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달 전 부동산 경착륙 막겠다며 '빗장' 풀더니…이제는 "환란 몇십 배" 경고

열 달 전 부동산 경착륙 막겠다며 '빗장' 풀더니…이제는 "환란 몇십 배" 경고

2023.10.31. 오전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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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 전 부동산 경착륙 막겠다며 '빗장' 풀더니…이제는 "환란 몇십 배" 경고
사진출처 = 연합뉴스 (좌 : 지난해 12월 / 우: 지난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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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랜드 사태로 알게 된 한국 채권 시장의 '불안'

레고랜드 사태는 우리 금융시장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었다. 레고랜드 공사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채권 만기일 하루 전인 지난해 9월 28일. 김진태 강원지사가 갑자기 강원중도개발공사(GJC)의 기업회생 절차를 밟기로 했다고 공식 선언해 버렸다. 금융시장 전체에 큰 폭탄 하나를 떨어뜨린 셈인데 정작 발언 당사자는 이를 몰랐을 것이다.

"지자체도 못 믿을 정도면…" 당장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는 '레고랜드 → 강원도(지자체) → 민간기업 → 한국 전체 채권 시장'으로 파장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금융계에선 지자체도 이 정도인데 민간기업은 어떨까? 라는 위기 인식이 순식간에 확산했다. 다시 자금줄을 옥죄기 시작했고 급속한 금리 인상과 원자잿값 인상이 맞물리면서 대형 건설사 연쇄 부도 우려까지 나돌았다. 일단 김진태 지사가 '없던 일'로 하면서 황급히 진화에 나섰지만 이런다고 덮일 게 아니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발 부동산 부실 문제는 지금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여겨진다. 경기 침체 우려가 계속되자 정부는 경기 부양책 일환으로 부동산 규제 풀기에 나섰다. 레고랜드 사태가 터진 지 단 두 달 만이다.

지난해 말 무슨 일 있었나?…'부동산 경착륙만은 막아라'

"고금리 상황으로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기 때문에 저희가 수요 규제를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풀어나가서…" - 윤석열 대통령 / 지난해 12월 15일 국정과제점검회의

"규제 패러다임을 전면 전환하겠습니다. 다주택자를 주택시장 내 공급의 주체로 보아 다주택자에 대한 징벌적 규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 추경호 경제부총리 / 지난해 12월 21일 2023년 경제정책방향 발표

윤석열 대통령이 규제 완화를 시사한 이후 6일 뒤 정부는 '2023년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부동산 중심의 대규모 경기 부양책을 내놨다. 목표는 확실했다. 부동산 시장 경착륙만은 막자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이른바 '총알'이 있는 다주택자에 대한 규제 완화다. 다주택자들이 심지어 규제 지역에서도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여기에 2020년 7월에 도입했던 취득세 중과세율을 완화하고, 양도세 중과 중단 조치를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단기 양도세율은 2020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도록 설계했다. 정부는 나아가 규제 지역을 추가로 해제하고 실거주와 전매 제한 규제도 5년 전 수준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는 급격한 금리 상승으로 구매력 회복이 어려운 실수요자보단 다주택자의 부동산 거래를 위한 조치임이 분명해 보였다.

대출 규제도 확실히 풀었다. 안심전환대출과 적격대출을 기존 보금자리론에 통합한 특례 보금자리론을 한시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또 지원 대상을 주택가격 6억 원 이하에서 9억 원 이하로 늘리고, 대출 한도도 3억 6,00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확대한다. 이는 이른바 '둔촌주공 살리기'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외환위기 몇십 배 위력"…10개월 뒤 한목소리 '경고'

이렇게 '빗장'을 풀었는데 열 달 뒤 정부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지난 29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있었던 당·정·대 고위 협의회. 여기서 대통령실과 여당, 정부 모두 가계부채 문제를 한목소리로 경고했다.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하면 1997년 외환위기의 몇십 배 위력이 있을 것" -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 인사말

"가계부채 리스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만큼 금융 불안정과 도미노 신용 부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안정화 조치가 강구되어야 한다" -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글로벌 고금리 기조하에서 이자 부담과 상환 리스크 증가가 예상되는 만큼 가계부채 양과 질을 면밀히 점검하고 관리해 나가겠다" - 한덕수 총리

올해 초부터 6회 연속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도 최근 "금리가 예전처럼 1%대로 다시 빠르게 떨어질 것이라 보면 안 된다"며 '영끌' 대출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어쨌든 정부는 가계부채 급증을 막기 위해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산정 시 일정 수준의 가산금리를 적용하는 변동금리 스트레스 DSR을 신속히 도입하기로 했다. 다시 가계부채 옥죄기에 나선 것이다. 열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정부의 입장이 180도 바뀐 걸까? 이는 수치로 나온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 따르면 지난 26일까지 가계대출 잔액은 684조 8,018억 원. 지난달 말과 비교해 2조 4,723억 원 급증했다. 이 추세라면 한 달 증가 폭이 2021년 10월 이후(3조 4,380억원) 2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 부양을 위해 부채를 늘리긴 쉬워도 줄이긴 훨씬 어렵다. 이미 문제라고 인식했을 땐 늦었다는 말도 있다. 지난해 말 부양책 차원에서 풀었던 각종 부동산 규제 완화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증가 폭은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을 연상케 한다" 가계부채 문제 관련 석학인 아미르 수피 시카고대학 교수가 지난 8월 전미경제학회(NBER)에 기고한 논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경기 부양을 위한 '달콤한 유혹'인 가계부채의 '역습'이 이미 진행되고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YTN 이대건 (dglee@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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