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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자유언론실천선언
▷(한동오 기자)
영화에서는 기자들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다가 여러가지 고초를 겪기도 하고 고군분투를 하는데, 실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이뤄졌던 배경과는 다른데요. 어떤 부분이 달랐던 건가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우리가 74년이 오기 전에 71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안 있다가 72년 연말에 비상사태가 선포가 돼요. 유신이 선포된 거죠.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에 72년 7월 4일 날,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게 발표돼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에 가고, 평양에서 총리였던 박 뭐라는 사람이 남쪽으로 오고. 이러면서 그 7.4 공동성명이 남북의 지도자 박정희, 김일성에 의해서 발표되는데 그 내용은 '남북은 서로 평화공존하고 교류협력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이런 거였어요. 그런데 그런 뒤편에서 한 석 달 뒤죠. 7월 2일 날 그랬고 10월 말쯤에. 10.17.(10월 유신) 석 달여 안에 남북이 다 통치체제를 그렇게 강화한 거예요. 한쪽은 여기는 영구 대통령 집권 쪽으로 하고. 그쪽은 수상이었던 것을 주석제로 바꾸고. 다 권력을 더 강화시켰어요, 남북이 모두. 물론 양쪽이 다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욕심은 가졌겠지만 북은 원래 헌법 자체가 거기는 계급 독재를 하는 것으로 돼 있고. 이쪽은 그나마 3선 개헌 전까지만 해도 여야가 있고. 야도 발언권이 있고, 야도 언론에도 이렇게 자주 보도가 될 수 있고, 일종의 다자주의, 다원주의적인 헌법을 가진 거란 말이에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서부터 대한민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다원주의, 다자주의, 공생하는 이런 헌법의 원리가 있었다면, 유신체제가 되면서 이것은 다자주의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국회의원 선거도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었다고. 상상할 수가 없죠 지금?
▷(한동오 기자)
진짜 상상도 못했어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러니까 야당이 없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고. 그래도 야당도 꼼짝을 못했어요. 그렇게 72년 연말에 10.17 비상조치.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이쪽에 종교인, 학계, 대학, 언론 이쪽에서 '아, 이제 정말 독재체제로 가는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그 유신헌법이 헌법으로 채택이 된다면 국민투표로 그게 채택이 돼야 되잖아요. 국민투표는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 준비를 해오는데 엄청난 저항들이 일어났어요. 유신헌법 폐지하라는 소리가 73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제일 먼저 나온 게 서울대학에서 73년 10월 2일, 너무 탄압을 심해서 1년 동안 정도 있다가 터져나온 거예요. 그때부터 학생 시위가 나오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유신헌법은 독재헌법이니까 인정할 수가 없다' 이런 유신헌법 거부 선언을 했어요. 그리고 그걸 국민들로부터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고. 그래도 국민투표가 진행이 돼서 99%인가 그렇게 찬성하는 걸로 나왔죠. 그리고 74년 초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을 구속시켜버려요. 그게 최초의 긴급조치에 의한 구속이에요. 1호, 2호. 그러고 74년을 맞이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71년부터 그때 이르기까지 세 차례의 언론 자유 선언을 해요. 그것이 다른 언론에도 번져나가고. 언론 자유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이게 몇몇 기자들만의 선언이 되고 그 앞섰던 사람들은 처벌당하고 쫓겨나가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그러면서 우리들이 마음에 먹은 것은 뭐냐면 '이건 언론자유 선언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흐지부지되고 이런 일은 반복해서는 안 된다'. 뭐냐. 동아일보 같으면 동아일보의 기자들, 동아방송의 PD, 아나운서들. 동아매스컴 안에 있는 모든 언론인이 함께 단결해서 자기들의 신분 보장도 받고 언론 자유도 보장받아야 된다 이런 얘기였어요. 즉 그건 뭐냐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74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어요. 그래서 3월 6일 날 노동조합을 결성을 했는데 동아일보에서 노동조합 간부와 거기에 적극적으로 합류할 사람들 20여 명을 그냥 잘라버렸다고. 그런데 이거는 유신체제 아래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업장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구성하려고 했던 사실만으로 해고를 해버리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부당해고 취소 청구 소송을 냈더니 질 것 같으니까 동아일보에서 다시 우리를 복귀시켰다고. 법을 이렇게 잘 보면은 아무리 독재체제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또 어길 수는 없잖아. 정부도 그렇고, 동아일보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가 복귀를 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는 노조가 성립이 안 됐다고, 잘릴 때는 너희들은 아직 노조를 다 성립하지 못했으니까 아직 성립이 안 됐다고 그러고 우리는 이미 성립이 됐다고, 서울시에다가 접수를 해서 접수증을 받아왔단 말이에요. 우리는 됐다고 보고. 그렇게 동아일보 안에서 우리는 노조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고, 동아일보는 그걸 막으려고 했는데 그게 막아지나. 이미 성립이 됐다고. 그래서 우리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할 때는 이미 180명 이상이 조합원으로. 200여 명 중에.
