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해공 신익희 선생이 1956년 오늘 64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민주당의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해 선거전에 나선 해공은 전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갑자기 숨졌다.
제3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관권과 폭력을 동원해 민주당 등 야권의 선거운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을 허용한다는 헌법 개정안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불법통과시켰다가 국민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해공의 급서 소식은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에게 큰 허탈감을 줬다.
5월 15일 실제 선거일에는 그에게 185만여 추모표가 던져져 우리 나라 선거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량 무효표가 나왔다.
해공은 3.1운동 때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며 해외독립운동원과 국내 지도자들과의 연락임무를 맡았고, 그 뒤 상하이로 망명해서는 임시정부의 내무부장,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사망 6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민주당의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해 선거전에 나선 해공은 전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갑자기 숨졌다.
제3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관권과 폭력을 동원해 민주당 등 야권의 선거운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을 허용한다는 헌법 개정안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불법통과시켰다가 국민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해공의 급서 소식은 그를 지지하던 국민들에게 큰 허탈감을 줬다.
5월 15일 실제 선거일에는 그에게 185만여 추모표가 던져져 우리 나라 선거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량 무효표가 나왔다.
해공은 3.1운동 때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며 해외독립운동원과 국내 지도자들과의 연락임무를 맡았고, 그 뒤 상하이로 망명해서는 임시정부의 내무부장,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사망 6년 뒤인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