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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안상호의 일본 체류 당시 인맥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일요신문에 따르면, 안상호와 일본인 부인 가와구치 이소코의 혼인과 귀국 과정에 등장하는 조선인 구연수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한 인물로 파악됐습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학회지 53호에 실린 이정은 당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논문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에 따르면, 안상호는 일본 도쿄에 있던 의친왕 이강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가와구치 이소코를 알게 됐습니다.
논문에는 “두 사람 사이를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던 구연수가 소개해 마침내 결혼하게 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구연수는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 자객들의 궁궐 진입과 명성황후 시해 과정에 관여한 조선인 협조자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99인’에는 구연수가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 소각을 감독했다고 서술돼 있습니다.
구연수의 이름은 1899년 7월 12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가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에게 보낸 문서의 별지에도 등장합니다. 해당 문서에는 구연수가 1895년 10월 8일 ‘왕비 시해 사변’ 당시 대원군에 동조해 궁에 들어간 일본인들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인물로 기록돼 있습니다.
구연수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1월 다른 시해 가담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1907년 5월 귀국한 뒤 친일단체 일진회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울도군수와 경무사, 경시부감 등을 지냈습니다. 1910년 7월에는 통감부 경무관에 임명됐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경무관으로 재직했습니다.
또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송병준의 사위였으며, 말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맡았습니다.
구연수와 안상호 부부의 접점은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됩니다.
정구충이 1985년 펴낸 ‘한국 의학의 개척자’에 따르면 안상호의 부인 가와구치 이소코는 일본 모리가 공신의 딸로, 상류층 가문에 들어가 예법과 생활 풍습을 익히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의친왕저에 갔다가 구연수의 소개로 사무를 보게 됐습니다.
이 인연을 계기로 가와구치는 안상호와 결혼하게 됐다고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와구치는 1907년 3월 안상호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남편의 귀국 준비를 했는데, 당시 머물렀던 곳이 서울에 있는 구연수의 자택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정구충은 이 책에서 1974년 12월 24일 가와구치 이소코를 직접 만나 안상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하영의 아버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책을 언급하며 안상호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의친왕이 일본 도쿄에 머물 당시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여성을 소개해 결혼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 여성과의 결혼 자체를 친일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까지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가족사를 알려온 하영은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인 지난 12일 자필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하영 집안을 둘러싼 비판 여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송과 광고계에서도 하영과 관련한 콘텐츠 및 홍보 일정 취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영이 출연해 이번 논란의 발단이 된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8월 7일 방송분은 다시보기 서비스가 중단됐으며, 관련 유튜브와 네이버TV 클립도 비공개 처리된 상태입니다.
오디오ㅣAI앵커
제작ㅣ이미영
#지금이뉴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일요신문에 따르면, 안상호와 일본인 부인 가와구치 이소코의 혼인과 귀국 과정에 등장하는 조선인 구연수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에 가담한 인물로 파악됐습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학회지 53호에 실린 이정은 당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의 논문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의 생애와 활동’에 따르면, 안상호는 일본 도쿄에 있던 의친왕 이강의 저택을 자주 드나들며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가와구치 이소코를 알게 됐습니다.
논문에는 “두 사람 사이를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던 구연수가 소개해 마침내 결혼하게 됐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구연수는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시 일본인 자객들의 궁궐 진입과 명성황후 시해 과정에 관여한 조선인 협조자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파 99인’에는 구연수가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 소각을 감독했다고 서술돼 있습니다.
구연수의 이름은 1899년 7월 12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가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에게 보낸 문서의 별지에도 등장합니다. 해당 문서에는 구연수가 1895년 10월 8일 ‘왕비 시해 사변’ 당시 대원군에 동조해 궁에 들어간 일본인들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인물로 기록돼 있습니다.
구연수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1월 다른 시해 가담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1907년 5월 귀국한 뒤 친일단체 일진회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울도군수와 경무사, 경시부감 등을 지냈습니다. 1910년 7월에는 통감부 경무관에 임명됐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경무관으로 재직했습니다.
또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송병준의 사위였으며, 말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맡았습니다.
구연수와 안상호 부부의 접점은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됩니다.
정구충이 1985년 펴낸 ‘한국 의학의 개척자’에 따르면 안상호의 부인 가와구치 이소코는 일본 모리가 공신의 딸로, 상류층 가문에 들어가 예법과 생활 풍습을 익히는 당시 관습에 따라 의친왕저에 갔다가 구연수의 소개로 사무를 보게 됐습니다.
이 인연을 계기로 가와구치는 안상호와 결혼하게 됐다고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와구치는 1907년 3월 안상호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와 남편의 귀국 준비를 했는데, 당시 머물렀던 곳이 서울에 있는 구연수의 자택이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정구충은 이 책에서 1974년 12월 24일 가와구치 이소코를 직접 만나 안상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하영의 아버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해당 책을 언급하며 안상호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의친왕이 일본 도쿄에 머물 당시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여성을 소개해 결혼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일본 여성과의 결혼 자체를 친일과 연결해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까지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가족사를 알려온 하영은 논란이 불거진 지 닷새 만인 지난 12일 자필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하영 집안을 둘러싼 비판 여론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송과 광고계에서도 하영과 관련한 콘텐츠 및 홍보 일정 취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영이 출연해 이번 논란의 발단이 된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 8월 7일 방송분은 다시보기 서비스가 중단됐으며, 관련 유튜브와 네이버TV 클립도 비공개 처리된 상태입니다.
오디오ㅣAI앵커
제작ㅣ이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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