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출발새아침] 역사가 말하는 '하사'의 의미? '진상'의 반댓말

[신율의출발새아침] 역사가 말하는 '하사'의 의미? '진상'의 반댓말

2015.09.23. 오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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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히스토리 인 뉴스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


◇ 신율 앵커(이하 신율): 추석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은 전 장병에게 1박 2일의 특박을 안겨주기도 했죠. 그리고 간식도 줬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하사’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대통령이 군에게 물건을 하사했다고 한 건데요. 역사의 눈으로 뉴스를 읽어보는 시간, 히스토리 인 뉴스. 오늘은 역사속의 '하사품' 이야기와 함께 추석 이야기도 좀 나누어보겠습니다. 오늘도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제연구소의 전우용 교수 스튜디오에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이하 전우용): 네, 안녕하세요.

◇ 신율: 하사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가요?

◆ 전우용: 상대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진상, 상납, 이런 것의 상대어인데요. 그래서 느낌이 왕조시대를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죠.

◇ 신율: 그렇죠. 그런데 이 하사, 적절한 표현은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고 정치권이 이거 가지고 싸울 정도는 아니지만 문제는 있다고 봅니다.

◆ 전우용: 그렇죠. 관점에 따라서 대통령을 왕에 비정할 수 있다고 보면 적절하다고 볼 수도 있는 거고요. 대통령을 왕이 비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부적절했다고 볼 수 있고요. 또 조건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겠죠. 개인 돈으로 줬다면 하사라는 표현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런데 국가예산이라면 그렇게 쓸 수 있느냐?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겠죠.

◇ 신율: 네, 일부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에게는 하사품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국군 최고통수권자가 대통령이잖아요. 대통령이 밑에 사람에게 주는 것, 군인들은 밑에 사람이 맞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군에게는 하사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하던데, 모르겠습니다. 그런데요. 하사라고 하면, 앞서 임금 말씀하셨는데 조선시대에 임금이 하사를 많이 했죠? 어떤 의미를 가진 거였나요?

◆ 전우용: 일단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중세국가, 특히 유교국가인 조선왕조에서는 나라 전체가 임금의 것이에요. 백성은 임금의 신민이죠. 그러니까 뭐든지 임금이 주는 것은 하사품입니다. 관직도 하사하고, 땅도 하사하고, 심지어 이름도 하사하고, 어장이라든가 목장, 영업권, 이런 것들이 다 하사의 대상이기 때문에, 실물만이 아니라 명예, 권리, 이런 것들이 전부 하사의 대상이 되는 거죠.

◇ 신율: 그렇군요. 그런데 뭘 잘해야 주겠죠?

◆ 전우용: 잘해서 주기도 하고요. 친해서 주기도 하고요.

◇ 신율: 친해서요? 처갓집이나 이런 곳에 주는 건가요?

◆ 전우용: 그렇죠. 처갓집이나 왕의 가족들에게 주기도 하고요. 흥미로운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어요. 부마라는 사람들, 왕의 사위인데요. 남성들에게는 가문의 명예이면서도 또 불편한 직위였죠. 부인이 공주인데 어떻게 겁나서 모시고 살겠어요. 더 불안한 건 부인이 요절했을 때입니다. 남성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다른 남성들은 상처하고 나면 바로 새 부인을 들이곤 했는데, 부마는 그럴 수 없었죠. 그런데 왕이 생각하기에는 불쌍하거든요. 괜히 왕실에 장가와서, 홀아비가 되었는데 새 장가도 못 들고 젊은 나이에 저렇게 산다는 게 불쌍한데요. 그래서 거느리던 궁녀 한 사람을 하사한다, 이런 사례도 있고요.

◇ 신율: 그 당시 여성에 대한 시각이 어땠는지 볼 수 있네요.

◆ 전우용: 그렇죠. 물론 일반 여성은 아니고, 궁녀나 노비 신분은 소유물로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하사품으로 취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세조가 기생을 굉장히 싫어했는데요. 궁중에서 기생이 춤추는 것을 그렇게 싫어해서, 기생제도를 폐지하자고 했는데요. 하륜이나 정인지나 몇몇 신하들이 기생을 참 밝히는 신하들이 있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극구 반대하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얼굴 보이지 않게 분을 두텁게 칠하고 춤추게 해라, 그리고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니까 하나 주마, 이렇게 하사한 일도 있었죠.

◇ 신율: 그렇군요. 그리고 우암 송시열 선생은 효종으로부터 가죽 옷을 하사받고, 성균관 유생들은 임금이 준 감귤을 두고 싸우기도 한 모양이에요? 당시에는 감귤이 귀했겠죠?

◆ 전우용: 제주도에서 안 상한채로 올려 보내기가 어려웠던 거죠. 그러니까 특별하게 성균관 유생들에게 주는데, 어느 정도 주냐면 한 쪽 정도, 한 알이 아니라 한 쪽이죠. 그런데 그마저도 못 받는 경우가 생기니까 다툼이 벌어지는 것이고요. 그리고 특별히 원로대신들에게는 특별한 하사품을 주는 경우가 있어요. 보통 나이 70이 넘으면 지팡이를 내려줍니다. 앞으로 너는 내 앞에서 지팡이를 집고 서 있어도 된다. 요즘으로 치면 경로우대증에 해당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이가 많은 노 대신이 병에 걸렸다고 하면 어의를 보내서 진맥하게 하고, 궁중 약을 내려 보내기도 하고요. 송시열의 경우에는 효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신하죠. 그래서 송시열이 효종에게 직접 받았던 담비가죽 조끼, 초구라고 부르는데요. 그게 서울시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그리고 특별한 날에 하사하는 하사품도 있었다고 하던데, 동짓날에는 납약이라는 걸 하사했다던데, 납약이 뭡니까?

