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언 드림의 종말…유럽이 미국과 '값비싼 결별'을 준비하는 이유 [한방이슈]

유러피언 드림의 종말…유럽이 미국과 '값비싼 결별'을 준비하는 이유 [한방이슈]

2026.01.30. 오후 8:44.
댓글
글자크기설정
인쇄하기
AD
20여 년 전,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저서 '유러피언 드림'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예고했습니다.

무한 경쟁과 개인의 부에 집착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가 가고, 삶의 질과 공동체의 안녕, 그리고 지속 가능한 평화를 추구하는 유럽식 가치가 인류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은 미국과 함께 세계 질서를 이끄는 거대한 축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전 세계가 동경하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2026년 오늘, 그 찬란했던 꿈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규칙과 합의가 지배하던 '평평한 세상'은 흔들리고 있으며, 그 자리에는 자국 우선주의와 날 것 그대로의 힘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의 표준을 자처했던 유럽은 이제 안보를 위협하는 미국과 경제를 압박하는 중국이라는 거대 패권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보호자'에서 '거래자'로…흔들리는 안보 신화

트럼프 행정부에서 안보 파트너십은 더 이상 가치의 공유가 아닌, 냉혹한 '거래'의 영역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인수 요구'는 단순한 거래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트럼프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관세와 군사적 행동까지 불사하겠다는 발언을 내놓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인(2025년 1월 7일) : (군사·경제적 사용을)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그린란드는 경제 안보를 위해 필요합니다.]

덴마크는 나토(NATO) 동맹국입니다.

동맹국의 영토에 대해 무력 사용 가능성을 언급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유럽에게 나토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보의 근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 스스로를 나토의 리더가 아닌, 나토와 러시아 사이의 '중재자'로 자처하며 동맹을 마치 외부 기구처럼 취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JD 밴스 부통령이 지난해 뮌헨 안보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을 향해 "방위비를 충분히 부담하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건은 대서양 동맹의 분위기가 어디까지 냉각됐는지를 보여줍니다.

[JD 밴스 / 미국 부통령 (2025년 2월 14일, 뮌헨 안보회의 기조연설) : 유럽과 관련해 제가 가장 걱정하는 위협은 러시아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다른 어떤 외부 세력도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는 건 유럽 내부로부터의 위협입니다. 다시 말해, 유럽이 가장 근본적인 가치, 미국과 공유하는 가치에서 후퇴하는 것을 뜻합니다.]

유럽은 이제 조약이라는 종이 한 장이 더 이상 자동적인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 EU 집행위원장(2026년 1월 20일) : 유럽의 대응은 단호하고 단결되며 비례적일 것입니다.]
 
 


가치 공유의 종말…"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일각에서는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를 언급하며 이번 갈등도 일시적일 것이라 낙관합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며 동맹국들을 압박했지만, 결국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균열은 차원이 다릅니다.

당시에는 정책적 이견이었지만, 지금은 동맹국을 상대로 군사력 사용을 입에 올리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변화는 여론조사 데이터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유럽정책분석센터(European Policy Centre)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을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으로 보는 유럽인은 16%에 불과했습니다.

2020년대 초반 40%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급격한 하락입니다.

'특별한 관계'라 자부하던 영국조차 변화하고 있습니다.

2025년 'YouGov' 조사에서 미국을 진정한 우방으로 보는 영국인 비율은 25%로 나타났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영국인의 67%는 미국이 관세를 부과할 경우 똑같은 보복 관세로 맞대응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우방국의 시민들이 이제 미국을 향해 강경 대응을 요구하고 있는 셈입니다.
 
 


안보의 미국…경제의 중국 사이 '조여드는 유럽'

유럽은 이제 미국 의존도를 줄이는 '탈미(脫美)'를 외치고 있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습니다.

저성장에 시달리는 유럽이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대체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됩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독자적 방위력 구축에 연간 최소 2,000억 유로(약 300조 원)가 필요하다고 추산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빈틈을 타고 밀고 들어오는 중국의 경제적 공세입니다.

현재 유럽은 거대한 지정학적 압박 속에 놓여 있습니다.

미국이 그린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카드로 유럽의 안보 주권을 흔드는 사이, 중국은 '산업용 증기기관차'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정부 보조금을 등에 업은 중국산 저가 전기차와 첨단 기술 제품들은 유럽 제조업의 심장부인 독일조차 위협하고 있습니다.

2024년 독일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사상 최대인 600억 유로를 넘어섰습니다.

