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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애 넷을 키우자니 힘이 들었다!', 생계 때문에 간첩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학군단 장교 출신 30대 남성이 구속됐죠.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서 조달청 전자 입찰 자료를 전달한 혐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한민국 장교 출신이 어떻게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됐을까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 YTN 스튜디오에 김동식 씨를 모셨습니다.
이름만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분들을 위해서 '부여 간첩 사건'을 간단히 소개하죠.
지난 95년 가을입니다.
충남 부여에서 2명의 간첩을 찾아냈고, 교전이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됐는데 이 생포된 1명이 바로 김동식 씨입니다.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원 출신, 부여 간첩 사건의 당사자, 김동식 씨를 지금 만나보시죠.
[앵커]
지금 말씀 들으셨습니다마는 아직까지는 직파된 간첩으로서는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지금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국가안보전략 연구원 김동식 연구위원과 함께 이 간첩에 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얼굴은 아직까지는 드러내는 것이 좋지가 않아서요.
선글라스를 끼시고 화면도 되도록 정면에서 잡지 않음을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지금요, 4남매를 키우는 간첩을 얘기를 하는데 이거 웃어야 합니까?
[인터뷰]
상당히 힘들었던가 봅니다.
[앵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이렇게 보면서 예를 들면 그렇게 생계형 간첩이 우리나라에 맨 처음에 고정간첩을 포섭 하실 때 생계형 간첩, 생계가 어려운 사람으로 타깃을 잡나요?
[인터뷰]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가 할 때는 이념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해서 포섭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최근에는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아마 이 분은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지 않았나 본인이,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앵커]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다?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면 어디 약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을 것 아니에요.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생계형이라고 하는 얘기에서 나왔듯이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북한을 통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의도적으로 북한 공작부서에 접근을 하지 않았나, 본인이.
북한이 먼저 접근을 한 게 아니고 본인이 먼저 접근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앵커]
우리 김 선생님, 리호남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인터뷰]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앵커]
리호남이라는 사람이 바로 북한 포섭 당한 그러니까 일종의 고정간첩이라고 봐도 되는 거죠, 이 사람이요?
[인터뷰]
네, 그렇죠.
[앵커]
고정간첩 전 씨가 중국을 방문해서 접촉한 공작원이 리호남이라는 건데 리호남은 지난 2010년에 이른바 흑금성 사건, 흑금성 간첩 사건 문건에도 등장을 하는 거물급 공작원이라고 하거든요.
흑금성 사건은 아시죠?
[인터뷰]
그거는 언론을 통해서 본 정도고요.
제가 구체적으로 아는 건 없습니다.
[앵커]
직접 관여라든지, 2010년이니까 참 모르시겠군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중국의 포스트 같은 경우에 있으면 거물급 간첩 같은 경우에는 A라는 고정간첩도 접촉하고 B라는 고정간첩도 접촉을 하고 그러나요?
[인터뷰]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개인적으로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약 베이징을 무대로 해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 북한과 연계된 그런 사람들이 사전에 연락을 하고 그다음에 이제 북경에 내려가거든요.
그렇게 되면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이 북경에 나와서 여러 라인들을 만날 수는 있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이 공작원이라기보다는 공작부서에 지도원이나 간부를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여쭤볼 게 뭐냐하면 조금 과거형 얘기인데요.
우리 김 선생님은 두 번 남파가 되셨죠?
처음 남파됐고 두 번째 남파가 되셨을 때 생포가 되셨는데요.
처음 남파가 됐을 때는 남파됐다가 북으로 올라가셨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처음 남파가 됐을 때 임무가 무엇이었어요?
[인터뷰]
그때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기존에 남파된 리선실이라고 하는.
[앵커]
리선실, 그 거물급 간첩?
[인터뷰]
그 할머니를 안전하게 북한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하나의 임무였고 두 번째는 요새는 종북세력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그 당시에는 운동권 인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을 해서 대한민국내에다가 간첩 조직을 구축하는 그런 임무가 두 번째 임무였습니다.
두 가지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앵커]
며칠 계셨어요, 처음 남파되셨을 때?
[인터뷰]
날짜를 보면 6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앵커]
그게 몇 년도였죠?
[인터뷰]
90년이었죠.
[앵커]
90년도요.
6개월이나 계셨는데 검문이나 이런 거 안 당하셨어요?
호텔에 계셨어요, 여관에 계셨어요?
어디에 계셨어요?
[인터뷰]
아니요.
저는 그때 당시에 리선실이 대방동에, 그때 단독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접선을 해서 리선실이 살던 전세 방 한 칸을 저희가 쓰고 살았죠.
