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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2년 8월 22일 (월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 김재원 역사선생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슬라생] "난 니가 동림이라고 생각해" 영화 <헌트> 속 '동림', 역사 속 실재는?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이자, 정우성과 23년만에 호흡을 맞춘 영화 <헌트>가 개봉 13일째, 3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헌트>는 1983년을 배경으로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루는데, 특히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 영화를 더욱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겠죠? 김재원 역사선생님,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김재원 역사선생님(이하 김재원): 네, 안녕하십니까.
◇ 이현웅: 오랜만에 연결했습니다. 영화 <헌트> 보셨나요? 총평을 하자면?
◆ 김재원: 네, 저는 봤습니다.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 이현웅: 아무래도 역사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것도 있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셨을 것 같은데, 영화 오프닝에서 역사와 허구의 조합이라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만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만으로도 현실감과 무게감이 상당합니다. 역사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김재원: 그런데 실제 역사를 영화로 다룬 영화들이 다 이렇게 힘을 가진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헌트>를 보면서 역사를 굉장히 존중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이 영화를 보면서는 역사적 사실을 무게감 있게 다뤘다라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 이현웅: 혹시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 김재원: 꾸며야 될 데를 잘 꾸민 것 같고요. 역사적 사실관계들이나 당대 분위기를 잘 표현한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가 굳이 어떤 영화라고 특정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영화들은 당대 시대적 맥락 같은 것들은 무시한 채로, '저 시대 때 저런 일이 있을 수 없었을 텐데'라는 것들을 다루는 영화들도 꽤 있거든요. 사실 그런 영화들보다 이 영화는 당대 시대적 분위기를 굉장히 잘 그려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게감 있게 역사를 다룬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영화 <헌트>는 1983년을 배경으로,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룹니다. 특히 제일 중요한 사건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가 인정한 공식 명칭은 '버마 아웅산 암살 폭파 사건'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건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재원: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에 국제적인 분위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때 일어났던 시기,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이 남한과 북한이 제3세계 외교전을 엄청 치열하게 치르던 때였거든요. 국제사회에서 남과 북 모두가 외교적 정통성을 서로 인정받으려고 공방전을 펼치던 때에 하필이면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북한보다 조금 잘 살기 시작했어요. 경제적이거나 군사적으로 북한을 넘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때 미얀마가 원래는 제3세계 국가이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는데, 그래서 당연히 북한에 우호적인 국가였거든요. 그런데 8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부터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려고 하거든요.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보면 신군부가 빠르게 파악을 한 거죠. 그래서 미얀마를 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들어야겠다라고 해서 83년에 동남아 대양주 순방이라고 하는 때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일부러 지정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막상 당시 외교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사실 딱히 미얀마의 매력을 못 느끼는 상황이었거든요. 당연히 미얀마가 군사독재 국가이기도 했고 외교를 통해서 미얀마한테 얻을 수 있는 실리나 국제적 위상 같은 것은 딱히 없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신군부 입장에서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승리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북한을 고립시켜야 된다라고 하는, 대외적으로 봤을 때, 그래서 강행을 한 거거든요. 그래서 1983년 10월 8일에 전두환 씨를 비롯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이 양군으로 떠나게 됐었던 건데 첫째 날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고 해요. 미얀마 대통령이 직접 영접 나와서 대담도 나누고 순조롭게 진행이 되다가, 문제는 다음 날에 터지는 건데 그게 10월 9일이었고 거기에서는 태국이라고 아마 나올 텐데 원래는 미얀마 독립운동가, 아웅산 묘소에서 참배 행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때 예행연습을 하다가 원래 오전 10시에 전두환 씨가 행사 참가를 위해서 들어오기로 돼 있었고 10시 30분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10시 26분에 갑작스럽게 예행 연습하고 있었던 사람들한테 무전 연락이 온 거죠. “차량이 정체돼서 대통령이 더 늦는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통령이 늦는다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한 번 더 연습한 거예요. 테러범들은 원래 10시에 출발해서 10시 30분에 여기 온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행연습 때 나오는 애국가가 전두환이 왔다고 생각을 해서 10시 28분에 폭탄 스위치를 누르고 폭탄을 터뜨리게 된 거죠.
