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별세...끊이지 않는 논란

천경자 화백 별세...끊이지 않는 논란

2015.10.25. 오전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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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근, 미술평론가

[앵커]
지난 주 천경자 화백이 지난 8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주요 뉴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많은 의문을 뒤로 한 채 한국 미술계의 큰별 천경자 화백이 사망했다는 소식, 미술계를 넘어 사회 전체에 큰 이슈가 됐는데요.

오늘 김종근 미술평론가와 함께 이 이야기 자세히 나눠보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천경자 화백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요, 얼마만큼 각별하십니까?

[인터뷰]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제가 압구정 현대백화점 미술관의 관장으로 있을 때 선생님께서 종종 커피를 마시러 오고 또 같이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미술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자주 나누던 그런 사이라고 봐야 되겠죠.

[앵커]
그런 만큼 이런 천 화백의 사망 소식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셨을 것 같아요.

[인터뷰]
오래 전부터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정말 아름다운 상태에서 미국으로 가서 작업을 하고 저렇게 노후를 보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상태에서 부고 소식을 들으니까 저로서는 참 만감이 많이 교차했었습니다.

[앵커]
고 천경자 화백이 쓴 친필편지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인터뷰]
1991년 4월, 선생님께서 사실 저에게 전화를 거셨어요. 자기 작업실에 잠깐 와줄 수 있느냐고. 그래서 그때 선생님께서 작품을, 포스터의 위작을 보여주면서 이게 정말 내 작품이 아닌데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여줬었고 1991년 6월, 아마 그로부터 2개월 후에 선생님이 제 잘 아는 지인한테 이 편지를 보내면서 저는 그때 프랑스로 갔었고 저한테 안부를 전한다는 그런 얘기가 있었죠.

[앵커]
91년이면 미인도 위작 논란이 있었던 바로 그 해인데요. 지금 화면으로 보시고 계신 게 천경자 화백이 쓴 친필 편지입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를 해드리면요.

진작 감사하다는 편지를 드리고 싶었지만 10여 년 동안 편지를 쓰는 일이 드물어서 펜이 잘 잡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저의 불행한 사건이 가끔 식도 부분의 둔통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앞으로 보다 차원이 다른 작품세계를 염원하면서 노력을 하고 작품들을 위해 남은 생명을 불태울 각오입니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91년이면 미인도 위작 논란이 있었을 때고 지금 편지 내용에서도 보시다시피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라고 짐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인터뷰]
사실 선생님께서 절필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당시로써 선생님이 그만큼 그림을 집어치울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했던 부분인데. 그것이 아마 보도가 증폭이 돼서 절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볼 때는 아마 미국에 가셔서도 내가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좋은 작품들을 끝까지 그려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런 열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 봐야 되겠죠.

[앵커]
이 편지가 지금 언론에는 처음 공개가 되는 것이죠?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렇군요. 말씀하셨다시피 굉장히 많은 언론들에는 천경자 화백이 절필을 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편지를 보면 차원이 다른 작품세계를 염원하면서 노력하겠다. 그만큼 앞으로 계속 작품을 계속 하겠다라는 의지를 밝히고 있거든요. 지금 뉴욕에서 지내시면서 또 다른 작품활동을 하신 게 있을까요? 알고 계신 게 있으십니까?

[인터뷰]
그게 저로서도 궁금하고 미스터리한 부분이에요. 선생님께서는 그림은 내 혼의 핏줄이라고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그림에 많은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림, 생태 같은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했다가 1년 뒤에 다시 달라고 해서 찾아올 정도로 그랬었던 분인데 분명히 아마 뉴욕에서도 다른 작품들이 있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을 해요.

[앵커]
91년도 사건을, 미인도 위작 논란인데. 이것이 아직도 결론이 안 나고 있죠?

[인터뷰]
그렇죠. 당시 천경자 선생님께서는 머리 부분에 색칠하는 부분이라든가 혹은 꽃의 형태라든가 나비라든가 그다음에 사인이라든가 연도, 이런 것으로 볼 때 내 작품이 아니라고 했었고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던 현대미술관, 아마 미술관측하고 감정협회 일부 관계자들이 모여서 이건 천경자 선생님의 작품이 맞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지금 화면으로 보시고 신 게 미인도의 그림인데요. 이를 두고서 위작논란이 있었는데 천경자 화백은 내가 내 자식도 못 알아보겠냐며 강하게 반발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인터뷰]
선생님의 작품은 정말 그때는... 제가 그 현장에서 선생님께서 한숨을 쉬고 담배를 피우면서 상당히 분노하고 비통한 표정으로 내가 그린 내 자식을 내가 몰라보겠느냐. 내가 작품을 할 때마다 정말 추운, 얼음이 어는 그런 셋방에서도 그림을 그려가고 그리고 이 작품 자체가 채색화이기 때문에 작품 제작기간도 훨씬 많이 걸리고 한 번에 7, 80번씩 붓질을 해야 하는 것인데.

선생님은 또 그 자료 같은 것을 충분히 보관을 잘 하고 계셨고 선생님의 작품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니까 선생님으로서는 너무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으로 봐요.

[앵커]
조금 전 저희가 보여드린 편지에서조차 그런 고통이 고스란히 얼마만큼 고뇌에 차 있었는지 알 수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천 화백에 대해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지 않기로 했다, 또 이것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인터뷰]
아마 제 생각에는 예술원 회원으로서 오랫동안 수당을 받으면서 계셨는데 그런 부분들이 아마 이혜선, 큰 따님과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결정을 했던 것 같은데 제가 볼 때는 그런 부분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고 해도 천경자 화백이 한국미술사에 남긴 족적이라든가 영향으로 봐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저는 좀 상당히 아쉽게 생각을 해요.

천경자 화백의 예술성이라든가 그런 것에 비춰볼 때 충분히 금관훈장을 추서하는 것이 미술계로 볼 때도 아름다운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앵커]
그렇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일단 천 화백의 사망소식을 공식적으로 전달받지는 못했다라는 입장인 것 같아요.

[인터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 저도 이전부터도 선생님에 대해서 글을 쓰고 제가 개인 책을 내기로 해 놓고도 저작권 문제로 전혀 연락이 안 되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그런데 그런 것이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아마 미술계로서도 그렇고 또 천경자 선생님을 생각하는 많은 분들이 안타까워 했었던 것 같아요.

[앵커]
그렇다 보니까 천 화백의 따님이시죠. 이혜선 씨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최근에 밝히면서 일각에서는 이를 믿지 못하겠다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렇지만 그 따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겠냐라고 반발을 했습니다.

딸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그래도 아무도 직접 장례식을 보지도 못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런 논란이 빚어지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인터뷰]
아마 따님으로서는, 특히 천경자 선생님의 말년을 옆에서 간병했던 입장에서 볼 때는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아요. 또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또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경자 화백은 한 개인의 어머니 이상의 한국 미술에 훌륭한 족적을 남긴 분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설령 정말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함께 슬퍼하고 함께 추모하는 그런 기회를 가졌으면 훨씬 선생님 가시는 길이 살아 생전에는 고통스럽고 그랬지만 좀더 좋았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아요.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 천 화백의 그림을 기증한 서울시립미술관에 많은 시민들의 추모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을 발걸음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고 있습니다.

김종근 미술평론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잘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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