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추적] [6·25 1편] "그들을 고국의 품으로" 전쟁 후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

[팩트추적] [6·25 1편] "그들을 고국의 품으로" 전쟁 후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

2025.06.18. 오후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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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엄지민
안녕하세요. 엄지민입니다. 현상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좇아, 팩트추적! 지금 시작합니다.

【인트로】
1950년 6월 25일, 평온했던 일요일 새벽을 짓밟은 무자비한 포성.

북한군의 기습 남침은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라디오 방송 :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치열했던 전장의 한복판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격전지의 상흔은 이제는 사라졌지만, 용사들의 뇌리에는 그날의 참상이 여전히 또렷합니다.

[김구현 / 백골부대(제18보병연대) 참전용사 : (국군) 1개 대대가 용산역까지 쫙 배치하고 거기다 대기를 하고 있었다고. (북한군이) 불과 한 200~300m 앞에까지 온 다음에 대전차포를 쐈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의 일상에는 쉽사리 평화가 찾아오지 못했고, 땅속에는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의 슬픈 사연이 잠들어 있습니다.

[박기문 / 국방부 유해발굴단 발굴팀장 : 1만 3천여 명의 유해는 발견됐으나 실질적으로 유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253분밖에….]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동족상잔'의 참극이 발발한 지 어느덧 75년.

사라진 전쟁의 흔적 속, 남겨진 그들의 이야기를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스튜디오】
▶엄지민
팩트체커 안동준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 기자,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엄청난 피해를 안겼죠?

▶안동준
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3년여 동안, 한반도는 전쟁의 참화에 휩싸였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사와 부상, 실종, 포로 등을 합해 77만여 명이 피해를 봤고, 북한군은 50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망과 부상, 행방불명 등 남북한 민간인의 인명 피해 규모도 249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아 10만여 명, 이산가족 1,000만여 명 역시 전쟁의 희생양이었습니다.

▶엄지민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가늠하기 힘든 '물적 손실'도 발생했잖아요.

▶안동준
맞습니다. 이제는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포화에 할퀸 75년 전 대한민국은 폐허 그 자체였습니다.

처참했던 현장엔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수많은 사람의 눈물과 헌신이 녹아있고요.

<팩트추적>은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결코, 잊혀선 안 될 이들의 숨은 이야기를 앞으로 2주 동안 집중 조명합니다.

【 VCR - 1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평화롭게 거니는 시민들 사이로 제복을 입은 노신사가 눈에 띕니다.

제18보병연대, 일명 '백골부대' 소속으로 한강 전투에서 싸웠던 김구현 어르신입니다.

[김구현 / 백골부대(제18보병연대) 참전용사 : 옛날에는 이거 다 백사장이었거든. (다 백사장이었어요?) 다 백사장이에요. 다.]

75년 전, 이곳 한강은 혈투가 벌어진 최전선이었습니다.

당시 국군은 38선을 넘은 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로 들이닥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김구현 / 백골부대(제18보병연대) 참전용사 : 저녁때만 되면 건너편에 마포에서 서빙고까지 강가에서 (북한군이) 전부 포사격을 했는데 불이 번쩍번쩍 번쩍…. 우리는 포가 없으니까 쏘지를 못하지. 60mm 박격포도 별로 없었어. 소총하고 기관총 갖고 싸우는 거야.]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강둑에서 적들과 맞선 부대원들의 용맹함은 전적비에 고스란히 새겨졌습니다.

[김구현 / 백골부대(제18보병연대) 참전용사 : 정신력으로 그때 우리 군대의 사기라는 것은 절대 죽지 않고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싸운 거야.]

일주일 동안 이어진 필사의 전투는 북한군이 파괴된 한강 철교를 복구하고 도하에 성공한 뒤 막을 내렸습니다.

전쟁 초기 적군의 압도적 전력에 밀려 한강 사수에는 실패했지만, 아군이 전열을 정비할 소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김유석 / 한성대학교 국방과학대학원 안보정책학과 교수 : 한강 남쪽에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이런 의지의 표현 그런 것들이 우리 국군이 계속해서 북한군을 상대로 싸울 수 있었던 어떤 힘이 된 원천이라고….]

수도 서울에서 펼쳐진 사투의 현장은 한강이 전부는 아닙니다.

서울 연희동 주택가 뒷산에 자리 잡은 104고지 전적비.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던 국군 해병대는 북한군과 백병전 끝에 이곳을 되찾았습니다.

