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큐] 노태우 국가장 결정...진정한 용서 가능할까?

[뉴스큐] 노태우 국가장 결정...진정한 용서 가능할까?

2021.10.27. 오후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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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김영수 앵커, 강려원 앵커
■ 출연 : 추은호 / 해설위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앵커]
정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했죠.그리고 노 씨의 마지막 유언은 들으신 것처럼 5.18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앵커]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지는 역사의 판단이 남아있습니다. 이번 국가장 결정 배경과 노태우 씨의 공과를 추은호 해설위원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추은호]
안녕하세요.

[앵커]
정부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박탈된 상황이기 때문에 과연 국가장으로 결정할 것인지 여부가 관심이었는데요.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결단으로 봐야 되겠습니까?

[추은호]
일단 저는 정치적 결단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아주 현명한 결정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 보는 시각에 따라서 공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다를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발전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이 있기까지 나름대로 기여한 부분이 틀림없이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을 인정해서 정부가 판단한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고 국가장법 2조를 보면 전현직 대통령은 사망 시에 유족의 의견을 고려해서 행정안전부 장관이 제청을 하고 또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서 대통령이 결정하도록 돼 있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결정하는 몫인데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결심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앵커]
일단 문재인 대통령이 빈소에 갈지도 관심이었는데 조문은 하지 않기로 한 거죠?

[추은호]
그렇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조문을 하지는 않고요. 비서실장 그리고 정무수석을 통해서 대신 빈소를 조문한다, 이렇게 청와대가 발표를 했고요.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메시지를 청와대가 발표를 했었죠. 5.18민주화운동 강제진압 그리고 12.12 군사쿠데타 이런 역사적 과오가 분명히 있지만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든가 북방정책,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이런 성과도 있었다. 이러면서 유족에게 위로를 전했다고 박경미 대변인이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앵커]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이었다고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는데. 국립현충원 안장은 법적으로 안 되나 보죠?

[추은호]
국립현중원 안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걸 가지고 법 해석이 아주 다양하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된다, 안 된다는 게 조문에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지금 안 된다는 근거가 법무부의 유권해석에 따라서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국립묘지 안장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보면 가장 기본적으로 유족이 원하지만 않을 경우에는 안장 대상자도 그러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경우에도 유족들이 국립 묘지 안장이 아니라 파주통일동산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법해석이나 이런 것을 떠나서 유족의 원함에 따라서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생전에 통일동산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그런 뜻이 있다는 유족의 말이 있기 때문에 아마 통일동산 쪽으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앵커]
그런데 왜 파주 통일동산에 고인도 생전에 묻히기를 원했을까요?

[추은호]
일단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요. 일단 첫 번째가 교하 노씨입니다. 파주 교하 노씨입니다. 거기 선산도 있고. 그런 인연이 하나 있고 거고요. 또 9사단장을 지냈습니다. 12.12 때. 9사단이 있는 곳이 파주, 일산 이쪽이거든요. 그런 인연이 있고 무엇보다도 1989년에 한반도 공동체통일방안이라는 것을 당시 내놓는데 여기에 따라서 파주 통일동산이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 그 이듬해에1990년에 한강 대홍수가 벌어집니다. 이게 엄청난 피해가 발생해서 163명의 인명피해가 났는데 그때 일산 쪽에 둑이 붕괴되는 엄청난 사고가 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자유로가 건설되거든요.

그래서 파주 쪽까지 쉽게 교통도 접근이 연결되고 해서 그래서 통일동산 조성이 아주 가속화되는데 노태우 대통령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통일, 이루지 못한 통일의 꿈을 다음 세대가 이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자신이 조성한 이곳에 묻히고 싶다, 이런 뜻을 피력한 것으로 이렇게 유족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앞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과오가 적지 않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이렇게 평을 했는데. 노태우 씨 같은 경우에는 공과가 뚜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태우라는 이름이 전면에 등장한 시점, 12.12 쿠데타 아니겠습니까? 당시 쿠데타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죠?

[추은호]
12.12 쿠데타가 1979년이죠. 12월 12일 그 당시에 노태우 씨는 육군 9사단장이었습니다. 육군 9사단장으로서 물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주도를 했지만 보면 9사단 예하 29연대 병력을 서울 시내로 진입을 시킵니다. 그 당시에 중앙청이라든가 이런 데 탱크가 배치돼 있는 사진을 보실 수가 있을 텐데요, 이렇게 찾아보시면. 그 병력이 29연대 사단입니다.

