면서요?

[인터뷰]
자백할 때도 많이 가족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당연히 가족을 인질로 잡고 공작원 중에 한 명 뭐 어떻게 되면 가족을 추방시키고 수용소 보내고 이렇게 가족에게 박해를 가합니다. 그게 북한의 속성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못하게 하는 거죠. 가장 인간의 약한 걸 쥐고 통제하는 게 북한입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도 저 때문에 아마 추방이 돼서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그 이후로는 그 뒷소식은 못 들으셨고요?

[인터뷰]
네. 그냥 조금조금 정확하지 않은 그런 탈북자들의 그런 이야기들이 전해오는데 어쨌든 쫓겨가서 고생한다고 합니다.

[앵커]
그 뒤에 쓰신 책의 제목이 나도 여자가 되고 싶다.

[인터뷰]
이제 여자가 되고 싶다.

[앵커]
이제 여자가 되고 싶다. 이제 여자가 되셨습니까, 지금은?

[인터뷰]
됐죠. 이제는 한 10년 동안 그 사건을 알리고 홍보를 하고 북한 실상을 알리는 활동과 책 이런 것을 썼습니다. 그래서 한 10년 이후에 그러니까 10년 된 해에 그 유가족분들을 만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특히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유족분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세도 드리고 그때 한 분, 한 분 악수도 하고 화해하는 그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저도 그냥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평범하게 살도록 좀 두지를 않았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많이 그런 고통을 당했죠.

[앵커]
조작된 것이라는 방송프로그램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있죠? 뭐라고 답 하십니까, 조작된 것 아니냐, 그게 정말 사실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으면 뭐라고 답을 하십니까?

[인터뷰]
지금은 조금 많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노무현 정권 때 하도 그런 걸 많이 이렇게 홍보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사실 그때 이렇게 떠나가지고 그냥 정말 시골에서 조용히 모든 것에서 떠나서 속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도 이렇게 막 떠들면서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저는 정치적 의도가,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들어서자마자 이 가짜라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도 기자회견을 하고 지상파 3사가 다 연달아 가짜라고 하고 국정원들도 이민을 가라고 하고 그런 속에서 자기네들한테 가짜몰이에 제가 동조를 하지 않았다고 사실 저희 집을 이렇게 노출시켜가지고 제가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엄동설한에 진짜 갓난 아이 둘을 업고 나와서 갈 곳도 없고 막 떨고 있는데 그 고통을 받고 있는 그런 속에서도 사실 노무현 정부는 국정원과 과거사위원회를 만들어놓고 그런데 그 과거사위원회도 제가 생각하면 한심합니다.

원래 이런 정부기관에는 민간인이 들어가는 거는 아니지 않습니까? 과거사위원회에다가 그런 좌파인사들을 데려다놓고요. 그런데 저는 그들의 목적은 김정일이가 지시하지 않았다는 걸 찾기 위한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제가 KAL기 사건에 대해서 진실을 말해서 북한에 타격을 줬기 때문에 북한을 대신해서 저를 그렇게 핍박하고 괴롭히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지금도 밖에 나가면 알아보는 분들이 있습니까?

[인터뷰]
알아보는 분도 계시고 또 모르는 분도 계시고. 이렇게 방송에 많이 나오면 알아봅니다.

[앵커]
그렇겠죠. 자녀들도 모를 수가 없겠군요, 방송에 어머니가 나오고 하니까요.

[인터뷰]
아직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앵커]
자녀들은 잘 모르는군요, 지금.

[인터뷰]
네.

[앵커]
이 방송도 그러면 안 봐야 되겠습니다. 아직 사춘기니까요.

[인터뷰]
아직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데는. 오락 프로그램에만 관심이 있고.

[앵커]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가족들 만나셔서 또 사죄하시고 8억여 원의 인세를 다 전달하시고 그렇게 하셨다고 들었고요. 요즘에도 그 여객기 테러, 얼마 전 IS 테러 그런 걸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하시겠습니까?

[인터뷰]
네, 철렁하고 액체폭약을 이용하는 게 북한이 하던 것하고 수법이 비슷하구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사시는 것이 그리고 대한민국을 위해서 기여하는 길이고.

[인터뷰]
그런데 제가 한마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사실 2003년에 노무현 정권 때 이렇게 집에서 쫓겨나서 지금까지 만 13년 넘게 아직도 힘든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자유민주주의 국가 아닙니까, 대한민국은. 그런데 이런 국가가 개인을 핍박하고 또 역사를 왜곡해서 가짜몰이를 하는 그런 불법 범죄행위를 해 놓고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도 없고 책임도 안 지고 그냥 침묵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명박 정부 때도 그냥 방치를 하고 또 박근혜 정부 들어서서는 남재준 국가정보원 전 원장께서 한다고 그러다가 그냥 나가시고. 그래서 저는 국정원과 해당기관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공식사과를 하고 그 관련자들을 처벌하고 이런 책임지는 행동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국정원이 공식사과를 해야 된다고 요구를 하셨습니다. 오늘 김현희 씨를 만나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였을 겁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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