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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 방송 : YTN 라디오 FM 94.5 (20:20~21:00)
■ 날짜 : 2025년 11월 09일 (일요일)
■ 진행 : 김영민 아나운서
■ 대담 : 오영환 예비소방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용 인용 시 YTN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김영민 아나운서 (이하 김영민) : 11월 9일, 오늘은 ‘제63회 소방의 날’입니다. 화재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소방 의식을 높이고자 지정한 날인데요. 오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에서는 ‘누군가 감당하기 힘든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다’ 하는 분 모셨습니다. 앞서 오프닝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최초의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에서 이제는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으로 돌아오신 분을 모셨어요. 오영환 예비 소방관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오영환 예비소방관 (이하 오영환) : 네, 반갑습니다.
◆ 김영민 : 반갑습니다. 제가 일단 예비소방관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는데, 그 얘기하기 전에 간단하게 청취자분들께 자기소개 한번 부탁드릴게요.
◇ 오영환 : 저는 20년 동안 화재 구조 구급 현장에서 소방관으로 근무를 했었고요. 제21대 국회에서 소방을 대표하고 또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국회의원을 또 했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제가 사명으로 생각하는, 저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소방 현장으로의 복귀를 앞두고 있는 오영환입니다. 반갑습니다.
◆ 김영민 : 아니 이런 이력을 가진 분이 대한민국에 또 계실까요? 정말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일단은 예비소방관이라고 저희가 지칭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소방본부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을 또다시 하셨는데, 아직 일은 안 하고 계신 거죠?
◇ 오영환 : 그렇죠. 7월 중순쯤에 최종 합격 발표가 났는데요. 보통 소방관들은 합격을 하고 나면 6개월씩 소방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하지만 저는 15년 전에 이미 기본 교육을 수료했기 때문에 학교는 들어가지 않고 발령을 기다리는데, 한 1월까지는 기다려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 김영민 :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 오영환 : 지금은 수영장에 라이프 가드라고 인명 구조 요원이 항상 있습니다. 물놀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빨간 옷을 입은 분들, 그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자격증이 인명구조사, 응급구조사 이렇게 다 사람 살리는 자격증밖에 없어서 전문성을 활용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저도 미디어를 통해서 의정 활동 하실 때 많이 뵀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방송은 엄청 오랜만이신 거죠?
◇ 오영환 : 그렇죠. 방송이나 이런 걸 할 기회도 없었고 할 의지도 없었죠. 그냥 시험공부 열심히 하고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어서 했다가 소방의 날을 기념해서 제가 제 생일보다 좋아하는 날이 소방의 날인데 특별히 불러주셔서 이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 김영민 : 어떠세요? 마이크 앞에 앉으신 기분이.
◇ 오영환 :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김영민 : 앞서서 라이프 가드 일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알아보는 분은 없으세요?
◇ 오영환 : 전혀 그런 게 없고요. 얼마 전에 지난주에 있었던 일인데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너무 즐겁게 노시길래 저도 열심히 지켜드리고 궁금해하시는 거 답변도 드리고 했는데 나가시는 길에 갑자기 이름을 물어보시더라고요. 혹시 알아보셨나? 이런 생각을 했더니 알고 보니까 친절한 직원 칭찬하는 게시판에 오영환이라는 인명 구조 요원 분이 너무 이렇게 친절하셨다 이렇게 글을 써주신 기억이 있네요.
◆ 김영민 : 그렇군요. 저도 수영장 갔을 때 라이프 가드 분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요. 생각보다 알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국회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하시다가 불출마 선언을 하시고 다시 소방관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을 하셨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 오영환 : 물론 너무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저는 처음 국회에 갈 때부터 나는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은 내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지역구로 공천을 받다 보니 그분들에 대한 의지나 신뢰나 지역에서의 발전이나 이런 일을 하려면 그래도 최소 두 번은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되면서 많은 분들이 놀라셨었죠. 그러나 제가 소방 현장으로 다시 복귀하고 돌아가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정확히 내년 1월에 돌아가면 얼마 만에 복귀하시는 건가요?
◇ 오영환 : 사직서를 냈던 게 12월 둘째 주 정도 되거든요. 곧 만 6년이 됩니다.
◆ 김영민 : 그러네요. 엄청 오랜만에 돌아가시는 것일 텐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했을 때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시다 보니까 가족들의 반응도 굉장히 중요했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 오영환 : 저희 가족들은 항상 제가 무슨 선택을 하건 결정을 하건 제가 그냥 통보를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하시다 보니 그냥 또 오영환이 오영환답게 했구나. 존중해 주고 환영해 줬지만 중요한 거는 당장 소방관 시험 합격할 때까지 아파트 대출은 어떡하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죠.
◆ 김영민 : 그럴 때 또 옆에서 힘이 돼 주는 게 가족이고 그러니까 아마 같이 잘 이겨내셨을 것 같은데, 국회의원을 하고 다시 소방관으로 돌아가면 국회의원 특채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오영환 : 다들 뭔가 국회의원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10년을 소방 현장에 있어서 뭔가 있지 않냐고 다들 의아해 하시는데 전혀 없었고요. 제가 119 구조대에서 특수구조대 중앙구조대까지 한 7년을 구조대를 했는데도 구조대원 특별 채용을 응시할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특수부대 출신들만 뽑는 것이 구조특채다 보니 구급대원으로 3년을 근무하고 자격증까지 땄음에도 충족 요건이 안 되고 구급대원 특채도 안 돼서 이번에는 당당하게 공개 채용 시험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안 힘드셨어요?
