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니 시리즈 77] "잊지 말고 도와주세요..." 고성 화재 자원봉사 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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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7. 오전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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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니 시리즈 77] "잊지 말고 도와주세요..." 고성 화재 자원봉사 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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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남은 재의 퀴퀴함과 라일락 꽃향기가 함께 뒤섞여 괴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 곳곳은 상흔으로 가득했다. 이번 해보니 시리즈는 지난 4일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긴 강원도 고성 산불 현장에서 피해 복구에 힘쓰는 자원봉사자들과 보낸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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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택배들"

자원봉사를 위해 행정안전부와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가 운영하는 '1365자원봉사센터'를 통해 활동을 신청했다. 피해가 막심해 현재 일손이 가장 부족한 고성군에서 구호 물품 접수와 배분 업무를 담당하기로 한 뒤, 23일 새벽 고성군으로 향했다.

전국 각지에서 배송되는 구호 물품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은 경동대학교 체육관. 다양한 물품은 이곳에서 종류별로 분류된 후 복지회관이나 또 다른 창고로 이동됐다. 이재민에게 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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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22사단 군 장병 60명, 일반 자원봉사자 10여명을 비롯해 한 종교단체 소속 종교인 15명 등이 활동에 함께했다.

어떤 물품이 택배 상자에 담겨 이곳으로 언제, 얼마나 배송될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멀리서 택배 트럭의 엔진 소리가 들리면 곧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택배 상자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물품부터 상상할 수 없는 물품까지 수백종류의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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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불란, 신속정확"

분류는 일사불란하고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한 박스 안에 다양한 물품이 담겨 오기 때문에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류를 세분화했다. 의류는 상하의와 속옷 구분은 물론이고 성별, 계절, 용도, 연령대에 따라 분류가 이루어졌다.

구호물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생아용품도 젖병과 젖꼭지는 함께 넣고 기저귀는 따로 분류하는 식이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물품을 정확하게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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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완전히 분류가 된 상태로 오면 참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안되죠" 10일 이상 생계를 뒤로 한 채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한 여성 봉사자는 "여기가 그런 곳이에요. 다들 정신 없으니까 알아서 잘해야죠"라며 분류에 집중했다.

생리대, 텀블러, 아동 장난감, 문구류, 샴푸, 바디워시, 빨래비누, 조미료, 설탕, 행주, 수세미, 물티슈, 고추장, 즙, 빵, 돗자리, 핫팩, 참기름, 통조림, 김, 라면, 고무장갑, 우산, 세재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품이 모여 있는 듯한 이곳에서 분류는 가장 큰 작업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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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마음이지만…"

분류 작업을 하며 구호 물품을 살펴보던 중 마음이 아픈 경우도 없지 않았다. 찢어진 의류나 검게 타버린 프라이팬, 도저히 쓸 수 없을 정도의 물품이나 구호품과는 거리가 먼 물건들도 눈에 띄었다. 자칫 구호품을 보낸 성의에 누가 될까, 조심스럽다며 입을 뗀 한 자원봉사자는 이런 물건을 보면 "일손이 두배로 드는 건 차치하고 마음이 아프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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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복구특별대책본부 내 한 관계자도 "첫 일주일간은 하루에 1t 트럭으로 10대씩 의류가 쏟아졌는데, 세탁도 안 된 헌 옷과 입을 수 없는 옷들이 많아 분류 및 처리 작업에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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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안타깝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눈물이 자꾸만 나올 것 같아요'
'이웃을 생각하며 몇 자 적었습니다. 건강 유의하고 모두 힘내세요'
'작지만 피해가 복구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내드립니다'

삐뚤빼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었을 쪽지부터 위로와 응원의 내용을 담은 편지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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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공무원에 합격한 후 여유 시간이 생겨 10일째 현장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 모 씨는 "편지와 구호 물품을 보며 전 국민이 힘이 한곳에 모이는 것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현장의 다른 자원봉사자들 역시 구호 물품과 시민들의 편지를 보고 울고 웃으며 힘을 얻고 있었다.

이번 화재로 집이 전소됐음에도 15일간 쉬지 않고 현장에 나와 자원봉사를 하는 임향진(46) 씨는 "우리를 위해 국민들이 봉사하러 오셨는데 함께 돕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임 씨는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동생의 집을 자원봉사자들에게 무료로 임대하고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출발해 14일째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60대 자원봉사자 이 모 씨도 "여기서 봉사하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이재민의 고통에 비할 수 없다"고 말하며 힘이 닿을 때까지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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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거로 부끄럽게"

현장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9명의 자원봉사자는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현장에 더 빨리 오지 못해 죄송하고, 더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고 민망하다며 기사 내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많았다.

하루 동안 '삼촌'으로 불리며 너무나 많은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권해 받았지만, 감히 쉬이 건네받을 수 없었다. 생계를 뒤로하고 달려와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온정을 베푸는 이들 진심 앞에, 고작 몇 시간 동안 흘린 땀방울은 한없이 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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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이제 시작"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집계에 따르면 동해안 산불 피해지역을 다녀간 자원봉사 누적 인원은 총 12,068명(24일 기준)이다. 누구보다 애쓰는 군인이나 등록 없이 자체적으로 손길을 내민 이들은 집계되지 않은 수치다.

화재가 발생한 지 3주가 넘었지만, 산불 피해 가옥이나 시설물에 대한 본격적인 복구 활동은 걸음마조차 떼지 못했다. 현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피해조사를 비롯해 주민 동의가 필요하지만, 피해조사 역시 이제 겨우 1차 단계만 마무리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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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 물품 역시 꾸준히 접수되고 있지만, 고령층에게 필요한 물건은 부족한 편이다. 성인용 기저귀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고가인 의치, 보청기, 휠체어, 보행 보조기 등에 대한 요청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피해복구특별대책본부 내 관계자는 "속초에서는 한 안경원이 이재민 중 노령인 분들에게 무료 돋보기를 지원해주기도 했지만, 보청기나 휠체어 등은 아직 나서는 곳이 없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산불은 너무나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겼지만, 벌어진 상처에 우리의 마음과 손길이 모인다면 회복 시간은 조금이나마 앞당겨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잊지 않고 아픔을 함께 나눈다면, 이들은 삶을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YTN PLUS 김성현 기자 (jamkim@ytn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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