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설레 잠 못잤다"...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 시작

"너무 설레 잠 못잤다"...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 시작

2018.08.20. 오후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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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무진 /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주환 /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앵커]
금강산에서 꿈에 그리던 부모와 형제를 만난 이산가족들. 그 감동의 상봉 장면과 함께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이모저모 짚어보겠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오늘 드디어 60여년 만에 벅찬 상봉이 이뤄지지 않았습니까? 오늘은 우리가 신청한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는 거고 이번 주 후반에는 북한에서 신청한 우리 가족들이 만나는 그런 건데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인터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고향입니다. 오늘 1회차죠. 2박 3일 동안 1회차에 있어서 우리 측 방문단 89명이 북측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상봉합니다. 그렇다면 89명 모두가 북한에 고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2회차, 83명의 북한 방문단이 우리 측 가족을 만나죠. 그것은 뭐냐 하면 83명 모두가 남측이 고향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산가족 상봉할 때 전혀 겹치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앞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단체상봉이 있었고 잠시 뒤 7시부터 북측이 주최한 환영만찬이 시작이 된다고 합니다. 이번 2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전의 상봉 행사와 다른 것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기자]
지금 계획상으로 보면 둘째 날에 개별중식... 객실 중식이 맞죠. 그러니까 남북 가족들이 객실에 별도로 모여서 가족이 그동안 지나온 얘기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굉장히 큰 차이점이 있고요.

그리고 단체 상봉했을 때 화면 들어온 게 과거 2015년도와 다른 게 뭐냐하면 북측 관계자들이 그전에는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훈장을 주렁주렁 차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화면상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다음에 물론 김일성, 김정일 배지는 달았지만 좀 분위기가 자유스러워졌다. 그리고 감시원들이 현재로서는 화면상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과거에 비해서 많이 유연해졌고 자유스럽다, 이렇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
그에 대해서 제가 보완해서 말씀드리자면 휘장. 영웅. 아마 이것이 지금은 우리 측 289명이 북측 가족을 만나기 때문에 어찌보면 안 다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2회차가 되면 북측 방문단 83명, 그중에서 혹시 달고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여지고 지금은 원래 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죠. 과거 20차와 이번 21차에 조금 개선책이 있는데 지금 현재 김주환 박사님께서 잘 말씀하셨는데 좀 더 요약하자면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통관 절차의 간소화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이런 고령의 이산가족들 아닙니까? 이분들을 위해서 버스 안에서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 한해서 버스 안에서 통관을 시키는, 그런 소위 말해서 통관절차 간소화죠.

두 번째는 김주환 전문기자가 말씀하신 대로 내일 개별 상봉에 있어서 과거에는 2시간 개별 상봉한 뒤에 단체 중식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뭡니까? 외금강호텔에서 주무시고 개별 상봉을 하고 그 객실 안에서 공동 중식이 아니라 개별 중식을 하는 것이죠. 도시락을 가지고... 그 말은 뭡니까? 개별 상봉의 시간이 확대됐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하면 거동이 불편하고 그러니까 버스에 탔다, 내렸다, 이 장소에 갔다 저 장소에 갔다. 이동 있잖아요. 이번에는 뭡니까? 이동 시간, 다시 말해서 동선이 상당히 간소화됐다. 이것이 과거 상봉 행사와 이번 상봉 행사의 차이점 아니겠나,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앵커]
오늘 3시부터 단체 상봉이 이뤄졌고요. 잠시 뒤 7시부터는 북한 측에서 주최하는 만찬이 이뤄지지 않습니까?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이 이뤄지게 되는데요. 전체적으로 11시간 정도 만나게 되는 겁니까?

