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번지가 중요한가요?"...독립 유공자 묘소 조사한다더니

[와이파일]"번지가 중요한가요?"...독립 유공자 묘소 조사한다더니

2019.03.12. 오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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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번지가 중요한가요?"...독립 유공자 묘소 조사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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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가 중요한가요?"

독립유공자 묘소를 관리하는 국가보훈처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부에 보고한 문서에 묘소 위치에 번지가 없어 '확인이 되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과장도 비슷한 반응이었습니다.

"담당자에게 확인했는데, 직원이 묘소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번지를 안 적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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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류는 '2018년도 독립유공자 묘소 실태조사' 였습니다.

관리가 안 돼 어디에 잠든지도 모르는 전국의 독립유공자들, 그 묘소를 찾아서 제대로 살피고 예우하겠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정부 담당자는 외려 "번지가 중요하냐"고 되물었습니다.

하다못해 맛집을 찾아가려고 해도 네비게이션에 주소를 적습니다. 골목은 정확한 지번이 있어도 헷갈립니다.

독립유공자 묘소는 보통 야산에 있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사람 접근이 힘든 곳에 자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정확한 지번은 필수입니다.

지난 4년 동안 국가보훈처가 조사한 자료를 보면 이와 비슷한 반쪽 주소가 많습니다. 행정구역 일부(읍, 면, 동, 리)만 적혀 있거나 그냥 산골, 뒷산만 적은 곳도 있습니다.

"번지가 중요한가요?"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보훈처 내부 인식이라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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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 주소마저 집계하다 사라져…안장지 '빈칸'




그나마 보고서에 있었던 반쪽 주소는 전국 집계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YTN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국가보훈처에서 받은 엑셀 파일에는 해당 유공자는 안장지 칸이 비어 있었습니다.

안장구분은 '확인 불능', 땅에 묻었는지 화장했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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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의 동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이 잊혀진 유공자는 '박상진 의사'입니다.

일제에 국권을 상실한 직후인 1910년대, 대표적인 항일 조직이었던 광복회 총사령.

군대로 치면 총사령관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김좌진 장군도 광복회 동료입니다.

박 의사는 27살에 판사 시험에 합격해 평양 법원에 발령 받았지만, 임용을 거부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장섰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나라를 등진 친일 인사를 암살했습니다.

광복의 그날을 위해 투쟁을 이어갔지만, 일본 경찰에 붙잡혀 사형당했습니다. 당시 나이는 38살이었습니다.

생가가 있는 울산에서는 박 의사는 지역의 자랑입니다.

공원은 기본이고 도로 이름도 유공자 이름을 따서 '박상진 길'이라고 지었습니다. 박 의사의 호 '고헌'을 딴 초등학교도 있습니다.

지역 시민단체는 박 의사가 공적에 비해 서훈이 낮다며 승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 기록에는 묘소는 알 수 없다고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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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지청장이 벌초까지 했는데…묘소 '몰라'




증손자인 박중훈씨는 정부가 모를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울산 보훈지청장께서 증조부님 묘소에 와서 벌초를 하셨고, 안내판을 설치할 때도 참석하셨습니다. 해마다 생가에서 열리는 추모식에도 참석하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박중훈 / 박상진 의사 증손자)

증거라면서 사진과 책자도 보여줬습니다. 국가보훈처의 전신인 원호처가 지난 72년 발간한 책에도 묘소 사진과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모를 수가 없는 상황, 그런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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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이 서로 달랐습니다.

생가는 울산에 주소를 두고 있고, 묘소는 차로 40분 떨어진 경주에 있습니다.

울산은 울산보훈지청이, 경주는 경북 남부보훈지청이 관리합니다.

울산에서는 자치단체까지 나서서 관리를 하면서 후손과 자주 연락하며 교류했지만, 경주는 연락처조차 없었습니다.

증손자인 박중훈 씨는 현재 울산시 북구 문화원에서 박상진의사 추모사업회 자문위원이자 이사직을 맡고 있습니다.

울산시나 울산보훈지청에 전화 한 통화만 했더라면 쉽게 연락은 닿을 수 있었습니다.


●등기 우편 보내고 답 없으면 '유족 연락 안 됨'




"손자녀 주소로 공문을 보냈는데 거기서 답신이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조사를 할 수 없었던 거예요."

현장 담당자들이 말한 실태조사 방법은 우편물이 기본이었습니다.

본부에서 조사자 명단이 내려오면, 적힌 주소로 우편물을 보냅니다.

현행법상 손자, 손녀까지만 관리하고 있으니 마지막 남은 주소라도 해도 손자, 손녀입니다.

한 담당자는 "일반 우편으로 보냈는데, 안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후로는 등기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답신이 없거나 명단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해서 안 받으면 보고서에 '유족 연락 안 됨'으로 적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망할 경우에도 전산에 남은 마지막 주소로 안내문을 보냅니다. 받을 사람도 없는 집에 편지만 계속해서 보내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는 셈입니다.

국가보훈처에 공식적인 실태조사 방법을 물었습니다. 대변인실은 '현지 방문조사'가 원칙이라고 밝혔습니다.

부득이한 경우 서면조사가 가능하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적어도 취재진이 접촉한 현장 담당자는 "대상자가 많아서 직접 조사는 힘들고 보통 안내문을 발송한다"고 했습니다.




●손자·손녀까지만 정보수집 가능…"우리도 힘들다"




묘소 관리 담당자들은 조사 과정에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연락처를 몰라서 확인이 힘들다"는 겁니다.

관련법을 보면 구조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보훈처는 독립유공자법에 따라 유공자의 손자와 손녀까지만 정보를 수집합니다. 독립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제5조, 유족 또는 가족의 범위에 따른 겁니다.

증손자와 고손자는 연락처 등 기본 정보가 아예 없습니다.

한 보훈처 관계자는 "(손자녀 이후는) 가족관계 증명서, 이런 걸로 후손을 추적해야 하는데, 개인정보 때문에 발급받기도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기준은 '보상을 받는' 범위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유족들도 이제 손자, 손녀 세대가 지난 경우가 많습니다.

증손자와 고손자 묘소를 관리하더라도 정부는 연락이 닿아야 합니다. 최소한 이름과 주소, 연락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다면 '보상'과 별개로 묘소 관리를 위한 다른 기준을 정부는 서둘러 고민해 봐야 합니다.

이승배 [sbi@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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