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에 다시 태어난 하춘화, 트로트를 향한 무한 애정 '한국 트로트 가요 센터'

11월 11일에 다시 태어난 하춘화, 트로트를 향한 무한 애정 '한국 트로트 가요 센터'

2019.11.11. 오후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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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에 다시 태어난 하춘화, 트로트를 향한 무한 애정 '한국 트로트 가요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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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뉴스FM, 조현지입니다’]
■ 방송 : YTN라디오 FM 94.5 (12:20~14:00)
■ 진행 : 조현지 아나운서
■ 대담 : 가수 하춘화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1월 11일에 다시 태어난 하춘화, 트로트를 향한 무한 애정 '한국 트로트 가요 센터'



◇ 조현지 아나운서(이하 조현지)> 11월 11일, 1이 4개 들어있는 오늘. 1과 관련이 깊은 분을 모셨습니다. 일단 데뷔 앨범부터가 국내 최초라는 말이 붙는데요. 올해 데뷔 58년차가 된 가수, 누군지 아시겠죠? 하춘화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 가수 하춘화(이하 하춘화)> 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현지> 나와 주셔서 영광이죠.

◆ 하춘화> 상암동 TV는 제가 YTN 뉴스에 여러 번 출연했는데, 라디오 스튜디오는 제가 처음 온 것 같아요. 시설이 너무 잘 되어 있고, 좋네요.

◇ 조현지> 종종 또 찾아와주세요. 오늘 오프닝에서 '11월 11일이 이렇게 기념할 일이 많은 날인 줄 몰랐다.' 이런 이야기 했는데요.

◆ 하춘화> 저도 잠깐 대본을 보고 오늘이 이렇게 기념하는 날이 많구나, 했는데요. 그런데저 개인적으로도 잊지 못할 날이기도 하거든요.

◇ 조현지> 어떤 날인가요?

◆ 하춘화> 어떤 우연의 일치라고, 저는 방송하기 전에 알았어요. 제가 지금부터 약 30년 전에 1977년 11월 11일, 지금 익산시지만 그때는 이리시였어요. 제가 그곳에서 하춘화 콘서트를 했거든요. 그때는 리사이틀이라고 했어요. 역하고 공연장하고 500m 정도고 굉장히 가까웠어요. 그런데 화약을 싣고 가는 기차에서 폭파사고가 나서 공연을 못했죠. 중단됐죠. 9시 10분경부터 공연되는데 제가 처음에 히트곡 메들리를 부르고 분장실에 들어왔을 때 폭파사고가 났으니까요. 저는 전후 세대거든요. 그래서 전쟁의 아픔이라든가, 이런 것을 제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라디오 TV를 통해 보고 듣기만 했단 말이에요. 그때 폭파가 되고, 시의 전기가 다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전쟁 났구나, 북에서 쳐들어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때 나이가 스물한 살인가, 두 살밖에 안 됐거든요. 여기서 사람이 이렇게 죽는가 보다, 생각하고 그때 이주일 씨라고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이주일 선생님께서 저를 업고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에요, 사실은. 그 상황에서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다, 나 혼자 살아나가야 되는데, 살 수 있을까, 정말 의문이었죠. 그 상황에서 이주일 씨가 저를 찾아서, 깜깜해서 앞이 안 보이는데, 정말 별빛만 볼 정도거든요. 그런데 저를 찾아서 업고, 생명을 구해준, 그 77년 11월 11일 이후에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볼 수도 있죠.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그때 불행을 당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거든요. 하춘화 리사이틀을 보러 오셔서 아깝게 생명을 잃으신 분들도 계시고 해서,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 조현지> 오늘 일부러 저희가 맞춘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선생님하고 인연이 있는 날이었네요.

◆ 하춘화> 그런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난 날.

◇ 조현지> 또 故 이주일 선생님에 대한 감사도 상기시키게 되고요. 선생님 모시기 전에 저희가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 이 노래를 전해드렸어요. 이 노래가 선생님의 최신곡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하춘화> 그렇죠. 제가 지금 6살 때 가수 데뷔해서 올해가 58년째고 2년 후가 60주년이 되거든요. 물론 기념공연도 할 건데, 60주년 기념 음반의 타이틀곡이에요. 이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라는 노래가. 그래서 원래 공연을 할 때 음반을 내는 게 2, 3년 전에 내요. 내서 대중 귀에 많이 익혀진 뒤에 제 공연할 때 오셔서 보시면, 이 노래구나, 이렇게 같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올해 초에 나왔죠.