[기자]
그렇죠. 그러니까 개별 식사 시간을 빼놓고, 그러니까 개별 상봉이라든지 단체 상봉, 앞서 얘기했던 이틀째날의 가장 중요한 개별 중식을 포함해서 여섯 차례 만남을 갖는 거죠. 이 2박 3일의 시간 테이블은 24일부터 26일까지 2차 북측 상봉단이 남측 가족들을 찾아가고, 시간 계획은 똑같이 적용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앞서 양무진 박사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번의 차이점은 뭐냐하면 14대의 버스와 5대의 앰뷸런스가 동행을 해서 동해 CIQ, 출입을 간소화했다. 제가 왜 출입이라는 말을 쓰느냐면 이번에는 출경, 남북 간 특수관계 때문에 국경을 넘나드는 개념이 아니거든요. 그런 차이가 또 행정적인 면이지만 그런 차이가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앵커]
이번 상봉단의 평균연령이 80세를 훌쩍 넘길 만큼 그야말로 고령의 이산가족들이 아주 많은데요. 이산가족 상봉 행사. 이번 1차 상봉자 89명 가운데 부모와 자식 간의 상봉은 단 7가족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죠.

[인터뷰]
그렇죠. 결국 뭐냐 하면 이산가족 고령화. 그 현상은 이산가족 상봉의 만남 현장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죠. 부부, 이것은 거의 없는 것이죠. 그다음 부자지간에 7가족, 그다음에 형제 자매가 20가족. 나머지는 뭡니까? 삼촌, 조카 이렇겠죠.

그만큼 지금 현재 고령화되어 있다는 것을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이렇게 계속 간다면 몇 년 내에 이산 1세대는 거의 없어지고 2세대에 가면 이렇게 될 수 있느냐.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시간이 별로 없다. 지금 현재 형제 자매 또 부자지간 이렇게 있을 때 남북한의 당국이 좀 더 이마를 맞대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빨리 내놓아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앵커]
연령별 생존자 현황이 나와 있는데요. 처음에 이산가족 상봉 시작할 때만 해도 14만 명 정도 됐었는데 지금은 절반 이상이 다 돌아가시고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조금 전에 말씀하셨듯이 가장 이산상봉의 아픔이 큰, 물론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가장 큰 경우가 부모 자식 간의 이별, 이런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데에서 형제 쪽으로 넘어가고요. 그마저도 얼마 안 남았고요.

[기자]
그렇죠. 지금 구체적인 정책이 뭐냐하면 14만여 명이 적십자사 컴퓨터에 등록되어 있는데 한 7만 4000여 분이 돌아가셔서 신청 기회를 잃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당사자입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 제가 실향민 2세대거든요.

저도 개인적으로 5차례 신청을 해 봤습니다마는 양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먼 훗날 통일이 됐을 때 일가족, 후손들이 남아있을 거란 말이죠.

그걸 연결시켜주는 건 북한 당국과 우리 당국이 2세들, 실향민 2세들, 그러니까 컴퓨터상이라도 서로 기록을 남겨놔야지 먼 훗날에 찾을 수 있다라는 그런 후속적인 역할이 계속 정부 차원에서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앵커]
오늘 상봉에는 국군 포로 가족. 또 전시 납북자 가족들도 포함이 돼 있다고 해요.

[인터뷰]
전시 또 그리고...

[앵커]
그 개념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국군 포로 가족하고 전시 납북자 가족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인터뷰]
국군 포로라는 그것은 말 그대로 전쟁 시기에 북한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고. 그다음에 전시는 국군이 아닌 상태에서 민간인 납북되어 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주로 이야기하는 거겠죠. 지금은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각각 100명씩 한다 이렇게 합의한 이후에 우리 측에서 인선위원회를 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인선위원회를 하면 예를 들어서 나이에 있어서 90세 이상은 50%, 80세 이상을 40%, 나머지는 80세 이하 10% 이렇게 합니다. 그다음에 또 가중치를 둡니다. 가장 중요한 가중치는 뭐냐하면 부부. 부모, 부자. 이 가중치를 두고 그다음에 밑에 형제 자매, 그 밑에 삼촌, 조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예를 들어서 가중치가 가장 높은 부부. 예를 들어서 부모, 부자 이렇게 했는데 이 사람들은 가중치를 두고 했는데 북측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 다 세상을 떠났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조카가 많아지는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좀 이산가족 상봉의 시급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앵커]
이번 상봉에서 부부상봉은 한 가족도 없더라고요.

