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2021.03.21.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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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금 매도 이어지며 개인 투자자 '분노'
"연기금 포트폴리오 조정 과정…매도세 이어질 듯"
연기금의 목적은?…"안정적인 기금 운용"
"운용 수익 내는 상황에선 비판 어려워"
[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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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는 주식 투자자에겐 참 어려운 한 해였습니다.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터지면서, 주식 시장이 급변했거든요. 지난해 3월 19일에는 코스피 종가가 1,457.64까지 떨어졌죠. 코스피가 1,500 아래로 추락한 건 2009년 7월 23일 이후 10년 8개월 만이었습니다.

이후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국에서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하 등의 수단으로 시장에 유동성(=돈)을 풀기 시작했거든요. 여기에 백신 개발로 코로나19 극복이 눈앞에 다가오자, 주식 시장에 활기가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월 7일, 코스피가 3천 선을 넘어선 3,031.68로 거래를 마쳤습니다. 투자자들은 풍악을 울렸습니다. 우리나라 증권 시장이 문을 연 뒤 처음으로 3천 선을 넘어선 것이었거든요. 지난 1월 25일에는 무려 3,200선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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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코스피가 다시 박스권에 갇히고 말았거든요. 박스에 갇혀서 떨어지지도, 오르지도 않는 지지부진한 장세가 이어지자, 개인투자자들의 불만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연일 매도를 이어나가는 연기금으로 향하는 분위기입니다.


◆ 연일 국내 주식 내다 파는 연기금

연기금이 얼마나 많은 주식을 팔았기에 요즘 말로 '욕받이'가 된 걸까요?

투자자는 크게 세 분류로 나뉩니다. 우리와 같은 개인 투자자와 외국인 투자자, 기관 투자자지요. 연기금은 이 가운데 기관 투자자의 하나로 분류됩니다. 기관 투자자에는 금융투자업체와 보험사, 사모펀드 등도 포함되는데요, 전문가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개인 투자자보다 시장을 전문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정보도 더 많다는 뜻이죠.

이 기관 투자자는 최근 들어 시장에서 매도 우위(사는 것보다 파는 게 많은)를 보여왔는데요, 여기에선 연기금의 투자 추이만 살펴보겠습니다.

연기금이 매도를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 24일부터입니다. 이후 무려 51거래일 동안이나 순매도를 이어가며 역대 최장 순매도 기록을 다시 썼죠. 이 기록은 지난 주에 깨졌습니다. 15일과 16일에 순매수에 나선 건데요, 하지만 이어진 3거래일 동안 다시 순매도가 반복됐습니다. 아직 추세 전환을 말하긴 일러 보이는 시점입니다.

[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이렇게 파는 배경은 연기금의 투자 전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연기금은 투자 비중을 정해놓고 주가가 오르면 비중이 커진 만큼 팔고, 주가가 내려가면 비중이 줄어든 만큼 사는 기계적인 전략을 사용하거든요. 올해 들어 주가가 빠르게 오르다 보니 매도 물량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위험 분산을 위해 해외 투자를 늘리는 추세여서 매도세가 더 눈에 띄는 상황입니다.

노동길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최근 코스피 오름세를 고려하면 연기금의 국내 주식 보유 물량이 올해 목표치를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며 "상반기 중에는 순매도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짚었습니다.


사실 연기금의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이 너무 크다는 문제점은 오랫동안 제기돼 왔습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연기금 고갈이 현실화하면 결국 보유 자산을 매각할 수밖에 없다"며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이 크다면 매각에 따른 시장 충격이 훨씬 커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연기금이 정부의 입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도 문제"라며 "연기금이 보유한 기업 지분을 통해 정부 정책을 집행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자금, 연기금

연기금의 매도세를 짚어보려면 연기금이 대체 뭘 하는 집단인지 살펴봐야겠죠. 연기금은 연금과 기금을 합한 말입니다. 연금은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제도로, 대표적인 게 바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국민연금이죠. 기금은 공공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가 예산과는 별도로 운용하는 자금입니다.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자금이라고 보시면 무방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국민연금기금과 공무원연금기금, 우체국보험기금, 사학연금기금, 군인연금기금 등이 대표적입니다. 4대 연기금이라고 하면 보통 앞에 네 곳을 말하는데요, 역시 범위가 넓은 국민연금이 가장 몸집이 큽니다.

대장 격인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설명해보죠. 국민연금공단은 국민연금법 제24조에 따라 설립된 기관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위탁을 받아 연금 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죠.


기관의 설립목적도 국민연금법에 쓰여있습니다. 제25조를 보면 11개 업무가 나와 있는데요, 이 업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국민연금을 지급하는 것, 두 번째는 수취액을 굴려서 더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개인 투자자들이 연기금에 분노하는 것은 이 두 번째 업무와 연관돼 있습니다. 연기금은 기금을 증식하기 위해 각종 투자에 나서고 있거든요.

