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탐사보고서 기록] 5공화국의 강제수용소 3부 : 생존자들

[YTN 탐사보고서 기록] 5공화국의 강제수용소 3부 : 생존자들

2020.09.27. 오후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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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제5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너무 맞아서 피가 터지고…"

"맞아가면서 고생하면서…"

"진짜 지옥 같은 데였습니다."

:박인근 씨하고 전경환 씨하고 내왕이 있었거든."

"그냥 동물 키우듯 죽지 않게만 해주면 된단 말이에요."

"이것의 원조가 형제복지원이잖아요."

"민간인 강제수용소의 수익 창출 구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김대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옛날 그대로입니다. (기자: 간판도요?) 아, 여기 생각하면 진짜. (기자 : 여기는 기억 나시는 게 있으세요?) 이쪽도 길이었습니다. 이쪽도. (기자 : 어때요? 옛날과 많이 달라진 편이에요? 그대로인가요?) 억수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한종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대표 : 일단, 이 고가도로 자체가 바뀌었는데…]

[김대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고가도로는 바뀌었고 이 목욕탕은 그대로 있고… 파출소 순경이 집 전화번호 물어봤는데 그때 집 전화가 없었거든요. 집 전화번호 없다, 우리 집은 이쪽이다. 이래도 내 말을 안 믿어줬어요. 그래서 (파출소에) 같이 있다가 갑자기 새벽에 이상한 차가 오더니만 그래서 잡혀가게 된 거예요.]

형제복지원은 사라졌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쯤 됩니다, 철문. 예. 저쪽을 바라보고…"

언덕은 여전히 가파르다.

뒷산만 넘으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조금 쉬어도 되지요? (안된다! 담배 못 피운다!) 아니 조금만 쉬려고, 다리가 아파서…"

[김대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경비들이 서 있고 무덤 같은 것이 있었고…]

[한종선 /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 생존자 대표 : 아파트 들어설 때 터 닦은 공사 인부로 나오셨던 분은 그 당시 뼈가 너무 많이 나오니까 신고를 해서 영락공원 무연고 묘지로 넘겼다, 이런 얘기를…]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12년간 공식 사망자 513명.

그러나 이건, 원장 박인근의 기록일 뿐이다.

생존자들이 기억 속에는 더 많은 죽음이 새겨져 있다.

[박창범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지금도 찾지 못한 시신들이 아마 많이 있을 거예요. 그 산에… (기자: 직접 목격하셨어요?) 직접 목격했어요. 때리는 것까지.]

[이상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관 나르는 과정도 까다롭죠. 소대원들이 봐선 안 되니까. 보면 말이 웅성웅성 나올 것 아닙니까? 사람 관 막 나르니까.]

YTN 기획탐사팀은 형제복지원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던 중 의심스러운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22살 김광호.

85년 1월 14일 사망.

사인은 심부전증과 고혈압.

그런데, 87년, 박인근을 수사했던 김용원 검사에게 한 수용자가 보낸 탄원서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김광호는 정신요양원에 갇혀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탄원서를 쓴 생존자를 찾아 그가 목격한 죽음에 대해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강신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기자님 전화 받고 곰곰이 생각을 더듬다 보니까 기억이 나더라고, 애가 어렸어. 나보다 그리고 얼굴이 보송보송하고 여드름도 벌겋게 났을 때라 그러니까 그때 걔가 20살 땐가 21살 땐가 들어와서 22살 때 죽었을 거야 아마… 목숨을 끊었어요. 침대에서…]

22살 청년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지병 탓으로 꾸며졌을 가능성이 크다.

[강신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바로 내 옆에 있었어. 침대가 ‘아 형님 여기 진짜 못 있겠다. 갑갑해 죽겠다’ 이런 얘기를 가끔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죽은 거야.]

강신우 씨는 살아남았다.

그는 84년 여름 형제복지원에 끌려왔다.

강제로 약을 먹고 복지원 내 정신요양소에 갇혔다.