[김유석 / 한성대학교 국방과학대학원 안보정책학과 교수 : 우리 국군 해병 1대대가 9월 21일 탈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발판으로 안산, 그다음에 연세대학교 뒤에 있는 연희고지, 그다음에 홍익대 뒤쪽에 있는 105고지….]

서울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남산 역시 전쟁 당시엔 격전지였습니다.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군사적 요충지인 탓에 사활을 건 전투가 계속됐습니다.

[남보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서울의 눈이라고 하는 이곳 어디일까요? 바로 남산이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고 N타워가 있지만, 실제 이곳이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우리 국군 수도사령부와 헌병대가 목숨을 걸고 지켜냈습니다.]

【스튜디오】
▶엄지민
이처럼 서울 곳곳에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다는 사실은 잘 몰랐어요.

▶안동준
네, 서울에는 6‧25 전쟁과 관련된 전적비만 30여 개 세워져 있는데요.

앞서 보신 백골부대 전적비는 한강공원 한복판에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104고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있습니다.

[이장호 / 백골전우회 고문 : 우리나라의 전적비는 전부 다 숨어있어요. 우리나라도 이런 거를 표면화해서 홍보해야 하겠다…. 그래야 국민이 이걸 보고 한 번 더 느끼고 우리도 마음 자세도 갖추고….]

▶엄지민
더 많은 사람이 참전용사들의 헌신에 감사할 수 있도록, 당국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 보이네요.

▶안동준
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는 서울 이외 다른 곳에도 남아있습니다.

【 VCR - 2 】
서울과 남부 지역을 잇는 주요 길목에 자리한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1950년 7월 5일, 한강 방어선을 뚫고 남하하던 북한군을 여기서 멈춰 세운 건 미 육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었습니다.

[남보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미군이 처음으로 외국에서 치른 지상전입니다. 특히, 이 스미스 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벌였던 이 전투로 인해서 북한군은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일시적으로 부대를 멈추게 되죠.]

그날의 치열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기념관.

참전했던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원' 명판 가운데 한국인 이름이 눈에 띕니다.

스미스 특임대에 파견돼 교육받던 윤승국 당시 대위의 자취입니다.

[장은심 / 고 윤승국 소장 유족 : 그때는 미군 부대원으로서 나와서 같이 전쟁한 거예요. 그게 그리고 영어로 하면 '딜레이 액션'이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그 이상 못 내려가게 막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투에 참여하게 된 거죠.]

전쟁이 터지자 미군을 따라 유엔군의 첫 전투에 뛰어든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윤 대위.

이후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뒤 지난 2021년 별세했지만, 생사를 넘나들었던 순간의 기억은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장은심 / 고 윤승국 소장 유족 : (북한군의 공세에) 후퇴해야 할 그런 입장이 됐을 때 자동차 제일 앞에 타서 말이에요. 민간인한테 한국말을 하니까 물어보고 그러면서 길을 안내해서 (부대원) 200명을 안전지대로 인도했대요. 그렇게 해서 무사히….]

또 다른 참전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원도 화천군 산양리.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지상군을 보낸 에티오피아의 황실근위대, '강뉴부대'가 주둔했던 곳입니다.

이역만리로 파병된 최정예 부대는 이 일대에서 253차례 격전을 치렀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김유석 / 한성대학교 국방과학대학원 안보정책학과 교수 : 왕실 근위군 출신이라는 이런 자부심, 긍지를 가지고 전투에 임하면서 단결력이라든가 용맹성, 이런 것들은 어느 부대보다 가장 앞섰다….]

춘천에 세워진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에서 만난 참전용사 후손 라헬 솔로몬 씨.

강뉴부대 일원이었던 케베데 아바테 씨의 손녀입니다.

[라헬 솔로몬 /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 안녕하세요. 저는 이름은 라헬 솔로몬이라고 하고요. 한국 이름은 하은희입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에서 왔고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6·25 전쟁 때 참전하셨고요.]

그러나 낯선 땅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용사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1974년 군부 쿠데타로 에티오피아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졸지에 배신자로 낙인찍혔던 겁니다.

1991년 공산 독재 정권은 무너졌지만, 핍박의 시간이 안긴 상처는 컸습니다.

