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의가치] 조선이 선진복지국가였다고?

[같이의가치] 조선이 선진복지국가였다고?

2019.04.11. 오후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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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의가치] 조선이 선진복지국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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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뉴스FM, 조현지입니다’]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12:20~14:00)
■ 진행 : 조현지 아나운서
■ 대담 : 이성규 장애인재단 이사장

[같이의가치] 조선이 선진복지국가였다고?





바둑에서는요. 접촉해 있는 쌍방의 돌이 중앙으로 한 칸씩 같이 뛰어나가는 수를 두고, '같이 가기'라고 한답니다.접촉하고 있는 쌍방의 돌이 위험한 싸움을 피해 서로 달아날 때, 이 '같이 가기' 수를 놓는 다는데요. 욕심을 버리고 같이 가면, 위험도 피할 수 있다는 말이겠죠.
장애인식 개선 및 복지계 뉴스를 짚어보는 시간! 오늘도 이 분과 같이 가겠습니다.
한국 장애인 재단, 이성규 이사장과 함께 합니다. <같이의 가치>

조현지 아나운서(이하 조현지) : 안녕하세요.

이성규 이사장 (이하 이성규) : 안녕하세요.

조현지 :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한데요. 또 다음 주면 장애인의 날이 다가옵니다. 4월엔 뜻깊은 날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아요. 관련이 있는 날인만큼 전하실 소식이 있으신 지 궁금합니다.

이성규 : 역사적 의미가 깊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역사와 장애를 키워드로 <같이의 가치>를 풀어볼까 합니다.

조현지 : 흥미로운데요. 인간의 역사와 장애의 역사는 같이 간다고 해도 무방할 텐데, 시대가 흐르면서 장애의 종류가 좀 달라졌을 거 같기도 하구요.
이성규 :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에 다양한 편리를 제공하죠. 장애인에게 기술은 신체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활동반경을 넓히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기술이 장애인에게 이러한 편리를 제공했다면, 사회적으로는 발달 과정에 따라 장애인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역사 속의 장애인의 삶을 짚어 보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해봤으면 합니다.

조현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카(E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실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는데요, 역사 속의 장애인의 삶을 통해 현재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성규: 먼저, 오늘날의 장애는 ‘장애’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를 말하고요, ‘장애인’ 이란 장애로 인해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사람을 뜻하는데요.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복지 관련 법률)에서 규정됐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이때는 장애를 질병으로 여긴 시대였는데요.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은 장애인을 ‘독질인(매우 위독한 병에 걸린 사람)’, ‘폐질인(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 ‘잔질인(몸에 질병이 남아있는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조현지 : 독질인, 폐질인, 잔질인... 정도에 따라 구분이 됐는데요.

이성규 : 이렇게 장애를 나눈 것은 자립이 가능한 정도에 따라 각종 조세 면제와 구휼대책 등을 국가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었죠. (*구휼:백성들이 흉년 등으로 곡식이 떨어지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국가에서 구제하던 일)

조현지 : 그렇군요. 사람들의 인식도 어땠을지 궁금한데요.

이성규 : 어땠을 거 같나요?

조현지 : 글쎄요, 아무래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는 덜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요.

이성규 : 이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지도 모르는데요. 조선시대는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는 유교적 민본사상을 토대로 국가가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한 제도와 규정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 한정하지 않고 직업을 갖고 자립생활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인식했는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인정(人政)』, 북학파 선구자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서는 장애 종류와 상관없이 모두 배우고 생계를 스스로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요.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아시죠?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도 장애인의 자립 뿐 아니라 중환자와 불구자의 구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현지: 조선시대에도 장애인에 대한 지원 대책이 계속 논의되어 왔다는 건데요.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장애인 정책들도 있었을까요?

이성규 : 있었죠. 국가주도로 설립된 세계 최초의 장애인단체가 “태종”의 명통시(明通寺)인데요. 명통시는 시각장애인 단체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국가 행사에 참여하여 경을 읽었고요. 또 흉년에는 기우제를 지내면서 보상으로 쌀이나 콩, 베와 노비, 건물 등을 하사받던, 즉, 국가에서 지원을 받는 단체였습니다.

조현지 : 세계 최초의 장애인단체가 조선시대 태종 때 ‘명통시’였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왠지 좀 뿌듯하네요.

이성규 : 그럼 조선시대 왕들 중 가장 장애인 복지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조현지 : 글쎄요. 앞서 최초로 설립한 ‘태종’인가요?

이성규 : 질문이 너무 어려웠나요? 백성을 어엿비 여겨...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왕이죠.

조현지 : 아, 세종이군요.