◇ 이현웅: 그러니까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대통령의 암살이었는데, 당시에 아웅산 폭탄 테러 이외에도 실제로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많이 자행됐나요?
◆ 김재원: 박정희 정권 때는 다들 아시는 것처럼 문세광 저격 사건도 있었고, 이 시기는 전두환 신군부 때의 일이니까 암살까지는 아니고 쿠테타 관련된 자료가 한번 나오기는 했어요. 그러니까 신군부가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미국한테 어떻게 보면 인정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때 미국이 인정도 거부도 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한테 계속 만나자고 조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사실 쿠테타를 당시에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국제사회의 눈도 좀 있고 그러다 보니까 공식적으로 이걸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에 이 분위기를 파악한 한국군장성들 그 중에 이범준이라고 추측이 되는 장군이 쿠테타 계획을 미국 쪽에 전달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때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랑 육사 출신 가운데서도 하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전두환의 쿠테타에 반대해서 전두환을 제거하겠다고 했었던 거죠. 사실 여부는 사실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게 5.18 민주화운동 관련해서 미국 자료 수집하다 나온 자료라서 어느 정도로 실제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미국도 모르고 하지만, 어쨌든 전두환의 신군부를 저지하기 위해서 쿠테타 시도가 한번 있었고 그걸 미국이 알고 있었다 정도는 파악되고 있습니다.
◇ 이현웅: 당시 북한이 대통령을 없애려는 그런 시도들도 추가적으로 더 있었던가요?
◆ 김재원: 그런 시도가 정확하게 진짜 있었다라고 하는 게 발견되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 이현웅: 북한측에서는 “아웅산 테러가 자작극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건가요?
◆ 김재원: 당연히 북한에서는 지금도 자신들의 소행을 인정 안 하고 있죠.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바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수사를 하거든요. 그래서 10월 11일~12일 사이에 이미 북한에서 온 테러범들을 체포를 하고 체포 과정에서 1명을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발표를 다 해요.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서 저질러진 거라고 발표도 하고, 다음 달에는 바로 북한과 외교 단절을 해 버린.
◇ 이현웅: 당시의 그 사건으로 우리나라 인재들 몇 명이 순직을 한 거죠?
◆ 김재원: 사망자는 총 17분이셨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직이셨어요.
◇ 이현웅: 그러다 보니까 이분들이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 김재원: 역사에는 만약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없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희생된 관계자들 분들, 부총리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부총리였던 분, 그다음에 외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동력자원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청와대 경제수석, 재무부 차관, 해외 법률기업의 기획단장 이런 분들이셨어요. 어떻게 보면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계셨던 분들이 이때 한 번에 다 돌아가셨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는지 이런 건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핵심 고위급 인사분들이 한 번에 돌아가신 건 맞습니다.
◇ 이현웅: 그리고 영화에는 이웅평 전투기 귀순 사건도 등장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서울 일대에 예고 없이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고 하죠?
◆ 김재원: 이때 한국군이랑 주한미군이 ‘팀스프리트 훈련’이라는 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이렇게 미국이랑 합동훈련을 하게 되면 북한에서도 대응해서 훈련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때는 거의 준전시 상태를 선포해놓고 ‘절대 하지 마라’라고 하는 비상 상황이었는데 이때 하필이면 영화에 나오는 비행기가 갑자기 편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왔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한국 공군에서는 요격하러 나갔었거든요. F5 전투기가 나왔는데, 아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날개를 흔들어서 기술하겠다는 뜻을 밝히거든요. 그리고 난 다음에 분위기가 이상하구나라는 걸 파악하고 수원비행장 쪽으로 착륙을 시키게 되는 겁니다.