◆ 주식·채권으로 몸집 불리는 연기금

국민연금공단의 조직도를 볼까요? 이사장 밑에 이사 네 명이 있네요. 각각 이사들은 여러 실과 본부 등의 조직을 담당하는데, 유독 기금이사만은 기금운용본부만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금운용본부의 규모가 크고, 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기금운용본부는 다시 여러 부문으로 나뉘는데요, 아래 조직도를 보면 국민연금공단이 어떻게 기금을 불리고 있는지 대략적인 개요가 보입니다. 주식과 채권, 사모 벤처, 부동산, 인프라라는 단어를 확인할 수 있죠.

국민연금은 매월 말에 기금을 어떻게 운용하고 있는지 공개하는데요, 포트폴리오를 보면 주식이 44.3%, 채권이 44.8%입니다. 여러 영역이 있지만 주로 이 두 가지를 통해 수익을 창출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 연기금은 목적은?…"안정적인 기금 운용"

그럼 투자 측면에서 연기금이 해야 할 가장 큰 목표는 무엇일까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높은 수익을 올려 연금 고갈 시기를 늦추고 안정적으로 기금을 운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연기금은 주가가 내려갔을 때는 주식을 매입하고, 주가가 오르면 차익 실현을 위해 주식을 매도하게 됩니다.

연기금이 가장 큰 비판을 받았던 시점은 지난 2018년이었습니다. 당시 연간 수익률이 -0.92%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냈거든요. 무려 6조 원에 달하는 기금이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이후로는 주식 시장 활황과 맞물려 준수한 수익률을 기록하는 중이죠.


물론 개인 투자자 입장에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국내 주식 투자 규모는 176조 원이 조금 넘습니다. 같은 시점의 코스피 시가 총액은 2천조 원에 조금 못 미쳤습니다. 연기금 가운데 국민연금 한 곳의 투자 금액만으로도 코스피 시가 총액의 거의 10%를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주식 시장의 엄청난 큰 손인 셈이죠. 실제로 어지간한 국내 대기업의 주요 주주에는 국민연금의 이름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들어가 있는 편입니다.

◆ "수익 낸다면 비판하긴 어렵다"

이는 곧 연기금이 코스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죠. 기계적 전략에 따라 매도에 나서는 것이 곱게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점을 과거로 조금 돌려볼까요?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주가가 폭락했을 당시인 3월과 4월을 보겠습니다. 코스피는 2,000선마저 내주면서 부진했는데요, 연기금은 3~4월 42거래일 가운데 32거래일에 순매수를 기록했습니다. 순매수 금액은 4조 5천억 원이 넘었고요. 의도와 관계없이 기계적인 투자 전략이 폭락 장에서는 지수를 방어하는 하나의 방패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연기금의 역할과 목적을 고려하면 연기금이 매도를 이어간다고(=주가 부양에 나서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중국집에 가서 파스타는 팔지 않고 짜장면과 짬뽕을 판다고 항의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불합리한 비판이라는 거죠.

성태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연기금이 수익을 내지 못한다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며 "지금처럼 이익을 실현하면서 포트폴리오를 바꾸는 것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 "권력·여론 눈치에서 벗어나야"

어찌 됐든 연기금에 대한 비판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연기금의 매도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여러 건 올라와 있더군요.

[와이파일] '박스피'의 주범?…'욕받이' 된 연기금


이렇게 큰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건 국민의 신뢰에 상처를 여러 번 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부 당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국면에서 찬성을 결정했던 사례일 겁니다. 당시 국민연금공단은 이 사안으로 수천억 원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고 하죠. 알고 했다면 도덕적 해이이고, 모르고 했다면 기금 운용의 무능인 셈입니다.

권력의 눈치 못지않게 여론의 눈치를 지나치게 본다는 점도 장기적인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최근 들어 이른바 '동학 개미'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더더욱 이런 경향이 짙어졌죠. 대표적인 것이 주식 양도세 부과 논란과 공매도 논란일 겁니다. 주식 양도세 부과 논란 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개인 투자자의 의욕을 꺾어선 안 된다며 반대 의사를 밝혔고요, 공매도 역시 정세균 국무총리부터 개별 국회의원까지 가세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정책적이라기보단 정치적인 결정에 가까운 방향으로 귀결됐고요.

증권업계 관계자는 "연기금의 안정적인 운용을 위해선 여론과 권력의 눈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며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정황이 많다"고 아쉬워 했습니다.

물론 정치권은 여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정치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가치를 배분하는 질서를 만드는 일'이죠. 따라서 여론이 올바른 정책적 방향을 지지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 역시 정치의 역할입니다. 연기금 역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이번엔 정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조태현[chot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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