[인터뷰]
그렇죠. 우리가 지난 2년 10개월 전에 20차, 19차 이럴 때는 그래도 부부지간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 불과 2년 10개월 지난 상황에서 그러한 가족들이 한 가족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서 우리가 예단은 금물이지만 2회차에, 다시 말해서 24일부터 실시되는 북측 방문단 83명, 이것이 우리 측 가족을 만날 때 그때 혹시나 우리는 북측보다도 나이라고 할까요, 이런 부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아마 부부지간이라든지 이런 만남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을 해 봅니다.

[앵커]
화면을 보면서 얘기를 나누어 볼까요? 실제 현장 화면, 앞서 들어온 화면을 보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조금 전 앞서 3시쯤에 상봉이 이뤄지는 상황, 한 두세 시간 전 상황이 되겠습니다.

지금 화면은 형제 상봉 장면이 되겠습니다. 남측의 이수남 님께서, 77살 이수남 할아버지가 형 이종성 형수 백옥녀 씨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앵커]
1950년 8월 하순쯤에 만 19세인 첫째형이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동네에 있는 복숭아밭 과수원 부근에서 인민군에 끌려간 사연이 있습니다. 첫째 형 85살 리종성 씨를 지금 이수남 씨가 만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산 상봉 하면 그때는 거의 부모 자식 상봉이어서 처음부터 엄청나게 격한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물론 시간도 많이 흘렀습니다마는 상당히 차분한 그런 가운데 상봉을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어요.

[기자]
그렇죠. 오늘 첫날인데 사실은 68년. 한국전쟁 개시부터 하면 68년 만에 만남이 이뤄졌는데 조카도 있고 그러니까 사실은 서먹서먹하겠죠. 그런데 저녁에 환영만찬 그리고 하룻밤 자고 나면 굉장히 감정들이 격해져서 헤어질 때면 거의 눈물바다를 이루거든요.

그래서 지금 앞서 말씀드린 부부간의 상봉이라든가 부녀, 부자. 모녀, 모자 상봉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확대해서 만나고 싶죠. 1000명, 2000명 한꺼번에 많이 북한 측에 제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측 내부 사정으로 해서 100명 이상이 제한이 있기 때문에. 사실 만나지 못했던 그런 생이별한 가족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앵커]
보통 이렇게 이산가족들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을 텐데 어떤 말들을 가장 먼저 한다고 하나요?

[인터뷰]
상봉 하면 우리가 민족 분단의 현주소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고 지금 기다림의 시간은 상당히 길었지만 만남의 시간은 짧죠. 그런데도 당장 알아차리잖아요.

그건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오랫동안 보고 싶은 이것이 가장 크고 그다음에 고향이라든지 고향 주변 친척이라든지 이런 안부라든지 이런 것들이 상당히 궁금하겠죠. 특히 지금 남북관계에서 보면 사진을 갖고 많이 설명하는 것이 많았죠.

[앵커]
지금 화면은 남동생의 아내를 만나는 그런 장면이 되겠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금연 할머니, 87살. 오른쪽에 있고요. 왼쪽에 북한의 남동생의 아내를 만나는 그런 장면, 올케가 되겠죠.

[인터뷰]
그렇죠. 그래서 상당히 첫 만남에 있어서 결국 뭡니까? 오랫동안 헤어져서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 알고 싶겠죠. 그래서 조금 아까 최 앵커님께서 국군 포로 납북자.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런 부분이 뭐냐하면 특수 이산가족 표현을 하죠.

여기에서 뭐냐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통 할 때는 200명의 이산가족에 대해서 생사확인 의뢰를 하는데 우리는 뭡니까? 특수 이산가족 50명을 더 추가해서 250명을 보냅니다. 여기에서 아마 북측이 수용해서 이번에는 50명의 특수 이산가족 의뢰한 상태에서 6가족. 이번에 이 만남이 이뤄진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앵커]
북측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선물들도 굉장히 한보따리씩 가져간다고 하는데 주로 어떤 선물들을 가져가나요?

[기자]
그렇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마는 영양제. 겨울이 오니까 그러니까 당연히 북측이 추울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복, 이런 것을 했고. 이번에 최고령자 할아버지는 얼굴도 처음 본다는 손주들을 위해서 무려 신발을 30켤레나 샀다고 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인데 주고 싶다. 그리고 앞서 화면에 잠깐 지나갔습니다마는 89살 이길성 할아버지는 아들이 태어난 줄도 모르고 월남을 했는데 어떻게 알아볼 거냐, 기자들이 물어보니까 내 아들인데 내가 왜 못 알아보겠느냐 해서 현장 취재하는 기자들이 울컥했다고 해요.