◇ 조현지> 그렇군요.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 들으면서도 역시 하춘화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드는 곡이다, 싶었거든요. 내용 자체가 선생님하고 의미가 있는 곡이라고요?

◆ 하춘화> 네, 제가 마산 경남대학을 나왔어요. 나왔는데, 마산이 얼마 전에 창원시로 합병되면서 마산시라는 단어가 이제 없어지는 거죠. 창원시로 되는 거죠. 그런데 제가 부른 마산항은 마산항이라고 부른대요. 그곳에 고향을 두신 분들이 아쉬워하고 하던 그런 순간에 제가 마산에서 학교를 다녔으니까 마산에 대한 것도 많이 알고 있고 해서 노랫말을 썼어요. 썼는데, 그것을 보시고 작곡가 이호섭 선생이 또 마산에서 학교를 다녔대요. 출생은 의령인데. 그래서 마산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서 그 선생님도 곡을 붙여주시고 해서 어떻게 모든 게 잘 맞아서 탄생한 노래거든요. 나오자마자 반응도 뜨거웠고, 또 마산에 고향을 두신 분들이 이 노래를 불러드리면 감격해하시고 우시고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TV 방송할 때는 우산을 들고 하는데요. 그래서 요즘 유튜브 들어가면 하춘화의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를 패러디해서 전부 우산을 들고 나와서, 저도 보고 웃습니다만.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입니다.

◇ 조현지> 많이들 사랑해주셨으면 좋겠고요. 지금 하춘화 선생님 나온다고 문자 보내달라고 했더니 한 분께서 “하춘화님께서 나오신다니 기대됩니다,” 하셨고, 다른 분은 “그렇다면 2시까지 주파수 고정합니다.” 하셨고요. 또 “하춘화 선생님 하면 왠지 김영철의 동그란 눈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요?”

◆ 하춘화> 동그란 눈이 아니라 약간은 혐오감도 줄 수 있는 엄청난 눈의 크기죠.

◇ 조현지> 저도 눈이 큽니다만, 그 특징을 딱 잡아서 김영철 씨가 해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젊은 세대들한테는 선생님을 조금 더 친근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거든요.

◆ 하춘화> 그렇죠. 초등학교 학생들도 하춘화보다는 김영철이 흉내내는 하춘화를 더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팬들도 많이 생기고, 또 김영철 씨는 저 덕분에 자기가 유명해졌다고 감사해해요. 저는 또 저로 인해서 한 사람이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니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서로 도움이 됐어요. 처음에는 김영철 씨가 제 덕에 살았는데, 지금은 제가 김영철 씨 덕에 광고도 했고요. 열심히 개그맨이지만 다른 쪽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 게 참 보기가 좋아요.

◇ 조현지> 그리고 또 하춘화 선생님 노래와 관련된 어렸을 때 향수들도 문자로 많이 보내주고 계십니다. 앞서서 11월 11일,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숫자 1과 선생님이 참 관련이 깊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데뷔 앨범부터가 최초,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요?

◆ 하춘화>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61년 6살 때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를 했거든요. 그 세계 가요사에 6살짜리가 대중가요를 음반으로 낸 게 처음이었대요. 그래서 외국 기자들도 와서 많이 취재를 해가고, 물론 국내에서도 화제가 많이 됐고요. 우리 한국 출신 레슬러 역도산 씨, 그분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저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키우려고 했어요, 가수로. 그래서 여러 가지 저희 아버지와 절충이 됐는데, 한 가지 맞지 않는 부분이 저를 한국인으로 일본 가서 키우는 것은 좋은데, 일본 사람으로 귀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저희 아버지께서 반대를 하셨어요. 그건 아니다, 한국인으로 키워준다고 하면 나도 환영하겠지만 그렇게 한국인인데 일본인으로 바꿔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이야기가 도중에 끝난 적이 있어요.

◇ 조현지> 그만큼 지금도 여섯 살에 앨범을 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데요.