그런데 다니면서도 저희는 그 당시 검문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신분증을 위조를 해서 왔었기 때문에 검문은 당했지만 걸린 적은 없었죠.
[앵커]
상당히 허술하네요, 우리나라가.
그런데 이게 웃을 문제가 아닌데요.
그런데 이건 좀 같은 맥락인데 우리 김 선생님은 북한 사투리를 안 쓰세요.
약간 그게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저희 아버지도 이북 출신이시거든요.
물론 돌아가셨지만요.
그래서 제가 이북 사투리를 조금 아는데 약간 있지 심하진 않으세요.
교육을 받으셨군요, 북한에서.
[인터뷰]
서울말을 배웠죠.
[앵커]
그렇죠.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인터뷰]
서울 사람한테 배웠어요.
[앵커]
서울 사람한테...
여기에서 올라간 분이군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몇 개월 배우셨는데 그렇게 사투리가 없어지던가요?
[인터뷰]
한 8개월 정도를 배웠습니다.
[앵커]
8개월이요, 매일이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8시간, 9시간씩?
[인터뷰]
그분하고는 24시간 같이 먹고 자고 하니까요.
[앵커]
다른 훈련도 받으셔야 될 것 아니에요.
독침 쏘는 법이라든지.
[인터뷰]
그런 훈련들은 이미 그 전에 받든지 그 후에 받든지 하고요.
한국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울 때는 일체 아무런 훈련이나 심지어는 사상 교육도 안 합니다.
그것만 집중하라고.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그때 내려오셔서 6개월을 계시면서 리선실을 대동해서 북한으로 올라가셨고 리선실 데리고 올라가시기 전에는 여기에 지하망을 조직하려고 했던 것이죠?
[인터뷰]
지하망을 2개를 조직을 했습니다.
[앵커]
2개라는 게 보통 몇 명이 포함이 돼 있는 것입니까?
[인터뷰]
지하조직망은 보통 한 사람을 포섭을 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한 개 망씩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두 개 망을 만들었다는 거는 두 사람을 포섭했다는 것이고요.
각각 포섭을 해서 그 사람이, 각각 한 사람이 하나씩 망을 만들도록 제가 교육도 하고.
[앵커]
피라미드식이군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렇다면 전 씨라는 사람, 이 사람은 조달청에 민간업체 전자교육 문서를 공작원에게 전달을 했다, 이건데요.
지금 드러난 게요.
그러면 이 사람이 간첩행위를 한 건 맞는데 이 사람도 피라미드 조직의 일부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럴 수 있죠.
[앵커]
그럴 수도 있죠.
이 사람도 조직을 밑에 만들거나 혹은 윗선에서 이렇게 내려오는 조직이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이죠.
[인터뷰]
자기 산하에 다른 구성원들을 규합을 해서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윗선에 연결된 피라미드 말단일 가능성이 좀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쪽에다가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말하자면 운동권 세력을 규합하는 것은 사실상 그런 사람들은 잘 시키지 않습니다.
런 사람들은 보통 정보수집하고 그런 역할,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망을 여러 개로 분포해서 만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고요.
단선 연계로 해서 그냥 이렇게 1대1로 운영할 가능성이 높죠.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리선실을 대동하고 다시 월북을 하셨는데 어떻게 가셨어요?
배 타고 가셨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셨어요?
[인터뷰]
갈 때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앵커]
강화도에서?
제가 이걸 왜 여쭤봤냐면 요새는 제주도를 통해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맞습니까?
[인터뷰]
제가 들어올 때 제주도로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앵커]
김 선생님이 제주도로 오셨구나.
[인터뷰]
네.
[앵커]
강정마을쪽으로 오셨어요?
[인터뷰]
강정마을쪽은 아니고요.
[앵커]
그쪽은 아니고요.
[인터뷰]
제가 왔던 데는 강정마을 옆에 서귀포, 한 번은 서귀포로 왔고요.
[앵커]
두 번째는요?
[인터뷰]
두 번째는 성산일출봉쪽으로 왔습니다.
[앵커]
두 번 다 제주도로 오셨구나.
[인터뷰]
우연히 그쪽으로 왔습니다.
[앵커]
우연히요.
그런데 그게 애용하는 루트 아닙니까, 북한에서 남파 간첩들이 애용하는 루트가 아닙니까?
[인터뷰]
과거 한 70년대 때까지는 여러 차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제가 듣기에는 80년대에는 그런 쪽으로 많이 안 들어왔고요.
90년에 저희가 들어오는데 그래서 그런지 하여튼 자료가 없어서 상당히 애를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제주도로 들어오면 강점이 거기는 그냥 들어오기만 하면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리니까요.