지금 앞서 양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는, 68년의, 아들이 무려 70 중반이 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이금순 할머니 같은 경우는 아흔 둘인데, 북한의 아들을 만났죠. 그래서 그런 장면들이 앞서 들어온 것들이 있습니다.

[앵커]
이제 지금 새로운 화면들이 조금씩 더 추가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인데요. 여기에는 아까 단체 상봉 장소인가요?

[기자]
만찬장인데 장소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지금 만찬 그림은 들어온 것 같지 않고요.

[앵커]
만찬하기 전에 담소를 나누는 모습인 것 같은데요.

[기자]
지금 시청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저희 현장에서 촬영을 해서 위성 장비로 바로 송출하는 것이 아니라 동해 CIQ를 지나서 우리 차량편으로 영상 카드를 후송합니다.

그래서 다시 중계차에 걸어서 각 언론사, 방송사에 송출하는 개념이고요. 그다음에 사연 역시 팩스가 송신이 안 되어 있어서 그걸 프린트해서 남측으로 내려와서 다시... 그러니까 지금 아쉽게도 우리가 지금 환영 만찬 그림은 지금 이 시간에는 잠시 후에... 진행되지만 볼 수 없다, 생방송으로 볼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앵커]
지금 보고 있는 가족은 국군 포로 가족인데요. 82세 이달영 씨가 리일영, 리영희 씨를 만나고 있습니다.

[인터뷰]
선생님 하셨다고 그랬잖아요. 선생님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인터뷰]
아버지가 선생을 하다가...

[앵커]
82세 이달영 씨. 고향은 경북 양목이고요. 아버지가 북으로 간 뒤에 줄곧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동생 2명을 이렇게 만나게 됐습니다.

다음은 송영부 할머니. 아흔 두 살. 만나는 가족은 조카들이 되겠습니다. 조카 송성길, 송순옥. 그동안 화면이 짧게 짧게 들어와서 변화가 있군요.

[기자]
매부를 만날 수도 있죠. 외조카 손자이고.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데 22살 때 자진 월남을 해서 가족들이 헤어졌다는 사연이 있습니다.

[앵커]
화면이 짧게 짧게 스케치로 들어온 화면이어서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3시부터 5시까지 단체 상봉이 있었고요. 그리고 잠시 뒤 7시부터 만찬이 있는데 지금은 단체 상봉...

[기자]
아마 사전 약속된 시간은 7시 반쯤 거기에서 출발을 해서 CIQ 넘어와서 하면 8시쯤 송출하는 걸로 그렇게 원래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7시가 안 됐기 때문에...

[앵커]
잠깐 들어볼까요?

[기자]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앵커]
최고령자죠, 101살.

[기자]
기분이 얼마큼 좋으세요?

[인터뷰]
금강산만큼. 소개해 주세요.

[인터뷰]
손녀.

[기자]
얼마만큼 보고 싶으셨는데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인터뷰]
나, 101살.

[기자]
며느리분 오늘 뵙고 처음에 무슨 말 해 주셨어요?

[인터뷰]
아무 말도 못했는데 눈물이 나서.

[기자]
우셨어요?

[인터뷰]
내일 또 만나잖아. 내일 가야지.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101살 백성규 할아버지, 며느리를 만났는데 눈물이 나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말이 짠하군요.

[기자]
인민군으로 징집이 돼서 한국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서 여기에서 반공포로로 석방을 해서 아마 가족과 헤어졌다고 그러고 앞서 말씀드렸죠. 신발을 30켤레를 샀다고 합니다. 얼굴 모르는 손주들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마지막인데 내가 뭘 더 못 해 주겠느냐, 이런 말도 했다고 하죠.

[앵커]
백성규 할아버지. 북에 두고 온 아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먼저 세상을 떠났고 이번에 며느리 김명순 씨, 그리고 손녀 백영옥 씨를 만나게 됐습니다. 연세에 비해서 상당히 저렇게 정정한 이유는 이런 만남을 기다렸다, 이렇게 봐야 하는 겁니까?

