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앤피플] “사람이 먼저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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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2. 오후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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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앤피플] “사람이 먼저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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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생 17좌’를 오르기로 다짐했습니다.”

얼마 전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이 벌인 세기의 대결이 화제를 모았다. 비록 승부는 4대1로 판가름 났지만, 인간의 능력과 끈기를 보여준 치열한 대국에 전 세계가 주목했다.

산악인 엄홍길(56) 대장도 목숨을 담보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의 8천 미터 고봉 16좌를 오른 기록의 사나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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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엄 대장의 손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따뜻하고 강한 에너지를 지녔다.

미래의 가장 소중한 존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엄 대장은 “밧줄에 목숨을 맡긴 채 도전을 감행했던 지난날들은 자연 앞에서 인간은 미물임과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줬다”고 한다.

엄 대장은 후배인 고(故)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원정대'를 꾸려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일을 회상하며 “먼저 죽은 동료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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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대장은 요즘 네팔 청소년들을 위해 다시 산에 오른다.

그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던 등반 과정에서 살아서 산을 내려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네팔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겠다”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약속은 지난 2008년 네팔 오지 청소년 교육사업을 위한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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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네팔 사가르마타 구에 1차 팡보체 학교 준공을 시작으로, 지난달에는 네팔 남서부 인도 국경 인근에 11차 건지 학교가 들어섰다.

그는 “등정에 성공한 16좌 수 만큼 네팔에 학교를 짓겠다는 뜻으로 ‘인생17좌’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며 네팔 기숙사와 보건진료소 의료진 숙소 설립 등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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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엄홍길 대장과 일문일답.

Q. 22년 동안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성공 하셨는데, 이 기록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죽음을 각오했던 도전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다. 사실 기적보다 더 한 기적이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인데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해냈다. 히말라야에 총 38번 올랐는데 한 번 오를 때 마다 인생을 송두리째 그곳에 맡겨야 하는 묘한 기분은 말로 표현이 다 안 된다. 한 마디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고, 없는 길을 새로 만들어 올라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산이 휴식처이자 아름다운 자연이지만, 내게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히말라야를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여러 번 죽었고 자연 속에서 매번 새로운 생명을 받아 다시 태어나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Q. 최근 영화 ‘히말라야’가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관람 소감은?

영화를 여섯 차례 정도 봤다. 영화 중에 장례식장 장면이나 후배 박무택을 발견한 장면에서 정말 눈물을 많이 흘렸다.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혼자 있으면 문득 문득 생각난다. 무택은 등반 성공 후 하산하다 사고를 당했다. 이후 1년 만에 시신을 수습하고자 히말라야에 올랐고 수많은 좌절과 고난 끝에 시신을 운구했다.

영화 제의가 들어온 초반에는 제작을 반대를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점차 각박해진다는 생각이 들어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협동심, 공동체 정신이 사라져 가는 사회분위기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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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휴먼원정대’ ‘휴먼재단’ ‘휴먼스쿨’ 등 ‘휴먼’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시는 듯하다.

‘휴먼’은 말 그대로 ‘사람을 향하자’는 취지에서 붙인 단어다. 히말라야에 도전하면서 역경이 참 많았다.

20번 완등과 18번의 실패를 통해 동료 6명, 현지 셰르파 4명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이렇게 내적으로 힘든 과정을 여러 번 거치니 어느 순간 내가 간절히 원하던 산 정상만이 아닌 '사람'이, 그리고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한 거다. 정말 인생의 최우선 가치는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다.


Q. 구호 사업 중에서도 특별히 ‘학교 설립’을 선택한 이유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장기적인 희망을 주기 위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 우리나라도 전쟁 이후 폐허가 됐지만 초고속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교육이다.

특히 세계 최빈국이라 할 수 있는 네팔에서 만난 아이들의 맑은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옛날부터 가난의 대물림은 최악이라고 생각해 왔기에 이들이 더 가슴에 남았던 것 같다.