[라헬 솔로몬 /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 군인이셨기 때문에 협박을 받으셨고 숨어야 했고, 아니면 다 잡혀들어가서 고문받거나 그런 경우도 있으셨고…. 모든 참전용사분이 떳떳하게 내가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리면 안 되기 때문에 다 흩어지게 되었어요.]

고초를 겪은 영웅들의 헌신에 대한 보답은, 늦게나마 그의 후손들에게 닿고 있습니다.

화천군의 장학 사업을 통해 현지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라헬 씨는 한국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국제 변호사를 꿈꾸며 할아버지가 지킨 나라에서 경력을 쌓고 있습니다.

[라헬 솔로몬 /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 (제가) 한국말을 하다 보니까 통역할 수 있는 통·번역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주어졌는데, 외교관분들도 만나고 국제 변호사인 분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런 멋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튜디오】
▶엄지민
75년 전 할아버지가 맺은 한국과의 인연이 손녀로 이어지고 있는 거네요.

▶안동준
네, 보신 것처럼 강원도 화천군은 지난 2009년부터 화천 지역에서 싸웠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후손들을 찾아 교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왔던 영웅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미래세대와 교류하며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겁니다.

[라헬 솔로몬 /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 : 이런 장학 사업을 하시면 에티오피아 측에서도 그런 일들로 인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도 되게 많아졌고 저희 역사가 안 잊히잖아요.]

▶엄지민
먼 이국땅에서 젊음을 바친 용사들에게 감사의 뜻이 계속 전해졌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안 기자, 유엔군 외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또 있다고요?

▶안동준
네,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오랜 기간 잊힌 영웅들이 있었습니다.

【 VCR - 3 】
벚꽃이 활짝 핀 서울 현충원.

하얗게 머리가 센 참전용사들이 전적 위령비 앞에 모였습니다.

6‧25 전쟁 당시, 계급도 군번도 없이 북한군과 맞섰던 유격부대원들입니다.

[이원술 / 유격군전우회 사무총장 : 1·4 후퇴 당시에 우리 국군이 유엔군과 밀려가는 과정에서 북한 지역에 살고 계시는 15세 전후의 청년들이 이거 안 되겠다. 공산주의에 국가를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의병들이 일어섰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추모 행사에 참석한 주은상 어르신도 황해도 은율군에서 구월산 유격대원으로 활약했습니다.

15살 어린 나이….

군에 징집되지 않은 마을 주민들과 의용대를 조직해, 변변한 무기도 없이 가족과 마을을 지켰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이 산속에 숨어들어 마을을 약탈했기 때문입니다.

[주은상 / 구월산 유격대 참전용사 : (북한군이) 산에서 식량 공급이라든가 생필품 이거를 제대로 공급을 못 받으니까, 밤에 습격 내려온다고. 내려와서 우리 양민들을 학살하고 또 재산들을 뺏어가고 그러니까. 각 지역의 마을별로 자체적인 치안대가 조성됐다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온 뒤로는 수탈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에 마을 단위로 결성됐던 의용대들은 하나의 부대로 힘을 합쳤고, 비로소 구월산 유격대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미군이 각지의 유격부대를 통합·운영한 이후에는 제8240부대에 배속됐습니다.

[주은상 / 구월산 유격대 참전용사 : 몽둥이 가지고 횃불 들고 다니면서 일을 했지만, 그래도 저놈들한테는 쉽사리 우리 지역을 그냥 밀고 들어올 수 없도록 그런 방패막이 되어줬다고 하는 자부심을 갖고 있고….]

북한 후방 지역에서 정보수집과 보급로 파괴 등 위험을 무릅쓴 작전들을 수행했지만, 비정규군이었던 탓에 그 공은 잊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14년 예우받을 길이 열렸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소속 남보람 당시 소령이 미 특수전사령부에 보관돼 있던 8240부대원들의 명단을 일부 확보한 겁니다.

하지만 그 뒤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불완전한 기록으로 생존자와 유족을 확인하는 게 어려워, 7년이 더 지나서야 공로금을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남보람 /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선임연구원 : 10년 전에 그 명단으로 인해서 특수 임무 수행자 보상 법안이 좀 더 수월하게 통과가 됐고, 그 명단에 있던 분 중 두 분은 사후에 훈장을 추서 받기도 했습니다.]

현재까지 공적을 인정받은 유격대원과 유족은 3천 8백여 명.

유격부대원이 최대 2만 3천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잊힌 영웅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엄지민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비정규군인 유격대원까지, 6·25 전쟁 참전용사들의 남겨진 이야기를 되짚어봤는데요.