◆ 전우용: 납일이라고 해서 동짓날로부터 세 번째 미일이라고 하는데요. 동짓날에 얼마 안 지난 다음날이라고 보시면 되고요. 그 날은 관, 군, 이쪽의 말단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따라서 상비약을 나눠줬습니다. 그걸 납약이라고 해요. 청심환이라든가, 포룡환이라든가, 일반적으로 배탈 났을 때 먹거나 다급할 때 먹는 구급상비약을 나눠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이렇게 관례적으로 내려주는 하사품도 있어서, 처음에 모두에 말씀드렸듯이 진상과 상납의 상대되는 개념이었으니까, 요즘 우리가 세금 낸다고 하지 세금을 상납한다고 하지 않잖아요. 그 당시에는 조세 상납, 곡물 진상, 이렇게 불렀기 때문에 일단 왕실에 들어가는 건 전부 상납이나 진상이었고, 왕실에서 나오는 것은 어떤 명목이든 하사였던 거죠.

◇ 신율: 설이나 추석 때는 뭐 안 줬나요?

◆ 전우용: 특별하게 납약이라고 하는 것이 해가 바뀔 때 전체적으로 주는 것이었고요. 추석에 뭘 줬다는 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친족들을 불러들여서 잔치를 베푸는 것, 잔치도 하사라고 하거든요. 음식 나눠주고, 이런 정도는 있지만, 관리 전체에게 포괄적으로 선물 나눠주거나 이런 사례는 잘 안보입니다.

◇ 신율: 일제 강점기에도 하사품 같은 것, 이건 하사품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습니다만 그런 게 있었죠?

◆ 전우용: 그때는 용어가 한 단계 더 격상되어버려요. 은사라고 합니다. 은혜로운 뜻으로 내려주는 물건이라고 해서요.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다음에 친일파들이죠. 일본의 한국 병탄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들에게 은사금이라고 해서 거액을 천황의 이름으로 줬고요. 그 밖에 민심 수습차원에서 전국의 과부, 홀아비,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에게 돈을 나눠 준 게 있고요. 그리고 군대도 해산하고, 관직에서 다 쫒아내지 않습니까? 쫓겨난 사람들에게 준 돈을 퇴직금이라고 하지 않고 은사금이라고 했어요. 군국주의 시대, 아시아태평양전쟁 정도 되어서는 군수품 전체를 하사품이라고 했는데요. 그러다보니까 심지어 종군위안부에 대해서도 천황폐하의 하사품이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들이 있어서, 역사 근대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일본 역시 천황제 국가였으니까요. 개념 자체가 국가에서 주는 걸 전부 천황이 줬다, 하사품이다, 이렇게 생각한 관행은 조선왕조와 별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겠죠.

◇ 신율: 그렇군요. 그리고 추석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하는데요. 그런데 조금 웃긴 게,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하고, 설 되면 설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하는데요. 원래 추석이 우리 민족에게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요?

◆ 전우용: 추석과 관련된 기록은 많이 나오는데요. 그게 유일, 최대, 이런 표현을 쓰기는 어려운 거라고 봐야 되겠죠. 일반적으로 놀이문화가 가장 풍성했던 날은 정월대보름이죠.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요. 또 단오, 굉장히 중요한 명절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위축되었죠. 상대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설과 추석인데요. 어느 나라든 근대 이후에는 명절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바뀌면서 시간을 표시하고, 고된 농업 노동에 지친 심신을 쉬고, 공동체의 결속을 회복하고, 이런 날로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는데요. 우리는 그 중에 특히 조상숭배와 관련된 한식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많이 있었고요. 그런데 근대 들어서면서 설과 추석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그러다보니까 설은 겨울철의 민족최대의 명절이고, 여름과 가을 사이에는 추석이 그렇고요.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 신율: 귀성행렬 같은 경우에, 귀성길 걱정하시는 분이 굉장히 많은데, 여러분이 특히 조심하셔야 하는 게 귀경길보다 귀성길이 훨씬 사고가 많이 난데요. 조심하셔야 하는데요. 이런 귀성행렬 같은 건 언제부터 생겨난 건가요?

◆ 전우용: 귀성이라고 하는 것이 두 단어의 합성어잖아요. 하나는 귀향,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묘죠. 그러니까 고향에 돌아가서 성묘하기 위해서 가는 게 귀성인데요. 이런 표현은 우리로 치면 30년대에 생겨났는데요. 그런데 이게 추석 때 쓴 말이 아니고요. 서울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 방학에 돌아가는 것을 귀성이라고 했어요. 고향 떠나서 타향살이가 일반화되는 과정이 도시화 과정이고, 이건 근대화 과정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1920~30년대까지는 타향살이가 많이 늘기는 했지만 출가형 임노동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농번기에는 고향에서 일하고, 농한기에는 잠깐 부수입을 올리려고 도시로 나갔다가 돌아오고, 이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추석 때 타향에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귀성 자체가 필요가 없던 거죠. 그러니까 귀성이 필요한 사람은 유학생이라든가 장기적으로 나가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게 오랜 일은 아닙니다.

◇ 신율: 알겠습니다. 전 박사님도 추석 잘 보내십시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 신율: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와 함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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