◇ 이현웅: 그런데 왜 북한을 탈출했냐, 이 이유를 두고도 얘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 김재원: 영화에서도 나오잖아요. ‘파손, 불량품 교환해 드린다’ 이거 보고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중에 이웅평 씨가 자기가 했던 말이 아니라고 얘기는 했어요. 자기가 했던 말은 아니고,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기에는 고민 자체가 좀 어색하죠. 이웅평 씨의 기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마도 안기부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으로 보이고요. 기술에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라고 하면 당연히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부분들이 좀 컸었던 것 같고, 당시 70년대 넘어가고 8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한국이 조금 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아마 체제에 대한 회의감 이런 게 컸었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이웅평으로부터 북한 암호 해독법을 알게 됐다는 얘기도 있던데 사실입니까? 확인이 된 게 있나요?
◆ 김재원: 아마 그분이 어느 정도 알고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목을 받았던 건 암호 해독 이런 것보다는 군수품을 갖고 온 거였어요. 사실 암호보다 이게 더 컸거든요. 당시에는 워낙에 고가의 물품이기도 했고 그래서 실제로 이웅평 씨한테 보상금이 엄청나게 나갑니다. 15억 2천만 원. 그때 강남의 아파트 하나가 2~3천이었으니까 엄청난 금액이죠.
◇ 이현웅: 5.18 민주화운동도 등장합니다. 여전히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영화에서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김재원: 5.18 민주화 운동 얘기가 저도 얘기하면서 조금 힘든 측면이 있는데, 아직 제대로 치유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로 불러야 한다, 북한군에 의한 사태였다. 이런 얘기들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치유됐다라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렵고 오히려 사실 피해 조사조차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자체가 조금 그렇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 때문에 아직까지도 2차, 3차 피해를 받고 계신 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계속적으로 영화에서 다뤄지는 이유도 그런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현웅: 영화에서는 '동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파이를 추적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동백림 북한 공작단 사건'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시기적 배경이 안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이름만 비슷한 겁니까?
◆ 김재원: 네, 동백림이라고 하는 건 당시 동독의 수도가 동베를린이잖아요. 그거를 그냥 한자로 한 게 동백림이에요. 그래서 동백림 사건은 전혀 다른 건데, 1967년에 있었던 사건이고요. 중앙정보부에서 만들어낸 간첩단 사건 같은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완전히 인연이 없는 사건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기는 한데 67년에 중앙정보부에서 동베를린에 있었던 분들 중 문화예술계에 있으셨던 분들 200명 정도를 ‘대남적화공작을 벌이고 있다’라는 명목으로 체포를 하세요. 간첩 활동을 이 사람들이 했다고 했는데,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서는 사형도 몇 명 내리고 징역형도 엄청 내리고 이렇게 해서 조사를 해서 선고를 엄청 강하게 내리거든요. 그런데 막상 선고 이후에 조사를 해봤더니 한국에 와서 간첩 행위를 했었던 분들은 거의 없었고요, 대부분은. 그래서 간첩죄가 인정되신 분이 아마 한 명인지, 한 명도 없으셨는지. 아무튼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것으로 결론이 났었던 사건이었습니다.
