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주민등록번호도 1번? '주민등록번호의 역사'

[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주민등록번호도 1번? '주민등록번호의 역사'

2020.05.28. 오전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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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박정희 대통령은 주민등록번호도 1번? '주민등록번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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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20년 5월 28일 (목요일)
□ 출연자 : 정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노영희 변호사(이하 노영희): 뉴스를 각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뉴스 탐구생활.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 뉴스를 좀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하죠. 국사편찬위원회 정대훈 편사연구사와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 정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이하 정대훈): 네, 안녕하세요.

◇ 노영희: 지난 26일에 행정안전부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중에 출생지를 나타내던 지역번호는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주민등록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어요. 기존에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출생지역과 신고 순서 등 규칙에 따라서 번호가 있어서 자기 식구들 뒤 번호는 다 비슷하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보면 출생지역, 이런 것을 추정할 수 있고, 이게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요. 결국, 이것을 바꾼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주제로 합니까?

◆ 정대훈: 아주 오랜만에 이루어진 주민등록번호 체계 개편을 맞이해서 그러면 주민등록 제도에도 역사가 있지 않을까 해서 그 내용을 준비해봤습니다.

◇ 노영희: 이것은 정말 공부가 되는 중요한 것 같은데요. 한 번 이야기를 해주시죠.

◆ 정대훈: 네, 지금의 주민등록번호 체계는 조금 전에 말씀해주신 것처럼 생년월일과 성별, 출생지역 등을 담은 13자리 번호로 구성이 되어 있잖아요. 이 현행 체계는 1975년에 도입된 체계입니다. 그때가 주민등록법 3차 개정 때라고 하는데요. 아마 대략 50대, 60대 이상이신 청취자 분들은 대체로 기억하실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떤 체계였느냐를 알아보면요. 그 이전에는 주민등록번호가 13자리가 아니라 12자리였습니다. 앞의 여섯 자리는 생년월일이 아니고 그 여섯 자리가 지역번호고요. 그 뒤의 여섯 자리는 성별을 나타내는 한 자리, 그리고 주민등록 등재 순서에 따라서 다섯 자리 일련번호가 부여가 됐는데요.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에 가장 빠른 주민등록번호를 발급받은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죠. 심지어 번호도 지금 공개되어 있습니다. 110101-100001번입니다.

◇ 노영희: 박정희 전 대통령 생일이?

◆ 정대훈: 생년월일이 아니고요. 앞의 여섯 자리가 그 당시 종로구 청운동의 지역번호고요. 뒷자리는 1로 시작하니까 남자고요. 제일 먼저 등록한 사람으로 제일 끝자리가 1번, 이렇게 됩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모스 부호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 노영희: 우리가 자동차 번호판도요. 로열 번호가 1111, 이런 게 로열 번호 아니에요?

◆ 정대훈: 그런 이야기를 하시죠.

◇ 노영희: 높은 분들은 1을 좋아하더라고요. 대통령이었으니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본인을 1로 다 감쌌군요. 그러면 육영수 여사는 어땠나요?

◆ 정대훈: 육영수 여사는 앞의 지역번호는 똑같고요. 뒤의 번호만 여성이고, 두 번째니까 200002,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 노영희: 자기는 서열 2위다, 이런 거군요? 이거만 봐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 정대훈: 그런데 이 체계도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고요. 1968년에 도입된 체계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주민등록번호라는 체계 자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 노영희: 그러면 주민등록번호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1968년도에 주민등록법 1차 개정 때 이게 도입됐다?

◆ 정대훈: 그렇죠.

◇ 노영희: 그리고 75년도는 3차 개정이었다, 이런 이야기고요.

◆ 정대훈: 네, 3차 개정 때 현행 체계로 개편이 된 건데요. 사실 이렇게 한 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국민의 신상이나 거주정보를 파악하려고 하는 제도는 대체로 식민지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물론 한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인구수를 파악하는 제도는 굉장히 오래 전부터 있었죠. 왜냐하면 어느 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세금도 걷고, 노역에도 동원하고, 전쟁 시에는 병사로도 동원을 하니까요. 당장 조선시대에는 호패법이라고 해서 호패라고 하는 신분증을 발급하는 제도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호패를 차고 다닌다는 것, 이런 것은 사실은 노역이나 군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사실은 이 호패법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시행된 것 같지는 않고요. 지금 같은 주민등록제도의 기원은 1942년에 만들어진 ‘조선기류령’이라고 하는 제도가 있거든요. 그것을 직접적인 기원으로 봅니다.