[인터뷰]
그렇죠. 기다림 속에는 자기 건강을 유지 안 하면 만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부분도 상당히 노력의 결과다, 이렇게 이해가 되고. 지금 상봉 시간이 김주환 전문기자가 11시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단체 상봉 하고 이어서 환영 만찬 이렇게 못 하잖아요.

왜냐하면 다 노령이니까 2시간 정도는 휴식이 필요하잖아요. 오늘 환영만찬. 이것은 북측에서 주관합니다. 그건 우리 측의 방문단 89명이 북측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기 때문에. 북측 가족만 항상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앵커]
잠깐 들어보죠.

[기자]
어떠세요?

[인터뷰]
좋지. 외손녀.

[기자]
외손녀, 저분 따님이세요? 할아버지께서 어머니 산소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하셨는지 찾으셨어요?

[인터뷰]
못 찾았어요. 제사날에도 못 가봤어요.

[인터뷰]
할아버지하고 말을 다 한 다음에 후에 좀...

[기자]
알겠습니다. 어떠세요, 느낌이?

[인터뷰]
좋습니다.

[앵커]
이렇게 단체 상봉의 장면을 보니까 진짜 감시하는 인력은 보이지 않고 굉장히 화기애애한 분위기네요.

[기자]
현재로서는 2015년 때에도 제가 방송을 했고 이산가족 상봉 현장을 몇 번 전달한 경험이 있는데 과거에 비해서는 그런 화면이 그런 장면은 안 보입니다.

[인터뷰]
상당히 변화의 모습이고 과거에 이런 만남이 이뤄진 것은 장군님,, 최고지도자, 수령 이런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싹 들어갔죠. 그만큼 북한도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 국가의 정상적인 지도자상, 그런 걸 각인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이산가족 상봉. 여기에 대해서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겠죠.

[앵커]
이문혁 할아버지, 조카들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기자]
누가 그렸어요?

[인터뷰]
네?

[기자]
누가 그렸어요?

[인터뷰]
우리 막내아들 손주들.

[기자]
몇 살이에요?

[인터뷰]
지금 인민학교 소학교 3학년.

[기자]
굉장히 잘 그려요.

[인터뷰]
잘 그리기는 뭘 잘 그려.

[기자]
눈에 번쩍 띄어요. 좋은 선물인 것 같습니다.

[인터뷰]
네.

[기자]
행복하게 지내세요.

[앵커]
조카죠.

[기자]
거의 칠십 중반 이렇게 보이죠. 이문혁 할아버지는 95살로 되어 있습니다.

[앵커]
이렇게 대부분 참가자들이 고령이다 보니까 건강 문제에 대비해서 의료진이나 지원 인력도 예전보다 굉장히 늘렸다고 하죠?

[기자]
그런데 이번에 다행히 과거에도 고령이신 분은 앰뷸런스에 누워서도 가겠다고 했는데 다행히 오늘 오전까지는 버스에 다 동승을 했고 만일의 경우에 있어서 5대의 앰뷸런스가 동행했는데 앰뷸런스에 누워서 가신 분은 아직까지는 단 한 분도 없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앵커]
손자가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8월 2일에 오늘 상봉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려서 나왔습니다. 70년 만에 만나는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라는 그림을 그렸네요.

[기자]
북측 관계자, 아마 현장에서 보조 업무를 하는 북측 관계자들 모습입니다.

[인터뷰]
인민학교라고 하니까 우리로 초등학교, 그림을 잘 그리나 봅니다.

[기자]
그러니까 증조부가 되겠죠, 그 아이 입장에서는. 증조부한테, 얼굴 모르는 증조부한테 지금 잠깐 보였습니다마는 데셍을 해서, 70년 만의 만남입니다. 그걸 전달해 줬다고 하지 않습니까?

[앵커]
다음 테이블 얘기 좀 볼까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남측의 양철수 할아버지가 화면에 처제로 보이는데요. 리용희 씨 처조카 임송근 씨를 만나는 모습인데요.

[인터뷰]
그전에 어려서 살던 얘기만 했어요. 이만해서 만났는데... 학교 다닐 때.