◇ 이현웅: <헌트>는 물론이고, 이전부터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많지 않습니까? 군부독재시대라는 시대적 특수성, 역사적인 배경이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 김재원: 사실 1980년대라는 시기가 굉장히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흥미롭다고 얘기하면 아픔도 많은 시기라서 말이 조금 그렇습니다마는 군부 독재 시절이기 때문에 굉장히 암울한 시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반대로 굉장히 명랑한 사회였거든요. <응답하라 1988>도 굉장히 명랑하잖아요. 언론 통폐합되고 국민들이 그때 당시 볼 수 있는 건 ‘땡전 뉴스’밖에 없었지만 반대로 대중문화가 엄청 발전했었던 시기라서 가요제도 엄청 많았고, 대중문화 자체가 엄청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TV 속에 비춰진 한국이 굉장히 밝았던 시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자유화 조치들이 엄청 많이 됐잖아요. 교복 자율화부터 시작해서 통금 풀리고, 거기에다 86년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88 올림픽이 있었고 ‘3저호황’이 있었고 경제 성장 엄청났고.. 이런 것들이랑 5.18 민주화 운동, 80년대 대학가에서의 민주화 운동, 그다음에 87년을 기점으로 하는 6월 항쟁 이런 것들이 같이 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때 굉장히 다층적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력적인 시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현웅: 알겠습니다. 이렇게 영화 <헌트>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배경들을 쭉 알아봤는데 끝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예전에 보면 뉴스에서 누가 간첩으로 밝혀졌다, 일명 간첩단 사건들이 많았는데 이중에는 조작으로 밝혀진 것도 많았죠?
◆ 김재원: 아까 말씀드렸었던 동백림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했었고, 사실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는 역사는 전두환 정권에서만 그랬었던 것도 아니고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꾸준히 있어왔던 겁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을 활용하는 거죠. 북한 관련된 사건을 조작하는 게 사실 내부 정치 단속에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용을 해왔어요. 어떻게 보면 최초의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 사건부터 시작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게 내부 단속으로 너무나도 잘 먹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히나 독재 정권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모두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걸로 내부적인 선거에 이용을 한다거나 그랬었던 적이 굉장히 많았었죠. 그래서 북한과의 관계가 굉장히 효과적인 정치 수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재원 역사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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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일시 : 2022년 8월 22일 (월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 김재원 역사선생님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슬라생] "난 니가 동림이라고 생각해" 영화 <헌트> 속 '동림', 역사 속 실재는?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이자, 정우성과 23년만에 호흡을 맞춘 영화 <헌트>가 개봉 13일째, 3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헌트>는 1983년을 배경으로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루는데, 특히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 영화를 더욱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겠죠? 김재원 역사선생님, 연결돼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 김재원 역사선생님(이하 김재원): 네, 안녕하십니까.
◇ 이현웅: 오랜만에 연결했습니다. 영화 <헌트> 보셨나요? 총평을 하자면?
◆ 김재원: 네, 저는 봤습니다.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 이현웅: 아무래도 역사를 영화적으로 각색한 것도 있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셨을 것 같은데, 영화 오프닝에서 역사와 허구의 조합이라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만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만으로도 현실감과 무게감이 상당합니다. 역사가 가진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김재원: 그런데 실제 역사를 영화로 다룬 영화들이 다 이렇게 힘을 가진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헌트>를 보면서 역사를 굉장히 존중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이 영화를 보면서는 역사적 사실을 무게감 있게 다뤘다라는 느낌을 받았었어요.