이성규 : 네, 세종은 흉년과 수재 시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구제할 수 있도록 강조했는데요. 세종실록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과 병약자들은 당연히 국가가 보살펴야 할 사람이다. 안으로는 한성부와 오부(五部)가, 밖으로는 감사수령이 상세히 조사하여 환상 진제해야 할 것이니 그들을 우선 지급하되 절대로 빠뜨림이 없어야 한다.” 『세종실록』, 세종1년(1418) 11월 3일
그리고 세조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한 돌봄 서비스를 강조했는데요.
잔질과 독질로서 의지할 곳 없는 자와 맹인들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시를 설립했지 않은가. 농아와 건벽(지체장애인)들은 한성부(서울시)가 돌봐줄 ‘도우미’를 널리 찾고, 동서활인원이 맡아 후하게 구휼해야 한다. 또한 계절마다 부양한 결과를 계문(보고)해야 한다.” 『세조실록』, 세조3년(1457) 9월 16일
※동서활인원 : 서민의 질병구료를 맡았던 의료기관. 유사기관으로 제생원이 있음

조현지 : 그렇군요. ‘장애인 돌봄 서비스‘하니까 왠지 요즘 이야기 같은데, 신기하네요.

이성규 :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전문직 장애인이 등장했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그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전문직 일자리를 제공한 건데요. 점을 쳐주고 대가를 받는 점복가, 도교나 불교 경전을 읽어 병을 치료하거나 기우제를 지내주는 독경사, 전문 음악인인 악공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장애인과 그 부양자를 위해서 부역을 면제해 주거나 죄를 범하면 형벌을 가하는 대신 면포로 대신 받고,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조현지 : 처음 제 생각과는 달리 조선시대는 장애인을 위한 정책과 섬세한 지원이 있었던 시대였네요.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아갔을지도 궁금한데요.

이성규 : 조선이 신분제 사회였다는 건 다 아시죠? 그렇지만 장애인에 한해서는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하려고 했는데요. 몇몇 인물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관료분야에서는 ‘허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체구가 작고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은 척추 장애인이었는데요. '수응재상(瘦鷹宰相, 마른 송골매 정승)'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업무처리가 철저했습니다. 그래서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왕을 거친 명재상이었는데요. 조선건국 후 예법을 정비하고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오죽하면 세종이 허조의 직언을 듣고 “허조는 고집불통이야.”『세종실록』 세종15년(1433) 10월 23일 라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허조의 비판을 끝까지 경청하며 믿었죠.

조현지 : 대단하네요.

이성규 : 그리고 숙종 때 일각정승(一脚政丞), 즉 한쪽 다리의 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진 윤지환도 있었는데요. 일본 통신사를 다녀온 이후 풍증으로 한쪽 다리를 잃고 지체장애인이 됐습니다. 그동안 뛰어난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다리를 잃게 되면서 '임금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하는 것은 불충'이라며 사표를 냈다고 해요. 하지만 숙종은 '걸을 수 없으면 기어서라도 어전에 들어오라' 명하면서 사직과 반려를 반복했는데, 그게 무려 79차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현지 : 여든 번에 가까운 사직과 반려... 그만큼 대단한 인재였다는 건데요. 문화예술 분야로도 뛰어난 분들이 있었다면서요?

이성규 : 네, 세종의 고손이자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였던 ‘이정’은 30대부터 묵죽화가로 널리 이름을 알렸는데요. 임진왜란 당시 칼에 맞아 오른팔을 다쳤습니다. 당연히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왼손으로 손을 바꾸어 나가며 예술적 깊이를 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언어장애 때문에 ‘눌인((訥人)'이라는 호를 가진 ’조광진’은 당대 최고 명필인 추사 김정희에게 찬사를 받았다고 하고요, 그 실력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조현지 : 각자의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장애는 그들이 가진 특징일 뿐 업적은 가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성규 : 이 밖에도 해외에서는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미국의 유일무이한 4선 대통령이 되었던 루즈벨트,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는 3중장애를 갖고 있었으나 사회 개혁가로서 가난한 노동자와 여성, 유색인을 대변했던 헬렌 켈러 등도 장애를 가진 역사 속 위인이라고 볼 수 있겠죠.

조현지 : 네, 생각해보니 장애를 갖고 있었던 다른 나라 위인은 알았어도, 우리 선조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성규 : 아무래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죠. 여기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한 위인들을 장애를 ‘극복’하며 뛰어난 업적을 일구어 낸 ‘드문’ 역사 속 위인으로 바라보기보다 그들이 가진 능력을 노력과 의지로써 업적을 일군 또 한 명의 ‘우리’라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현지 : 그렇죠, 다 같은 사람이니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걸음이 우리 사회의 장애인식을 바꾸는 거름이 되는 시간! <같이의 가치> 한국장애인재단, 이성규 이사장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이성규 :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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