▷(한동오 기자)
전체 직원이 200여 명..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전체 언론인들. 거긴 공무국, 운수하는 사람들, 사무직, 광고국 이런 데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여기 가담을 안 시켰어요. 실제로 기자, 동아방송 PD, 아나운서 이 사람들만 한 거예요. 180명 정도인데 그게 다 된 거예요.
▷(한동오 기자)
거의 다 가입한 거네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거의 다 했어요. 거기에는 일부 차장들이 들어왔어요. 차장까지만 되니까, 부장은 (노조 가입이) 안 되니까.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을 결성시켜 놓고 그렇게 해서 그걸 가지고 그 중간에 74년 8월 15일 박정희 육영수 피격사태가 있었고. 우린 그런 건 사실은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 일은. 그리고 10월 24일로 D-Day를 잡고 자유언론 실천선언 발표일로.
▷(한동오 기자)
그러면 이 암살 미수 사건 이미 전에 10월 24일 그때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계획을 하고 그걸로 준비를 해왔죠. 노조 가입을 더 많이 늘리고 노조조합비를 받아서 일종의 사업자금 같은 것도 이렇게 하고. 그런 걸 통해서 외신 쪽이나 국내 언론 쪽에도 많이 알려서 다른 기자들은 그런 걸 할 엄두를 못 냈거든요, 다른 사에서는. 여기서는 그걸 해내고 착착 자유언론 실천선언 준비를 했는데 마침 10월 24일로 날짜를 정해놨는데 그날이 UN데이, UN 창립일이었어요. 그때 당시 한국은 UN회원국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1948년에 정부 수립될 때 UN이 한국의 남한 단독정부를 인정을 했거든, 미국 지지하는 나라들로. 그래서 UN에 대해서 무척 고마워하고 UN회원국이 아니었는데도 UN데이를 기념을 했어요. 그날이 휴일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날로 잡고 하는데 이게 우연의 일치지만 23일 날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씨라는 사람이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또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는 유서를 써놓고 할복자살을 했다고.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기사를 중요한 부분에 넣어서 신문 만들자고 그러는데 동아일보에서 그걸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그럼 신문 못 만들겠다, 이렇게 우겨가지고 그 신문을 조금 좋게 넣었어요. 그랬더니 그때 바로 그날 23일 날 편집국장에 취임한 송건호 선생을 사회부장, 지방부장하고 같이 중앙정보부에 연행을 해버린 거예요. 내일이 우리는 D-Day로 잡아놨는데.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에 우리가 얘기한 대로, 동료가 연행되거나 그러면 귀가하지 않고 회사에 머물면서 농성을 한다. 우리가 그냥 농성을 하고 있는데 밤에 풀려났어요. 그리고 10월 24일날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했죠. 바로 그게 '우리는 외부의 간섭을 철저히 거부한다'. 두 번째는 '기관원의 언론사 내의 출입을 금지한다'. 세 번째가 '우리는 이 대의를 위해서 끝까지 투쟁한다'. 이런 세 가지 결의사항을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거예요.
▷(한동오 기자)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것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준비를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런 일들을 다 했던 거예요. 그때 당시 노동조합은 다 하고 싶었는데 일체 그런 게 용인이 안 됐어요. 65년에 한일협정이 맺어진 다음에 많은 일본의 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했잖아요. 그 차관이 들어오면서 재벌들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재벌 기업들이 커지면서 동아일보가 그전엔 급료 수준이 제일 높고 그랬는데. 재벌 회사들이 생기면서 그쪽 급료가 엄청나게 높아졌다고. 언론계가 전체적으로 봐서 동아일보가 그중에 제일 높다고 했어도, 다른 일반 기업에 비해서 확실히 떨어지는 그런 급료 수준이었고. 그리고 복지 부분도 제대로 되질 않고. 그래서 우리도 일반 사기업이니까 급료를 잘 받아보자, 그리고 처우도 함부로 우리를 하지 못하게 보장을 받자, 그래서 생활도 낫고 그리고 언론 자유도 우리가 더 제대로 확보하자,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조합을 만든 거예요. 노동조합을 만드니까 그 다음서부터 사주 쪽은 사주 쪽대로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중앙정보부나 정부기관 쪽에서는 저 사람들이 색깔도 이상하구나. 그때 노동조합을 하면 색깔이 이상하다고 봤으니까.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도 세우고 자유언론 실천선언도 하고 그러고 밀고 나가니까 다른 일이 또 벌어지는 거죠.