◇ 이현웅: 혹시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 김재원: 꾸며야 될 데를 잘 꾸민 것 같고요. 역사적 사실관계들이나 당대 분위기를 잘 표현한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가 굳이 어떤 영화라고 특정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영화들은 당대 시대적 맥락 같은 것들은 무시한 채로, '저 시대 때 저런 일이 있을 수 없었을 텐데'라는 것들을 다루는 영화들도 꽤 있거든요. 사실 그런 영화들보다 이 영화는 당대 시대적 분위기를 굉장히 잘 그려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게감 있게 역사를 다룬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영화 <헌트>는 1983년을 배경으로,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다룹니다. 특히 제일 중요한 사건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부가 인정한 공식 명칭은 '버마 아웅산 암살 폭파 사건'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건인지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재원: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에 국제적인 분위기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때 일어났던 시기,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이 남한과 북한이 제3세계 외교전을 엄청 치열하게 치르던 때였거든요. 국제사회에서 남과 북 모두가 외교적 정통성을 서로 인정받으려고 공방전을 펼치던 때에 하필이면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이 북한보다 조금 잘 살기 시작했어요. 경제적이거나 군사적으로 북한을 넘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때 미얀마가 원래는 제3세계 국가이면서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는데, 그래서 당연히 북한에 우호적인 국가였거든요. 그런데 8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부터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개선하려고 하거든요.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보면 신군부가 빠르게 파악을 한 거죠. 그래서 미얀마를 한국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들어야겠다라고 해서 83년에 동남아 대양주 순방이라고 하는 때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일부러 지정을 하게 된 거죠. 그런데 막상 당시 외교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사실 딱히 미얀마의 매력을 못 느끼는 상황이었거든요. 당연히 미얀마가 군사독재 국가이기도 했고 외교를 통해서 미얀마한테 얻을 수 있는 실리나 국제적 위상 같은 것은 딱히 없었던 상황입니다. 그런데 신군부 입장에서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승리를 해야 된다라고 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북한을 고립시켜야 된다라고 하는, 대외적으로 봤을 때, 그래서 강행을 한 거거든요. 그래서 1983년 10월 8일에 전두환 씨를 비롯해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들이 양군으로 떠나게 됐었던 건데 첫째 날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고 해요. 미얀마 대통령이 직접 영접 나와서 대담도 나누고 순조롭게 진행이 되다가, 문제는 다음 날에 터지는 건데 그게 10월 9일이었고 거기에서는 태국이라고 아마 나올 텐데 원래는 미얀마 독립운동가, 아웅산 묘소에서 참배 행사를 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때 예행연습을 하다가 원래 오전 10시에 전두환 씨가 행사 참가를 위해서 들어오기로 돼 있었고 10시 30분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10시 26분에 갑작스럽게 예행 연습하고 있었던 사람들한테 무전 연락이 온 거죠. “차량이 정체돼서 대통령이 더 늦는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통령이 늦는다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한 번 더 연습한 거예요. 테러범들은 원래 10시에 출발해서 10시 30분에 여기 온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행연습 때 나오는 애국가가 전두환이 왔다고 생각을 해서 10시 28분에 폭탄 스위치를 누르고 폭탄을 터뜨리게 된 거죠.
◇ 이현웅: 그러니까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대통령의 암살이었는데, 당시에 아웅산 폭탄 테러 이외에도 실제로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가 많이 자행됐나요?
◆ 김재원: 박정희 정권 때는 다들 아시는 것처럼 문세광 저격 사건도 있었고, 이 시기는 전두환 신군부 때의 일이니까 암살까지는 아니고 쿠테타 관련된 자료가 한번 나오기는 했어요. 그러니까 신군부가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미국한테 어떻게 보면 인정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데 이때 미국이 인정도 거부도 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한테 계속 만나자고 조르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사실 쿠테타를 당시에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국제사회의 눈도 좀 있고 그러다 보니까 공식적으로 이걸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황에 이 분위기를 파악한 한국군장성들 그 중에 이범준이라고 추측이 되는 장군이 쿠테타 계획을 미국 쪽에 전달한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그때 비육사 출신 장교들이랑 육사 출신 가운데서도 하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전두환의 쿠테타에 반대해서 전두환을 제거하겠다고 했었던 거죠. 사실 여부는 사실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게 5.18 민주화운동 관련해서 미국 자료 수집하다 나온 자료라서 어느 정도로 실제성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미국도 모르고 하지만, 어쨌든 전두환의 신군부를 저지하기 위해서 쿠테타 시도가 한번 있었고 그걸 미국이 알고 있었다 정도는 파악되고 있습니다.
◇ 이현웅: 당시 북한이 대통령을 없애려는 그런 시도들도 추가적으로 더 있었던가요?
◆ 김재원: 그런 시도가 정확하게 진짜 있었다라고 하는 게 발견되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 이현웅: 북한측에서는 “아웅산 테러가 자작극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주장을 하는 건가요?