중국산 전기차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2020년 1%에서 2025년 15%로 급증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도전이 추가되었습니다.

2025년 1월 딥시크(DeepSeek)로 대표되는 중국의 저가 AI 모델들이 유럽 시장을 노크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최고 모델에 필적하는 성능을 구축한 이 모델들은 유럽 기업들에게 양날의 검입니다.

데이터 유출과 중국 의존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지만, 미국 AI 접근이 차단될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지금, 중국의 오픈 모델은 특정 업체에 갇히지 않는 '보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럽 기업의 37%가 이미 생성형 AI를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제조업에서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에 대한 신뢰 상실이 유럽으로 하여금 중국 기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미국이 시장을 열어주고 안보를 지켜줬으나, 이제 미국은 시장을 닫으며 안보를 거래하고, 중국은 유럽의 마지막 자존심인 제조업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 프랑스 대통령(2026년 1월 8일) : 미국은 기성 강대국이지만 점차 일부 동맹국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최근까지 함께한 국제 규칙들로부터 스스로 벗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은 부상하는 강대국이지만 코로나19 이후 노골적으로 경제적 압박을 가하며 현재 유럽 경제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공백…푸틴과 시진핑에게 배달된 기회

미국과 유럽의 분열은 외부 적대 세력에게는 전략적 기회입니다.

대서양 동맹을 분열시키는 것은 푸틴에게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러시아의 궁극적 목표는 영토 점령을 넘어 동맹의 결속을 파괴하는 것이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최근 행보는 이를 돕고 있습니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로 인해 상처 입은 유럽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포섭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헝가리와 세르비아는 이미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으며, 그리스 피레우스 항구는 사실상 중국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안보는 미국에 흔들리고 경제는 중국에 압박받는 상황에서,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브뤼셀의 한 외교관은 "백악관이 푸틴과 시진핑의 수석 전략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탄 섞인 목소리를 냈습니다.
 
 


유럽의 딜레마…'탈미'의 현실적 한계

물론 유럽의 '탈미'에도 심각한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럽 27개국은 안보 전략에서 여전히 깊은 이견을 보입니다.

폴란드와 발트 3국은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미국 없는 대러 억지력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프랑스와 독일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며 독자 노선을 모색합니다.

독자적 군사력 구축에는 수십 년이 걸립니다.

핵무기 개발, 첨단 무기 체계 구축, 통합 지휘체계 수립 등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 사이 유럽이 러시아와 중국의 압박을 견딜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마르크 뤼터 / 나토 사무총장(2026년 1월 26일, 유럽의회) : 유럽이 미국 없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면 계속 꿈꾸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해요. (미국과 유럽은) 서로 필요합니다. 미국도 나토 회원국입니다. 자국 안보를 위해 안전한 북극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역내 시장만으로는 성장 동력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유럽은 여전히 미국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중국과의 전면적 경쟁은 양날의 검입니다.

결국 유럽이 진정한 독자 노선을 걷기 위해서는 내부 통합, 막대한 투자,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힘의 질서 속으로…다시 쓰는 주권

이탈리아 의원 카를로 칼렌다는 "EU는 세상이 평평하던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일갈했습니다.

도덕적 우위와 공동체의 가치로 세상을 선도하겠다던 '유러피언 드림'의 시대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는 다시 냉혹한 '힘의 정치' 시대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유럽은 외부 압력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 방어력을 갖춰야 하는 생존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과연 유럽은 규칙의 성벽 안에서 나와, 거친 힘의 질서 속에서 독자적인 주권 세력으로 재탄생할 준비가 되었을까요?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천문학적 비용을 감당하며, 러시아와 중국의 압박을 버틸 수 있을까요?

70년 동맹의 재편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서방 중심의 세계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꿈에서 깨어난 유럽이 마주한 현실은 차갑지만, 그 속에서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찾아내는 것만이 '유럽'이라는 이름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그 길이 성공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획·구성 : 김재형(jhkim03@ytn.co.kr)
제작 : 이형근(yihan3054@ytn.co.kr)
참고 기사 : 월스트리트저널, 이코노미스트
 
 
YTN digital 김재형 (jhkim03@ytn.co.kr)
YTN digital 이형근 (yihan3054@ytn.co.kr)

※ '당신의 제보가 뉴스가 됩니다'
[카카오톡] YTN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02-398-8585
[메일] social@ytn.co.kr


[저작권자(c) YT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