버티고 버텨서 지옥을 벗어났지만,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강신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형제복지원에서) 뇌를 다쳤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내가 그걸 몰랐어. 뇌출혈이 왔다가 이게 이제 막히니까 뇌경색이 온 거야. 가면 갈수록 몸이 자꾸 걷는 게 더 안 좋아지고…]

생과 사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걷다 가까스로 삶의 영역으로 넘어 온 그들은, 여전히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

[이상명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저도 어릴 때 죽으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형제복지원) 나온 뒤에 너무 힘들어서 먹고살기 힘들어서 어떻게 살 방식을 모르니까.]

[김 모 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국가가 아동 인신매매한 것과 마찬가지잖아요. 얼마나 내가 분하고 그래서 내가 우울증에 걸려서 목숨을 끊으려고…]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도 살아남았다.

87년 전두환 정권의 수사 방해 끝에, 살인과 폭행이 아닌 특수감금과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특수감금마저 무죄로 판단했다.

2년 6개월 형을 살고 1989년 7월 20일 출소했다.

화려하게 복귀해 법인명을 네 차례 바꿔가며 사업을 벌이다.

형제복지원 법인 허가가 최종 취소되고 5개월 뒤, 2016년 6월 사망했다.

YTN 기획탐사팀은 박인근의 출소 뒤 사망까지 27년간의 행적을 좇다 한 곳에 이르렀다.

형제복지원이 그랬던 것처럼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

형제복지원의 마지막 이름, 실로암의 집이다.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로 지금은 버려져 있다.

그런데 실로암의 집을 운영하는 대표이사는 박인근이 아니다. 그의 셋째 아들이다.

[이성재 / 前 국회의원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너희 아버지가 잘못했으니 자식도 잘못했어 이건 정말 안 돼요. 저도 그 점은 반대하는데 그렇게 접근하기보다, 투명하면 누가 해도 괜찮습니다. 투명하면. (운영이) 투명한가에 포인트가 주어지는 거예요.]

2001년 부산시 주례동 형제복지원 부지, 매각 대금 223억 원.

2005년부터 2009년 부산저축은행 대출금 118억 원.

이렇게 법인 명의로 조성된 자금은 사회복지와는 무관한 목욕탕과 온천 등에 투자됐다.

법인 수익사업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상 박인근 개인 돈벌이였다.

복지 시설이라고는 명목상 ‘실로암의 집’ 하나를 운영한 것이 전부였다.

취재진이 확보한 2000년대 ‘실로암의 집’ 회계 자료를 보면, ‘회장님 개인 지출’이라며 장학사업이나 교회 헌금으로 수억 원을 지출하고, 사위에게 이자 명목으로 수십억 원을 송금하기도 한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대표이사를 맡았으니, 횡령이라고 고발할 사람도 없었다.

2012년 부산시 감사 결과 박인근 일가의 범죄가 드러났다.

형제복지원 재산 매각 대금 중 14억 5천만 원 횡령.

온천 사업으로 번 돈 가운데 4억 4천만 원 횡령.

장기차입금 118억 원 중 16억 원 횡령.

나머지 사용처 불투명.

[박민성 / 부산시의원 : 2000년 이후 사상해수온천이나 각종 자산을 불리는 데 있어서 복지법인이 장기차입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은데 장기차입을 계속해서 부산시가 허가해주는 과정에서 충분히 유착 의혹이 가게 됐던 부분이고…]

박인근은 2012년 ‘돈줄’이었던 부산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다.

형제복지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세습도 무산됐다.

그러나 빼돌린 돈은 이미 어딘가로 흘러간 뒤였다.

호주 시드니.

골프장을 갖춘 대형 스포츠 센터.

부지만 8만 제곱미터다.

[호주 골프장 관계자 : (기자 : 스포츠클럽 설립자가 누구인가요?) 제가 지금 응대할 고객이 많아서 다시 전화 주실래요?]

현재 소유주는 박인근의 셋째 딸과 사위다.

90년대 중반 형제복지원에서 빼돌린 돈으로 매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박인근은 매일 밤 골프장 수입 내역을 팩스로 받아 직접 결제했다.

장녀에게는 아동 복지 시설을 물려줬다.

그러나 악동 학대와 원생 간 성폭행 사건이 잇따랐고, 결국, 부산시의 해산 명령으로 폐쇄됐다.