◇ 오영환 : 임기가 5월 29일에 끝났으면, 그 전주부터 스터디 카페를 1년을 등록을 해 놓고 3월 필기시험까지 꼬박 10달 하루 12시간씩.
◆ 김영민 : 그래도 한 번 만에 된 거네요?
◇ 오영환 : 그렇죠. 두 번을 할 자신이 없어서. 하루에 12시간을 앉아 있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 김영민 :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있다면요?
◇ 오영환 : 공부 자체가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의 죄책이죠. 집에 아까 말씀하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국회의원이 무슨 연금이 있지 않냐 이렇게 하시지만 연금은커녕 실업급여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끝난 사람은 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집에서는 딸이 커가는데, 딸은 보고 싶은데 놀아줄 시간도 충분치 않고 공부하러 가야 되고 그게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가족에게 가정적인 측면에서나 공백 기간이잖아요. 아무런 담보가 없는 확신이 없는 그게 가장 힘들었죠.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루어내셨습니다.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오영환 :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죠.
◆ 김영민 : 함께 수험 생활을 하는 친구분들이 한참 어린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런 거 보면서 어떠셨어요?
◇ 오영환 :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띠동갑이고 그러니까 같이 체력 학원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13살 차이고 이런 것들이 참. 그 빛나는 청춘들이 정말 젊은 그 땀방울이 소방관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되게 너무 보기 좋았고 고마웠고 그 곁에서 저도 함께 그걸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되게 특별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 김영민 : 같이 수험 생활하던 친구분들이 국회의원 출신인 걸 알고는 엄청 놀라지 않았나요?
◇ 오영환 : 놀라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거보다는 10년을 소방 현장에 있었다는 거에 자기들은 소방관을 꿈꾸는 청춘들인데.
◆ 김영민 : 오히려 그런 부분에?
◇ 오영환 : 그럼요. 저는 국회의원, 이거는 그냥 하나의 저에게도 전생같이 또 하나의 별도로 분리된 삶같이 느껴지고 저에게 더 자부심이 되는 건 10년 경력 소방관으로 근무했던 경험들이죠.
◆ 김영민 : 그렇군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시는데 더 소방 현장의 처우를 개선하고 많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정치 활동에 또 입문을 하셨었던 거잖아요. 국회의원으로서의 오영환이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가 있으셨는지 얼마나 이루셨던 것 같은지 이런 부분 여쭤볼게요.
◇ 오영환 : 제가 소방관으로 근무를 하는 동안 출동하는 동안 법이나 제도나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이 미비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이런 죄책감이 항상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바꾸기 위해 국회에 왔었고 궁극적으로는 덜 죽는 세상, 한 명이라도 더 구하고 한 명이라도 더 지킬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대한민국을 꿈꿨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입법 개선을 이뤄냈고 법 개정도 너무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너무 많이 이루어냈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법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열심히 노력해도 현장에서 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순직하는 동료들이 있고 저는 의정 활동에 다시 돌아가도 그만큼은 못하겠다 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많이 해도 한 반도 못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항상 들어요. 보람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어요.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렇게 열심히 하셨는데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 오영환 : 못 다한 일들이 더 기억에 남는 거죠.
◆ 김영민 : 그러네요. 이 얘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책도 출간을 하셨었잖아요.
◇ 오영환 : 그렇죠. 그거는 소방관 시절에 어린 날들에.
◆ 김영민 : 더 옛날로 저희가 돌아간 건데, 그때 책이 얼마나 팔렸습니까?
◇ 오영환 : ‘어느 소방관의 기도’, 제가 20대 소방관이던 시절에 낸,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그게 한 그래도 굉장히 많이 팔렸어요. 2만 3천 부 이렇게 넘게 팔렸고 왜냐하면 소방 수험생들이 주로 많이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 김영민 : 수험서 바이블 같은 건가요?
◇ 오영환 : 면접 필수 독서 이런 거.
◆ 김영민 : 그럴 수 있겠네요.
◇ 오영환 : 그렇죠. 그만큼 많이 팔렸고 또 인쇄를 저는 한 70%를 기부한다 이렇게 띠지에 적어놨었는데 순직 소방관 가족, 독거노인, 저소득층, 어린이 이렇게 한다고 했지만 막상 들어오는 걸 보니까 많지가 않은 거예요. 그냥 100%를 그냥 다 기부하고 오히려 더 보태서 더 기부하고 하다 보니까 그 책을 팔아서 기부한 것만 한 3천만 원은 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마침 만 10주년이 돼서 책을 낸 지 한 번 봤는데 그렇게 기부를 했더라고요.
◆ 김영민 : 그렇군요. 이 책 제목으로 하신 어느 소방관의 기도, 이게 미국의 스모키 린이라는 소방관이 쓴 시로 알려져 있는데 이걸 제목으로 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 오영환 : 우리나라 소방관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상징성을 갖는 시이기도 하죠. 2001년에 홍제동 사고 때 순직하신 김철홍 선배님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시고 전국의 소방서에 이시가 없는 소방서가 없을 거예요. 벽에 걸리거나 활용되고 국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이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대표하는 그냥 딱 한 문장으로 하면 그 제목이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 김영민 : 저도 이 시는 익히 잘 알고 있는데 시는 또 낭독하는 맛이잖아요. 멋진 목소리로 한번 읽어봐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번 읽어봐 주시겠어요?