◆ 하춘화> 노래한다는 것은 저는 운명론자가 아니거든요. 운명은 살아가면서 본인이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노래한다는 것, 가수, 이거는 저에게 있어서 운명적인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것을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거든요. 제가 저의 일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나. 가끔씩 명절에 보면 신동이라고 해서 3살, 4살, 5살, 이런 아이들이 나와서 대중가요를 하거든요. 제가 그런 아이들을 볼 때 소름이 끼쳐요. 너무 아니다 싶고, 어린애가 너무 조숙해지는 것 같고, 그런데 제가 그때 데뷔할 당시에 얼마나 사람들이 안 좋은 이야기를 했겠는가. 그 당시만 해도 우리 대중예술인들을 굉장히 폄하하고, 하시할 때인데. 저희 부모님들을 얼마나 안 좋은 눈으로 보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저를 키우셨을 때는 나름 철학이 있지 않으셨겠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 조현지> “그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있다는 건 정말 천재성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하고 이렇게 문자 주신 분들도 계시고, “항상 옥구슬 굴러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6살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신 것” 같다고도 보내주셨는데요.

◆ 하춘화> 네, 그런 말 들을 때가 가장 기쁘죠.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 중요한 거거든요.

◇ 조현지> 그리고 또 올해 10월 29일,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또 국내 처음이라는 말이 붙는 일을 하셨어요.

◆ 하춘화> 그러니까요. 저는 자꾸 최초, 최다, 최연소, 이렇게 붙으니까 약간의 부담을 느끼는데요. 이번에 역시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요. 벌써 있었어야 하는 건데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트로트가요 센터를 설립해야겠다, 후세들의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학교, 아카데미를 설립해야겠다는 생각은 3, 40년 전부터 저희 아버지하고 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하고 있었는데, 누구도 전통 가요가수들도 그런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그리고 자기 히트곡 내고, 자기 활동하는 거에 급급하더라고요. 제가 그래서 그래도 대한민국 땅에 대중가요, 트로트가요 가수로서 태어나서 살다 가면서 뭔가 내가 후세들을 위한 일을 해놓고 가야지, 나만 노래 부르다가 가면 조금 의미가 덜할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왔죠. 저희 아버지께서도 저의 뜻에 맞춰주신 건지는 모르지만, 제가 약 6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자료가 있잖아요. 지금 대중 한국 전통가요의 1세대하고, 제가 6살 때 한 무대에 섰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뻘 되시는데, 그때는 3, 40대셨어요. 제가 6살, 이때는요. 그런데 그분들하고 한 무대에 섰기 때문에 그분들까지도 아버지가 자료를 다 모으셨어요. 그게 자료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때인데, 그건 돈으로 계산이 안 되잖아요. 약 60년간 모아서 저희 부모님 고향인 전라남도 영암에 그 자료를 기증한 거예요. 영암군에. 영암군에서 우리가 이것을 받고 그대로 받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뭔가 대한민국에 없는 것을 설립해서 먼 훗날 후세들에게 문화유산으로 남겨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7년 전부터 계획을 했죠. 군에서는. 우리는 한 10년 전에 기증을 하고요. 그래서 짓기 시작한 게 4년 전부터 해서 드디어 올해 10월 29일에 개관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셔서 감동받으시더라고요.

◇ 조현지> 정말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당연히 그동안 있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었던 것.

◆ 하춘화> 우리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하시하고. 우리 트로트가 한국 전통가요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정말 외롭게, 비바람을 맞으면서 의연히 그 자리를 지켜왔어요. 그런데 이제 한국 트로트가요 센터가 전라남도 영암에 생김으로 해서 우리 전통가요인 트로트가요의 정체성이 확실해졌고, 앞으로 우리 거니까, 우리가 그것을 발전, 계승시켜서 먼 훗날 우리 후세들이 정말 자유롭게 우리 한국의 전통가요인 트로트가요에서 꿈을 펼치고, 또 자기가 닦은 기량을 가지고 또 그 시대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가요 가수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국가에 공헌하고, 또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그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요. 참 어려움이 많았어요.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그 어려움, 어느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절대로 될 수가 없거든요. 희생과 철학을 가지고 앞으로 지금 일이 많아요. 이번에 개관한 것은 전시관, 한국 트로트가요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고요. 그다음에 2층에는 하춘화 전시관, 공연장 소극장, 한 300석 규모로 개관을 했어요. 앞으로 더 큰 게 아카데미. 우리가 교육이 목적이거든요. 아카데미가 내년부터 착공 들어가고, 그 후에 대극장. 대극장이 지금 300석인데, 1000석 이상 되는, 그래서 거기서 교육 받고 훈련 받아서 자기의 기량을 대중 앞에 한 번 시험대에 올라야 되잖아요. 그러면 직접 또 무대도 있으니까. 그런 시스템으로 교육하고, 훈련을 시킬 계획입니다.