[기자]
돌아가신 걸로 보이고요. 그래서 부인이 돌아가셔서 대신 처제. 역시 얼굴이 비슷하니까 상당히...

[기자]
리용희 할머니의 이야기 도중에 요만할 때 어려서 전쟁 전에 두 분이 만났던 기억이 있는 거예요. 지금 그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이만할 때 만났다, 기억이 있다 그러시지 않습니까?

[앵커]
60년 전이어도 기억 속에는 어제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겠죠? 지금 앞서도 잠깐 언급해 주셨습니다마는 이번 주에 2번 만남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가족이 불과 200가족 이렇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많은 이산가족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걸 더 늦기 전에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상설면회소 같은 그런 건가요?

[인터뷰]
1회차 우리 방문단 89명이 북측에 있는 가족 195명 정도 만나는 것이죠. 2회차는 북한의 방문단 83명이 우리 측에 있는 가족. 약 337명을 만나게 되어 있죠. 어쨌든 간에 지금 이 만남도 그렇게 보면 숫자가 상당히 작은 것이죠.

[앵커]
모자 상봉이군요. 92살 이금섬 할머니가 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리상철 씨. 그리고 손자 며느리 김옥희 씨를 만나고 있습니다.

[인터뷰]
과거에도 보면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는 상봉 횟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남북관계가 안 좋았을 때는 상봉 횟수도 적었죠. 근본적 해결에 있어서는 가장 기본이 남북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좋은 상태에서 당국이 이마를 맞대서 상봉 횟수도 늘리고 상봉 숫자도 늘리고 또 상시 상봉, 더 나아가서 화상 상봉. 영상 편지 이런 걸 다 해야겠죠. 이런 걸 하려고 하면 또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생사 확인부터 해야 됩니다.

죽은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 남북은 과거 2001년도에 두 차례에 걸쳐서 생사 확인한 사례는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숫자가 적습니다. 그래서 지금 북한은 행정, 전산이 미비하다. 우리는 IT 강국 아닙니까?

우리가 지원해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그런 상태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기자]
또 하나, 북한이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행정적인 사업망, 우리로 해서는 행자부, 주민등록 등초본제도가 북한도 잘되어 있는 곳이거든요. 굉장히 잘 돼 있는데 과거 이산가족 상봉에 관여했던 당국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지만 있으면 굉장히 쉽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고향이 어디냐 그래서 같은 단어를 넣어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맞춰서 찾아내고 거기서 나이 하면 굉장히 확률도 많아지고 몰랐던 친인척까지 찾을 수 있는 확률이 많은데 결국 양 박사님 말씀하신 대로 의지죠, 의지. 당국자들 간의, 위정자들 간의 의지죠.

이런 부분이 전파를 해서 결국 인도주의적인 문제니까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산가족 상봉에서 단 한 분이라도 빨리 만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거죠.

[앵커]
지금 소리 좀 들어볼까요?

[인터뷰]
어떻게 변했냐고 누나들이.

[인터뷰]
누나들 다 그때 이렇게 봐도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모습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고. 그런데 제가 우리집에 이런 족보가 있어요. 이런 게 있어요. 와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있잖아요.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김봉용이 알아? 김용녀 알아? 그랬더니 어머니라는 거예요. 나도 어머니니까 동생이지. 처음에 와서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 이름을 대면서 아냐고 했더니 아버지라고 그러고 어머니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나한테도 어머니 되고 아버지 되니까 동생 맞죠. 그래서 찾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렇게 아니면 찾을 길이 없어요.

[기자]
계속 연락이 됐으면 좋겠다 그렇죠? 계속 연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죠? 계속 연락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터뷰]
네, 앞으로 연락할 수 있으면 참 좋겠어요.

[앵커]
60여 년 동안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기억, 흔적을 가지고 혈육 찾기를 하는 겁니다. 얼마나 애달픈 사연입니까?

[인터뷰]
그렇죠. 우리가 지금 쉽게 이야기는 할 수 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이러는데 한 번 만난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서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오히려 병이 난 사람도 많다, 이렇게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좀 더 이미 만났던 사람들은 서신, 영상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전향적인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보여지고. 지금 북측에서 김주환 기자가 얘기했는데 물론 전산 행정 미비가 맞습니다.