◇ 오영환 :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내가 늘 깨어 살필 수 있게 하시어 갸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주소서
◆ 김영민 : 소방관의 목소리로 듣는 어느 소방관의 기도, 업무에 임할 때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너무너무 소름 돋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까운 가족 중에도 소방관이 있지만 평상시에 너무 존경스럽다 이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거든요. 근데 정말 이렇게 업무에 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혹시 두 번째 출간 계획도 있으세요?
◇ 오영환 : 안 그래도 만 10년이 됐고 소방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도 더 늘어났기 때문에 원래 있던 어느 소방관의 기도 계정 증보를 출간을 준비하고 있고요. 그 이후에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고 제가 복귀하기까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또 하나의 책으로 담고 싶은데 그거는 현장에 복귀한 뒤에 순차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준비하고 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정말 더 다채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담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오영환 : 무거운 이야기들이 주로 담기게 될 것 같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YTN 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최초의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에서 이제는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이 될 오영환 예비소방관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희 출연하신 분들의 신청곡 들어보는 나의 인생, 나의 노래 순서 가져볼 텐데요. 신청곡 노래로 가지고 오셨어요?
◇ 오영환 : 네, 오래된 노래이긴 하지만 이미숙 선생님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이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 김영민 : 이 곡을 선곡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 오영환 : 이 노래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저도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에 나오는 가사가 특히 동료들을 떠나보낼 때, 동료들을 기억할 때 항상 생각하고 혼자 머릿속에 마음속에 맴도는 노래이기도 하거든요. 소방의날인 만큼 제가 소방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를 신청했습니다.
◆ 김영민 : 네, 좋습니다. 그 의미를 한번 되새기면서 노래 들어보시죠. 이미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함께하셨습니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 주인공,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또다시 소방관이 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 오영환 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노래 듣고 오시니까.
◇ 오영환 : 참 많은 생각이 들죠. 그 노래를 언제 들었었는지도 생각이 나고.
◆ 김영민 : 맞습니다. 오영환 님과 함께 소방의 날 기념으로 저희가 방송하고 있는데요. 소방관 하면 굉장히 화제가 되는 게 있잖아요. 몸짱 소방관 달력. 이 달력이 매년 화제가 되는데 2026년 달력도 나왔다고 제가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영환 예비 소방관님도 이 달력 모델로 활동하신 적이 있으시죠?
◇ 오영환 :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게 저는 옷을 입고 찍는 달력이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 오영환 : 다만 몸짱 소방관 달력도 그렇고 제가 했던 베스티안 달력도 그렇고 화상 환자들을 그 수익으로 지원하고 이런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게 더 의미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김영민 : 네, 맞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소방관으로 정년퇴직하는 게 목표입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는데, 정말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소방관에 대한 꿈이 커졌던 게 언제부터이세요?
◇ 오영환 : 처음 이 소방관을 꿈꾸기 시작한 거는 학창시절 고등학교 때 한창 학교 때 친구들이나 입시에 관심을 가질 때 저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면서 무슨 일을 해야 내가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하던 차에 한 뉴스 한 장면을 보고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하면 내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다,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 김영민 : 저는 처음 아나운서 꿈을 키웠을 때 뉴스를 보고 그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을 보고 ‘어 나 저거 해야지’ 이랬는데 그 뉴스 속에 나오는 소방관을 보고 꿈을 키우셨군요.
◇ 오영환 : 상가에 화재가 났는데 엄청나게 화염이 컸고 시커먼 구름 같은 노년들이 막 피어오르는데 상인들이 막 엄청 서글프게 울고 있는 거예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루하루 먹고 살겠다고 하는 그 평범한 시민들이. 근데 그 분들의 모습에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어렵게 사셨으니까 딱 겹쳐 보이는 찰나에 거대한 불길 속으로 맞서서 싸우고 있고 시커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소방관들의 뒷모습을 보고 아 우리 부모님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꿈을, 일상을 지켜주는 직업이구나. 소방관을 저도 꿈꾸기 시작했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러면 처음으로 사람을 구했던 기억이 나신다면요?
◇ 오영환 : 그건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죠. 제가 소방관을 꿈꾸며 군대도 소방서로 갔어요. 의무소방이라고. 그때 해운대 소방서에 발령을 받고 해운대 해수욕장 수상 구조대에서 첫 임무를 시작하는데 그때 당시에 한창 성수기에, 2008년이니까 모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때 풍랑이 거세서 입수 통제를 할 정도였거든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리니까 물에 조금씩 들어가고 그러다 떠내려가고 저는 제트스키를 타고 구조대원으로 뒤에 탑승해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긴급하게 무전이 왔어요. 저기 해변 끄트머리에 수십 미터 뒤에 빨리 달려가라. 아니 그 멀리까지 왜 가라고 하는 거지 하고 막 달려갔더니 높고 높은 파도에 세상에 수십 미터를 한 70m, 100m 한 사람이 떠내려와서 거기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하더라고요. 가까이 가서 보니까 아주 조그마한 여자애. 구하려고 뛰어들었는데 파도에 집어 삼켜져서 애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저도 입수를 해서 손을 딱 뻗은 순간 그 아이가 제 손을 잡았어요. 딱 잡는 거예요. 제가 막 찾아서 잡은 게 아니라 그 애가 자기가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제 손을 구조대원의 손을 딱 잡는 거예요. 그때 그 마주 잡은 손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때 그 여자 아이의 눈빛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죠. 그게 벌써 거의 20년이 다 돼 가는 일인데도 여전히 그 손길 때문에라도 저는 현장에 구조대원으로 계속 근무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김영민 : 정말 의미 있는 경험을 매일매일 하실 수 있는 그런 직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구조했던 경험 외에도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아 진짜 소방관 하기 잘했다 이런 순간이 있으셨다면요.