◇ 조현지> 전남 영암에 생긴 한국 트로트가요 센터에 대해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는데요. 청취자님께서 “트로트의 여왕, 하춘화 씨. 역사인물입니다.” 이렇게 보내주셨고요. 다른 분께서는 “하춘화님 6살 때 노래 듣고 싶어요,” 하셨는데요. 저희가 이것도 준비를 해놨습니다. “어렸을 때 집에 하춘화 씨의 5살 때 레코드가 있었는데,” 6살 때 나온 앨범을 얘기하시는 거겠죠? “어떻게 이런 어린 나이에 노래를 그렇게 잘할까, 놀라면서 판을 뚫어지게 보고 했었네요.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 들어보니까 이제 경지에 들어섰네요. 관록이란 게 이런 겁니다. 그런데 나이 먹지도 않고 더 젊어지시니까 너무해요.” 이렇게 보내셨는데요.

◆ 하춘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라디오기 때문에 많이 청취자들이 모르실 거예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지만, 조현지 씨가 얼마나 예쁜지 여러분들 모르시죠? 저도 오늘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 조현지> 저 보고 23살 같다고 해주셨어요. 너무나 감사합니다. 청취자님, “하춘화님, 제가 스무 살 때 부산 살았는데요. 그때 부산에서 극장쇼 할 때부터 봐온 팬입니다. 정말 노래 잘하는 가수, 인간적으로도 너무 좋아합니다.” 이렇게 팬 분들이 문자도 많이 보내주고 계세요. 앞서서 저희가 한국 트로트가요 센터 전남 영암에 문을 열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게 아버님께서 그 옛날부터 그 기록을 모아 기록물고 함께 탄생하게 된 건데요. 그런데 개관을 코앞에 두고 아버님께서 올해 7월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 하춘화> 네, 개관일 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어요. 하춘화 전시관에 아버지 흉상이 서 있는데, 조금만 더 사셔서 개관하는 것을 보셨으면 가장 기뻐하실 분이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있어요. 자식 입장에서. 아버지께서 101살에 돌아가셨거든요. 많은 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다 이렇게 해놓으시고 가셨으니까 항상 트로트가요 센터 흉상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지켜줄 것이다, 이런 말씀도 하시고, 위로의 말씀들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 조현지> 아버지 생각 많이 나셨을 것 같은데, 또 선생님께서 공연도 정말 많이 하셨고,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8500회가 넘는 공연도 하셨고요. 그리고 수익을 통한 기부금만 해도, 저는 0 하나를 잘못 본 줄 알았어요. 200억 원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아버님 말씀 때문이었다면서요?

◆ 하춘화> 네, 그렇죠. 그리고 저는 오랜 세월을 하다 보니까 액수가 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요. 어쩌다 한 번은 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하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훌륭해서 그런 일을 한다기보다는 아버지께서 저를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시키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까 어려운 분들을 작은 힘이지만, 돕는다는 게 저의 사명감, 꼭 해야 할 일, 그래서 그냥 항상 누구한테 광고내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해왔어요. 지금까지 45년 이상을요. 하니까 그게 액수가 쌓이고 해서 그런 숫자가 나옵니다만,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일을 하면서 주변에서 가장 궁금해 하는 게 너는 그 돈 기부하면서 아깝지도 않냐, 네 돈인데, 이렇게 질문을 많이 하세요. 물론 돈은 누구에게나 다 소중하죠. 그렇지만 제가 그 기부할 때 그 돈이 제 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 돈은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쓰라고 생긴 돈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했지, 한 번도 그게 제 돈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사실은 그 좋은 일을 한다는 게 참 듣지 좋고, 말하기는 좋지만,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움이 많아요. 그렇지만 몇 십 년간 해오면서도 지치지 않았던 것은 이제는 그만해야지, 하는 생각도 저도 들죠, 힘드니까. 그런데 기부금을 가지고 전달식을 할 때, 어린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하잖아요. 한 번은 다문화가정 어린이들, 초등학교 건립 기금이 없어서 개교식을 못 하고 있더라고요. 바로 오류동에 있어요. 제가 50주년 공연을 끝내고 그 수익금 전체를 가지고 기부를 하러 갔어요, 그곳에. 거기 보면 피부 색깔이 다 다르잖아요. 제가 현장에 도착하니까 저를 위해서 노래를 해준다고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노래를 하더라고요. 합창으로요. 그런데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그 아이들을 보니까. 그러면서 제가 어렵게 공연을 끝낸 그것들이 그 순간에 다 눈 녹듯이 녹아버리는 거예요. 내가 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내가 힘들더라도 앞으로도 계속해야겠다. 그런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다시 마음을 다져요.