▷(한동오 기자)
영화에서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면서 중정에 있는 기관원들이 와서 다 때리고 했는데 사실 그렇진 않았고 영화에서는 육영수 여사에 관한 사건 취재에 관해서 했었지만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그것 때문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유신 체제랑 전날의 서울대생 그런 것들로 인해서 실천선언이 있었던 그런 차이가 있는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렇죠. 우리는 육영수, 박정희 피격 사건 이런 거는 그냥 지나가는 사건 정도로 본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라는 국가 대통령, 육영수라는 대통령 부인과 관련된, 그야말로 사건이죠, 사건. 그러나 언론 전체의 문제로 보면 그건 일회성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하여튼 이것은 독재정권이라는 건 어떻게 유지되는 거예요? 그 철권 폭력과 그 폭력을 처음에는 언론을 통해서 이렇게 퍼뜨리는 거 아니에요? 폭력적인 분위기나 법이나 이런 거를. 그건 정부가 이렇게 제대로 힘이 미치는 언론을 통해서 다 나간단 말이에요. 관영언론을 통해서 뭐 이렇게 공영방송이나 이런 걸로 나가고 또 정부가 직영하는 신문에를 통해서 나가고. 심지어 이제 사기업인 신문을 통해서도 나가고. 사기업은 거기에 기자,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도 있으니까 수용을 절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기업인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이나 방송국의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이 저항을 했는데 그것도 대부분 다 굴복을 해버리고 동아일보에서 저렇게 유독 그랬단 말이죠. 그게 다른 언론에도, 사기업 언론에도 물론이지만 공기업에 있는 기자들이나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걸 못한다고. 그런 거를 정부 당국에서는 다른 쪽으로 번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동아일보 내부만 이렇게 고립시키고 가둬놓으려고 그런 거죠.
▷(한동오 기자)
갈라치기를 하려고 했던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렇죠. 74년 3월에 우리가 노조 만들기 전후에서, 그때 유신헌법 72년 말에 선포를 하고, 73년에 그 공방이 벌어지고 이랬을 때 일부 서울대생들이 10월 2일 데모를 먼저 시작했는데 그때 엄청나게 많이 잡혀갔어요. 그때는 우리도 난 동아방송 그때 사회부 경찰 기자를 할 때인데, 그 후배들이 문리대에 가서 미리 데모가 있다는 거 귀띔을 듣고 갔는데 경찰이 그냥 데모 시작하자마자 확 들어오더니 학생들 머리를 방망이로 때리니 딱딱 소리가 나더라고. 난 죽지 않을까 싶던데. 그리고 악! 도망가고 야단이고 끌려가고 그랬는데 그걸 보면서, 아이고 난 기자니까 데모를 못 하잖아. 기자가 어떻게 데모를 해요. 그 너무 안타깝고 후배들 맞고 그러는 걸 보고 그러는데, 그때 그걸 보고, 아 이게 심상치가 않구나, 유신헌법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국민들이 용납을 안 하겠구나, 그랬는데 그리고 74년이 됐잖아요. 그 얘기한 대로 장준환 선생, 백기완 선생이 그때 잡혀가고. 헌법,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문제를 놓고 막 국민들한테 이거 반대하라고 일종의 선동을 하고 이래 되니까 두 분이 잡혀가고. 그러고 3월 달부터 우리가 노조 만들고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되는 거예요. 수백 명, 학생 수백 명이 잡혀갔어요. 그리고 교수들, 그때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이런 사람들, 지학순 주교 이런 거 다 잡혀가고. (전북대) 문회루는 김지하 씨 이런 사람도 잡혀가고. 그리고 인혁당 사람들이 또 잡혀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인혁당 사람들이 이 학생들을 뒤에서 노농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라고 사주했다, 뒤에서 부추겼다, 이래서 그 사람들도 잡혀가고. 그러니까 이 4월 달부터 재판이 시작이 됐는데. 그땐 군사 재판을 하는 거예요. 군인이 판사고 검사도 군인이 검사예요, 검찰관. 판사는 군사 재판관. 심리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그 가족들이 그런 걸 보고 기가 막혀서 뭘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막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을 때리니까. 명동성당에 와서 기도회를 열어 달라고, 신부들한테. 김수환 추기경 계실 때인데. 거기 가니까 가족들이 재판정에 갔다 듣고 나온 얘기를 막 호소를 하고 그랬어요. 근데 성당 안에 경찰들이 들어갈 수가 없잖아, 그때만 해도. 우리가 그걸 취재를 해서 보도를 하려고 하니까 그것도 우린 또 취재를 한 게 그때만 해도 10.24 전 아니에요. 제대로 보도가 안 되잖아. 그 다음에 내가 또 기도회 가니까 그 인혁당 우홍선 씨 부인이라고 강순희 씨라는 아주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당신 중앙정보부원 아니냐고'. '이거 왜 다 적어 왔는데 보도가 안 나오냐, 이게 하나도 동아일보에'. 그래서 내가 사정을 얘기하고 뭐 이랬더니 '우리가 그걸 믿을 수가 있냐고'. 내가 동아일보 기자라는 걸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확인하고, '저 사람들을 애쓰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일을 겪었다고. 근데 이건 참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동아방송 동아일보 기자만 그 현장에 오지, 딴 기자들이 나타나질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취재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 게 다 찍힌 일이지, 다. 