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 언론을 묻다 4부. 감옥에 갇힌 기자 [이부영 동아투위원장 인터뷰] / 여기잇슈

그 시대, 언론을 묻다 4부. 감옥에 갇힌 기자 [이부영 동아투위원장 인터뷰] / 여기잇슈

2026.10.30. 오후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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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오 기자)
위원장님께서 옥고를 치르셨을 때 일도 궁금한데요. 그때 당시 상황이 어땠었나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제가 1975년 6월 9일, 10일 요즈음에 중앙정보부에 연행이 되고 한 20일 뒤에 성유보 씨도 또 끌려와서 같이 구속이 돼서 청우회 사건이라는 것으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나나 성유보 씨가 그때 가장 걱정스러워했던 것은 우리들에게 적용됐던 법조항이 대한민국에서는 역적으로 몰리는 국가보안법, 반공법 그런 거였어요. 거기다 긴급조치까지 겹쳐있고 내 경우에는 외국인 특파원들이나 이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형법 104조 2항이라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을 비방한 그런 것도 그때는 처벌을 받도록 돼 있었어요. 그런 것이 다 겹쳐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이것이 위중한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한 20년 징역은 살 거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냐하면 그 전에 민청학련 사건이라든지 그 인혁당 사건 이런 것들과 같이 국가보안법이 또 걸려 있어서 그렇게 됐죠. 그런데 재판은 지나고 보니까 1심 때는 굉장히 18년 구형에 내 경우엔 9년 징역 이렇게 하고 뭐 성유보 씨는 8년인가에 4년인가 이렇게 했는데 2심 징역엔 18년에 9년 했던 걸 2년 반으로 깎아버리더라고.

▷(한동오 기자)
확 깎였네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성유보 씨는 4년 했던 걸 1년으로 해버리고 이런 것도 외국 언론에 보도되고 이런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재판이라는 평가들이 있어 가지고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형량 변화가 일어났었던 거죠. 그리고 성유보 씨가 그동안에 감옥 안에서 몸이 안 좋아가지고 굉장히 걱정들을 많이 했어요. 내 경우에는 재판을 서울대생 데모를 배후 조정했다는 것까지 겹쳐가지고 지금 서울지방법원하고 영등포 지원해서 양쪽에서 재판을 받고 그렇게 했는데. 그리고 안양교도소를 거쳐서 전주교도소 특별사동이라는, 미전향 장기수들하고 같이 갇혀있는 그런 방에 가서 굉장히 엄한 징역을 살았죠. 그러니까 6.25 이후에 구속이 돼서 전향을 안 했기 때문에 미전향 장기수라고 해서 한 30년씩 징역을 사는 사람들 갇혀 있는데 갖다 집어넣어 놨으니까 굉장히 엄중한 수형생활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거기 있는 동안에 문익환 목사께서도 거기 오셨고 여러 진급조치, 국가보안법 위반한 청년 학생들도 와서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제 경우에는 거기 미전향 장기수들이 갇혀있는 특별사동이라고 그러는데 거기에 갇혀 있었던 것이 굉장히 귀중한 경험이 됐어요. 그러니까 대한민국 행형시설 안에 특별사동이라는 것이 있는 곳이 전주, 광주, 대전, 그리고 대구 이렇게 4개 교도소에만 특별사동이 있었어요. 거기는 이른바 미전향 장기수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그런 장기수들을 가둬놓는 데니까 거기 들어가서 안 사실이지만 참 어마어마한 특별사동, 특별구금시설 안에서의 범죄가 저질러졌더라고.

▷(한동오 기자)
어떤 범죄예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그때 당시 72년에 긴급조치 그런 것이 발표가 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게 발표됐잖아요. 남북 간의 평화공존 대화를 하겠다는 걸 유신체제 안에서 발표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미전향 장기수라고 해서 그렇게 오랫동안 가둬놓는 거가 남북 평화공존을 한다고 그러면서 안 되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든지 전향을 시키려고 그러는데 자기들은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반공체제를 유지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저희들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러고 저항을 하면서 전향을 거부하는 거예요. 그래서 73년에는 장기형을 살던 사람들이 20년 만약에 징역선고를 받았으면 20년 지난 사람은 내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전향을 안 한 사람을 내놓을 수가 없다고 해서 사회안전법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래서 전향을 안 하면 2년씩 그냥 무기한으로 연장하는 거예요, 형기를.