◇ 조현지> 선생님, 지금 말씀 들으면서 표정을 보니까 정말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구나,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외할아버지께서 선생님 이름을 지어주셨다면서요?

◆ 하춘화> 글쎄 말이에요. 저는 처음에 저희 집이 딸만 넷이에요. 제가 둘째 딸이거든요. 그런데 큰 언니가 하춘매, 제가 하춘화, 셋째가 하춘엽, 넷째가 하춘광, 이래요. 이름이 너무 이상하다. 왜 여자 이름을 그렇게 화려하게, 이상하게 지었나 하고 처음에 불만을 많이 가졌어요. 제가 이름이 알려지니까 주변에서 다 이름 좋다고. 저는 예명을 쓸 줄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우리 집안에는 이쪽 연예계 지식이 있는 분도 아무도 없고 하니까 그냥 본명을 그대로 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았어요. 그렇게 했는데, 때로는 불편하죠. 항상 이렇게 신분이 다 노출되니까. 그래도 본명을 썼으니 지금 바꿀 수도 없고요.

◇ 조현지> 아니에요. 너무 좋은 이름 같아요. 앞서서도 청취자 분들께서 어렸을 때 목소리 기억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보내주셨는데, 지금 한 분께서 “제가 어릴 적 하춘화 씨 노래 영감, 왜 불러, 이 노래 친척들 모일 때마다 불러서 용돈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 하춘화> 그때 이 노래가 히트가 되면서요. 대학 응원가로도 가사를 바꿔서 많이 했고요. 지방 같은 데 가면 그때는 몇 개 배당이 안 간대요. 그러니까 예약 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코드를 미리 예약을 했대요. 미리 돈을 주고 다음에 레코드가 오면 나를 달라, 그럴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입니다.

◇ 조현지> 저희가 그래서 선생님의 어렸을 때 목소리를 차례로 준비했습니다. 먼저 ‘효녀심청 되오리다,’ 의 목소리를 들어볼까요.

M. 하춘화, '효녀심청 되오리다'

◇ 조현지> 어렸을 때 목소리를 다시 들어도 귀엽죠?

◆ 하춘화> 저는 소름 끼쳐요. 제 목소리인데도. 어떻게 저렇게 했을까. 그때는 조기교육이 없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했죠. 인사말도 누가 써준 거지만 외워서 한 거예요. 글을 못 읽으니까 옆에서 계속 불러주면 듣고 있다가 외워서 그것을 한 거고, 노래 가사도 다 외워서 했어요. 그리고 스튜디오가 지금 이렇게 YTN 스튜디오처럼 훌륭한 스튜디오가 아니고, 그때는 방음을 하기 위해서요. 군인용 담요가 있어요. 그것을 벽에다가 못으로 박아서 방음을 하고, 그렇게 하고 녹음을 했어요. 악단하고 같이. 그 누가 하나라도 실수를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미개하지만, 그때는 그렇게밖에 녹음을 할 수가 없었어요.

◇ 조현지> 완벽한 한 번의 녹음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 하춘화> 네, 그래야 하죠. 실수가 없어야 하는 거예요.

◇ 조현지> 청취자님께서 “소름 끼치네요, 정말.” 다른 분은 “하춘화 선생님을 향한 수식어, 무엇으로 대신하겠습니까? 정말 건강하시고요. 존경합니다,” 이렇게 메시지 보내주셨는데요. 이게 6살 때였고, ‘잘했군 잘했어’가 16살 때?