◇ 오영환 : 뿌듯한 순간들은 너무 많죠. 내가 구해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정말 감사의 말씀을 하실 때 일상으로 돌아갈 때 심장이 멎었던 분이 다시 걷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상을 살아가는 그 소식을 듣거나 회복을 시켰을 때 나 소방차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고 웃어줄 때 존경의 눈빛을 보낼 때. 근데 그런 감사한 시간보다 아픔이 더 많은 직업이긴 하죠. 아까 처음 구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지만 구한 사람들의 얼굴보다 더 머리에 많이 남는 건 구하지 못한 얼굴들이 훨씬 더 기억에 많이 남고 그 옆에서 울고 있던 가족들의 눈빛이 더 죄책감으로 오래 남고 그런 거죠.
◆ 김영민 : 그렇군요. 소방관으로 일한다는 것이 그런 애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어요. 소방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 얘기가 언론 보도를 통해서 또 많이 나오잖아요. 더 개선됐으면 하는 그런 부분도 혹시 있으실까요?
◇ 오영환 : 물론 많이 발전했어요. 제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서도 많이 발전했고 10년 전에 비하면 더 많은 발전을 했고 인력도 많이 늘어났고 장비도 많이 좋아졌고 그렇지만 유일하게 변함없이 더 달라져야 되는 부분은 많은 인력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소방차에 탑승하는 대원들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소방서도 그만큼 늘어나고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또 정치인들의 선택에 의해서 안전센터가 늘어나고 소방차가 늘어나고 늘어난 인력을 분산 배치하다 보니까 출동하는 소방관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다 보니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관들의 안전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분들이 지켜내는 그 관할 구역의 국민들의 안전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저는 인력 문제만큼은 소방의 날인 만큼 인력만큼은 정원 자체를 증원을 해서. 지금은 충원만 하고 있어요. 차에 탑승하는 소방관의 수가 5명이라고 정해져 있으면 그 5명을 못 맞춰서 충원만 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원 자체를 6명, 7명을 해야 이분들이 무슨 트라우마나 질병이나 이런 거 걸렸을 때도 치료하고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마음껏 휴식이나 휴가나 교육이나 이런 걸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팀에서 또 흔히 말하는 대타를 구해야만 또 갈 수 있고 못 구하면 그냥 5명이서 탈 거를 3명에서 출동을 나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소방관의 안전을 위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인력만큼은 시급히 늘어나야 된다 이런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 김영민 : 이 얘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딸 바보시잖아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내분께서 바로 클라이밍 여제 김자인 선수입니다. 다시 소방관이 된 영환님께 김자인 선수께서는 말을 보통 해주시나요?
◇ 오영환 : 한 번에 해낸 것 자체에 대해서 정말 신기하다 대단하다는 응원을 많이 해 주죠. 제가 워낙 그 일을 얼마큼 간절히 기다렸고 꿈을 꾸는지를 아니까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 많이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 김영민 : 행복한 가정에도 제가 계속해서 응원을 드리고 축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소방의 날을 맞아서 저희가 방송을 하고 있는 만큼 청취자분들께 소방의 날을 맞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 오영환 : 저희 소방관들의 안전을 늘 염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거는 결국 한 명이라도 덜 다치시고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을이고 날씨가 추워지고 겨울이 다가오는데 화재의 가장 많은 원인은 전기입니다. 전열기구 사용이 늘어나는 겨울철에 또 불이 많이 납니다. 항상 우리 집 안에서 내 일상에서 난로나 휴대용 전열기구 이런 것들에 더 조심하시고 전기를 꼭 빼놓으시고 사용하실 때만 켜놓으시고 꺼져 있는지 확인하시고 그렇게 올 가을과 올 겨울에도 안전한 나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여러분들의 일상은 저희 대한민국 소방관이 최선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 김영민 : 아유 감사합니다. 전기를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저도 오늘 나오면서 어떻게 했는지를 머릿속으로 한번 되새겨 봤는데 오늘 좋은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사람들의 소중한 희망을 지켜주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다는 사람 오영환 예비 소방관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오영환 : 감사합니다.
◆ 김영민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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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내용 인용 시 YTN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김영민 아나운서 (이하 김영민) : 11월 9일, 오늘은 ‘제63회 소방의 날’입니다. 화재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소방 의식을 높이고자 지정한 날인데요. 오늘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에서는 ‘누군가 감당하기 힘든 위험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다’ 하는 분 모셨습니다. 앞서 오프닝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최초의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에서 이제는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으로 돌아오신 분을 모셨어요. 오영환 예비 소방관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오영환 예비소방관 (이하 오영환) : 네, 반갑습니다.
◆ 김영민 : 반갑습니다. 제가 일단 예비소방관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는데, 그 얘기하기 전에 간단하게 청취자분들께 자기소개 한번 부탁드릴게요.
