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비화가야 고분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을까?

창녕 비화가야 고분서 왜 신라 금동관이 나왔을까?

2020.10.31. 오전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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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를 찾겠다며 싹쓸이하듯 털어간 곳, 바로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일대의 가야 고분군입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금동관을 비롯한 무덤 주인공의 장신구 일체가 발견됐는데요,

신라에서 건너온 듯 경주 출토 유물과 빼닮았다고 합니다.

이승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천5백 년 전 비화가야 지배층 무덤 250여 기가 몰려 있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지난해 이 일대에서 처음 63호분이 도굴되지 않은 상태라는 게 확인됐습니다.

발굴 결과 금동관과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 등 장신구 일체가 발견됐습니다.

다만 신발은 없었습니다.

귀걸이가 굵은고리인 점, 큰 칼이 없는 점 등으로 봐서 무덤 주인공은 여성, 목관을 이은 꺾쇠 위치로 봤을 때 키는 155cm 정도였습니다.

순장 양태에는 가야 문화의 특징이 강합니다.

무덤 주인공 발치의 순장 공간에 2명이 묻혔고, 봉토 안에서 석곽 2개와 옹관 1개가 나와 모두 5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금동관과 귀걸이 등 귀한 장신구들은 마치 신라에서 만든 듯 경주 출토 유물과 모양이 비슷합니다.

[양숙자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 꾸밈 유물들이 주피장자에 그대로 꾸며진 채로 출토된 것도 창녕 지역 고분에서는 처음이고요. 그 외에 순장 공간의 모습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저희로서도 처음 보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일제는 일본부 존재 증거를 찾겠다며 가야 지역, 특히 창녕 교동·송현동 일대에서 고분을 마구잡이로 발굴했습니다.

뚜껑 돌만 열면 유물을 꺼내기 쉬운 탓에 도굴도 많아 유물을 통한 이 일대 시대상 추정이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63호분을 고고학계는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한상 /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창녕 지역 세력들을 신라의 손아귀에 넣는 것이에요. (5세기 말~6세기 초는) 그런 단계가 막 시작되는 시점이거든요. 한반도 중남부 지역 쟁패전의 서막을 보여주는….]

신라와 가야 경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지닌 비화가야 연구는 신라사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YTN 이승은[selee@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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