막내딸과 사위는 부산에서 정신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다.

87년 형제복지원에 수용돼 있던 정신질환자 가운데 일부가 그곳으로 옮겨졌다.

[부산 정신요양원 관계자 : (막내딸이) 그때 제가 알기로는 어렸을 때잖아요. 그 어린 사람이 뭘 알겠어요?]

[남찬섭 / 동아대 교수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 조사 위원장) : 거기에도 형제복지원에 있다 간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가 협조 안 해줘요. 굉장히 방어적이고…]

87년 형제복지원 내 정신요양원 총무로, 박인근과 함께 형사처벌 받았던 둘째 아들은 현재 부산에 주점을 하고 있다.

취재진은 그를 만났다.

[박 모 씨 / 박인근 둘째 아들 (前 형제복지원 총무) : (기자 : 선생님께서 (형제복지원에서) 총무 역할을 하셨잖아요?) 내가 무슨 총무를 했다는 말입니까? (기자 : 선생님, 박○○ 선생님 맞으시잖아요?) 아닙니다. 잘못 알고 왔어요. 그런 사람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우리가 (기자 : 당시에 기소된 것 보면 공소장에 그렇게 나와 있고 피해자들도 증언하시잖아요?) 피해자들이 누구예요? 됐습니다. (기자 : 피해자들한테 사과하실 마음은 없나요?) 내가 무슨 피해자한테…. 그런 거 없어요. 나는 월급 받고 일했으니까 내가 오히려, 내 인생이 오히려 더 피해자지. (기자 : 분명히 책임은 있는 문제인 거잖아요.) ]

87년 형제복지원과 함께 문제 됐던 대전 성지원.

98년 인권단체에 의해 참상이 드러났던 양지마을.

두 시설의 원장 노재중은 어떻게 됐을까?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노재중 씨 복지법인이) 대전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대재벌이라고 보통 표현을 합니다. 복지재벌.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요.]

99년 노 씨는 횡령죄로 3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가석방됐다. 그리고 복귀했다. 사업은 번창했다.

2020년 현재, 특수학교와 장애인, 노숙인 시설, 노인요양원과 병원까지, 무려 12개 시설이‘천성원’이라는 법인 아래 모여 있다. 직원 6백 명, 한해 정부 보조금은 136억 원에 이른다.

세습은 순조로워 보인다.

노 씨는 오래전 자리에서 물러났고, 지금은 부인이 천성원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아들 셋은 모두 법인의 시설에서 직을 맡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지원받는 공익법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족벌 경영.

이뿐만이 아니다.

노 씨는 지난 2004년 천성원에서 양지마을 등 충남 연기군에 있던 시설 세 곳을 분리해 ‘이화’라는 새로운 법인을 세웠다.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 분리한다 이거야 분리. 이사회에서 분리해 주면 돼요. (기자: 엄밀히 말하면 천성원 손해잖아요.) 그 이사들이 다 그 사람의 사람이야. (기자: 노재중 씨의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최근까지 8년 넘게 새 법인 대표를 맡은 건 박 모 씨.

98년 양지마을 직원으로 있다가 노 씨와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노 씨의 둘째 부인으로 올해 5월까지 대표이사직을 맡았다.

[박 모 씨 / 前 천성원 분리 법인 ‘이화’ 대표 : (기자 : 여기 박○○ 원장님 댁 맞나요?) 누구세요? (기자: 안녕하세요. YTN에서 나왔는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기자: 과거에 폭행, 감금 이런 것도 있었다 그러잖아요.) 근데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솔직히 아닌 것도 많죠. 모르겠어요. 저만 아니면 되니까. (기자: 이사회에서 후임 정하고 그만두시잖아요.) 노(재중) 회장님한테 여쭤보세요. 저는 정말 몰라요.]

공공의 재산인 복지법인을 마음대로 쪼갠 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에게 나눠주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유를 새 법인의 초기 이사 명단에서 찾을 수 있었다.

[前 충남 연기군 공무원 : 사회과장 출신이야 조OO대표가. (기자:사회과장이면 복지시설 담당?) 그렇지. 사회과장 할 때부터 노재중이랑 짝짜꿍이 됐었지. 그래서 이화 법인을 만든 거야.]