◇ 오영환 : 저는 20년 동안 화재 구조 구급 현장에서 소방관으로 근무를 했었고요. 제21대 국회에서 소방을 대표하고 또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국회의원을 또 했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제가 사명으로 생각하는, 저의 천직으로 생각하는 소방 현장으로의 복귀를 앞두고 있는 오영환입니다. 반갑습니다.
◆ 김영민 : 아니 이런 이력을 가진 분이 대한민국에 또 계실까요? 정말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일단은 예비소방관이라고 저희가 지칭한 이유가 있습니다. 서울소방본부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을 또다시 하셨는데, 아직 일은 안 하고 계신 거죠?
◇ 오영환 : 그렇죠. 7월 중순쯤에 최종 합격 발표가 났는데요. 보통 소방관들은 합격을 하고 나면 6개월씩 소방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하지만 저는 15년 전에 이미 기본 교육을 수료했기 때문에 학교는 들어가지 않고 발령을 기다리는데, 한 1월까지는 기다려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 김영민 :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 오영환 : 지금은 수영장에 라이프 가드라고 인명 구조 요원이 항상 있습니다. 물놀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빨간 옷을 입은 분들, 그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자격증이 인명구조사, 응급구조사 이렇게 다 사람 살리는 자격증밖에 없어서 전문성을 활용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저도 미디어를 통해서 의정 활동 하실 때 많이 뵀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방송은 엄청 오랜만이신 거죠?
◇ 오영환 : 그렇죠. 방송이나 이런 걸 할 기회도 없었고 할 의지도 없었죠. 그냥 시험공부 열심히 하고 빨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어서 했다가 소방의 날을 기념해서 제가 제 생일보다 좋아하는 날이 소방의 날인데 특별히 불러주셔서 이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 김영민 : 어떠세요? 마이크 앞에 앉으신 기분이.
◇ 오영환 : 너무 어색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김영민 : 앞서서 라이프 가드 일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알아보는 분은 없으세요?
◇ 오영환 : 전혀 그런 게 없고요. 얼마 전에 지난주에 있었던 일인데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너무 즐겁게 노시길래 저도 열심히 지켜드리고 궁금해하시는 거 답변도 드리고 했는데 나가시는 길에 갑자기 이름을 물어보시더라고요. 혹시 알아보셨나? 이런 생각을 했더니 알고 보니까 친절한 직원 칭찬하는 게시판에 오영환이라는 인명 구조 요원 분이 너무 이렇게 친절하셨다 이렇게 글을 써주신 기억이 있네요.
◆ 김영민 : 그렇군요. 저도 수영장 갔을 때 라이프 가드 분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요. 생각보다 알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국회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정말 열심히 하시다가 불출마 선언을 하시고 다시 소방관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을 하셨어요. 그때 많은 분들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세요?
◇ 오영환 : 물론 너무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저는 처음 국회에 갈 때부터 나는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결정은 내려져 있었습니다. 다만 지역구로 공천을 받다 보니 그분들에 대한 의지나 신뢰나 지역에서의 발전이나 이런 일을 하려면 그래도 최소 두 번은 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마음을 먹게 되면서 많은 분들이 놀라셨었죠. 그러나 제가 소방 현장으로 다시 복귀하고 돌아가는 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기정사실이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정확히 내년 1월에 돌아가면 얼마 만에 복귀하시는 건가요?
◇ 오영환 : 사직서를 냈던 게 12월 둘째 주 정도 되거든요. 곧 만 6년이 됩니다.
◆ 김영민 : 그러네요. 엄청 오랜만에 돌아가시는 것일 텐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했을 때 아무래도 가정이 있으시다 보니까 가족들의 반응도 굉장히 중요했을 것 같아요. 어떠셨어요?
◇ 오영환 : 저희 가족들은 항상 제가 무슨 선택을 하건 결정을 하건 제가 그냥 통보를 하는 것이 너무 익숙하시다 보니 그냥 또 오영환이 오영환답게 했구나. 존중해 주고 환영해 줬지만 중요한 거는 당장 소방관 시험 합격할 때까지 아파트 대출은 어떡하지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죠.
◆ 김영민 : 그럴 때 또 옆에서 힘이 돼 주는 게 가족이고 그러니까 아마 같이 잘 이겨내셨을 것 같은데, 국회의원을 하고 다시 소방관으로 돌아가면 국회의원 특채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오영환 : 다들 뭔가 국회의원 출신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10년을 소방 현장에 있어서 뭔가 있지 않냐고 다들 의아해 하시는데 전혀 없었고요. 제가 119 구조대에서 특수구조대 중앙구조대까지 한 7년을 구조대를 했는데도 구조대원 특별 채용을 응시할 자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특수부대 출신들만 뽑는 것이 구조특채다 보니 구급대원으로 3년을 근무하고 자격증까지 땄음에도 충족 요건이 안 되고 구급대원 특채도 안 돼서 이번에는 당당하게 공개 채용 시험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안 힘드셨어요?
◇ 오영환 : 임기가 5월 29일에 끝났으면, 그 전주부터 스터디 카페를 1년을 등록을 해 놓고 3월 필기시험까지 꼬박 10달 하루 12시간씩.
◆ 김영민 : 그래도 한 번 만에 된 거네요?
◇ 오영환 : 그렇죠. 두 번을 할 자신이 없어서. 하루에 12시간을 앉아 있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 김영민 :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있다면요?
