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2017.09.05. 오후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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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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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와 나란히 안장된 경기도 화성시의 융건릉(隆健陵).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갸륵한 효심이 어린 융건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206호이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수원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던 자리다. 일대에서는 정조 재실(齋室)터, 백제-조선 시대의 생활유적, 수원고읍성과 관아지 등이 줄줄이 발굴되어 역사 유적의 보물창고로 평가된다. 1821년 '건릉지'에 수록된 조선 고지도인 능원침내금양전도(陵園寢內禁養全圖)를 보면, 융건릉이 자리 잡은 화산(花山)은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상인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의 지형으로 표현됐다. 고산 윤선도는 이곳을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명당"으로 평가했다. 지도는 융건릉과 함께 부근의 부속 시설도 담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의 위치가 보이고, 융건릉 남동쪽에는 왕릉과 연계된 수리시설인 만년제가 있다. 특히 그 서편으로는 구슬 주(珠)자 4자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역사학자들은 주(珠)자가 지금은 사라진 대형 조형물들이 있었던 자리라고 본다. 왕릉과 관련해 설치한 용의 여의주 조형물이다. 조형물은 융건릉 남쪽 하단 어디인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취재진은 1966년에 주한미군이 촬영한 흑백 항공사진을 살펴봤다. 융건릉 밑 쪽 4곳에 둥그런 원이 확인된다. 한국고고학회장인 한신대 박물관장 이남규 교수는 "검은 원은 여의주 조형물이 확실하고 나머지 검은색으로 나타난 지점도 조형물로 추정이 되는 곳"이라고 진단한다.


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약 30년이 지난 1995년 항공사진에는 또 다른 변화가 보인다. 남서쪽 여의주 추정 지점만이 식별되는데 더 작고 희미해졌다. 다시 15년이 지난 2010년 사진에서는 그 흔적도 찾기 어렵다. 땅 밑에 조형물 기단이라도 남아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 취재진은 1966년 항공 사진에 나타났던 검은 점의 위치에서 지난해 상점과 사업장이 새로 들어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융건릉 주변 태안3지구의 임야는 1963년 박정희 前 대통령의 지시로 퇴역 군인들의 사회 복귀를 지원하는 제대군인 개척농장이 조성된 장소이다. 1966년에도 조형물이 있었다면 농경지 조성 와중에도 일부는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후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수수께끼이다.

융건릉과 수원 고읍 성터는 우리나라 문화재 행정의 현주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지난 1998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돼 20년 가까이 개발과 보존의 논리가 팽팽히 줄다리기하다가 최근 경기도가 한옥특화지역 등을 포함한 택지개발 사업 변경안을 승인해 사업 재개에 관심을 끌고 있다. 왕릉의 부속 시설인 만년제는 국가 사적이 아닌 도 기념물에 머무른 채, 잡초만 무성한 상태이다. 그러는 사이 융건릉 주변에는 매장문화재 보호 제도와 행정의 허점 때문에 갖가지 공사들이 문화재 조사를 받지 않은 채 진행됐다.



(참고 : 포털을 통해 보는 기사에서 인터랙티브 지도가 뜨지 않을 경우, 인터넷 주소 http://bit.ly/2x66ZAl 에서 지도를 볼 수 있음. 또한,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는 인터랙티브 지도가 구현되지 않을 수 있음)

융건릉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에서 500m 이내에서 벌어지는 개발행위는 문화재 영향검토를 받게 되어 있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제작한 매장문화재 SOS 지도로 융건릉 주변을 살펴보면, 면적 3만㎡ 미만 중소규모 건축이 곳곳에 들어선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절한 문화재 조사를 받지 않고 건축된 '깜깜이 공사'들이다.

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관아(官衙)=

이번에는 조선 후기 1872년에 제작된 평택현(지금의 평택시 팽성읍 일대) 지도를 관찰해보다. 당시 지방 군현의 중심인 읍치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준다. 읍치의 일부를 지도로 확대해 보면, 오른편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사신이 머물던 객사(客舍)가, 중앙에는 수령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이 있다. 이 두 곳이 지방 권력의 핵심적인 공간이라면, 왼편의 향교(鄕校)는 유교 제사와 교육을 위한 시설이었다. 객사와 향교 사이에 내아(內衙: 수령의 살림집), 향청(鄕廳: 고을 양반이 세금 징수 등 행정을 수행하던 시설)과 형리청(刑吏廳: 죄인을 다루는 형리가 근무하는 곳) 등의 관청 건물과 관아에서 거둔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인 사창(司倉) 등이 있다. 주변에는 사찰과 마을 제사 시설도 보인다. 당시 지방의 정치, 행정, 문화를 담은 역사 콘텐츠가 집약된 공간이어서, 매장문화재의 밀도도 높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도쿄대학교 김헌규 연구원의 논문 '조선 시대 지방 도시 읍치의 성립과 계획 원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조선에는 331개의 군현이 있었고 이 중 적어도 226개 군현에서 객사의 존재가 기록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객사 건물은 17개. 249개나 남아 있는 향교와 달리 객사와 관아 건물은 훼손이 빈번했다. 상당수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이다. 평택 팽성읍의 경우 객사와 향교는 남아있지만, 다른 유적들의 자취는 찾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팽성읍 객사도 일제시대에는 양조장으로 사용됐고, 이후 개인 단독주택으로 쓰이던 것을 1994년에 평택시가 매입한 뒤 해체 수리해 복원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②[매장문화재 데이터 분석] 천하명당 정조대왕릉, 용의 여의주는 어디로 갔을까