◆ 하춘화> 네, 중학교 3학년 때. 그때 제가 영감, 하고 부르는 분이 저희 부모님뻘 되시는, 그 곡을 작곡하신 선생님이에요. 고봉산 선생님이라고. 그 선생님하고 둘이 하는데 제가 못하겠다고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너 그러면 가수 하지 마라, 이게 3분 예술인데 노역부터 아역까지 해야 된다. 그것을 못하면 너는 가수될 자격이 없다, 이렇게 야단을 치시더라고요. 스튜디오 안에서. 또래하고 시키면 좋은데, 아버지뻘 되시는 분한테 영감, 이렇게 하는 것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도 야단을 맞고 그래서 제가 그냥 할 수 없이 영감, 이렇게 했거든요. 했더니 그게 뭐냐고, 조금 애교를 넣어야지, 그게 뭐냐고 하면서 영~감~, 이렇게 하라고 시키더라고요. 그래서 또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여러분의 사랑을 받을지 몰랐죠. 요즘도 이 노래는 알아요. 아는데, 이 노래를 하춘화가 부른 줄을 잘 모르더라고요.

◇ 조현지> 그러니까요. 저도 초등학교 때 이 노래로 한복 입고, 율동하는 거 아시죠? 그거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한 번 들어볼게요.

M. 고봉산, 하춘화, ‘잘했군 잘했어.’

◆ 하춘화> 우리 고봉산 선생님도 돌아가셨는데요. 그 당시에 대한민국 남자 가수, 또 대한민국 TV 탤런트, 그다음에 영화배우, 이 노래를 같이 안 부른 사람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노래는 혼자 할 수가 없잖아요. 어느 공연장을 가도 그런 사람들 다 만나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하겠다, 이렇게 해서 남자 영감 역할을 돌아가신 신성일 선생님까지도 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누가 제일 잘 부르느냐? 송해 선생님이 제일 잘 부르세요. 노래 맛이 아주 구성지게, 고봉산 선생님 이후에는 다른 남자 가수들보다도 송해 선생님이 아주 구수하게 잘하세요. 요즘은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프로그램에 가잖아요. 그러면 앵콜송할 때 송해 선생님하고 이 노래를 꼭 불러줘요.

◇ 조현지> 그렇군요. 한 번 송해 선생님하고 같이 부르는 모습도 찾아봐야겠는데요.

◆ 하춘화> 유튜브 들어가면 같이 TV한 것도 있고 해요.

◇ 조현지> 선생님, 오늘 이야기 듣다 보니까 시간이 훌쩍 지났어요.

◆ 하춘화> 네, 늘 그래요.

◇ 조현지> 선생님이랑 오늘 처음 만났는데, 원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 하춘화> 저도 조현지 씨가 우리 조카하고, 언니의 딸하고 얼굴이 너무 비슷해서 제가 친조카를 만난 그런 가족 같은 마음으로 방송을 했어요.

◇ 조현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2006년에는 가수 최초로 박사 학위도 받으셨고요. 그리고 또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국 트로트가요 센터 건립까지 정말 열정적으로 계속 뭔가를 누군가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한다면 이런 것을 못했을 것 같아요.

◆ 하춘화> 그렇죠. 이거는 박사 학위 할 때도 많은 분들이 왜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 너는 가수로서 박수인데, 라고 했지만 제가 큰 계획이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사실 박수가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하고요. 또 누군가는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 이 일을 꼭 하기는 해야 해요. 그런데 누가 할 사람이 안 보여서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하자, 그렇게 된 거죠.

◇ 조현지> 선생님 정말 멋지십니다.

◆ 하춘화> 감사합니다.

◇ 조현지> 선생님의 앞으로의 여정도 저도 열심히 응원하도록 하고요. 또 선생님 모실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하춘화> 네, 다음에 시간 맞춰서 꼭 찾아뵙겠습니다.

◇ 조현지> 선생님하고 인사 나누면서요. 선생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곡이에요.

◆ 하춘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김영철 씨가 즐겨부르는 노래죠. ‘날 버린 남자.’

◇ 조현지> 이 노래 전해드리면서 선생님과는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하춘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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