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잊지 못하는 그 날...5년의 기억들

여전히 잊지 못하는 그 날...5년의 기억들

2019.04.16. 오전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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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오점곤 앵커
■ 출연 : 김범환 기자

[앵커]
지금부터 세월호 관련 얘기를 차분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김범환 기자가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제 기억에 세월호 관련 보도를 가장 많이 한 기자 아닌가 하는데요.

그리고 세월호의 처음과 끝을, 그리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기자이기도 합니다.

김범환 기자, 어서 오세요.

김 기자, 다시 4월 16일이 돌아왔습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는 특히 어린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면서 온 국민에게 커다란 아픔을 남겼는데요,

먼저 그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짚어볼까요?

[기자]
세월호는 지난 2014년 4월 15일 밤 9시쯤 인천 연안부두를 떠납니다.

원래 6시 반에 출항할 예정이었는데요, 안개가 짙게 끼어 세월호는 2시간 반 뒤에야 출항했습니다.

세월호에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물살이 센 진도 병풍도 부근 맹골수도를 지나면서 사고가 납니다.

그때가 출항 이튿날, 그러니까 4월 16일 오전 8시 48분쯤이었습니다.

먼저 30여 초 동안 정전이 있었고 이후 진행 방향의 오른쪽으로 뱃머리를 틀어 P자 모양을 그리며 중심을 잃고 운항했습니다.

3분 30여 초가 지난 8시 52분쯤에는 선체가 갑자기 왼쪽으로 넘어지면서 멈춰 섭니다.

이후 10시 17분에는 전복되면서 세월호가 물에 잠기기 시작합니다.

세월호에 탄 단원고 학생이 마지막으로 카톡을 보낸 시각도 10시 17분이었습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침몰한 것은 사고 1시간 40분 정도가 지난 오전 10시 반이었습니다.

이후 세월호는 사흘 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앵커]
초기에는 탑승객 수를 둘러싸고 혼선이 많았는데요, 안타까운 피해 상황 얘기도 해 볼까요?

[기자]
세월호에는 모두 476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탑승 인원은 초기에 극도의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만큼 탑승 인원 관리가 허술했기 때문인데요, 나중에는 해양경찰이 직접 CCTV를 보고 일일이 배에 타는 사람 수를 셌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확인한 게 476명이었습니다.

처음에 119로 신고한 탑승객이 5백여 명이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보도가 나가자 해경이 350명이 탔다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이후 477명, 474명, 476명, 다시 474명으로 갔다가 마지막으로 476명으로 굳어졌습니다.

구조자 수도 바뀌었습니다.

단원고 325명 전원 구조 오보도 있었지만, 구조자 수는 사고 당일 최고 368명까지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이는 구조자 수가 겹치면서 부풀려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된 게 174명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20여 일이 지난 5월 8일 중앙구조본부는 구조자가 172명이라고 밝히고 사과했습니다.

실종자가 2명 더 늘어난 겁니다.

결국 304명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세월호 수색이 마무리될 무렵에 295명이 발견되고 9명은 실종 상태였습니다.

이후 세월호 인양 과정에서 4명이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5명은 단원고 학생 2명과 교사 1명 그리고 일반 승객인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앵커]
지금 저희가 나와 있는 목포 신항에 세월호가 바르게 세워져 있는데요, 진도 사고 해역에서 인양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죠?

[기자]
쉽지는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의지만 있었다면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사고 이후 희생자 수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중요한 것은 사고 원인 규명이었습니다.

실제로 세월호를 인양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원인 규명도 어려웠기 때문인데요, 인양은 3년 뒤에야 이뤄졌습니다.

처음에는 인양업체 선정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중국 구난 전문 업체 상하이 샐비지가 주관사로 선정됐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바다 밑을 파서 쇠줄을 연결하고 2017년 3월 말에 시험 인양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본 인양에 들어갔습니다.

세월호는 올라오다가 뒷문이 걸려 중단되기도 했지만, 사고 1,073일 만에 무사히 인양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4월 초 반잠수식 선박에 실린 세월호는 진도에서 이곳 목포 신항으로 옮겨지게 됐습니다.

나중에 당시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인양을 일부러 지연시키고 바다 밑에 그대로 두려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해양수산부도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앵커]
당시 대대적인 수사가 있었는데요.

검찰이 밝힌 사고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기자]
검찰과 경찰은 사고 직후 합동수사본부를 차리고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습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정밀 감정을 위해 학계 등 11명으로 전문가 자문단도 구성했습니다.

사고 당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검찰이 밝힌 사고 원인은 크게 5가지로 조사됐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18년을 쓴 선박을 수입해 무리하게 수리하고 증축하면서 탑승 정원은 117명, 총 톤수가 239톤이나 늘어 좌우 균형이 맞지 않게 됐다는 거였습니다.

두 번째는 사고 당일에 최대 화물 적재량의 배에 가까운 2천백여 톤의 과적이 꼽혔고요,

세 번째는 선체 복원에 필요한 평형수 등을 천3백 톤이나 빼낸 점, 네 번째는 차량과 컨테이너 등을 제대로 동여매지 않아 복원성이 크게 악화한 상태였고, 다섯 번째는 사고 해역을 지날 때 선장이 선실을 이탈하고 항해사와 조타수의 실수로 과도하게 방향타를 돌리는 등 운항상 과실이 더해 침몰했다고 밝혔습니다.