◇ 오영환 : 공부 자체가 힘들다기보다는 그냥 마음의 죄책이죠. 집에 아까 말씀하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국회의원이 무슨 연금이 있지 않냐 이렇게 하시지만 연금은커녕 실업급여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국회의원 끝난 사람은 버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집에서는 딸이 커가는데, 딸은 보고 싶은데 놀아줄 시간도 충분치 않고 공부하러 가야 되고 그게 경제적인 측면에서나 가족에게 가정적인 측면에서나 공백 기간이잖아요. 아무런 담보가 없는 확신이 없는 그게 가장 힘들었죠.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렇지만 이루어내셨습니다. 너무너무 고생 많으셨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오영환 :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죠.
◆ 김영민 : 함께 수험 생활을 하는 친구분들이 한참 어린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런 거 보면서 어떠셨어요?
◇ 오영환 : 같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띠동갑이고 그러니까 같이 체력 학원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다 보니 13살 차이고 이런 것들이 참. 그 빛나는 청춘들이 정말 젊은 그 땀방울이 소방관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되게 너무 보기 좋았고 고마웠고 그 곁에서 저도 함께 그걸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되게 특별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 김영민 : 같이 수험 생활하던 친구분들이 국회의원 출신인 걸 알고는 엄청 놀라지 않았나요?
◇ 오영환 : 놀라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거보다는 10년을 소방 현장에 있었다는 거에 자기들은 소방관을 꿈꾸는 청춘들인데.
◆ 김영민 : 오히려 그런 부분에?
◇ 오영환 : 그럼요. 저는 국회의원, 이거는 그냥 하나의 저에게도 전생같이 또 하나의 별도로 분리된 삶같이 느껴지고 저에게 더 자부심이 되는 건 10년 경력 소방관으로 근무했던 경험들이죠.
◆ 김영민 : 그렇군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시는데 더 소방 현장의 처우를 개선하고 많은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 정치 활동에 또 입문을 하셨었던 거잖아요. 국회의원으로서의 오영환이 꼭 이루고 싶었던 목표가 있으셨는지 얼마나 이루셨던 것 같은지 이런 부분 여쭤볼게요.
◇ 오영환 : 제가 소방관으로 근무를 하는 동안 출동하는 동안 법이나 제도나 시스템이나 이런 것들이 미비해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 이런 죄책감이 항상 있는 상태에서 그런 것들을 바꾸기 위해 국회에 왔었고 궁극적으로는 덜 죽는 세상, 한 명이라도 더 구하고 한 명이라도 더 지킬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대한민국을 꿈꿨었는데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입법 개선을 이뤄냈고 법 개정도 너무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너무 많이 이루어냈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법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바꾸고 열심히 노력해도 현장에서 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순직하는 동료들이 있고 저는 의정 활동에 다시 돌아가도 그만큼은 못하겠다 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많이 해도 한 반도 못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항상 들어요. 보람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어요.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렇게 열심히 하셨는데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 오영환 : 못 다한 일들이 더 기억에 남는 거죠.
◆ 김영민 : 그러네요. 이 얘기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책도 출간을 하셨었잖아요.
◇ 오영환 : 그렇죠. 그거는 소방관 시절에 어린 날들에.
◆ 김영민 : 더 옛날로 저희가 돌아간 건데, 그때 책이 얼마나 팔렸습니까?
◇ 오영환 : ‘어느 소방관의 기도’, 제가 20대 소방관이던 시절에 낸,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그게 한 그래도 굉장히 많이 팔렸어요. 2만 3천 부 이렇게 넘게 팔렸고 왜냐하면 소방 수험생들이 주로 많이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 김영민 : 수험서 바이블 같은 건가요?
◇ 오영환 : 면접 필수 독서 이런 거.
◆ 김영민 : 그럴 수 있겠네요.
◇ 오영환 : 그렇죠. 그만큼 많이 팔렸고 또 인쇄를 저는 한 70%를 기부한다 이렇게 띠지에 적어놨었는데 순직 소방관 가족, 독거노인, 저소득층, 어린이 이렇게 한다고 했지만 막상 들어오는 걸 보니까 많지가 않은 거예요. 그냥 100%를 그냥 다 기부하고 오히려 더 보태서 더 기부하고 하다 보니까 그 책을 팔아서 기부한 것만 한 3천만 원은 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마침 만 10주년이 돼서 책을 낸 지 한 번 봤는데 그렇게 기부를 했더라고요.
◆ 김영민 : 그렇군요. 이 책 제목으로 하신 어느 소방관의 기도, 이게 미국의 스모키 린이라는 소방관이 쓴 시로 알려져 있는데 이걸 제목으로 하신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 오영환 : 우리나라 소방관들에게도 굉장히 많이 상징성을 갖는 시이기도 하죠. 2001년에 홍제동 사고 때 순직하신 김철홍 선배님의 책상에 놓여져 있던 시고 전국의 소방서에 이시가 없는 소방서가 없을 거예요. 벽에 걸리거나 활용되고 국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이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대표하는 그냥 딱 한 문장으로 하면 그 제목이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 김영민 : 저도 이 시는 익히 잘 알고 있는데 시는 또 낭독하는 맛이잖아요. 멋진 목소리로 한번 읽어봐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한번 읽어봐 주시겠어요?
