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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내가 미 국무장관인데..." 사기는 이렇게 현실이 된다
Posted : 2019-05-04 08:00
[와이파일]"내가 미 국무장관인데..." 사기는 이렇게 현실이 된다
"내 친구가 검산데..." "내 친구가 변호산데..." 이런 인맥 자랑, 한 번쯤 들어보셨죠. 그런데 그 인맥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무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같은 사람 말입니다. 전 세계 외교를 좌지우지하는, 북한 비핵화 협상의 큰 축인 폼페이오 장관! 만약 당신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면요? "내 돈 300억을 갖고 한국에서 당신과 함께 사업하고 싶다!"

[와이파일]"내가 미 국무장관인데..." 사기는 이렇게 현실이 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요? 제가 실제로 받은 제안입니다. 저는 자신이 폼페이오 장관이라는 분과 한 달 넘게 이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페이스북으로 대화도 나눴습니다. 우리는 막역한 사이입니다. 장관(?)님은 저를 'my dear brother(친애하는 형제)'라고 부릅니다. 브라더. 그것도 디어 브로. 한국과 미국이 피를 나눈 혈맹 국가라는 걸 암시하는 장관(?)님의 배려일까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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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가 폼페이오 장관(?)과 주고받은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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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와 폼페이오 장관(?)은 dear bro!

처음에 그는 제가 아닌 한국의 어떤 사업가에게 접근하셨습니다. 페이스북 채팅으로 먼저 말을 걸었고요. 이메일을 줬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미국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입니다. 나는 한국에 수익성 있고 지속가능한 투자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전문성과 경영 관리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없습니다. 나는 한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업이 잘 진행되는 곳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좋은 투자자와 신뢰할 수 있는 투자자를 찾고 있습니다. 제안된 기금은 3천만 달러입니다. 스페인 금융기관 중 한 곳에 기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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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이 사업가에게 보낸 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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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이 기자에게 보낸 3천만 달러 사진. 100달러짜리 지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3천만 달러면 우리 돈으로 300억 원이 넘습니다. 그 돈을 미끼로, 폼페이오 장관(?)은 다른 한국인에게도 접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도 제보를 받았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정말 폼페이오 장관이 맞을까? 설마 폼페이오 장관을 사칭한 사기꾼일까? 사기가 맞다면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겠다, 그래서 저는 직접 그에게 접근해보기로 했습니다. 기자인 걸 알리지 않고 한국의 기업가라고 둘러대고 말입니다. (사전에 해당 기업 대표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대표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폼페이오 사칭범(?)을 잡기 위해 한국의 사업가를 사칭(?)한 취재, 저도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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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님과 기자가 주고받은 채팅. 지금은 장관(?)님께서 해당 계정을 탈퇴하셔서 "메시지가 일시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만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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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는 외대를 졸업했지만 영어와 매우 거리가 멀다. 그래서 폼페이오 장관(?)님과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구글 번역이 긴요하게 사용됐다. 위의 사진은 번역기를 돌려도 장관(?)님이 보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다시 물어보려고 또 번역기를 돌리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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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을 사칭한 페이스북 계정. 기자가 주고받은 계정은 이미 탈퇴됐고, 비슷한 방식으로 위와 같은 계정이 만들어져 있다

먼저 폼페이오 장관(?)님 페이스북에 들어갔습니다. 실제 폼페이오 장관의 사진을 대문에 올려놨습니다. 소개글에는 자신이 70대 미국 국무장관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게시물이 별로 없습니다. 가장 오래된 게시물도 한 달 전입니다. 최근에 만든 계정이라는 얘기입니다. 올린 사진도 자세히 보면 '외교부'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폼페이오 장관이 한국에 왔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됩니다. 사기꾼이 노리는 사람이 한국인일 것으로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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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어디선가 캡처해서 받아서인지 화질이 매우 좋지 않다. 조금만 더 성의를 갖고 화질 좋은 걸 받으셨어야 했는데..

저는 그분과 페이스북으로 채팅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메일도 받았습니다. 폼페이오 장관(?)님은 나를 어떻게 보셨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첫 메일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실망했습니다. 다른 사업가가 받은 메일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았거든요. 실망스러운 '복붙' 메일 밑에는 빨간 줄의 경고 문구도 있었는데요. 요지는 '너 이거 메일 다른 사람한테 공개하면 불법이야!'