정보부 쪽이나 이런 데서는. 그러고 학생들이 데모가 다시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10월 23일에 서울농대에서 김상진 학생이 할복자살을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일이 계속 조금씩 조금씩 계속됐고. 우리는 더 이상 못 참겠어서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면서 그게 터져 나온 거지. 그리고 우리가 웬만한 걸 다 쓰고, 명동성당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벌어지는 기도회도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사진까지 곁들여서. 그러니까 10.24 이후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쟤네들도. 뭐 기관원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취재하는 것도 막을 수도 없고 막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근데 다른 언론에서 안 싣는 거예요. 동아일보가 '절해고도' 같아. (절해고도: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섬) 섬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백지광고 사태: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던 기업들을 압박해 광고계약을 무더기로 해약시킨 사건) 백지광고라는 건 뭐냐면 광고로 압력을 가해서 경제적으로 수입이 줄어들잖아요. 없다시피 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동아일보 사주 쪽하고 자유언론하는 기자들하고 갈라놓으려는 이간책이거든. 그런데 점점 11월 달 되니까 논설위원, 부차장 이런 간부들까지 이쪽 지지를 하고 나선 거예요. 사주들이 급했지, 이제. 간부들을 불러놓고 협박을 한 거지. '너희들, 평기자들이 야단인데 너희들까지 거기 부화뇌동을 하고 나서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12월 25일 그때가 완전히 광고가 끊어지면서 부차장들이 다 흔들리는 거예요, 그때는. 이러다 나까지 목이 다 달아나겠구나.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말리기 시작하고 이런 분열이 일어난 거지, 그때부터. 그래서 결국 우리가 처음에는 한 134명이 나와서 쫓겨나왔단 말이에요. 그때 쫓겨나올 때도 우리하고 같이 시노트 신부라고 있었어요. 그 신부가 우리하고 같이 농성을 할 때 있으면서, 우리 농성자들이 다 양심선언을 써서 우리가 잡혀가든지 뭐하든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 뜻하고 관계가 없다고, 우린 지금 쓰는 것이 이것이 진심이고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겠다는 심경을 그대로 한다, 그 전부 다 동아일보 안에서 그때 농성했던 사람들, 밑에서 2층에서 단식농성하는 친구들까지 다 양심선언을 써서 신부님한테 맡겨서 내보내서 그분이 나중에 그걸 가지고 또 책을 냈어요. 증인이죠, 증인. 그때 우리가 쫓겨날 동안에 그땐, 지금 사람들은 모르지만 12시서부터 4시까지 통행금지였어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공격해오기 시작한 게 아침 새벽 3시쯤이에요. 깡패들하고. 2층, 3층 편집국으로. 2층 공장에서 활자 문선하고 그런 거기서 농성을 하고, 3층 편집국에서 농성을 했는데 우리가 잠가 놓은 것을 전부 다 함마, 용접기, 쇠 끊는 거. 다 문도 끊고 들어왔다고, 몽둥이 들고. 그래서 막 들어와서 막 두들겨 패고 이러는 거 잠깐 기다려라. 우리가 나가지 말래도 나간다, 그래놓고 거기서 의식을 하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고 쓴 족자 이런 것을 떼서 다 말아서 가지고. 그런데도 그 놈들은 또 저희들이 또 할 일이 있잖아. 때려서 내쫓았다는 것은 또 보고해야 되니까. 우리를 다 내쫓고. 4층에 방송국에도 가서 또 다 들이부수고 끌어내고 여자 아나운서도 치마도 들치고 이 짓들을 하면서 끌어냈다고. 그래서 끌려 나오니까 밖에 천관우 선생, 정일형 선생, 이태영 여사, 윤보선 대통령 부인이었던 윤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뭐 이런 분들 나와서 우리들 새벽에 맞이하더라고요. 우리를 쫓아내자마자 동아일보 앞에 있는 지하차도 있잖아요. 그걸로 다 몰아세워서 쫓겨나가서. 일단은 뭐 거기서 막 구호를 외치고 그러니까 경찰들이 또 우리 바깥에서 경찰들이 또 쫓아내더라고요. 그래서 9시에 맞춰서 우리가 언론회관으로 들어가서 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라는 것을 결성해요. 자유언론을 수호하겠다는 다짐을 쫓겨나자마자 이렇게 했죠. 그것까지 우리가 다 시나리오를 세웠었어요. 쫓겨나고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서부터는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뜻을 전하고 같이 합류하라고 하겠다고. 여섯 달 동안 그 뒤에 동아일보 앞에서 도열 시위를 한 거예요. 나는 그때 아까 처음에 얘기한 대로 6월 7일인가 6월 9일 날, 9일 날 성유보 씨하고 나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내 경우에는 외국인에게 국가, 국가 체제, 대통령이나 정부를 비난했다고 국가 모독죄라는 게 있었다고. 헌법 104조 2항에. 그것까지 해가지고 정보부에 잡혀갔다고. 신문회관 앞에서, 지금 프레스센터 앞에서 성유보하고 같이.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뒤에서 조직을 해서 동아투위를 만들고 혼란을 조장했다, 이런 뒤집어 씌워서 그렇게 갔죠. 그런데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서클을 같은 과이고 서클도 하고 그런 여러 가지 얘기를 하는데 동아일보에 동기생으로 같이 들어왔고. 우리들하고 같이 했던 선배들 몇 사람하고 같이 그런 걸로. 우리들 그걸 되게 많이 캔 것 같아요, 보니까. 학교 한 그때만 해도 우리가 졸업을 한 지 상당히 상당히 오래 됐는데 그걸 다 뒤에서 캐가지고 했으니까.