◇ 오영환 :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뜨거운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 내가 늘 깨어 살필 수 있게 하시어 갸냘픈 외침까지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화재를 진압하게 하소서 그리고 신의 뜻에 따라 저의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아내와 가족을 돌보아주소서
◆ 김영민 : 소방관의 목소리로 듣는 어느 소방관의 기도, 업무에 임할 때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너무너무 소름 돋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가까운 가족 중에도 소방관이 있지만 평상시에 너무 존경스럽다 이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거든요. 근데 정말 이렇게 업무에 임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혹시 두 번째 출간 계획도 있으세요?
◇ 오영환 : 안 그래도 만 10년이 됐고 소방 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도 더 늘어났기 때문에 원래 있던 어느 소방관의 기도 계정 증보를 출간을 준비하고 있고요. 그 이후에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고 제가 복귀하기까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또 하나의 책으로 담고 싶은데 그거는 현장에 복귀한 뒤에 순차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준비하고 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정말 더 다채롭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이 담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오영환 : 무거운 이야기들이 주로 담기게 될 것 같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YTN 라디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최초의 소방관 출신 국회의원에서 이제는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이 될 오영환 예비소방관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저희 출연하신 분들의 신청곡 들어보는 나의 인생, 나의 노래 순서 가져볼 텐데요. 신청곡 노래로 가지고 오셨어요?
◇ 오영환 : 네, 오래된 노래이긴 하지만 이미숙 선생님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이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 김영민 : 이 곡을 선곡하신 이유가 있으실까요?
◇ 오영환 : 이 노래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저도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에 나오는 가사가 특히 동료들을 떠나보낼 때, 동료들을 기억할 때 항상 생각하고 혼자 머릿속에 마음속에 맴도는 노래이기도 하거든요. 소방의날인 만큼 제가 소방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를 신청했습니다.
◆ 김영민 : 네, 좋습니다. 그 의미를 한번 되새기면서 노래 들어보시죠. 이미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함께하셨습니다. 행복한 쉼표 잠시만요.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오늘 주인공,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또다시 소방관이 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의원 출신 소방관 오영환 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노래 듣고 오시니까.
◇ 오영환 : 참 많은 생각이 들죠. 그 노래를 언제 들었었는지도 생각이 나고.
◆ 김영민 : 맞습니다. 오영환 님과 함께 소방의 날 기념으로 저희가 방송하고 있는데요. 소방관 하면 굉장히 화제가 되는 게 있잖아요. 몸짱 소방관 달력. 이 달력이 매년 화제가 되는데 2026년 달력도 나왔다고 제가 얘기를 들었습니다. 오영환 예비 소방관님도 이 달력 모델로 활동하신 적이 있으시죠?
◇ 오영환 :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 게 저는 옷을 입고 찍는 달력이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 오영환 : 다만 몸짱 소방관 달력도 그렇고 제가 했던 베스티안 달력도 그렇고 화상 환자들을 그 수익으로 지원하고 이런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게 더 의미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김영민 : 네, 맞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소방관으로 정년퇴직하는 게 목표입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는데, 정말 평생을 소방관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소방관에 대한 꿈이 커졌던 게 언제부터이세요?
◇ 오영환 : 처음 이 소방관을 꿈꾸기 시작한 거는 학창시절 고등학교 때 한창 학교 때 친구들이나 입시에 관심을 가질 때 저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면서 무슨 일을 해야 내가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하던 차에 한 뉴스 한 장면을 보고 소방관이라는 직업을 하면 내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다, 내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납니다.
◆ 김영민 : 저는 처음 아나운서 꿈을 키웠을 때 뉴스를 보고 그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을 보고 ‘어 나 저거 해야지’ 이랬는데 그 뉴스 속에 나오는 소방관을 보고 꿈을 키우셨군요.
◇ 오영환 : 상가에 화재가 났는데 엄청나게 화염이 컸고 시커먼 구름 같은 노년들이 막 피어오르는데 상인들이 막 엄청 서글프게 울고 있는 거예요.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루하루 먹고 살겠다고 하는 그 평범한 시민들이. 근데 그 분들의 모습에 저희 부모님도 그렇게 어렵게 사셨으니까 딱 겹쳐 보이는 찰나에 거대한 불길 속으로 맞서서 싸우고 있고 시커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소방관들의 뒷모습을 보고 아 우리 부모님같이 평범한 사람들을, 꿈을, 일상을 지켜주는 직업이구나. 소방관을 저도 꿈꾸기 시작했었습니다.
◆ 김영민 : 그렇군요. 그러면 처음으로 사람을 구했던 기억이 나신다면요?
◇ 오영환 : 그건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죠. 제가 소방관을 꿈꾸며 군대도 소방서로 갔어요. 의무소방이라고. 그때 해운대 소방서에 발령을 받고 해운대 해수욕장 수상 구조대에서 첫 임무를 시작하는데 그때 당시에 한창 성수기에, 2008년이니까 모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때 풍랑이 거세서 입수 통제를 할 정도였거든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몰리니까 물에 조금씩 들어가고 그러다 떠내려가고 저는 제트스키를 타고 구조대원으로 뒤에 탑승해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긴급하게 무전이 왔어요. 저기 해변 끄트머리에 수십 미터 뒤에 빨리 달려가라. 아니 그 멀리까지 왜 가라고 하는 거지 하고 막 달려갔더니 높고 높은 파도에 세상에 수십 미터를 한 70m, 100m 한 사람이 떠내려와서 거기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를 하더라고요. 가까이 가서 보니까 아주 조그마한 여자애. 구하려고 뛰어들었는데 파도에 집어 삼켜져서 애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저도 입수를 해서 손을 딱 뻗은 순간 그 아이가 제 손을 잡았어요. 딱 잡는 거예요. 제가 막 찾아서 잡은 게 아니라 그 애가 자기가 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제 손을 구조대원의 손을 딱 잡는 거예요. 그때 그 마주 잡은 손길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을 때 그 여자 아이의 눈빛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하죠. 그게 벌써 거의 20년이 다 돼 가는 일인데도 여전히 그 손길 때문에라도 저는 현장에 구조대원으로 계속 근무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김영민 : 정말 의미 있는 경험을 매일매일 하실 수 있는 그런 직업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구조했던 경험 외에도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아 진짜 소방관 하기 잘했다 이런 순간이 있으셨다면요.