(기자:노OO 이사가 큰딸이에요?)
"그럴걸요."

"여OO 이사는 노재중이 데리고 온 사람이에요."

"전OO 이사는 면장, 그 지역 면장"

공무원과의 유착, 이사회 장악, 족벌 경영은 그렇게 가능해졌다.

[김동근 / 前 대전시의원(1995년~2002년) : 딱 한 가지로 얘기한다면 공직자와 시설 운영자의 유착관계예요. 그러니까 계속 지원해주고 뒤로 주머니 차고….]

취재 과정에서 노 씨의 아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노 모 씨 / 노재중 아들 : 시설 자체는 개인 것이 아니에요. 지금 직을 맡고 있을 뿐이지 저희는 떳떳하게 운영하고 있고 여러 사람한테 혜택이 가게 하려고 하는 거고 개인 소유물이 아니니까….]

그런데, 취재진은 법인 공시 자료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차입금 33억 원.

노 씨와 그의 부인, 아들을 비롯한 특수관계인들이 천성원에 빌려준 돈이다.

[노재중 / 前 양지마을·성지원 운영자 : 아니 내가 무슨 돈으로 그걸 빌려줘요? (기자: 빌려주신 게 없어요? 여기 차입금이라고 나와 있는데?) 모르겠어요. 그거는. 나는 뭐 매일 풀이나 뽑고 이런 거지. 내 나이에 뭐를 해. (기자: 돈 빌려주신 것도 없고요?) 경찰이 와서 얘기해야지 왜 기자분이 얘기하시지?]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복지법인이 출처 불명의 돈 수십억 원을 빌린 셈이다.

그러나 감독기관은 그 경위는 물론 사용처도 모르고 있다.

[대전시 관계자 : (기자 : 특수관계인한테 차입한 게 없어요?) 그건 확인이 안 되니까요. 별도로 확인해봐야 하는 거죠.]

이해되지 않는 복지 행정은 이것만이 아니다.

천성원은 은행에서 수십억 원을 빌려 수익사업인 병원에 쏟아붓는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해마다 적자가 쌓여간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투자를 대전시는 매번 허가했다.

[김정환 / 변호사(사회보장법 박사) : 계속 적자가 나는데 그 의료기관을 유지하고 있다면 사실은 의료기관을 유지하고 있는 자체가 사회복지법인이 탈법적 행위를 하는 데 사용되고 있지 않나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는 상황이거든요.]

이렇게 천성원 자산 2백억 원 가운데 절반은 빚으로 남았다.

그러나 노 씨 일가는 여전히 천성원을 지배하며 전권을 휘두른다.

회계 장부에 기록된 차입금을 빌미로 채권자의 권리까지 행사할 수 있다.

[정도진 /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회계 전공 박사) : 중요한 건 이것도 빌린 돈이기 때문에 갚아야 하는 것이고요. 이 경우는 의료법인에서 지금 돈을 못 벌고 있으니까 결국 고유목적사업인 공익사업 쪽에서 이 차입금을 나중에 주주나 임원이나 종업원한테 갚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는 거죠.]

[원용철 / 목사 (대전 노숙인 쉼터 ‘벧엘의 집’ 운영) : 어휴, 진짜 욕 나오네. 이야… 이렇게 해서 그것을 대대손손 해 먹는구나.]

탐욕에는 끝이 없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하다.

그 속에서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후회와 원망, 그리움까지, 모두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형, 경보 왔어. 경보.]

형제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형제복지원은 그들을 가뒀다.

형은 다리가 불편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형을 두고 형제복지원을 떠나 온 그날이, 잊혀지지 않는다.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사탕 몇 개를 소매에서 꺼내서 감춰놨던 걸 주고 가더라고 사탕 쳐다보면 형 생각 많이 나 자기도 많이 먹고 싶었을 텐데…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혈육 동생이라고 그거 안 먹고 자기가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사탕 많이나 주나? 세 개 두 개 주는 거 놔뒀다가 그런 사탕을 감춰놨다 한 번 만나면 챙겨주고….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만났잖아.]