또 북한에서 가족 제도가 우리와 차이점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양부의 성을 따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남편이 죽고 나면 애기들, 이 사람들이 뭐냐 하면 새로운 양아버지의 성을 따르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앵커]
지금은 나종표 씨. 남측의 나종표 씨. 형의 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조카들이네요.

[기자]
또 하나 우리가 과거에 연좌제 때문에 사실은 우리도 감췄던 부분이 있어요. 북측에서는 실향민, 월남을 했던 가족들, 북한이 과거 체제 5등급제로 나누면서 피해볼까 봐 감추었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러니까 거듭 말씀드리면 이번에 북측에서는 나름대로 북측 체제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라거나 어느 정도 체제의 성군으로 유지되는 사람들, 그러한 인사들만 나온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인터뷰]
건강하고...

[인터뷰]
아들하고 사십니까? 둘이서 삽니까? 손주들도 안 데리고... 오래 사세요.

[인터뷰]
딸들이다. 형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고. 형님의 딸들. 저로서는 조카가 되죠.

[기자]
보니까 어떠세요?

[인터뷰]
너무나 감격스럽고 원망스러운 일이죠. 이렇게 만나볼 수 있어야 되는데 형님이 생존해 계실 때 우리가 행방불명이 된 뒤로 다 강제 납북에 들어갔고 납북이 된 뒤에 생사를 몰랐잖아요.

그러다가 이번에 당첨이 돼서 만나게 되니까 그래도 형님이 생존해 계셨구나 하는 그런 편안한 느낌을 갖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서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자]
너무 표정이 좋으세요. 조카 분들은 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잘 못 들었는데.

[인터뷰]
조카들이 그렇게 살아있음을 형님이 살아계셨으니까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개무량하다 하는 것이죠.

[기자]
나주 영삼포가 고향으로 알려져 있죠. 목포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형이 갑자기 실종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해 보니까 92년도에 사망을 했다. 그런데 표기 차이입니다. 북한에서 나 씨를 라 씨로 표기하냐인데 오해하는 시청자 분들을 위해서 설명드리면 같은 성 씨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요. 그래서 형의 딸들을 만난 거죠.

[앵커]
60여 년 동안 헤어져 있던 당사자도 아니고 형의 딸인데 한두 시간 만에 서로 친족인 걸 쉽게 확인하고 한몸이 되는군요.

[인터뷰]
혈육이라는 것은 어디에 갖다놓더라도 당장 알아보는 것이, 이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민족공동체에서 혈연,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겠죠. 그다음 표기법에 있어서 김주환 전문기자께서 남북한에 언어 차이는 없잖아요. 단지 표기의 차이는 있겠죠.

그래서 나 씨, 라 씨가 있고. 지금 현재 단체 상봉. 환영 만찬. 이 장소는 지금 북한의 금강산호텔에서 하고 있죠. 이 금강산호텔은 뭐냐하면 우리 측 현대아산이 일종의 리모델링을 해서 임대로 사용하는 게 있죠. 그런데 오늘 우리 89명의 가족들이 주무실 때는 외금강호텔에서 잡니다.

외금강호텔은 뭐냐하면 지금 김정은 위원장의 할머니, 다시 말해서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정숙이 휴양을 외금강호텔에 보내거든요. 이번에는 주로 1회차에 있어서 외금강호텔과 금강산호텔. 이곳을 주로 이용하고 2회차 다시 말해서 24~26일 할 때는 우리 면회소 또 금강산호텔. 이곳을 주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기자]
지금 작은 변화 중 또 하나가 뭐냐하면 테이블마다 번호표를 볼 때 현대아산이라고 마크가 표기되어 있어요. 이것까지 다 남북이 협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는 굉장히 껄끄러울 때는 그런 것 가지고도 실랑이를 벌였는데 어느 정도 용인을 해 주고 작은 차이가 변화된 것이죠.

[앵커]
이렇게 또 60여 년 만에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만났습니다. 하루빨리 남은 가족들도 만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지금까지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김주환 YTN 정치안보 전문기자였습니다. 두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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