▷(한동오 기자)
무기징역이랑 똑같네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렇지. 그때 50년도에 반공법으로 잡힌, 지리산에서 빨치산하다 그냥 사는 사람들이 50년대에 들어온 사람들이 53년에 휴전이 됐잖아요. 그 뒤에도 잡힌 사람이 더 있었다고. 그 사람들은 소년들이 있었어요. 스무 살이 넘지 않은 사람들도 빨치산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53년, 4년에 생포돼서 재판을 받으니까 4.19 때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이 20년으로 감형이 됐다고. 그때 소년수나 이런 사람들은 무기수로 이렇게 살게 할 수가 없어서 20년이 징역이 되니까 73년, 4년 되면 이 사람들을 내놔야 되잖아요, 20년이 됐으니까. 이 사람들을 내놓을 수는 없고 그러니까 사회안전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전향을 안 하면 2년씩 계속 형이 그냥 계속 살 수밖에 없도록 됐어요. 내가 거기 갔을 때 그런 사람들이 몇 명이 있어서 그때 그 사람들도 이미 나이가 40대 중반이 넘고 그랬는데 사회안전법으로 계속 형이 늘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전향을 시키기 위해서 그 독방 안에 2.7평 이렇게 관처럼 생긴 방이야. 방이 2.7평이니까. 그 깡패를 집어넣어서 두드려 패는 거예요. 또 혹은 한겨울에 그냥 방 안에다가 찬물을 끼얹어 버리고 그런다고. 근데 이 그 특별사동의 독방이라는 데는 전부 다 시멘트 아니에요, 전부 다. 마룻바닥만 제외해 놓고는. 그러니까 만약에 영하 10도 기온이라면 밤새 시멘트가 얼어버리잖아요. 냉장고 효과가 있는 거예요, 독방 안에는. 그래서 영하 10도 기온에는 영하 14도 그렇게 된다고. 그 안에는 냉장고 효과가 오는 거예요. 시멘트가 차게 되죠. 코가 얼고 귀가 얼고 그러더라고요. 나도 그 얼음에 귀하고 코 이런 데가 얼고 뺨 같은 데도 얼음이 박히더라고. 깡패들한테 두드려 맞고 그 또 이 막 별별 짓을 다 하는 거예요, 전향하라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굉장히 고마워 하더라고. 이 남쪽의 정치범들이 그 특별사동에 갇히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짓을 못 하게 된 거예요. 우리한테 가끔 운동을 그분들과 두 명이 한 조로 나가서 블록 담벽으로 한 40평 되는 걸 둘로 나눴어요. 그래서 여기 이렇게 따로 들어가면 여기서 뺑뺑뺑뺑 돌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렇게 하는 게 운동이라고, 열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열평이 뭐야. 네다섯평 밖에 안 되겠구나. 블록 담으로 막은 데. 가끔 교도관들이 추우면 자기들은 저기 안에 들어가서 구멍탄 난로에 가서 불 쬐고 있고 그 동안에 우리가 얘기를 주고 받는데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때문에 자기들이 살아났다는 거예요. 깡패들한테 두드려 맞고 찬물 끼얹고 그래서 폐렴 걸려 죽고 이랬는데. 그런 경험을 내가 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하고 이렇게. 그래서 아 이게 인권 인권 떠들고 그런 거 뭐 바깥에 사람들 그렇게 인권 처벌, 뭐 인권이 침해당하고 했다고 불평을 하는데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인권이고 뭐 없는 거지. 그분들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게 정말 독재정권, 군사정권이라는 게 그런 그 정말 법의 보호를 못 받는 사람들한테는 별의별 짓을 다 하는 거예요. 깡패를 들여보내서 두드려 패고. 그것도 사회안전법에 따라서 전향을 안 한 사람은 2년씩 형을.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에요. 거기다 전향을 시키겠다고 깡패들을 집어넣어서 두드려 패고 물을 막 끼얹고. 내가 거기서 또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한 거는 방 꼭대기 손이 안 닿는 저 위에다가 스피커를 달아 놓고 전향하라고 볼륨을 높여 놓고 막 방송을 하는 거예요. 그때 KBS에 대북방송이라는 게 있었어요, 대북방송. '김일성 이놈! 넌 네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뭐 이런 식의 방송이에요. 그걸 똑같은 거를 하루에 열 번 이상을 트는 거예요. 어디 갈 데도 없잖아. 귀를 막아도 들리고 그 변소 뒤에 있는데 변소 뒤에 가서 해도 꽝꽝 울리고 아니 그 대북 방송이라는 건 방송이니까 북에도 들리지만 남에도 다 들리죠, 그때. 오승룡이라는 성우가 있었어요. 유명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와서 읽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하루에 한 번만 들으면 모르겠는데 그걸 열 번씩 반복을 해서 듣는다고 생각해봐요. 그게 고문이거든. 나도 그걸 들으라고 틀어놓는 거예요. 그 특별사동에 있는 교도소, 전주교도소 같은 데에는 거기에 전향 공작반이라는 게 있어.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는. 거기서 다 하는 건데. 내가 조금 나밖에 그런 걸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발광을 했다고. 문을 쇠문을 차고 막 '당장 그치라고 이게 무슨 짓이냐 이게. 사람이 귀도 안 들을 수가 없이 듣도록 만들어 놓고 그걸 하루에 열 번씩 똑같은 걸 반복해서 들으라고 그러면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한 며칠을 그랬다고. 