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백두혈통 김정은, 북한 정통세력 위기 보강으로 백두산 사진 연출”

[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백두혈통 김정은, 북한 정통세력 위기 보강으로 백두산 사진 연출”

2019.10.17. 오전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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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희의출발새아침] “백두혈통 김정은, 북한 정통세력 위기 보강으로 백두산 사진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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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노영희의 출발 새아침]

□ 방송일시 :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 출연자 :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중국 조선 국경 획정 논의는 조선 숙종 때부터 있던 것
-백두산은 우리땅 잘라서 중국에 팔았다는 것은 큰 오해
-백두산정계비 내용과 위치 잘못된 것
-고종 대한제국 선포 이후 백두산이 중요한 산으로 부각되기 시작
-남북 진전 반대하는 북한 정통세력 위기 보강으로 백두산 사진 연출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노영희 변호사(이하 노영희): 뉴스를 각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뉴스 탐구생활. 오늘은 바른 역사 시간인데요. 역사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뉴스를 똑바로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 전우용 한국학중앙연구원 객원교수(이하 전우용): 안녕하세요.

◇ 노영희: 우리가 참 이 시간만 되면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에서 현안이 접합되는 그런 느낌을 제가 받는데, 오늘은 어떤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실 건가요?

◆ 전우용: 어저께 화제가 됐던 한 장의 사진이죠. 백두산의 백마인데, 백마 이야기는 빼고 백두산 이야기만 좀 들려드릴까 합니다.

◇ 노영희: 어제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는데, 하얀 눈으로 덮인 백두산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오르는 모습이었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좀 불만이에요. 우리가 백마 탄 왕자님에 대한 환상이 사실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그게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 전우용: 그런데 백마 탄 왕자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환상이죠. 왕자가 잘생기란 법이 어디 있어요. 김정은 같이 생긴 왕자들도 많았을 거예요, 옛날에.

◇ 노영희: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요, 또 영어에 이런 표현이 있대요. 백마 탄 왕자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Charming Prince’라는 게 있대요. 매력적이다,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백마 탄 왕자님은 원래 그래야 하는 거죠.

◆ 전우용: 아니, 왕자라는 직함이 매력적인 거지, 왕자라는 사람이 얼굴이 매력적이란 법은 없어요. 그리고 왕자이기만 하면 인물이 어때도 매력적이지 않겠어요?

◇ 노영희: 하긴 그렇습니다. 그 사람의 지위가 중요하죠. 그런데요. 우리한테는, 저한테는 솔직히 좀 별로 안 좋은 느낌이었지만 북한 주민들에게는 그 사진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클 것 같습니다.

◆ 전우용: 그렇죠. 그러니까 이미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 당대부터 김정일이 김일성의 항일유격대 활동을 하는 기간 중에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유포했어요. 사실은 하바롭스크에 있는 당시 동부 진지에서 태어났는데, 하바롭스크인데도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그래서 김일성 일가를 백두혈통이라고 부르죠. 백두산은 마치 북한 정권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징적인 산이다. 이런 식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70년 넘게 홍보해 왔고요. 그런 점에서 백두산에서 백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해서 주민들에게 유포한 것은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 노영희: 하필이면 이 타임에?

◆ 전우용: 실제로 백두혈통으로서의 김정은의 리더십에 대해서 그동안 특히 북미회담, 특히 남북관계. 우리만 이게 빨리 진척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건 아니잖아요. 북한 주민들도 이게 풀리기를 많이 기대했을 것이고요. 반면에 북한 내에도 이런 남북관계의 진전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수도 있는데. 저희가 남북관계 전문가는 아니니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정통성의 위기라고 하는 것을 느꼈든지, 아니면 그걸 좀 더 보강할 필요를 느꼈든지. 그래서 백두산에서 백마 탄 모습을 의도적으로 촬영해서 연출해서 북한 주민들에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노영희: 선전용으로 일부러 한 것 같다. 그리고 백두산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남한이나 우리 쪽하고는 다르게 북한의 주민들에겐 다가갈 것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북한이 백두산을 절반을 잘라서 중국에 선물했다, 팔았다. 이런 이야기는 도대체 뭡니까? 그런 이야기 있긴 있잖아요.