YTN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분석한 위 지도는 팽성읍에서 지난 18년 동안 발굴이나 시굴 조사 등을 거치지 않고 지어진 3만㎡ 미만 중소규모 건축 지점들을 보여준다. 객사와 향교 사이를 빨간 점으로 표시된 각종 건축 공사가 메우고 있다. 아파트와 빌라, 학교 등 다양하다. 이 붉은점으로 표시된 건축이 모두 아무런 조사를 거치지 않은 '깜깜이 공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 영역에서는 택지개발이나 하수관거 사업 과정에 지표 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지표 조사 영역을 제외해보면, 지도상의 공사 지점 중 적어도 29개 공사가 아무런 문화재 조사를 받지 않은 공사로 보인다. 대부분 다가구 주택과 근린생활시설(상점 등) 들이다. 이남규 교수는 "관아 터 부근에서 과거에 지표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추가적인 정밀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구역으로 그동안 수많은 매장문화재가 훼손됐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특히 인접한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으로 이 지역에도 추가적인 인구 유입이 불가피해, 개발 압력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조선시대 유적이 발굴될까=

고지도 속 평택 객사와 향교의 중간 지점, 옛 동헌(東軒) 자리를 보면,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와 운동장이 자리하고 있다. 초등학교의 설립연도는 1927년이다. 조선을 빼앗은 일제는 각 지역의 객사나 동헌, 향교 등을 헐어버리고, 소학교와 관청을 지었다. 팽성읍 객사리는 객사와 향교 사이의 사창(司倉) 터에는 팽성읍 사무소가, 동헌(東軒)터에는 보통학교(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위한 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이 초등학교에서는 아직 발굴 조사를 한 기록이 없지만, 일제 시대에 설립된 다른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문화재 발굴을 하면 유물과 유구가 출토되기도 한다. 실제로 인천 문학초등학교 안에는 옛 객사와 동헌 일부가 남아 있으며, 지난해에도 조선 시대 관청 건물의 석축이 새로 발굴됐다. YTN 데이터저널리즘팀 분석 결과 일제시대에 설립된 초등학교는 1,952개이며, 이 가운데 매장문화재 유존 지역으로 설정된 초등학교는 17개였다. 나머지 학교에서도 시굴 및 발굴 조사가 이뤄지면 상당수 학교에서 옛 건물터나 유물이 추가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YTN의 매장문화재 SOS 데이터 지도를 살펴보면, 현행 매장문화재 제도하에서는 소홀히 지나치기 쉬운 3만㎡ 미만 건축공사 지점들이 빼곡히 드러난다. 융건릉이나 수원 읍성, 평택읍치와 같은 고고학적 거점지역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융건릉과 평택 팽성읍은 매장문화재 유존지역과 유존지역 사이의 빈틈을 파고드는 각종 개발 행위의 패턴을 잘 보여준다. 별다른 문화재 조사를 거치지 않은 채 진행되는 이 같은 중소 규모 건축은 또 다른 의미의 고질적인 난개발이다. 충남대학교 고고학과 박순발 교수는 "아무 유물이나 유구가 나타나지 않는 지점도 엄청나게 중요한 것의 한 부분일 수 있다"면서 "공백이라는 개념을 고고학에서는 중요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왕릉과 부속 시설 사이, 객사와 향교 사이의 공백에 숨겨진 역사적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팍팍한 현실은 이 '공백'을 포괄하는 고고학적 상상력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서울 도심의 국보 1호 숭례문이나 보물 1호 흥인지문 주변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눈에 보이는 문화재가 하나 있으면, 그 하나만 복원하고 주변은 내버려두는 게 과거의 문화재 행정이었다. 문화재 보존 방식을 점 단위(단일 문화재) 관리에서 면(마을, 지역) 단위의 광역적인 관리 개념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 한정되곤 했다. 아직도 수많은 비지정문화재와 매장문화재의 존재는 난개발의 그늘 속에 망각되고 있다. 역사 문화의 보존을 소홀히 하는 사회는 자신의 뿌리도 정체성도 망각하게 되는 법이다. 문화재 관리를 등한시할 때 지역의 소중한 문화 관광 콘텐츠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손실은 불 보듯 뻔하다. 눈앞의 문화재뿐 아니라, 주변 구역의 드러나지 않은 매장문화재와 자연환경, 공동체 문화까지 포괄적으로 보존하고 주민들의 참여도 끌어낼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문화재 행정, 통합적인 도시계획이 아쉬운 이유이다.

취재 · 기사 · 데이터 분석 : 함형건 (hkhahm@ytn.co.kr)
데이터 정리 · 분석 : 권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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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tn.co.kr/_ln/0106_20170831144552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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