"비밀 유지주의 사항 : 이 통신에는 비공개, 기밀 또는 법적 권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보의 불법적인 사용 또는 공개는 Mike Pompeo 및 해당 법률에 따라 엄격히 금지됩니다. 의도한 수신자가 아니거나 이 통신문을 잘못 수신한 경우 발신자에게 즉시 회신 메일로 알리고 첨부 파일을 읽거나 파일에 저장하지 않고 첨부 파일을 포함하여 모든 사본을 삭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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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하단에 적힌 무시무시한 경고 문구

그 후 폼페이오 장관(?)과 저는 매일 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미국은 우리와 13시간 시차가 나죠. 그것까지 계산해서인지, 그 분은 한국 시간으로 밤이나 아침에 메일을 주셨습니다. 저는 메일을 받은 날에 바로 답장을 썼습니다. 나이 서른이 돼 펜팔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요. 오늘은 어떤 메일을 주셨을까. 이번엔 내게 얼마를 요구하실까. 두근두근. 마침내 장관(?)님은 제게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저와 MOU를 맺어주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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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님과 맺은 MOU. 하단에 장관(?)님의 서명이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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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은 장관(?)님 서명, 오른쪽은 그 위에 찍힌 다른 서명이다. 확대했더니 장관(?)님 서명 글씨체는 깨지고, 다른 서명은 안 깨진다. 장관(?)님 서명은 컴퓨터로 그렸고, 다른 서명은 종이에 그린 원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사기도 꼼꼼함과 성실함이 필요하다

MOU를 맺자 장관(?)님은 본색을 드러내셨습니다. 드디어 제게 돈을 요구하신 겁니다. 3천만 달러를 저의 회사에 투자하겠다, 그런데 그 전에 10%를 먼저 내게 보내라는 장관님의 제안이었죠. 3천만 달러의 10%면 300만 달러, 30억입니다. 이 돈을 자신이 지정한 UN 외교관에게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3천만 달러 사진, 폼페이오 장관 얼굴이 찍힌 여권 사진, UN 외교관 사진 등을 보내줬습니다. UN 외교관에 적힌 이름을 검색해보니 실제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아예 달랐습니다. 사칭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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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님이 보낸 UN 외교관 ID 카드. 이 사람한테 돈을 내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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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 ID 카드로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이런 카드가 나온다. 두 카드의 차이점이 보이는가. 바로 사진이다. 밑에 카드는 사진에 홀로그램 UN 마크가 보인다. 폼페이오 장관(?)이 보낸 UN 외교관 사진에는 홀로그램 마크가 없다. 사진만 붙여넣기 한 것이다. 사진은 선명한데 주변부는 희미한 것만 봐도 이건 포토샵이다. 아니, 이 조악함이면 그림판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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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페이오 장관(?)님이 보낸 자신의 여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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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해킹됐던 미셸 오바마 여권 사진. 이 사진을 토대로 폼페이오 장관님 여권을 베낀 것으로 보인다

저는 결국 돈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30억 원이 있었으면 이미 기자를 그만 뒀을 지도 모르죠. 저의 침묵에도 장관(?)님은 꿋꿋하게 제게 메일을 주십니다. "(구글 영어 번역) 안녕 내 친애하는 친구야. 너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거니. 너의 침묵에 대해 내게 친절하게 알려다오. 땡큐." 제가 괜히 장관(?)님을 희망고문하는 걸까요. 가슴이 아려옵니다.

유명인을 사칭한 사기는 대개 이런 식입니다. "당신은 선택된 사람이야! 당신에게만 열린 기회야!"라고 교묘하게 현혹하죠. 다 거짓말입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나옵니다. '바보가 아니고 누가 속아?'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널리 알려진 보이스피싱도 여전히 피해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저런 독특한 방식의 사기인데 어르신들은 어어어? 하시다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신뢰를 얻고 뒤통수를 치는 것, 사기 공식입니다. 혹시, 설마하는 마음으로 요행을 바라는 것, 이런 헛된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기꾼의 유혹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을 것입니다.

취재 : 한동오 기자 (hdo86@ytn.co.kr)
그래픽: 김유정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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