[인터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제주도라고 하는 거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후방쪽에 있기 때문에 휴전선이나 북쪽보다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좀 취약하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런 게 아마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앵커]
그러면 그때 처음 오실 때나 두 번째 오실 때 제주도로 오셨는데요.
그때 권총하고 독침하고 이런 거 다 갖고 오신 거예요?
[인터뷰]
다 갖고 왔죠.
[앵커]
다 갖고 오셨구나.
[인터뷰]
네.
[앵커]
두 번째 오셨을 때 임무는 뭐였죠?
[인터뷰]
그때도 역시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남파된 사람을 데리고 오라, 또. 두 번째는 할아버지 그다음에 이제 또.
[앵커]
할아버지가 뭐예요?
[인터뷰]
그러니까 그만큼 나이가 많은.
[앵커]
기존에 남파된 사람이 할아버지시구나.
[인터뷰]
할아버지였습니다.
[앵커]
거기 주로 기존에 남파되신 분들이 여기에서 늙으신 모양이네요.
리선실도 할머니 아닙니까?
이분도 할아버지. 이 사람도 할아버지.
그리고요?
[인터뷰]
그다음에 두 번째는 운동권 인사들을 가서 포섭을 해라, 그게 또 두 번째 임무였습니다.
임무 성격이나 유형은 첫 번째 하고 유사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그때는 얼마나 계시다가 잡히신 거예요?
[인터뷰]
그때는 두 번째 들어왔을 때는 두 달 정도 있었습니다.
[앵커]
두 달이요?
두 달 만에 잡히신 거죠?
더 있으시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거 아니에요?
[인터뷰]
그때 제가 10월 24일 날에 잡혔는데, 원래는 10월 29일에 접선을 해서 복귀하기로 다 약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닷새 정도 더 있었으면 갔죠, 북한으로.
[앵커]
왜 잡히신 거예요, 실례지만요.
누가 신고를 한 것입니까?
[인터뷰]
결국은 접선을 하려고 했던 그 상대를 만나려고 갔다가 거기에서 경찰하고 조우를 한 것이죠.
[앵커]
그런데 신분증을 다 갖고 계셨다고 하셨잖아요.
[인터뷰]
그런데 거기에서 경찰들이 불신검문을 했고요.
거기에 이제 검문에 응하는 과정에 거기에서 신분이 노출이 되니까요.
경찰들이 미리 현장에 가 있었고요.
그래서 이제 잡힌 겁니다.
[앵커]
그런데 여기 지하망을 구축하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사람을 접촉할 때 아예 까놓고 말씀을 하세요.
내가 북에서 왔다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럼 그 사람들이 놀라지 않아요? 간첩인데요.
[인터뷰]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앵커]
놀라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신고들을 한 명도 안 했던 모양이죠?
[인터뷰]
그때 신고를 사실 하긴 했습니다.
[앵커]
몇 분이, 사람이요?
[인터뷰]
몇 분이 했는데 그 분들은 제가 봤을 때는 면피성 신고를 했던 것이고요.
나머지는 그나마도 안 했고요.
[앵커]
그래서 이제 생포가 되셨는데요.
그러면 원래 데리고 가려고 했던 할아버지도 잡혔겠네요, 결국에는.
[인터뷰]
그렇죠.
이미 그분은 잡혔었고요.
[앵커]
그런데 보니까 여기 남파돼서 아예 여기에서 늙는 간첩들이 많네요, 말씀을 들어보니까요.
[인터뷰]
옛날에는 6.25 전후로 해서 월북을 했던 그런 사람들을 주로 공작원으로 뽑아서 남파를 시켰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이쪽에 가족들도 있고요.
그리고 또 고향이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에 와서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하다 보면 여기에서 늙어서,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여기에서 늙어서... 그거 끔찍한 얘기네요.
간첩이 돼서 늙어서 죽어요.
그런 할아버지들, 할머니들.
리선실도 마찬가지고요.
이메일을 사용하거나 이렇게 해서 접선하는 그게 익숙하지가 않을 텐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접선을 하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그분들이 활동을 하던 90년대까지는 이메일 같은 거는 안 썼으니까요.
그때는 주로 무전기를 사용을 했고.
[앵커]
모스부호요.
뚜뚜뚜뚜 하는 거요?
[인터뷰]
그건 다 젊었을 때 배웠으니까 그다음에 수신을 하는, 말하자면 지령을 받는 거는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옛날에는 숫자방송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앵커]
압니다.
평양에 있는 삼촌이 이런 거 아닌가요?
[인터뷰]
그런 것도 있고요.