▷(한동오 기자)
기자들이 자유언론선언을 실천하기 시작하자 정권에서는 동아일보 광고를 끊는 식으로 압박을 했었는데, 그래서 백지 광고가 나갔었는데, 시민들이 각자 한푼 두푼 돈을 내서 광고를 싣었잖아요. 그때 위원장님 어떤 마음이 드셨었나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백지광고가 나가면서 처음에는 별안간 백지광고가 나간 게 아니라 하나둘 (광고주가) 없어졌잖아요. 그러다 12월 20일 전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싹 사라져버린 거예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던 회사들이, 제약회사나 은행이라든지 여러 고정광고를 내던 회사들이 꽤 많았는데 그 회사들이 일시에 광고 동판이라고 그랬는데. 그 전에 활판 인쇄였잖아요. 이게 광고도 이렇게 그 밑에다 갖다 놓고 그걸 납으로 이렇게 그 연판을 찍어서 신문을 돌리는 건데. 그걸 싹 다 가져가 버리니까 '왜 가져가냐'고 그랬더니 '묻지 말아달라고'. 그 광고주들이 그 회사에서 와서 그걸 맡겨놓고 일정하게 한 달에 세 번 돌리시오, 우린 다섯 번 돌리시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나중에 뭐 석 달 뒤에 돈을 일시로 다 갚는다든지 이런 식이란 말이죠. 싹 다 가져가 버리는 거예요. 왜 가져가냐고 그러니까 '우리들 묻지 말아라', '우리도 기업에 지금 존폐가 걸려 있다'. 그럼 가져가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쯤 크리스마스 선물 아주 굉장한 걸 준 거죠. 싹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걸 백지로 내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날부터 요만한 광고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동아야 힘내라', '동아 보는 재미에 산다'. 기사들도 이제 제대로 다 나간 거야, 동아일보에는. 딴 신문들은 안 나가. 학생들 시위하는 거 뭐 그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이런 것들. 다른 데는 나가지 않아요. 여기만 나가지. 그러니까 거기에 어떤 광고가 들어오냐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동아야 너 보는 재미에 산다', 또 '동아야 너마저 배신하면 나 이민 갈 거야'. 몇몇 아주머니가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갔다가 자기들 장 보려고 가지고 나왔던 돈 가지고 와서 광고 내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죠?' 그리고 의문 부호를 찍고. 우리 기자들이 가서 밥먹는 집 밥집 아줌마가 '밥집 아줌마가 여러분들 싸우는데 한 푼 보태러 왔습니다'. 그런 서민들에서부터 아줌마, 중고등학생들, 또 서울대 법대생들이 '배운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부끄럽게 광고합니다'. 그런 게 수만 건이 들어온 거예요. 아... 역시 자유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이렇게 뜨겁구나. 우리는 절대로 앞으로 이분들에게 등을 돌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저런 마음을 봤는데 그런 마음에 우리가 등을 돌리면 우리가 원래 기자를 했던 사람일 수가 있냐. 인간도 아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일은 이것은 50여 년을 버티는 것은 그 독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이거를 우리가 뒤돌린, 등을 돌리는 한 우리는 기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게 되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의 그 뜨거운 마음을 봤거든요. 나는 역시 그때 동아일보 백지광고에 나왔던 그 많은 문구 이런 걸 보면서 촛불 시민이 그때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그건 조금 더 올라가면 4.19 때 대중들, 3.1운동 때 대중들,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 속에 나라를 지키자든지 언론을 지키자든지 이런 거는 3.1운동 때부터 쭉 이어져온 그 맥락에서 봐야 올바르게 본다고 봐요. 최소한 우리는 신문기자를 한다고 그랬다 어떻게 그 마음을 읽게 된 거예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절대로 등 돌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10.24 자유언론 선언을 할 때는 그렇게 폭발적으로 이걸 지원하고 응원하는 줄은 몰랐다고. 백지광고가 생기며 어떻게 나타난 거예요.