◇ 노영희: 그러니까 호패라고 하는 것을 이용해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쓰기는 했지만 정착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주민등록제도가 생긴 것은 1942년 조선기류령을 그 기원으로 본다, 이렇게 되는군요. 그런데 기류령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 정대훈: 표현이 낯선 표현이잖아요. 여기서 ‘령’이라고 하는 것은 법령이라는 뜻이고, ‘기류’라는 말은 어딘가에 머무른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 기류령 전에는 호적을 통해서 인구를 관리했죠. 그런데 호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아시다시피 가족관계를 나타낼 뿐이지, 어떤 사람이 실제로 어디에 살고 있는지 이것을 말해주지는 않거든요. 물론 예전에는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살기 때문에 자기 본적지, 그러니까 고향에서 나서 자라서 그냥 돌아가시죠. 그래서 별도로 거주지를 파악할 필요가 별로 없었는데, 그런데 식민지기부터는 일자리를 찾아서 자기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이 호적 제도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선기류령이라는 것을 발표해서요. 90일 이상 거주 목적으로 본적지 이외의 장소에 주소나 거소를 정한 경우에는 반드시 신고를 하게 한 겁니다. 그게 조선기류령이라고 하죠.

◇ 노영희: 지금하고 비슷하네요?

◆ 정대훈: 네, 상당히 비슷한 제도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조선기류령이 주민등록제도의 직접적인 기원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그런데 이게 만들어진 게 1942년이잖아요. 약간 의심이 되는 부분인데, 이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때입니다.

◇ 노영희: 그때는 우리가 일제의 치하에 있었던 때인데요.

◆ 정대훈: 그렇죠. 그러니까 일제는 이 당시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전쟁에 징병할 필요가 있었던 거죠. 사실 조선기류령은 연구자들은 일제가 징병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십니다.

◇ 노영희: 고향을 떠나서 어디에 가 있으면 연락도 안 되고 당신들 확인도 못 하니까 우리가 합니다, 하고 좋은 취지로 설명을 했지만 실제는 자기들 전쟁에 동원시킬 목적으로 이것을 한 것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가 있군요. 그러면 주민등록제도는 결국, 징병을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라는 건데요. 별로 기분이 안 좋네요?

◆ 정대훈: 사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고 있는 제도지만 기원은 약간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죠. 사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기를 한국 같은 주민등록제도가 한국 외의 다른 나라에는 없다, 이런 지적도 많이들 하시잖아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주민등록제도라는 것 자체가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지나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이런 비판도 하시고요. 그런 비판들이 가능한 이유가 주민등록제도의 이런 역사적 기원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죠.

◇ 노영희: 그러니까 거주 이전의 자유라고 하는 게 기본권으로 사실 인간에게는 있는 건데 이런 주민등록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침해하는 면이 있다는 거잖아요?

◆ 정대훈: 네, 그런 것 때문에 이런 비판들이 있는 거고요. 실제로도 조선기류령이 해방 이후에도 크게 수정이 안 된 상태로 그대로 이어진 측면이 있기도 하죠. 1945년에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이 제도는 계속 유지가 되는데요. 예컨대 47년, 그 당시에는 정부 수립 이전이죠. 미 군정에서도 38선 이남에 있는 모든 주민에게 거주 등록을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그때는 신분증까지는 아니고 등록표라고 하는 것을 발급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49년 정도부터 조금 새로운 제도가 발견되는데요. 그 당시 38선 이남에서 문제가 됐던 빨치산 토벌 지역에서 국민증, 혹은 도민증이라는 것이 발급됐다고 해요. 이것은 모든 주민에게 발급된 것은 아니고,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 중에서 이른바 양민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한테는 발급이 된 건데요. 이 말인즉슨 모든 사람에게 발급된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 지역의 경찰서장 같은 이런 경찰기관을 통해서 사상검열을 받고 정기적으로 갱신을 해야만 발급되고 유효한 신분증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것이 없으면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간주됐습니다.

◇ 노영희: 이때는 약간 1947년? 이 시기니까 해방 이후에 사상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시기였고, 그래서 필요했군요.

◆ 정대훈: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권자잖아요. 주권을 가진 국민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 행정적으로 자기의 신분을 등록하는 게 아니고 국가로부터 검열을 받은 후에만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 지금의 입장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있죠. 명목으로는 선량한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한 거다, 라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통제에 순응하고, 국민을 길들이고, 억압하는 도구로 악용된 측면도 있기는 있습니다.