◆ 김재원: 당연히 북한에서는 지금도 자신들의 소행을 인정 안 하고 있죠.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미얀마 정부에서는 바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서 수사를 하거든요. 그래서 10월 11일~12일 사이에 이미 북한에서 온 테러범들을 체포를 하고 체포 과정에서 1명을 사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발표를 다 해요. 북한의 특수공작원에 의해서 저질러진 거라고 발표도 하고, 다음 달에는 바로 북한과 외교 단절을 해 버린.
◇ 이현웅: 당시의 그 사건으로 우리나라 인재들 몇 명이 순직을 한 거죠?
◆ 김재원: 사망자는 총 17분이셨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직이셨어요.
◇ 이현웅: 그러다 보니까 이분들이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 김재원: 역사에는 만약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없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당시 희생된 관계자들 분들, 부총리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부총리였던 분, 그다음에 외무부 장관, 상공부 장관, 동력자원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청와대 경제수석, 재무부 차관, 해외 법률기업의 기획단장 이런 분들이셨어요. 어떻게 보면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계셨던 분들이 이때 한 번에 다 돌아가셨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는지 이런 건 제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핵심 고위급 인사분들이 한 번에 돌아가신 건 맞습니다.
◇ 이현웅: 그리고 영화에는 이웅평 전투기 귀순 사건도 등장합니다. 1983년 2월 25일, 서울 일대에 예고 없이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고 하죠?
◆ 김재원: 이때 한국군이랑 주한미군이 ‘팀스프리트 훈련’이라는 훈련을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이렇게 미국이랑 합동훈련을 하게 되면 북한에서도 대응해서 훈련을 하거든요. 그래서 이때는 거의 준전시 상태를 선포해놓고 ‘절대 하지 마라’라고 하는 비상 상황이었는데 이때 하필이면 영화에 나오는 비행기가 갑자기 편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왔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한국 공군에서는 요격하러 나갔었거든요. F5 전투기가 나왔는데, 아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기가 날개를 흔들어서 기술하겠다는 뜻을 밝히거든요. 그리고 난 다음에 분위기가 이상하구나라는 걸 파악하고 수원비행장 쪽으로 착륙을 시키게 되는 겁니다.
◇ 이현웅: 그런데 왜 북한을 탈출했냐, 이 이유를 두고도 얘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 김재원: 영화에서도 나오잖아요. ‘파손, 불량품 교환해 드린다’ 이거 보고 인민의 편의를 도모하는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중에 이웅평 씨가 자기가 했던 말이 아니라고 얘기는 했어요. 자기가 했던 말은 아니고,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기에는 고민 자체가 좀 어색하죠. 이웅평 씨의 기술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마도 안기부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 것으로 보이고요. 기술에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라고 하면 당연히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는 부분들이 좀 컸었던 것 같고, 당시 70년대 넘어가고 8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한국이 조금 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아마 체제에 대한 회의감 이런 게 컸었던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이웅평으로부터 북한 암호 해독법을 알게 됐다는 얘기도 있던데 사실입니까? 확인이 된 게 있나요?
◆ 김재원: 아마 그분이 어느 정도 알고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목을 받았던 건 암호 해독 이런 것보다는 군수품을 갖고 온 거였어요. 사실 암호보다 이게 더 컸거든요. 당시에는 워낙에 고가의 물품이기도 했고 그래서 실제로 이웅평 씨한테 보상금이 엄청나게 나갑니다. 15억 2천만 원. 그때 강남의 아파트 하나가 2~3천이었으니까 엄청난 금액이죠.
◇ 이현웅: 5.18 민주화운동도 등장합니다. 여전히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많은 영화에서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김재원: 5.18 민주화 운동 얘기가 저도 얘기하면서 조금 힘든 측면이 있는데, 아직 제대로 치유되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 같고.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로 불러야 한다, 북한군에 의한 사태였다. 이런 얘기들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치유됐다라고 말하기는 당연히 어렵고 오히려 사실 피해 조사조차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 자체가 조금 그렇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 때문에 아직까지도 2차, 3차 피해를 받고 계신 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계속적으로 영화에서 다뤄지는 이유도 그런 것에 대한 반작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현웅: 영화에서는 '동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파이를 추적하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동백림 북한 공작단 사건'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시기적 배경이 안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이름만 비슷한 겁니까?