▷(한동오 기자)
해직 기자가 되신 후에 월급이 끊겼는데 생활인으로서 이런 건 어떻게 충당하셨었나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나 같은 경우에는 6월 9일날 잡혀갔으니까 아주 초기에 잡혀간 거 아니에요, 지금으로서는 재판도 막 받고. 그 초기에는 우리 권영자 선배가 동아투위 1기인데 그분이 첫 동아투위 위원장을 했어요. 여성인데. 이분이 기독교계, 천주교계, 여성계 이쪽에 굉장히 발이 넓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동아일보의 광고를 좀 하고 했던 사람 중에 지위도 있고 이런 사람들, 몰래 몰래 그런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권영자 선배를 통해서 많이 희사금(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돈)을 내서 아마 100여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았어요. 나와보니까 그랬더라고. 근데 그게 74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 안에서 번역실도 내고 또 심지어는 복덕방도 내고 또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장사도 하고. 이렇게 생계들을 이어갔어요. 왜냐하면 어느 직장에 가면 꼭 정보부에서 와서, 저런 불순한 사람들 해서 당신들 무슨 피해를 당하냐고. 다 쫓겨나는 거예요, 다시. 아무데도 못 들어갔어요.
▷(한동오 기자)
지금 같은 경우에는 잘리면 사실 다른 방송사 들어가거나 신문사 갈 수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예 그걸 막은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원천적으로 막아서 동아투위 사람들이 어디 가서 명함을 내려놓고 뭘 할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옷 장사도 하고 김밥 장사도 하고 와이셔츠 맞춤집 이런 것도 하고. 무슨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요. 무슨 뭐 뒤에 그 배경이 있어. 그러니까 금방 털어먹고 뭐 이렇게 됐지. 고생들을 참 많이 했어요.
▷(한동오 기자)
위원장님은 그때 뭐 하셨어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난 감옥 안에 앉아 있고 2년 반 동안을 쭉 살아야 되니까. 집사람이 금방 애를 둘 낳았다고. 내 아들애가 그때 낳은 지 사흘 만에인가 구속이 된 거야. 그 첫 애는 한 살 조금 넘었고. 집사람이 이제 우리 장모님이 부산에서 대학 교수를 하셨는데 그 양반이 다 생활을 뒷바라지 했죠. 그 양반도 홀로 딸 둘 다 시집 보내고 혼자 사는 어른인데 토요일 날 올라와서 일요일 오후까지 애들하고 놀아주고 그리고 또 기차 타고 가시고. 그런 분들이, 그런 헌신적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던 거죠. 난 지금 이런 암살자(들) 같은 저런 영화가 나오는 것도 참 고맙고 그런 일인데. 그런 것도 창작 영화 같은 걸로 그렇게 내고. 이쪽에 다큐멘터리에 거의 비슷한 버금가는 영화인데. 그런 것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 사람들이 잘리고 고문당하고 감옥 가서 감옥 살고 그리고 또 복덕방도 하고 뭐 라면집도 하고 이러면서 살았던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초지를 꺾지 않고 그대로 견디고 동아통위를 지켜온 이런 일들, 이런 얘기를 정말 거의 사실에 가깝게. 그건 무슨 언론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까지 하고 사냐 말이에요. 그냥 나 안 한다고, 그러고 정보부한테 야 나 취직 좀 지켜줘 그러면 좋은데 막 들어가고 그럴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고 이렇게 버텨낸 거를 이런 걸 얘기로 좀 했으면 어떨까. 다 기록들이 있어요, 그런 거. 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 쓴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오히려 사람들한테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일 아니냐. 자유언론 선언한다고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밑에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리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52년을 버텨왔다는 것을.