형 박경오 씨는 2015년 세상을 떠났다.

폐암이었다. 평생을 아파했고,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내내 가난했다.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다음 생에 태어나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자고 우리. 그래서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 받고 다른 세계에서 한번 살아보자고. 꼭 형 만날 것 같아. 다음 생애에서는 꼭 만날 사람이야, 형이.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살아남은 동생은 지금도 발버둥 친다.

형제복지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경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지, 어떡해. 열심히 살게, 형. 알았지?]

5공화국 감금의 시대.

그 피해자들은 여전히 갇혀 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처, 그리고 뒤틀린 삶의 결과물 격인 지독한 가난 속에….

[한종현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그때 15살, 16살, 17살이었는데 성장기 때 그러다 보니까 무릎이 다 나간 거예요. 허리가 협착증이 됐고요. 허리 맨 밑의 것이 붙어버렸고요. 무릎은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6월만 되면 퉁퉁 부어요.]

[이혜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어릴 때 제가 집에 오고 나서부터 혼자 어디 나가지를 못했어요. 슈퍼도 가지 못해서 그냥 내 성격이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살았어요. 8년간의 트라우마가 저한테 남아 있던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딜 혼자 못 갔어요.]

[이승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요즘 근래에 들어서 악몽도 꾸고 괴롭긴 합니다. 날 때렸던 사람은 제가 기억하지 않습니까? 악몽들이 살아나기도 하고….]

[배기열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지금 삶이 이렇게까지 안 왔겠죠. 제 삶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엉망진창 산 거예요. 청소년 시기를 힘들게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으니까요.]

[연생모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배도 탔었고 원양어선도 탔었고 먹고살려고 하는데, 안 되더라고요. 나도 먹고살려고 노력은 많이 해봤어요. 남의 것 훔치지 않고 내가 벌어서 먹고살려고 해봤는데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힘들더라고요. 열심히만 살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다시 형제복지원과 마주했다.

형제복지원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하나의 사건도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잊고 있던 구조적이고 거대한 부조리다.

피해자들의 눈물은 현재의 일이다.

가해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풍요를 누리며 살아간다.

[이성재 / 변호사 (98년 양지마을 ‘햇볕 작전’ 참여) : 지금 20년 전이라 덮으면 이건 영원히 모순을 가지고 가면서 사는 걸 합리화시켜주는 논리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금철 /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과정 : 가장 사회에서 취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손이 닿아야 하는 공공부조 시스템은 여전히 70년대 80년대 형제복지원이 운영되던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공공부조 시스템은 아직까지 형제복지원 체제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약자와 소수자를 시야에서 지우는 대규모 수용은 5공화국의 유물이다.

이제는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남찬섭 / 동아대 교수 (부산시 형제복지원 실태 조사 위원장) : 정부 보조금이라는 게 수용 인원당 보조금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대규모 시설을 운영하는 자체를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책 그만하고 시설을 하더라도 소규모 시설로 하고. 가능하면 지역사회에서….]

[김일환 /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 과정 (형제복지원 연구팀) : (대형 복지시설을) 개인이나 가족들이 사유화하거나 세습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어떻게 더 개방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분명히 왔다고 생각하고 협동조합 형태의 새로운 시설을 모색해 볼 수도 있고요.]

비로소, 야만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희망을 이야기한다.

[한종선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대표 : 진상규명이 끝나기 전까지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저희가 건강하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떻게든 살아남는 모습을 통해서 희망을 포기하기보다는 희망을 갖고 모두가 살아갈 수 있는 차별 없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김대우 /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 배우고 싶은 욕망은 계속 있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으니까 좋다, 내가 공부를 해야겠다. 공부해서 사회복지과라도 가보자 해서 제가 이번에 며칠 전에 공부해보려고 신청했어요. 나도 공부해서 남들처럼 떳떳하게 대우도 받고 싶고 국가에서 내 억울한 삶, 보상도 받고 싶고 이런 심정입니다.]

(기자 : 초등학교 졸업장 들어보시겠어요?)
"아직 졸업한 것 아닌데요. 검정고시! 검정고시 치려고요."
(기자 : 그것만 잠시 들어주시면 찍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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