그거 말고 여자 아나운서가 숫자로 부르는 겁니다.
[앵커]
난수표.
[인터뷰]
그게 전문이라고 하는데요.
전문을 불러주면 그걸 가지고 난수표하고 대조를 해서 해부를 하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앵커]
지금 그렇게 여기에서 늙어죽은 간첩까지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고 황장엽 선생님이요, 찾아놓은 게 있는데 아, 여기 있군요.
고 황장엽 선생이 국내에 5만명의 고정 간첩이 활동을 한다, 김정일 책상 위에 서류를 봤더니 여권 핵심기관 회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5만명이 가능합니까?
얼마 전에 국회에서 2만명 얘기가 나왔는데요.
[인터뷰]
제가 봤을 때는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앵커]
물론 5만이 될지, 2만이 될지 모르지만요.
분명히 아직도 여기에서 모르게 활동하고 있는 간첩이 있을 거고 그리고 북한에서 이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올라가려고 김선생 처럼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죠?
[인터뷰]
당연히 있다고 봐야죠.
[앵커]
당연히 있다고 봐야 되나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어떻게 잡아요, 그거?
방법이 없어요, 그거?
증명서도 똑같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요새는 아마 증명서를 위조를 해도 아무래도 이제 우리 남한이 IT기술이나 이런 것들이 발전을 했기 때문에 아마 지문이나 얼굴인식 앱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중요한 것은 지금 같은 경우에는 외국인으로 신분 세탁을 해서 들어오면 이건 가서 검문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요새는 검문을 많이 안 하니까 제가 처음에 왔던 90년대만 하더라도 그때 대모도 많았고 그래서 불신검문을 상당히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검문을 당했었는데 요새는 그냥 다니면 검문하는 경우가 없으니까요.
크게 문제는 안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앵커]
갑자기 생각이 난 게 뭐냐하면 이 씨 피살사건이 생각이 나는데 그때도 내려왔다가 올라간 거죠.
이 씨를 살해를 하고요.
그 사람들도 남파된 지 얼마 안됐고 목적 달성을 하고 올라간 것이 아닙니까?
[인터뷰]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앵커]
그때 우리가 잡을 수가 없었나 보죠?
북쪽으로 돌아가는 그 과정에요?
[인터뷰]
알고 가서 퇴로를 차단하면 좋은데요.
[앵커]
그걸 알 수 없으니까요.
[인터뷰]
그때 당시에는 제가 붙잡힌 다음이거든요.
제가 95년도에 잡혔으니까 97년도에 일어난 일인데 그때 나중에 제가 안 일입니다마는 제가 소속되어 있던 대외연락부에서 공작원이 내려와서, 그 공작원도 제가 압니다.
[앵커]
같이 훈련을 받으셨던 공작원이군요.
[인터뷰]
네,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데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말하자면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하고 지리를 다 알고 있고, 신분증도 다.
[앵커]
지리를 어떻게 알아요?
[인터뷰]
10년, 20년 대한민국 지도를 놓고 연구를 했던 사람들인데 모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잡으려면 아마 제 생각에는 한국 해안으로 들어오는 공작선을 잡아야 되는데 그거 못 잡으면 이 사람들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죠.
[앵커]
그러니까 독침 쏘는 거 권총 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주 지도를 숙달하고 오는군요.
[인터뷰]
여기에 들어오는 것을 다 외우고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물론.
[앵커]
그런데 요새 스마트폰이 있어서 더 쉬울 것이 아니에요?
[인터뷰]
요새는 아주 활동하기 좋죠.
[앵커]
날고 기겠네요.
[인터뷰]
활동하기가 좋죠.
[앵커]
여러 가지로 큰일인데 어쨌든 환경이 많이 변했습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남파 간첩이라는 것은 북한의 대남 정책이 바뀌더라도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인터뷰]
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북한의 대남정책이 바뀔 수도 없는 것이고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전술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주긴 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갖다가 적화를 해야 되겠다는 대남 전략 목표는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변하지 않는 한 또 우리 북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대남공작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아주 참 여러 가지로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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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넷을 키우자니 힘이 들었다!', 생계 때문에 간첩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학군단 장교 출신 30대 남성이 구속됐죠.
북한 공작원의 지령을 받아서 조달청 전자 입찰 자료를 전달한 혐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한민국 장교 출신이 어떻게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됐을까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늘 YTN 스튜디오에 김동식 씨를 모셨습니다.
이름만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분들을 위해서 '부여 간첩 사건'을 간단히 소개하죠.
지난 95년 가을입니다.
충남 부여에서 2명의 간첩을 찾아냈고, 교전이 벌어집니다.