▷(한동오 기자)
이 위원장님의 말씀을 보고 영화를 만드시는 창작자분께서 영감을 받으셔서 어느 분께서 꼭 만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YTN 한동오 (hdo86@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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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오 기자)
영화에서는 기자들이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다가 여러가지 고초를 겪기도 하고 고군분투를 하는데, 실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이뤄졌던 배경과는 다른데요. 어떤 부분이 달랐던 건가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우리가 74년이 오기 전에 71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안 있다가 72년 연말에 비상사태가 선포가 돼요. 유신이 선포된 거죠.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에 72년 7월 4일 날,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게 발표돼요.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에 가고, 평양에서 총리였던 박 뭐라는 사람이 남쪽으로 오고. 이러면서 그 7.4 공동성명이 남북의 지도자 박정희, 김일성에 의해서 발표되는데 그 내용은 '남북은 서로 평화공존하고 교류협력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이런 거였어요. 그런데 그런 뒤편에서 한 석 달 뒤죠. 7월 2일 날 그랬고 10월 말쯤에. 10.17.(10월 유신) 석 달여 안에 남북이 다 통치체제를 그렇게 강화한 거예요. 한쪽은 여기는 영구 대통령 집권 쪽으로 하고. 그쪽은 수상이었던 것을 주석제로 바꾸고. 다 권력을 더 강화시켰어요, 남북이 모두. 물론 양쪽이 다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욕심은 가졌겠지만 북은 원래 헌법 자체가 거기는 계급 독재를 하는 것으로 돼 있고. 이쪽은 그나마 3선 개헌 전까지만 해도 여야가 있고. 야도 발언권이 있고, 야도 언론에도 이렇게 자주 보도가 될 수 있고, 일종의 다자주의, 다원주의적인 헌법을 가진 거란 말이에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서부터 대한민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다원주의, 다자주의, 공생하는 이런 헌법의 원리가 있었다면, 유신체제가 되면서 이것은 다자주의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국회의원 선거도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 있었다고. 상상할 수가 없죠 지금?
▷(한동오 기자)
진짜 상상도 못했어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러니까 야당이 없어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고. 그래도 야당도 꼼짝을 못했어요. 그렇게 72년 연말에 10.17 비상조치.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이쪽에 종교인, 학계, 대학, 언론 이쪽에서 '아, 이제 정말 독재체제로 가는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그 유신헌법이 헌법으로 채택이 된다면 국민투표로 그게 채택이 돼야 되잖아요. 국민투표는 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 준비를 해오는데 엄청난 저항들이 일어났어요. 유신헌법 폐지하라는 소리가 73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단 말이에요. 제일 먼저 나온 게 서울대학에서 73년 10월 2일, 너무 탄압을 심해서 1년 동안 정도 있다가 터져나온 거예요. 그때부터 학생 시위가 나오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유신헌법은 독재헌법이니까 인정할 수가 없다' 이런 유신헌법 거부 선언을 했어요. 그리고 그걸 국민들로부터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고. 그래도 국민투표가 진행이 돼서 99%인가 그렇게 찬성하는 걸로 나왔죠. 그리고 74년 초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 선생을 구속시켜버려요. 그게 최초의 긴급조치에 의한 구속이에요. 1호, 2호. 그러고 74년을 맞이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71년부터 그때 이르기까지 세 차례의 언론 자유 선언을 해요. 그것이 다른 언론에도 번져나가고. 언론 자유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이게 몇몇 기자들만의 선언이 되고 그 앞섰던 사람들은 처벌당하고 쫓겨나가고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그러면서 우리들이 마음에 먹은 것은 뭐냐면 '이건 언론자유 선언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흐지부지되고 이런 일은 반복해서는 안 된다'. 뭐냐. 동아일보 같으면 동아일보의 기자들, 동아방송의 PD, 아나운서들. 동아매스컴 안에 있는 모든 언론인이 함께 단결해서 자기들의 신분 보장도 받고 언론 자유도 보장받아야 된다 이런 얘기였어요. 즉 그건 뭐냐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74년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했어요. 그래서 3월 6일 날 노동조합을 결성을 했는데 동아일보에서 노동조합 간부와 거기에 적극적으로 합류할 사람들 20여 명을 그냥 잘라버렸다고. 그런데 이거는 유신체제 아래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업장의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구성하려고 했던 사실만으로 해고를 해버리는 거예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그 부당해고 취소 청구 소송을 냈더니 질 것 같으니까 동아일보에서 다시 우리를 복귀시켰다고. 법을 이렇게 잘 보면은 아무리 독재체제도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또 어길 수는 없잖아. 정부도 그렇고, 동아일보도 그렇고. 그래서 우리가 복귀를 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는 노조가 성립이 안 됐다고, 잘릴 때는 너희들은 아직 노조를 다 성립하지 못했으니까 아직 성립이 안 됐다고 그러고 우리는 이미 성립이 됐다고, 서울시에다가 접수를 해서 접수증을 받아왔단 말이에요. 우리는 됐다고 보고. 그렇게 동아일보 안에서 우리는 노조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고, 동아일보는 그걸 막으려고 했는데 그게 막아지나. 이미 성립이 됐다고. 그래서 우리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할 때는 이미 180명 이상이 조합원으로. 200여 명 중에.
▷(한동오 기자)
전체 직원이 200여 명..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전체 언론인들. 거긴 공무국, 운수하는 사람들, 사무직, 광고국 이런 데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여기 가담을 안 시켰어요. 실제로 기자, 동아방송 PD, 아나운서 이 사람들만 한 거예요. 180명 정도인데 그게 다 된 거예요.