◇ 노영희: 이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더 커지는 겁니까?

◆ 정대훈: 네, 그렇습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대가 되는데요.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런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보증인이 필요했고요. 반장, 통장, 경찰서장 등의 심사를 거쳐야만 이런 증이 발급이 됐습니다. 그리고 신분증이 발급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검열도 받아야 했거든요. 이게 없으면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요. 식량 배급도 못 받기 때문에 굉장히 이것은 꼭 받아야만 하는 신분증이었습니다. 이 시민증이 없는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검문 같은 것에 걸렸다고 하면 간첩으로 간주가 됩니다. 실제로 이게 없는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검문에 걸린 한 청년이 거의 10년 가까이 간첩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케이스도 있다고 합니다. 모든 국민들이 기본적으로 간첩으로 의심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이 시민증을 통해서 자기가 결백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을 해야 하는 겁니다.

◇ 노영희: 그러니까 간첩이라는 전제 하에 네가 만약에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면 시민증을 보여라,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 정대훈: 이게 명목상으로는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야당 정치인이라든지, 재야인사를 감시하는 효과가 있기도 했습니다.

◇ 노영희: 그런 식으로 수단으로 쓰였군요.

◆ 정대훈: 네, 초기에 이런 정치적인 혼란 상황이라든지, 억압적인 국가 분위기를 반영하는 측면이 있었죠.

◇ 노영희: 그러면 이런 시민증을 원래 발급해주는 사람이 경찰, 반장, 통장, 이런 사람들이잖아요. 이 사람들 마음이겠네요?

◆ 정대훈: 그렇죠. 그런 것들 때문에 그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고요. 그래서 이것은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월 혁명으로 붕괴한 이후에 이 제도도 유야무야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에 5.16 군사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민증 제도가 조금 더 강화되기도 하죠. 물론 62년도에 만들어진 주민등록법에서는 그냥 거주 사실만 확인하는 것 정도였고요. 그 당시에는 여전히도 주민등록증이나 주민등록번호는 아직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 노영희: 그러면 주민등록증이나 번호가 생긴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 정대훈: 이게 1968년의 일입니다. 이 68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한 해라고도 할 수 있어요. 1월에 국가적으로 비상상황이 많았어요. 다들 기억하실 텐데 이른바 1.21 사태라고 해서 일군의 무장간첩이 서울까지 진입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동해안에 있던 미국의 정보수집 업무를 담당하던 미국의 배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등 남북 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이른바 불온분자의 색출을 용이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68년에 주민등록법 개정을 통해서 주민등록증과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지문날인제도까지가 도입되고, 지금까지 체계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 노영희: 그랬군요. 그런데 어쨌든 주민등록번호, 주민등록제도, 이렇게 되면 결국, 개인정보 유출, 이것을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 정대훈: 그렇죠. 주민등록번호에 워낙 많은 개인정보가 연동되어 있는 것도 있고요. 그리고 주민등록번호에 연동되어 있는 지문날인 역시도 요즘 스마트 기기를 통한 인터넷 은행업무를 보실 때 지문들도 많이 이용하시잖아요. 이런 우려 때문에 주민등록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향후에 아마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될 텐데요. 이런 것들을 잘 알아두어야 어떤 결함들을 보완할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이런 것을 알아두는 게 시민의 교양이 아니겠습니까?

◇ 노영희: 그런데 가수 이선희 씨 있잖아요. 이선희 씨 앨범에 자기 본적하고 주민등록번호를 그대로 적었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 정대훈: 인터넷에 화제가 되었던 게시물이 하나 있는데요. 이선희 씨가 80년대에 냈던 앨범에 보면, 아마 컨셉을 그렇게 잡은 것 같기는 한데요. 성함과 본적지와 주소와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는 게.

◇ 노영희: 왜 그러셨을까요?

◆ 정대훈: 글쎄요. 물론 주민등록번호가 맞다, 아니다를 두고 네티즌 내에서도 말이 많기는 한데요. 사실은 80년대에 주민등록번호, 그리고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관념이 그만큼 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노영희: 그래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셨기를 저희가 기도를 해보겠습니다. 오늘 아주 정말 시민의 교양을 쌓느라 고생을 많이 해봤는데, 45년 만에 주민등록번호 체제 개편을 맞이해서 주민등록제도의 역사를 되짚어봤습니다. 여기까지 말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정대훈: 네, 감사합니다.

◇ 노영희: 지금까지 정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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