여기에서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생포됐는데 이 생포된 1명이 바로 김동식 씨입니다.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원 출신, 부여 간첩 사건의 당사자, 김동식 씨를 지금 만나보시죠.
[앵커]
지금 말씀 들으셨습니다마는 아직까지는 직파된 간첩으로서는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지금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국가안보전략 연구원 김동식 연구위원과 함께 이 간첩에 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얼굴은 아직까지는 드러내는 것이 좋지가 않아서요.
선글라스를 끼시고 화면도 되도록 정면에서 잡지 않음을 여러분께서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지금요, 4남매를 키우는 간첩을 얘기를 하는데 이거 웃어야 합니까?
[인터뷰]
상당히 힘들었던가 봅니다.
[앵커]
그런데 이번 사건을 이렇게 보면서 예를 들면 그렇게 생계형 간첩이 우리나라에 맨 처음에 고정간첩을 포섭 하실 때 생계형 간첩, 생계가 어려운 사람으로 타깃을 잡나요?
[인터뷰]
그런 건 아니고요.
저희가 할 때는 이념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해서 포섭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최근에는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아마 이 분은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지 않았나 본인이, 그런 생각이 드네요.
[앵커]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다?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면 어디 약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을 것 아니에요.
어떻게 보십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생계형이라고 하는 얘기에서 나왔듯이 본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북한을 통해서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갖고 의도적으로 북한 공작부서에 접근을 하지 않았나, 본인이.
북한이 먼저 접근을 한 게 아니고 본인이 먼저 접근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앵커]
우리 김 선생님, 리호남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인터뷰]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앵커]
리호남이라는 사람이 바로 북한 포섭 당한 그러니까 일종의 고정간첩이라고 봐도 되는 거죠, 이 사람이요?
[인터뷰]
네, 그렇죠.
[앵커]
고정간첩 전 씨가 중국을 방문해서 접촉한 공작원이 리호남이라는 건데 리호남은 지난 2010년에 이른바 흑금성 사건, 흑금성 간첩 사건 문건에도 등장을 하는 거물급 공작원이라고 하거든요.
흑금성 사건은 아시죠?
[인터뷰]
그거는 언론을 통해서 본 정도고요.
제가 구체적으로 아는 건 없습니다.
[앵커]
직접 관여라든지, 2010년이니까 참 모르시겠군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중국의 포스트 같은 경우에 있으면 거물급 간첩 같은 경우에는 A라는 고정간첩도 접촉하고 B라는 고정간첩도 접촉을 하고 그러나요?
[인터뷰]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은 제가 개인적으로 모르겠습니다마는 만약 베이징을 무대로 해서 활동을 했다고 한다면 한국에서 북한과 연계된 그런 사람들이 사전에 연락을 하고 그다음에 이제 북경에 내려가거든요.
그렇게 되면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이 북경에 나와서 여러 라인들을 만날 수는 있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리호남이라고 하는 사람이 공작원이라기보다는 공작부서에 지도원이나 간부를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앵커]
지금 그리고 또 하나 제가 여쭤볼 게 뭐냐하면 조금 과거형 얘기인데요.
우리 김 선생님은 두 번 남파가 되셨죠?
처음 남파됐고 두 번째 남파가 되셨을 때 생포가 되셨는데요.
처음 남파가 됐을 때는 남파됐다가 북으로 올라가셨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처음 남파가 됐을 때 임무가 무엇이었어요?
[인터뷰]
그때 두 가지였는데요.
하나는 기존에 남파된 리선실이라고 하는.
[앵커]
리선실, 그 거물급 간첩?
[인터뷰]
그 할머니를 안전하게 북한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하나의 임무였고 두 번째는 요새는 종북세력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요.
그 당시에는 운동권 인사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 운동권 인사들을 포섭을 해서 대한민국내에다가 간첩 조직을 구축하는 그런 임무가 두 번째 임무였습니다.
두 가지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앵커]
며칠 계셨어요, 처음 남파되셨을 때?
[인터뷰]
날짜를 보면 6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앵커]
그게 몇 년도였죠?
[인터뷰]
90년이었죠.
[앵커]
90년도요.
6개월이나 계셨는데 검문이나 이런 거 안 당하셨어요?
호텔에 계셨어요, 여관에 계셨어요?
어디에 계셨어요?
[인터뷰]
아니요.
저는 그때 당시에 리선실이 대방동에, 그때 단독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접선을 해서 리선실이 살던 전세 방 한 칸을 저희가 쓰고 살았죠.
그런데 다니면서도 저희는 그 당시 검문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완벽하게 신분증을 위조를 해서 왔었기 때문에 검문은 당했지만 걸린 적은 없었죠.