물질적인 지원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일시적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역시 ‘교육’이었고 학교 시설을 짓는 것이 남은 내 인생의 숙원사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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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학교 한 채 건립에 드는 비용과 기간은 어느 정도인가?

한 학교 당 약 3~5억 정도 들고, 준공 기간은 1년 여 다. 공사 기간이 길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우리는 일반적인 장소가 아닌 오지나 변두리에 짓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NGO단체들도 마다하는 곳에 학교를 짓고 있는데, 반짝 홍보효과 등을 바라고 하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건축비 이상으로 자재 수송비가 많이 든다. 어느 지역은 헬리콥터로 건축 자재를 옮겨야 할 정도로 깊은 오지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산 진입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공사가 지연된다. 하지만 눈물겨운 것은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험한 곳에 학교를 지어도 교육에 목마른 어린 아이들이 상상 이상으로 몰린다는 것이다.


Q.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는가?

기업이나 개인 등 감사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스님들이 꽤 많다는 게 특이하다. 스님들은 특히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 탄생지인 네팔 남부의 룸비니에 관심이 많아 연락도 자주 하고 후원도 하시는 것 같다.


Q. 휴먼스쿨 건립으로 어떤 희망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네팔 오지는 주변에 제대로 된 건물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 대부분이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에게 학교는 지상낙원이자 마을에서 가장 좋은 시설로 인식 됐다고 한다.

특히 교내 놀이시설까지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방과 후 집에 그냥 돌아가기 싫어한다고 들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면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람 있다고 생각한다. 네팔 아이들이 교육에 행복을 느끼고, 이를 바탕으로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보다 밝은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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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죽음을 각오한 극한 도전이 히말라야 16좌 등반을 이끌었다고 하셨는데, 만약 자녀들이 산을 좋아한다면 산악인의 길을 허락하겠는가?

물론이다.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독려해 주고 싶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진정 가슴 뛰는 일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추천할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직업은 목숨을 내놓는 일을 기본으로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게 다음 생에 더 편하고 풍족한 삶을 준다고 해도 산악인이란 직업을 택할 것이다. 몸을 움직여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길이 ‘산악인의 길’이며 생명과 자연의 소중한 정신이 그 안에 있다고 믿는다.


Q. ‘휴먼재단’은 국내에서도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전국 100여 명의 남녀 대학생들을 선발해 휴전 155마일을 행군하는 ‘DMZ평화통일 대장정’, ‘청소년 희망원정대’, 장애인과 소외계층 지원 행사, ‘청소년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 개최’, 산악인 유가족 지원, 네팔 셰르파 유가족 자녀를 지원하는 ‘히말라야 휴먼 장학금’ 지원 등 많은 일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유가족들을 챙기는 일은 살아남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참 뜻을 헤아리고 마음을 모으는 분들이 많으니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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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자승최강(自勝最强)’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물론 요즘 수저계급론, 헬 조선 등의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는 걸 잘 안다. 노력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 좀 하고, 취업 좀 늦어지면 어떤가. 무엇보다 오뚝이 정신이 중요하다.

청년실업률에 대해서는 요즘 청년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의 기준치가 올라가 있는 현실인데 오히려 중소기업들은 인력난에 허덕이는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조금만 힘들어도 못 이기는 아이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이들은 찬바람이 불면 거친 사회의 세파에 제대로 적응하기 어렵다.


Q. 왜 산에 오르는가?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이기 때문이다. 산이 있기에 내가 있다. 또한 산 없는 나의 모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젊은 날에 나는 산을 그저 도전 대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산은 삶의 스승이자 존경하는 신이다. 인간의 영역을 철저히 벗어나는 것이다.

뚜렷한 목표를 세워 그것을 성취하고 산의 정상에 오른 순간순간마다 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는 내가 살아있는 이유, 쉽게 비유하면 숨 쉬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YTN PLUS] 취재 공영주 / 사진 정원호, 엄홍길휴먼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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