◇ 오영환 : 뿌듯한 순간들은 너무 많죠. 내가 구해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정말 감사의 말씀을 하실 때 일상으로 돌아갈 때 심장이 멎었던 분이 다시 걷고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일상을 살아가는 그 소식을 듣거나 회복을 시켰을 때 나 소방차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같이 사진 찍자고 하고 웃어줄 때 존경의 눈빛을 보낼 때. 근데 그런 감사한 시간보다 아픔이 더 많은 직업이긴 하죠. 아까 처음 구한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지만 구한 사람들의 얼굴보다 더 머리에 많이 남는 건 구하지 못한 얼굴들이 훨씬 더 기억에 많이 남고 그 옆에서 울고 있던 가족들의 눈빛이 더 죄책감으로 오래 남고 그런 거죠.
◆ 김영민 : 그렇군요. 소방관으로 일한다는 것이 그런 애환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도 들어요. 소방관 분들의 처우에 대해서 얘기가 언론 보도를 통해서 또 많이 나오잖아요. 더 개선됐으면 하는 그런 부분도 혹시 있으실까요?
◇ 오영환 : 물론 많이 발전했어요. 제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비해서도 많이 발전했고 10년 전에 비하면 더 많은 발전을 했고 인력도 많이 늘어났고 장비도 많이 좋아졌고 그렇지만 유일하게 변함없이 더 달라져야 되는 부분은 많은 인력이 늘어났다고 하지만 소방차에 탑승하는 대원들의 수가 늘어나지 않았거든요. 왜냐하면 소방서도 그만큼 늘어나고 국민들의 요구에 의해서 또 정치인들의 선택에 의해서 안전센터가 늘어나고 소방차가 늘어나고 늘어난 인력을 분산 배치하다 보니까 출동하는 소방관의 숫자가 늘어나지 않다 보니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관들의 안전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분들이 지켜내는 그 관할 구역의 국민들의 안전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저는 인력 문제만큼은 소방의 날인 만큼 인력만큼은 정원 자체를 증원을 해서. 지금은 충원만 하고 있어요. 차에 탑승하는 소방관의 수가 5명이라고 정해져 있으면 그 5명을 못 맞춰서 충원만 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원 자체를 6명, 7명을 해야 이분들이 무슨 트라우마나 질병이나 이런 거 걸렸을 때도 치료하고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마음껏 휴식이나 휴가나 교육이나 이런 걸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른 팀에서 또 흔히 말하는 대타를 구해야만 또 갈 수 있고 못 구하면 그냥 5명이서 탈 거를 3명에서 출동을 나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소방관의 안전을 위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인력만큼은 시급히 늘어나야 된다 이런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 김영민 : 이 얘기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딸 바보시잖아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내분께서 바로 클라이밍 여제 김자인 선수입니다. 다시 소방관이 된 영환님께 김자인 선수께서는 말을 보통 해주시나요?
◇ 오영환 : 한 번에 해낸 것 자체에 대해서 정말 신기하다 대단하다는 응원을 많이 해 주죠. 제가 워낙 그 일을 얼마큼 간절히 기다렸고 꿈을 꾸는지를 아니까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니까 많이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 김영민 : 행복한 가정에도 제가 계속해서 응원을 드리고 축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소방의 날을 맞아서 저희가 방송을 하고 있는 만큼 청취자분들께 소방의 날을 맞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 오영환 : 저희 소방관들의 안전을 늘 염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건 너무 감사하지만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거는 결국 한 명이라도 덜 다치시고 그런 비극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을이고 날씨가 추워지고 겨울이 다가오는데 화재의 가장 많은 원인은 전기입니다. 전열기구 사용이 늘어나는 겨울철에 또 불이 많이 납니다. 항상 우리 집 안에서 내 일상에서 난로나 휴대용 전열기구 이런 것들에 더 조심하시고 전기를 꼭 빼놓으시고 사용하실 때만 켜놓으시고 꺼져 있는지 확인하시고 그렇게 올 가을과 올 겨울에도 안전한 나날들 보내시길 바라며 여러분들의 일상은 저희 대한민국 소방관이 최선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 김영민 : 아유 감사합니다. 전기를 정말 조심해야겠네요. 저도 오늘 나오면서 어떻게 했는지를 머릿속으로 한번 되새겨 봤는데 오늘 좋은 말씀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사람들의 소중한 희망을 지켜주기 위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다는 사람 오영환 예비 소방관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 오영환 : 감사합니다.
◆ 김영민 :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는 YTN 라디오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서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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