[앵커]
상당히 허술하네요, 우리나라가.
그런데 이게 웃을 문제가 아닌데요.
그런데 이건 좀 같은 맥락인데 우리 김 선생님은 북한 사투리를 안 쓰세요.
약간 그게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저희 아버지도 이북 출신이시거든요.
물론 돌아가셨지만요.
그래서 제가 이북 사투리를 조금 아는데 약간 있지 심하진 않으세요.
교육을 받으셨군요, 북한에서.
[인터뷰]
서울말을 배웠죠.
[앵커]
그렇죠.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인터뷰]
서울 사람한테 배웠어요.
[앵커]
서울 사람한테...
여기에서 올라간 분이군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몇 개월 배우셨는데 그렇게 사투리가 없어지던가요?
[인터뷰]
한 8개월 정도를 배웠습니다.
[앵커]
8개월이요, 매일이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8시간, 9시간씩?
[인터뷰]
그분하고는 24시간 같이 먹고 자고 하니까요.
[앵커]
다른 훈련도 받으셔야 될 것 아니에요.
독침 쏘는 법이라든지.
[인터뷰]
그런 훈련들은 이미 그 전에 받든지 그 후에 받든지 하고요.
한국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울 때는 일체 아무런 훈련이나 심지어는 사상 교육도 안 합니다.
그것만 집중하라고.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그때 내려오셔서 6개월을 계시면서 리선실을 대동해서 북한으로 올라가셨고 리선실 데리고 올라가시기 전에는 여기에 지하망을 조직하려고 했던 것이죠?
[인터뷰]
지하망을 2개를 조직을 했습니다.
[앵커]
2개라는 게 보통 몇 명이 포함이 돼 있는 것입니까?
[인터뷰]
지하조직망은 보통 한 사람을 포섭을 해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한 개 망씩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두 개 망을 만들었다는 거는 두 사람을 포섭했다는 것이고요.
각각 포섭을 해서 그 사람이, 각각 한 사람이 하나씩 망을 만들도록 제가 교육도 하고.
[앵커]
피라미드식이군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그렇다면 전 씨라는 사람, 이 사람은 조달청에 민간업체 전자교육 문서를 공작원에게 전달을 했다, 이건데요.
지금 드러난 게요.
그러면 이 사람이 간첩행위를 한 건 맞는데 이 사람도 피라미드 조직의 일부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럴 수 있죠.
[앵커]
그럴 수도 있죠.
이 사람도 조직을 밑에 만들거나 혹은 윗선에서 이렇게 내려오는 조직이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이죠.
[인터뷰]
자기 산하에 다른 구성원들을 규합을 해서 조직을 만들기보다는 윗선에 연결된 피라미드 말단일 가능성이 좀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쪽에다가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고 말하자면 운동권 세력을 규합하는 것은 사실상 그런 사람들은 잘 시키지 않습니다.
런 사람들은 보통 정보수집하고 그런 역할, 그런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망을 여러 개로 분포해서 만드는 그런 일은 하지 않고요.
단선 연계로 해서 그냥 이렇게 1대1로 운영할 가능성이 높죠.
[앵커]
그렇군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리선실을 대동하고 다시 월북을 하셨는데 어떻게 가셨어요?
배 타고 가셨어요, 비행기를 타고 가셨어요?
[인터뷰]
갈 때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앵커]
강화도에서?
제가 이걸 왜 여쭤봤냐면 요새는 제주도를 통해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맞습니까?
[인터뷰]
제가 들어올 때 제주도로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앵커]
김 선생님이 제주도로 오셨구나.
[인터뷰]
네.
[앵커]
강정마을쪽으로 오셨어요?
[인터뷰]
강정마을쪽은 아니고요.
[앵커]
그쪽은 아니고요.
[인터뷰]
제가 왔던 데는 강정마을 옆에 서귀포, 한 번은 서귀포로 왔고요.
[앵커]
두 번째는요?
[인터뷰]
두 번째는 성산일출봉쪽으로 왔습니다.
[앵커]
두 번 다 제주도로 오셨구나.
[인터뷰]
우연히 그쪽으로 왔습니다.
[앵커]
우연히요.
그런데 그게 애용하는 루트 아닙니까, 북한에서 남파 간첩들이 애용하는 루트가 아닙니까?
[인터뷰]
과거 한 70년대 때까지는 여러 차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제가 듣기에는 80년대에는 그런 쪽으로 많이 안 들어왔고요.
90년에 저희가 들어오는데 그래서 그런지 하여튼 자료가 없어서 상당히 애를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제주도로 들어오면 강점이 거기는 그냥 들어오기만 하면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리니까요.