수사본부는 사고 6개월 뒤 모두 4백여 명을 입건해 세월호 이준석 선장과 최초 구조에 나선 경비정 정장 등 150여 명을 구속기소 했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그런데 지금 세월호 가족협의회에서는 다시 수사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까?

[기자]
세월호 4·16연대는 어제 1차로 사고 책임자 18명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철저한 재수사와 사고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는데요, 책임자로 지목된 18명 가운데 청와대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등 5명이 포함됐습니다.

적극적으로 구조하지 않은 김석균 전 청장 등 해양경찰청이 6명입니다.

정부 측 인사로는 황교안 전 법무부 장관, 이주영 전 해양수산부 장관, 남재준 전 국정원장, 전 기무사령부 장군 등 7명이 꼽혔습니다.

4·16연대는 고성능 스피커를 단 구조 헬기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세월호 탈출을 알려 줄 골든타임을 놓친 책임자가 경비정 정장 1명뿐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4·16연대는 공소 시효가 끝나기 전에 정부 책임자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4·16연대는 앞으로 국민이 직접 책임자들을 고소·고발하도록 국민 고소·고발인단을 꾸릴 예정입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수사권이 없으므로 특별수사단을 구성해 전면적인 재수사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올렸습니다.

세월호 CCTV 저장장치, DVR이라고 하는데요.

얼마 전에 세월호 선체 조사 위원회가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DVR 조작과 은폐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은 크게 3가지를 가려달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해양경찰이 왜 선원들만 표적 구조하고 승객들에게는 구조시도조차 하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실제로 최초 출동한 해경 경비정은 9시 35분에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박직 선원들을 제일 먼저 구조했습니다.

행해사와 기관사 등 세월호 선박직 선원 15명은 모두 구속됐습니다.

둘째는 '과적과 조타 미숙 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월호 급변침과 침몰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입니다.

셋째는 '박근혜 정부 등은 왜 박근혜 7시간 기록을 봉인하면서 그토록 집요하게 증거를 조작·은폐하고 진상규명을 방해했느냐'를 들고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배 좌우 균형을 잡는 스태빌라이저가 왜 정상 각도의 2배나 돌아가 있는지, 방향타를 조절하는 솔레노이드 밸브는 언제, 왜 작동을 멈췄는지, 선체 외부가 깊게 팬 원인은 무엇인지, 또 뱃머리 왼쪽에 방향이 제각각인 긁힘은 왜 생겼는지 등 5가지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원인은 선체 내부적 요인이 주로 언급됐는데, 혹시 밖에서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은 아닌지도 밝혀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앵커]
세월호가 인양된 지도 2년이 지났는데요, 지금 보면 녹슬어 시뻘겋게 변하고 해서 위험하게도 보입니다.

세월호는 앞으로 어떻게 처리가 되는 겁니까?

[기자]
세월호 처리는 쉽지 않은 문제로 보입니다.

일단 이대로 계속 둘 수는 없으므로 어떻게든지 처리해야 하는데요, 우선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맨 먼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가 있는 안산이 꼽힙니다.

안산에는 4·16 생명안전공원이 조성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희생자들이 실려 온 진도 팽목항 부근에 세워지는 국민안전체험관 일대가 꼽힙니다.

또 인천과 이곳 목포도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세월호 거치 장소를 놓고 지역마다 여론이 갈리고 있습니다.

세월호 거치 장소는 여론조사 등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선체가 커서 한꺼번에 옮길 수는 없고 해체한 뒤 다시 조립하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앵커]
세월호 참사 발생과 피해 상황, 수사, 인양, 앞으로의 과제를 알아봤는데요, 오늘 전국에서 추모행사가 열리죠?

[기자]
별이 된 아이들의 넋을 달래고 국민이 기억하고 행동하길 바라는 추모 행사가 곳곳에서 열립니다.

이달에 열리는 크고 작은 추모 행사가 백여 가지에 이르는데요, 먼저 안산 회랑유원지에서는 세월호 가족협의회 등이 여는 공식 '기억식'이 열립니다.

공식 행사에 앞서 고잔역에서 4·16 기억교실, 단원고, 화랑유원지로 이어지는 걷기 행사가 마련됩니다.

기억식이 시작되는 오후 3시 정각 경기도에서는 1분 동안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사이렌이 울립니다.

진도에서는 자치단체에서 주관하는 '국민안전의 날' 행사와 함께 팽목항 바람길 걷기 대회가 열립니다.

세월호가 오가던 제주도에서는 14곳에 분향소가 마련된 가운데 마을마다 합창과 행진이 이어집니다.

오늘 전국 곳곳에서는 천 개의 바람이 돼 첫 마음으로 함께 걷고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니까요,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 대한민국을 염원하는 날이 됐으면 합니다.

[앵커]
지금까지 김범환 기자와 세월호가 거치된 목포 신항에서 세월호 5주기 소식 전해드렸습니다.

김범환 [kimbh@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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