◆ 김재원: 네, 동백림이라고 하는 건 당시 동독의 수도가 동베를린이잖아요. 그거를 그냥 한자로 한 게 동백림이에요. 그래서 동백림 사건은 전혀 다른 건데, 1967년에 있었던 사건이고요. 중앙정보부에서 만들어낸 간첩단 사건 같은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완전히 인연이 없는 사건이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기는 한데 67년에 중앙정보부에서 동베를린에 있었던 분들 중 문화예술계에 있으셨던 분들 200명 정도를 ‘대남적화공작을 벌이고 있다’라는 명목으로 체포를 하세요. 간첩 활동을 이 사람들이 했다고 했는데, 그래서 중앙정보부에서는 사형도 몇 명 내리고 징역형도 엄청 내리고 이렇게 해서 조사를 해서 선고를 엄청 강하게 내리거든요. 그런데 막상 선고 이후에 조사를 해봤더니 한국에 와서 간첩 행위를 했었던 분들은 거의 없었고요, 대부분은. 그래서 간첩죄가 인정되신 분이 아마 한 명인지, 한 명도 없으셨는지. 아무튼 조작된 간첩단 사건인 것으로 결론이 났었던 사건이었습니다.
◇ 이현웅: <헌트>는 물론이고, 이전부터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많지 않습니까? 군부독재시대라는 시대적 특수성, 역사적인 배경이 영화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 김재원: 사실 1980년대라는 시기가 굉장히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흥미롭다고 얘기하면 아픔도 많은 시기라서 말이 조금 그렇습니다마는 군부 독재 시절이기 때문에 굉장히 암울한 시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반대로 굉장히 명랑한 사회였거든요. <응답하라 1988>도 굉장히 명랑하잖아요. 언론 통폐합되고 국민들이 그때 당시 볼 수 있는 건 ‘땡전 뉴스’밖에 없었지만 반대로 대중문화가 엄청 발전했었던 시기라서 가요제도 엄청 많았고, 대중문화 자체가 엄청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TV 속에 비춰진 한국이 굉장히 밝았던 시기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자유화 조치들이 엄청 많이 됐잖아요. 교복 자율화부터 시작해서 통금 풀리고, 거기에다 86년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88 올림픽이 있었고 ‘3저호황’이 있었고 경제 성장 엄청났고.. 이런 것들이랑 5.18 민주화 운동, 80년대 대학가에서의 민주화 운동, 그다음에 87년을 기점으로 하는 6월 항쟁 이런 것들이 같이 있었던 시절이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 때 굉장히 다층적인 측면을 보여줄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그래서 매력적인 시대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 이현웅: 알겠습니다. 이렇게 영화 <헌트>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배경들을 쭉 알아봤는데 끝으로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예전에 보면 뉴스에서 누가 간첩으로 밝혀졌다, 일명 간첩단 사건들이 많았는데 이중에는 조작으로 밝혀진 것도 많았죠?
◆ 김재원: 아까 말씀드렸었던 동백림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기도 했었고, 사실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는 역사는 전두환 정권에서만 그랬었던 것도 아니고 이승만 정권 시기부터 꾸준히 있어왔던 겁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을 활용하는 거죠. 북한 관련된 사건을 조작하는 게 사실 내부 정치 단속에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용을 해왔어요. 어떻게 보면 최초의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 사건부터 시작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이게 내부 단속으로 너무나도 잘 먹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히나 독재 정권에서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 모두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걸로 내부적인 선거에 이용을 한다거나 그랬었던 적이 굉장히 많았었죠. 그래서 북한과의 관계가 굉장히 효과적인 정치 수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김재원 역사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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