[인터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제주도라고 하는 거는 우리 대한민국에서 제일 후방쪽에 있기 때문에 휴전선이나 북쪽보다는 상대적으로 경계가 좀 취약하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런 게 아마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앵커]
그러면 그때 처음 오실 때나 두 번째 오실 때 제주도로 오셨는데요.
그때 권총하고 독침하고 이런 거 다 갖고 오신 거예요?
[인터뷰]
다 갖고 왔죠.
[앵커]
다 갖고 오셨구나.
[인터뷰]
네.
[앵커]
두 번째 오셨을 때 임무는 뭐였죠?
[인터뷰]
그때도 역시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남파된 사람을 데리고 오라, 또. 두 번째는 할아버지 그다음에 이제 또.
[앵커]
할아버지가 뭐예요?
[인터뷰]
그러니까 그만큼 나이가 많은.
[앵커]
기존에 남파된 사람이 할아버지시구나.
[인터뷰]
할아버지였습니다.
[앵커]
거기 주로 기존에 남파되신 분들이 여기에서 늙으신 모양이네요.
리선실도 할머니 아닙니까?
이분도 할아버지. 이 사람도 할아버지.
그리고요?
[인터뷰]
그다음에 두 번째는 운동권 인사들을 가서 포섭을 해라, 그게 또 두 번째 임무였습니다.
임무 성격이나 유형은 첫 번째 하고 유사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그때는 얼마나 계시다가 잡히신 거예요?
[인터뷰]
그때는 두 번째 들어왔을 때는 두 달 정도 있었습니다.
[앵커]
두 달이요?
두 달 만에 잡히신 거죠?
더 있으시려고 했던 거 아닙니까, 그거 아니에요?
[인터뷰]
그때 제가 10월 24일 날에 잡혔는데, 원래는 10월 29일에 접선을 해서 복귀하기로 다 약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닷새 정도 더 있었으면 갔죠, 북한으로.
[앵커]
왜 잡히신 거예요, 실례지만요.
누가 신고를 한 것입니까?
[인터뷰]
결국은 접선을 하려고 했던 그 상대를 만나려고 갔다가 거기에서 경찰하고 조우를 한 것이죠.
[앵커]
그런데 신분증을 다 갖고 계셨다고 하셨잖아요.
[인터뷰]
그런데 거기에서 경찰들이 불신검문을 했고요.
거기에 이제 검문에 응하는 과정에 거기에서 신분이 노출이 되니까요.
경찰들이 미리 현장에 가 있었고요.
그래서 이제 잡힌 겁니다.
[앵커]
그런데 여기 지하망을 구축하셨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사람을 접촉할 때 아예 까놓고 말씀을 하세요.
내가 북에서 왔다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럼 그 사람들이 놀라지 않아요? 간첩인데요.
[인터뷰]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앵커]
놀라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신고들을 한 명도 안 했던 모양이죠?
[인터뷰]
그때 신고를 사실 하긴 했습니다.
[앵커]
몇 분이, 사람이요?
[인터뷰]
몇 분이 했는데 그 분들은 제가 봤을 때는 면피성 신고를 했던 것이고요.
나머지는 그나마도 안 했고요.
[앵커]
그래서 이제 생포가 되셨는데요.
그러면 원래 데리고 가려고 했던 할아버지도 잡혔겠네요, 결국에는.
[인터뷰]
그렇죠.
이미 그분은 잡혔었고요.
[앵커]
그런데 보니까 여기 남파돼서 아예 여기에서 늙는 간첩들이 많네요, 말씀을 들어보니까요.
[인터뷰]
옛날에는 6.25 전후로 해서 월북을 했던 그런 사람들을 주로 공작원으로 뽑아서 남파를 시켰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이 이쪽에 가족들도 있고요.
그리고 또 고향이고 그러다 보니까 여기에 와서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하다 보면 여기에서 늙어서,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앵커]
여기에서 늙어서... 그거 끔찍한 얘기네요.
간첩이 돼서 늙어서 죽어요.
그런 할아버지들, 할머니들.
리선실도 마찬가지고요.
이메일을 사용하거나 이렇게 해서 접선하는 그게 익숙하지가 않을 텐데, 그 사람들은 어떻게 접선을 하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그분들이 활동을 하던 90년대까지는 이메일 같은 거는 안 썼으니까요.
그때는 주로 무전기를 사용을 했고.
[앵커]
모스부호요.
뚜뚜뚜뚜 하는 거요?
[인터뷰]
그건 다 젊었을 때 배웠으니까 그다음에 수신을 하는, 말하자면 지령을 받는 거는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옛날에는 숫자방송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앵커]
압니다.