노태우 9사단장 휘하의 병력이죠. 그런데 전방을 지키는 부대 아닙니까? 전방을 지키는 부대를 한미연합사령관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이렇게 후방으로 뺐다는 것은 그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걸고 한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 때문에 전면에 등장을 하게 되고 결국 5공화국 내내 2인자로 등극하는 그런 바탕이 됐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그렇기 때문에 내란죄로 처벌도 받은 거고요.

[추은호]
그렇습니다.

[앵커]
2인자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2인자라는 꼬리표가 계속 달려 있었지 않았습니까? 정치적인 판단 하에 2인자를 선택한 거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까?

[추은호]
2인자가 괜히 2인자가 아니라요. 물론 육군사관학교 11회 동기입니다. 동기이고 고등학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경북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시작은 대구공업고등학교부터 시작을 했거든요. 거기에서부터 해서 나중에 경북고등학교로 편입을 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이는 한 살 위지만 또 학교는 2기 밑입니다. 그런 오랜 인연이 있는 거죠. 여기다가 전두환 씨가 보안사령관을 마치고 대장으로 예편을 해서 대통령이 되는 수순을 밟아갔을 때 그 보안사령관을 물려받은 사람이 노태우입니다.

그리고 뒤에 정계에 진입해서는 민정당 대표 그리고 어떻게 보면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후계자로까지 이어받았죠. 반항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그대로 순응하면서 자리를 물려받는, 그 뒤를 따라가는 그런 2인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러 과오가 많았지만 성과 중의 하나를 뽑으라면 6.29 선언 당시 직선제 수용이다. 이렇게 평가를 하더라고요.

[추은호]
일단 노태우 씨가 민정당에, 당시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날이 6월 10일입니다. 1987년 6월 10일입니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죠? 6.10 민주항쟁이 시작됩니다. 서울 시내가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찬 날이고 그 하루 전날 이한열 씨가 최루탄에 맞은 날입니다.

결국 보름 정도 지나서 6. 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수용을 하고 또 당시 김대중 씨 사면 이렇게 석방을 하고 사면을 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노태우 씨의 결단에 의한 정치적 결단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민초들의, 우리 국민들의, 시민들의 강렬한 요구,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평가를 하고요. 물론 그것을 수용했다. 대통령 후보로서 쉽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지만 직선제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는 건 나름대로 용기라는 평가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그래서 개그맨들도 많이 풍자했던 단어 있잖아요.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런 것도 그런 것과 맥락이 있겠습니까?

[추은호]
일단 대통령 후보가 돼서는 당선이 돼야 되는 게 목적이니까 당선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보통사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의 시대, 이런 말들을 많이 내세웠고요, 선거전에. 그리고 이 사람 믿어주세요라는 말을 많이 쓰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결국 대통령이 된 것은 야권의 분열, 1노3김으로 인해서 야권의 분열에 어부지리로 얻은 측면도 상당히 있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앵커]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에 3당 합당,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그 당시는 여소야대였고요. 국정운영이 상당히 힘들었을 텐데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서는 승부수였다, 이렇게 볼 수 있을까요?

[추은호]
승부수였죠. 일단 1988년에 이뤄진 바로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이뤄집니다. 민정당이 125석 그리고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죠. 그러다 보니까 곧바로 이어져서 진행되는 것이 5공 청산이라든가 광주 특위 이런 것들이 진행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날 수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계속 정권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택한 게 3당 합당입니다. 당시 YS의 통일민주당 그리고 JP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해서 아주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킵니다.

[앵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 당시에는 3당 야합이라는 비판도 컸어요.

[추은호]
이 3당 합당이 된 게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해서 이뤄진 겁니다. 결국 내각제 개헌 합의는 나중에 파기되고 말았지만 3당 합당이 결국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에 영향을 계속 미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구도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고 우리 정치의 지역감정, 지역정치의 악폐를 그대로 고스란히 미친 그런 부정적인 영향은 남아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역사라고 하는 게 참 재미있는 게 구절구절 안에서 또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는데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탄생한 스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아닙니까?

[추은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초선 의원이었습니다. 5공 특위 청문회 때 일약 청문회 스타로 아주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김영삼 당시 의원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3당 합당되는 과정에서 본인은 거부를 했습니다. 본인은 가지 않고 꼬마민주당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길을 한동안 겪었습니다. 출마하는 구마다 낙선을 하고 시련을 많이 겪었는데 그래도 결국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어떻게 보면 비주류의 길을 갔던 것이 대통령의 길로까지 이어지는 그런 여정이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앵커]
그리고 오늘 노태우 씨의 마지막 유언이 공개됐는데 5.18 희생자의 너그러운 용서를 구한다였는데 본인이 직접 사과를 하지 않았어요.