아침서부터 저녁까지 발로 차고 그러니까 교도소의 감방문이 쇠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걸 하면 오죽 그게 소리가 요란해? 그치라고 그랬더니 그 옆에 있는 방에 비전향 장기수하고 똑같이 한 칸은 국내정치범, 그 다음은 미전향 장기수, 한 칸은 국내정치범 이렇게 전부 다 옆에다가 서로 넣어놔요. 그리고 그 사람들하고 조금이라도 말하고 통방을 하면 국가보안법을 추가로 띄운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미전향 장기수 빨갱이니까 그 사람들하고 얘기를 하면 국가보안법을 추가로 더 기소를 한다는 거예요. 아마 이런 얘기는 밖에 안 알려졌던 얘기일 거예요. 내가 운동을 같이 그분들을 옆에 방하고 같이 하니까 아무래도 두 사람하고 나가면 그분들하고 나가게 되는데 그 교도관이 잠깐 없는 사이에 둘이 운동하면서 마주 보고 얘기를 하는데 '이 선생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야단하냐고, 조금만 지나면 그게 다 자장가로 들려요'. '아 난 못 견디겠다고'. 자기들은 뭐 몇십 년 동안 그런 걸 해서 아무리 거슬리지 않는대요. 거슬리지 않는대. 내가 참 부끄럽더라고요. 내가 수양이 안 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내가 나갈 때쯤이 되니까 나를 병사로 옮겨 놓더라고요. 병사. 그 병든 사람들이 있는. 거기 가서 그때 강문봉 장군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강문봉 장군이 육사 2기인데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사람이죠. 그 사람이 50, 55년 그때 김창룡이라고 있어. 특무부대장. 중장이었어요. 요새 박정희 그때 좌익했다고 재판받고 그런 얘기 나오잖아. 그걸 수사한 사람이 김창룡이었다고, 특무부대장. 박정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박정희가 좌익을 했으니까. 여순 사건의 배후,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하도 김창룡이가 그때뿐만 아니라 해방, 50년대에도 특무부대장 하면서 지금 보안사예요, 보안사 대장. 군 내부에서도 못된 짓을 많이 하니까 강문봉 장군하고 몇몇 공국진 장군, 중장 뭐 이런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그 밑에 허태영이라는 대령을 시켜서 김창룡을 쏴 죽여버렸다고. 집에서 출근하는 걸 쏴 죽여버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때 무기징역인가를 받았다가 4.19 일어나면서 풀려난 거예요, 강문봉 장군이. 그다음에 5.16 일어나니까 박정희가 이제 대장이 된 거 아니요. 박정희가 이제 그때 집권자가 되니까 강문봉 이런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람이거든. '저 사람은 여기 자기 옆에 그냥 있으면 안 돼' 했으니까. 이 사람은 대사로 내보내요.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이런 데 대사로 내보내서. 그러다가 다시 이제 70년대에 들어와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했어요. 근데 이 사람이, 박정희가 계속 독재를 하거든. 도저히 그걸 용납을 못 해요, 이 사람도. 이 사람이 그때 미 한국군을 만든 사람이죠. 제임스 하우스만이라고 미 8군 사령관 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군, 한국정부를 모두 이렇게 뒤에서 주무르던 사람이 있어요. 하우스만이라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76년 내가 구속된 다음 해에 국군의 날 행사가 여의도에, 여의도 그때는 5.16 광장이라는 게 있었다고. 지금은 그 넓은 도로 있는데. 거기가 원래 여의도 비행장 자리거든. 거기서 국군의 날 행사를 76년에 하는데 거기서 박정희가 사열을 받는데 저격해서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하우스만. 그 사람이 한국군을 창설을 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48년에 한국군 창설을 한 다음에 계속 여기 있으면서 한국군 만들고 이런 걸 했으니까 70년대 중반이면 그때 벌써 20여 년이 넘도록 한국군 내지 정부를 움직이던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강문봉하고도 이제 창군할 때부터 잘 아는 사이여서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강문봉을 잡아다가 감옥에다 집어넣고 두드려 팬 거예요. 사흘 동안 거꾸로 매달아 놓고 그냥 때리기만 하더래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사람도 이제 그때 감옥에 들어온 지 한 1년 반이 넘었을 때인데 내가 있는 병사(에서) 같이 만났어요. 나하고 할 말이 많지. 강문봉 장군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요. 박정희도 만주군관학교 나왔잖아요. 굉장히 두 사람이 다 우수한 사람이라고. 이 강문봉 장군 집은 굉장히 부잣집이었어, 그때. 아버지가 은행가였고. 대부분 그 집에 많이 놀러 오고 그랬대요. 정일권, 백선엽 이런 사람까지. 그런 얘기도 강문봉 장군한테서 많이 얘기를 들었고. 그분도 다 세상 떠났어요. 그리고 그 해 연말에 내가 나왔다고. 2년 반이니까 2년 반 됐지.


YTN 한동오 (hdo86@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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