평양에 있는 삼촌이 이런 거 아닌가요?
[인터뷰]
그런 것도 있고요.
그거 말고 여자 아나운서가 숫자로 부르는 겁니다.
[앵커]
난수표.
[인터뷰]
그게 전문이라고 하는데요.
전문을 불러주면 그걸 가지고 난수표하고 대조를 해서 해부를 하는 거죠.
그런 방식으로 했습니다.
[앵커]
지금 그렇게 여기에서 늙어죽은 간첩까지 있다고 말씀을 하셨는데요.
고 황장엽 선생님이요, 찾아놓은 게 있는데 아, 여기 있군요.
고 황장엽 선생이 국내에 5만명의 고정 간첩이 활동을 한다, 김정일 책상 위에 서류를 봤더니 여권 핵심기관 회의 내용이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5만명이 가능합니까?
얼마 전에 국회에서 2만명 얘기가 나왔는데요.
[인터뷰]
제가 봤을 때는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앵커]
물론 5만이 될지, 2만이 될지 모르지만요.
분명히 아직도 여기에서 모르게 활동하고 있는 간첩이 있을 거고 그리고 북한에서 이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올라가려고 김선생 처럼 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죠?
[인터뷰]
당연히 있다고 봐야죠.
[앵커]
당연히 있다고 봐야 되나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어떻게 잡아요, 그거?
방법이 없어요, 그거?
증명서도 똑같다고 하는데요?
[인터뷰]
요새는 아마 증명서를 위조를 해도 아무래도 이제 우리 남한이 IT기술이나 이런 것들이 발전을 했기 때문에 아마 지문이나 얼굴인식 앱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중요한 것은 지금 같은 경우에는 외국인으로 신분 세탁을 해서 들어오면 이건 가서 검문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요새는 검문을 많이 안 하니까 제가 처음에 왔던 90년대만 하더라도 그때 대모도 많았고 그래서 불신검문을 상당히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검문을 당했었는데 요새는 그냥 다니면 검문하는 경우가 없으니까요.
크게 문제는 안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앵커]
갑자기 생각이 난 게 뭐냐하면 이 씨 피살사건이 생각이 나는데 그때도 내려왔다가 올라간 거죠.
이 씨를 살해를 하고요.
그 사람들도 남파된 지 얼마 안됐고 목적 달성을 하고 올라간 것이 아닙니까?
[인터뷰]
그렇다고 보는 겁니다.
[앵커]
그때 우리가 잡을 수가 없었나 보죠?
북쪽으로 돌아가는 그 과정에요?
[인터뷰]
알고 가서 퇴로를 차단하면 좋은데요.
[앵커]
그걸 알 수 없으니까요.
[인터뷰]
그때 당시에는 제가 붙잡힌 다음이거든요.
제가 95년도에 잡혔으니까 97년도에 일어난 일인데 그때 나중에 제가 안 일입니다마는 제가 소속되어 있던 대외연락부에서 공작원이 내려와서, 그 공작원도 제가 압니다.
[앵커]
같이 훈련을 받으셨던 공작원이군요.
[인터뷰]
네,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아는데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말하자면 한국말을 자유자재로 하고 지리를 다 알고 있고, 신분증도 다.
[앵커]
지리를 어떻게 알아요?
[인터뷰]
10년, 20년 대한민국 지도를 놓고 연구를 했던 사람들인데 모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잡으려면 아마 제 생각에는 한국 해안으로 들어오는 공작선을 잡아야 되는데 그거 못 잡으면 이 사람들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죠.
[앵커]
그러니까 독침 쏘는 거 권총 쏘는 것 뿐만 아니라 아주 지도를 숙달하고 오는군요.
[인터뷰]
여기에 들어오는 것을 다 외우고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물론.
[앵커]
그런데 요새 스마트폰이 있어서 더 쉬울 것이 아니에요?
[인터뷰]
요새는 아주 활동하기 좋죠.
[앵커]
날고 기겠네요.
[인터뷰]
활동하기가 좋죠.
[앵커]
여러 가지로 큰일인데 어쨌든 환경이 많이 변했습니다마는 예를 들어서 남파 간첩이라는 것은 북한의 대남 정책이 바뀌더라도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인터뷰]
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북한의 대남정책이 바뀔 수도 없는 것이고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전술적으로 약간의 변화를 주긴 하는데, 근본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을 갖다가 적화를 해야 되겠다는 대남 전략 목표는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변하지 않는 한 또 우리 북한 체제가 존재하는 한, 대남공작은 지속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아주 참 여러 가지로 생생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우리 시청자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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