[추은호]
그렇습니다. 참 아쉬운 점이죠. 이왕이면 본인의 입으로 직접 사과를 전하고 아니면 글로라도 남겼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는데 물론 아들 노재헌 씨가 여러 차례 5.18 광주민주화묘역을 찾아서 참배도 하고 또 관련자 단체들도 만나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런 점이 무척 아쉽습니다.

오늘 노재헌 씨가 전한 말을 보면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께 사죄를 한다. 그리고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 이런 말을 대신 전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노재헌 씨는 부친, 선친이 미안한 마음 그리고 사과하는 마음, 역사를 책임지겠다는 그런 마음은 있었다. 그것을 병상에 계시면서 제대로 의사표현을 못한 점이 무척 본인도 안타깝다고 대신 이렇게 의사를 전했는데요. 더불어 말씀드리지만 본인 입으로 직접 육성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 것이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앵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 공과가 있다고 평가하셨다고 했는데 공 중에서는 북방정책 외교성과도 있었고요. 그리고 토지 공개념 이런 개념도 그 당시에 나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추은호]
일단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요. 어떻게 보면 보수정권 아닙니까? 보수정권에서 경제정책이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때 나온 것이 말씀하신 대로 토지 공개념이 대표적인 건데요. 여기에 혁신적인 부동산 정책이죠. 그 당시가 우리 사회가 3조 호황의 끝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중에 풍부한 자금들이 부동산 시장에 유입이 되니까 부동산이 폭등하고 이런 현상이 지금하고 비슷했거든요. 이때 정부가 취한 게 토지 공개념 3법. 예를 들어서 토지 소유상한제라든가 개발이익 환수, 토지초과이득세 이런 것들을 도입합니다. 물론 일부는 위헌 판결이 나서 한 10년 만에 무력화되기는 했습니다마는.

[앵커]
그때 신도시도 건설됐죠.

[추은호]
1기 신도시라고 하는 일산, 분당신도시가 이때 건설이 되죠. 노태우 씨의 공약이 200만 호 건설이 공약이었거든요. 그런 것도 있고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최저임금제가 이때 시작됩니다. 거기다가 건강보험, 그 당시에는 의료보험이라고 했는데 의료보험이 전 국민으로 확대 적용된 것도 이때입니다. 보수정권이지만 이런 진보적인 정책들을 썼다. 이것은 지금 현재 국민의힘도 새겨봐야 될 대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요. 이때 주역이 김종인 경제수석, 당시 경제수석.

[앵커]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그 당시 경제수석이었고...

[추은호]
그 당시에 보사부 장관 경제수석이었고요. 또 문희갑 경제수석, 조순 경제부총리. 이런 분들이 크게 역할을 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노태우 씨 보면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 또 수천억 원대 비자금 사건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 그리고 불명예를 다 안은 그런 전직 대통령이었어요.

[추은호]
그렇습니다. 12.12, 5.18 이 부분에 대해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통령이 되고 나서 12.12, 5.18 이것은 대통령 되기 전에 어떻게 보면 자신의 업보 아닙니까? 그럼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의 오래된 정치의 병폐였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했어야죠. 하지만 끊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재임기간에 기업으로부터 수천억 원대 돈을 받았고 그것을 또 비자금을 조성해서 통치자금. 이건 권력유지를 위해 썼고 또 남겨뒀다.

이 부분이 어떻게 보면 씻을 수 없는 과오였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또 징역 15년 선고를 받았고 2600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죠. 나중에 어떻게 돈은 다 갚았다는 것이 국가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그런 중요한 요인이 됐는데 이런 부분들을 옛날 병폐들을 고스란히 답습했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 혁신적인 생각들을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앵커]
전두환과 노태우를 두고 사실은 역사적인 평가가 다르다, 같다, 비슷하다. 이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앵커]
화면에 나오는 게 재판과정에서 손을 꼭 잡은 사진이에요.

[추은호]
이 사건이 1심 선고공판 때일 겁니다. 1심 선고공판 때인데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는 것 자체가, 수의을 입고 서 있는 게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런 사진 한 장일 수밖에 없는데 오래된 일이지만 그래도 역사는 살아 있는 부분들이거든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추은호 해설위원과 노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해서 자세히 짚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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