끝내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많죠?

▶안동준
네, 6·25 전쟁 중 실종되거나 포로로 끌려간 국군과 유엔군은 4만 2천여 명에 이르는데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투를 벌였던 현장에 아직 묻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엄지민
유족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이분들의 유해를 수습해 모셔야겠어요.

▶안동준
네, 6‧25 전쟁 50주년이던 지난 2000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사자 유해 발굴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VCR - 4 】
등산로조차 없는 가파른 산을 오르는 국군 장병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시간여를 걸어 도착한 곳은 강원도 홍천군 금물산의 유해 발굴 현장입니다.

지난 1951년 2월 국군과 중공군의 목숨 건 고지전이 벌어졌던 장소인 만큼, 참전용사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구호 외치고 시작하겠습니다. 구호 준비! 그들을! (고국의 품으로!)]

유해를 찾기 위해서는 지표면에서 최대 80cm까지 땅을 파야 합니다.

고된 작업이지만, 장병들의 마음가짐은 남다릅니다.

[이재빈 / 상병 : 6·25 전사자분들을 위해서 올라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별로 힘든 것 같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팔뼈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됐습니다.

이제부턴 6‧25 전쟁 당시 국군의 유해인지,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박기문 / 국방부 유해발굴단 발굴팀장 : 감식관이 유해에 대한 (1차) 감식을 실시하고, 이후 중앙감식소로 봉송하게 됩니다. 그래서 중앙감식소에서 또 2차 감식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동안 격전지 곳곳에서 발굴한 유해는 만 3천여 구.

하지만 신원이 파악돼 가족 품으로 돌아간 건 253구뿐입니다.

[박기문 / 국방부 유해발굴단 발굴팀장 : 국군 전사자라고 모셔 왔는데 DNA를 검출했으나 이거에 비교해 볼 8촌 이내의 DNA가 없기 때문에…. 유가족분들의 DNA가 필요합니다. 시료 채취가 가장 중요하고 국민의 관심이 많이 필요합니다.]

75년 전 각국 참전용사들이 입었던 군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패션쇼.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훈 문화’ 확산을 위해 마련됐습니다.

[김수현 / 의정부시 청소년수련관 보훈외교단 단장 : 보훈이라는 요소를 차세대에게 조금 더 매력적으로 어필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패션이라는 예술 요소를 융합해서 전달하고자….]

단순히 옷을 선보이는 걸 넘어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습니다.

[김진일 / 패션업체 대표, 참전용사 후손 : 그분들을 기리고 기억하는 것만큼 그리고 또 그분들을 위해서 저희가 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또 다른 어떤 움직임을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팩트추적>이 만난 참전용사와 가족들의 소망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끼는 평화와 번영….

이 모든 게 누군가의 목숨과 희생의 토대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잊지 않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주은상 / 구월산 유격대 참전용사 : 내가 바라는 데는 우리 6·25 전쟁을 통해서 우리 선대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고생들 했는지…. 평생을 아프게 지나온 그 역사를 후손들이 좀 알아야 한다 이런 얘기지.]

【스튜디오】
▶엄지민
후손들이 역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참전용사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네요.

▶안동준
전쟁 발발 이후 75년이나 지난 만큼 살아계신 분이 많지 않고, 생존한 분들 또한 모두 고령입니다.

이분들을 충분히 예우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보훈 정책 전반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엄지민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할까요?

▶안동준
우선 생계 유지 등 현실적인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전용사들은 정부의 '명예 수당' 외에 주민등록지 지자체에서 별도의 '참전 수당'을 받는데요.

월평균 지급액은 각 지자체 여건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형평성과 상대적 박탈감 논란, 보훈 정책 불균형 심화 우려 등이 불거질 수 있는 겁니다.

고령인 상당수 참전용사에게 참전 수당은 중요한 수입원인 만큼,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엄지민
보훈병원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죠?

▶안동준
참전용사 등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을 위한 보훈병원은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등 전국 통틀어 6곳에 불과합니다.

물론, 일부 지역은 보훈 위탁 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의료 수요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엄지민
시설 노후화와 병상 부족 문제도 숙제로 꼽힌다던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세심한 지원이 뒤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기자, 수고했습니다.

▶엄지민
오늘 팩트추적은 여기까집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도 현상 이면에 숨겨진 사실을 좇아, 시청자 여러분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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