◆ 전우용: 굉장히 오래된 오해이죠. 오래된 오해이고요. 또 일부 악의가 좀 개입돼 있는 언론보도가 작용했죠. 백두산은 우리 땅이다라는 건 우리 상식이에요. 백두산은 우리 땅인 건 우리의 상식인데, 백두산부터 우리 땅이죠. 백두산이 우리 국토의 최북단이잖아요. 그러면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이냐, 아니면 백두산의 반쪽이 우리 땅이냐.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안 했던 거예요. 실제로는 백두산을 둘러싸고 어디부터가 중국 땅이고 어디부터가 조선 땅이냐라는 국경 획정 논의는 조선 숙종 때부터 있었어요. 그때 백두산정계비를 세웠죠. 그런데 정계비 내용과 정계비 위치가 문제였어요. 그 당시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 이렇게 돼 있었는데, 비석을 세울 때는 동쪽으로 토문강, 서쪽으로 압록강이라고 써놨어요. 토문강이란 강이 따로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강은 송화강의 지류예요. 그걸 경계로 삼아버리면 만주 전체가 우리 땅이 되는 거죠. 어마어마한 땅을 가지고 정계비를 세웠던 것인데. 사실은 조선 숙종 연간에 중국 측 대표하고 조선 측 대표 사이에 합의는 됐는데 정계비를 잘못 세웠던 것이죠. 정계비를 잘못 세웠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어요. 그래서 서로 그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논의를 하다가 조선 조정에서는 잘못 세웠다는 것을 우리가 중국에 알렸다가는 공연히 지금 중국 사신이 문책을 당할 것이고, 그다음에 새로운 사신이 오면 더 나쁜 조건으로 영토를 획정하자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른 척하고 있자.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갔어요. 그래서 18세기에는 그렇게 넘어갔는데, 1880년대가 돼서 새로 국경을 획정하는 문제가 되면서 1885년부터 1909년까지 사실은 25년 가까운 기간 동안 당시 조선 대한제국 정부와 청나라 사이에, 또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싸고 계속 백두산 국경을 둘러싸고 논란이 됐었는데. 일단 1885년 당시에 합의가 된 것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한다라고 하는 것은 합의가 됐어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백두산 천지에서 둘 다 발원을 하는데, 이 물이 천지에서 그냥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일부 구간은 땅속으로 잠류라고 하죠. 땅속으로 들어가서 지상에 안 보여요. 그랬다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었거든요. 게다가 지류가 여러 개가 있으니까 중국 쪽은 가능하면 중국 쪽에 넓도록, 그러니까 두만강 지류의 최남단을 경계선으로 하자라고 주장했고, 조선 쪽은 최북단을 경계로 하자라고 주장했던 거예요. 그런데 1909년 간도협약 때에는 일본이 중국 측 요구를 일방적으로 다 들어주고, 그리고 대신에 간도에서의 일본의 이권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넘어가버렸어요.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우리와 중국과의 경계선은 두만강 지류의 최남단에 정해져 있었거든요. 그랬다가 한국전쟁 끝나고 중국과 북한 사이에 다시 일본과 중국이 맺은 간도협약을 인정할 것이냐. 중국 쪽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재획정을 해야 하는데. 그때 또 조선시대에 논란이 계속 됐던 것이죠. 그런데 당시가 중소 분쟁 상황이었고.

◇ 노영희: 중국하고 소련이 분쟁 상황이었죠.

◆ 전우용: 예, 중국과 소련이 영토분쟁을 하던 상황이었고, 이런 분쟁 상황을 북한 쪽에서 교묘하게 이용한 거죠. 중국 쪽의 가급적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서.

◇ 노영희: 잘했네요, 그래도.

