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뉴스 더콕] 역대 정부 '3년차의 저주'...지금은?

[더뉴스 더콕] 역대 정부 '3년차의 저주'...지금은?

2019.09.16. 오후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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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임기 3년 차의 저주."

2007년 4월, 대통령 연임제 개헌안을 발의하기 위해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직접 준비한 국회 연설문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헌법 개정안 발의가 유보되면서 연설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 표현은 대통령 단임제의 한계를 강조하는 말로 자주 인용됩니다.

역대 정부에서 정말 '3년 차의 저주'가 있었는지 더콕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3년 차였던 1995년.

연초부터 여당 내에서 권력다툼이 불거졌습니다.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김종필 대표가 1월 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2월 탈당해 자유 민주연합, 자민련을 창당했습니다.

내부 분열은 이후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 참패로 이어집니다.

김영삼 정부는 결국 1997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3년차인 2000년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해입니다.

하지만 3년 차의 저주가 정상회담 시기 전후로 지속됐습니다.

여당은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패배했고 그해 가을 거액의 불법대출과 횡령, 주가 조작, 정관계 뇌물 사건이 어지럽게 얽힌 각종 게이트가 잇따라 터져 정부에 부담을 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쇄신 요구가 여당 내부에서 나오면서 대통령 최측근으로 불리던 권노갑, 한화갑 두 최고위원 간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참여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여당 내부 분열상이 노출됐고 이듬해 탄핵 정국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이른바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2005년 4.30 재보선에서 국회의원 6곳을 포함해 23곳에서 당선자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습니다.

7월에는 노 대통령을 향한 탈당 요구가 여당 내부에서 나왔고 청와대 실세 개입설이 제기된 '행담도 개발 의혹 사건'도 2005년에 터졌습니다.

이명박 정부 3년차인 2010년은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친이·친박 대립으로 시작됐습니다.

친이·친박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방송 등에서 이견을 노출했습니다.

그리고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민주당에 패했습니다.

11월에는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 터졌고 이는 이후 지속적으로 이명박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말에 터진 이른바 십상시 문건 파동으로 3년차인 2015년 전반기 내내 '밀실 측근 정치'에 대한 여론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당청 갈등이 심각한 양상으로 불거졌습니다.

2015년 4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유승민 의원이 국회 대표연설에서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응수했습니다.

결국 유 의원은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를 계기로 당내 비박계와 청와대의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올해는 문재인 정부 3년차입니다.

정부 출범이 늦었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이전 정부의 3년차와 단순 비교가 어렵지만 내용상으로도 분명한 차이점이 보입니다.

우선 민심을 확인할 큰 선거가 없고 여권 내부의 갈등이 불거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게이트급 사건이 또 하나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지만 아직은 야권 일각에서 주장이 나올뿐 확인된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권 내부에서 갈등이 불거지는지 여부, 이른바 조국 수사가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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