◆ 전우용: 잘했죠. 게다가 그래서 당시 중국의 2인자였던 주은래(周恩来·저우언라이)였던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이게 왜 외교 문제냐. 우리와 북한은 사실 전쟁을 같이 한, 6·25 전쟁을 같이 치렀으니까. 혈맹이기 때문에 대교라고 해야 한다, 외교가 아니다. 그리고 북한이 전쟁의 참회에서 갓 벗어났으니까 우리 중국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양보하자. 그래서 오히려 일제강점기 때보다 땅을 꽤 넓게, 40만평 정도 된다고 하던가요. 확보했죠. 그래서 1962년에 조중변계조약이라는 것으로 북중 국교 문제가 일단락됐고. 그래서 전체 백두산 천지 면적을 보면 55%가 북한 쪽, 45%가 중국 쪽, 이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 노영희: 어쨌든 북한하고 중국, 국경선을 다시 획정하는 그런 논의에 우리 정부는 전혀끼지 못했다. 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 전우용: 거기에,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만 해도 우리가 중국에 대해서는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이런 노래 부를 때이고. 그리고 그런 사실도 까맣게 몰랐어요. 까맣게 몰랐으니까 80년대까지도, 사실은 80년대 말에 가서야 조중변계조약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 그때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조중변계조약, 북한과 중국의 경계선이 백두산을 가로지른다라는 사실을 알게 돼서는 나름대로 마음대로 추측을 해서 북한이 한국전쟁에 대한 감사 표시로 백두산 반을 떼어줬다라는 이야기를 유포시켰죠.

◇ 노영희: 어쨌든 그렇다면 남북한을 막론하고 결국 백두산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국까지, 소련까지 다 포함해서 상당한 것 같은데요. 지금 우리는 사실 백두산에 우리가 독자적으로는 못 가잖아요. 중국을 통해서밖에 못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 전우용: 현재로선 그렇죠.

◇ 노영희: 그렇게 되면 김정은이 사실은 좀 어떻게든 간에 우리도 갈 수 있게끔 해준다든가, 뭔가 조치를 취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 전우용: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 방북했을 때 백두산을 북한을 통해서 가고 싶다라고 전부터 그랬다고 해서 그 길을 열어줬잖아요. 남북관계가 잘돼서 관광사업이라도 시작이 되면 당장 금강산을 넘어서 가고 싶은 데가 북한을 통해 백두산 올라가는 거겠죠. 그게 지금 안 풀리고 있으니까 답답한 거죠.

◇ 노영희: 그러니까 이게 김정은의 정치적 선전도구로 계속해서 이용되고 있는 현 상황, 이런 것들이 조금 안타까운 상황이다. 그러면 우리 애국가 이런 데도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이런 이야기 나오는데, 남한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백두산은 정확히 무슨 의미라고 봐야 합니까?

◆ 전우용: 사실 백두산이 민족의 성산으로 떠오른 것이 얼마 되지 않아요. 

◇ 노영희: 아, 원래는 안 그랬습니까?

◆ 전우용: 일부에서는 아주 고대부터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시원지이다, 이렇게 주장하시는데. 신라가 삼국 통일하고 고구려 영토 대부분이 당나라에 넘어가면서 우리 민족의 땅에서 벗어났죠. 고려 때도 백두산까지는 우리 땅이 아니었고요. 조선 초에 4군6진 세종 때 설치하면서, 그래서 남이장군의 시조가 처음 나와요, 시가. 백두산석 마도진(白頭山石 磨刀盡)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백두산의 돌들을 칼을 갈아 다 없앴다라고 하는 것이 그때 처음 나오는데. 그래도 당시 교통형편이나 지리관이나, 심상지리에서 보자면 백두산은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잘 안 들어오는 거였어요. 백두산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건 오히려 일본에 조선통신사가 갈 때 우리 조선통신사들이 보기에 도쿄 뒤에 우뚝 서 있는 후지산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일본인들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고요. 그러니까 필담을 나누면서 우리에게도 그에 필적하는 산이 있다. 그게 백두산이다. 그런데 수도 옆에 있는 후지산하고 저 변경에 있는 백두산하고가 같이 비교되는 게 쉽지 않았겠죠. 백두산이 본격적으로 중요한 산으로 부각된 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황제가 되면 4독5악 이런 것들을 선포합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는 명산이나 대천들을 작위를 줘요. 그래서 5악이라고 해서 북한산,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이런 것들을 5개의 큰 산으로 지정했었는데 그때 백두산이 굉장히 중요한 산으로 자리 잡았고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애국가 작사가 나올 때 ‘동해물과 백두산’ 원래는 이게 ‘성자신손 오천년’ 의미였어요. 이게 1910년대에 가서 애국가 가사로 자리잡은 건데, 이것은 1910년 전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망명을 가면서 백두산을 보았던 기억과 관련이 있습니다.

◇ 노영희: 그래서 우리 애국가에 편입이 되게 됐고, 지금까지 현재 우리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군요. 오늘 백두산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감사합니다.

◇ 노영희: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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