▷(한동오 기자)
거의 다 가입한 거네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거의 다 했어요. 거기에는 일부 차장들이 들어왔어요. 차장까지만 되니까, 부장은 (노조 가입이) 안 되니까.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을 결성시켜 놓고 그렇게 해서 그걸 가지고 그 중간에 74년 8월 15일 박정희 육영수 피격사태가 있었고. 우린 그런 건 사실은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 일은. 그리고 10월 24일로 D-Day를 잡고 자유언론 실천선언 발표일로.
▷(한동오 기자)
그러면 이 암살 미수 사건 이미 전에 10월 24일 그때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계획을 하고 그걸로 준비를 해왔죠. 노조 가입을 더 많이 늘리고 노조조합비를 받아서 일종의 사업자금 같은 것도 이렇게 하고. 그런 걸 통해서 외신 쪽이나 국내 언론 쪽에도 많이 알려서 다른 기자들은 그런 걸 할 엄두를 못 냈거든요, 다른 사에서는. 여기서는 그걸 해내고 착착 자유언론 실천선언 준비를 했는데 마침 10월 24일로 날짜를 정해놨는데 그날이 UN데이, UN 창립일이었어요. 그때 당시 한국은 UN회원국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1948년에 정부 수립될 때 UN이 한국의 남한 단독정부를 인정을 했거든, 미국 지지하는 나라들로. 그래서 UN에 대해서 무척 고마워하고 UN회원국이 아니었는데도 UN데이를 기념을 했어요. 그날이 휴일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날로 잡고 하는데 이게 우연의 일치지만 23일 날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씨라는 사람이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또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는 유서를 써놓고 할복자살을 했다고. 엄청난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기사를 중요한 부분에 넣어서 신문 만들자고 그러는데 동아일보에서 그걸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우리는 그럼 신문 못 만들겠다, 이렇게 우겨가지고 그 신문을 조금 좋게 넣었어요. 그랬더니 그때 바로 그날 23일 날 편집국장에 취임한 송건호 선생을 사회부장, 지방부장하고 같이 중앙정보부에 연행을 해버린 거예요. 내일이 우리는 D-Day로 잡아놨는데. 그래서 그날 밤 우리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에 우리가 얘기한 대로, 동료가 연행되거나 그러면 귀가하지 않고 회사에 머물면서 농성을 한다. 우리가 그냥 농성을 하고 있는데 밤에 풀려났어요. 그리고 10월 24일날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했죠. 바로 그게 '우리는 외부의 간섭을 철저히 거부한다'. 두 번째는 '기관원의 언론사 내의 출입을 금지한다'. 세 번째가 '우리는 이 대의를 위해서 끝까지 투쟁한다'. 이런 세 가지 결의사항을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단순한 거예요.
▷(한동오 기자)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당연한 건데 그 당연한 것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랜 준비를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런 일들을 다 했던 거예요. 그때 당시 노동조합은 다 하고 싶었는데 일체 그런 게 용인이 안 됐어요. 65년에 한일협정이 맺어진 다음에 많은 일본의 차관이 들어오기 시작했잖아요. 그 차관이 들어오면서 재벌들이 커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재벌 기업들이 커지면서 동아일보가 그전엔 급료 수준이 제일 높고 그랬는데. 재벌 회사들이 생기면서 그쪽 급료가 엄청나게 높아졌다고. 언론계가 전체적으로 봐서 동아일보가 그중에 제일 높다고 했어도, 다른 일반 기업에 비해서 확실히 떨어지는 그런 급료 수준이었고. 그리고 복지 부분도 제대로 되질 않고. 그래서 우리도 일반 사기업이니까 급료를 잘 받아보자, 그리고 처우도 함부로 우리를 하지 못하게 보장을 받자, 그래서 생활도 낫고 그리고 언론 자유도 우리가 더 제대로 확보하자,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조합을 만든 거예요. 노동조합을 만드니까 그 다음서부터 사주 쪽은 사주 쪽대로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중앙정보부나 정부기관 쪽에서는 저 사람들이 색깔도 이상하구나. 그때 노동조합을 하면 색깔이 이상하다고 봤으니까. 그렇게 해서 노동조합도 세우고 자유언론 실천선언도 하고 그러고 밀고 나가니까 다른 일이 또 벌어지는 거죠.
▷(한동오 기자)
영화에서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면서 중정에 있는 기관원들이 와서 다 때리고 했는데 사실 그렇진 않았고 영화에서는 육영수 여사에 관한 사건 취재에 관해서 했었지만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그것 때문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유신 체제랑 전날의 서울대생 그런 것들로 인해서 실천선언이 있었던 그런 차이가 있는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렇죠. 우리는 육영수, 박정희 피격 사건 이런 거는 그냥 지나가는 사건 정도로 본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박정희라는 국가 대통령, 육영수라는 대통령 부인과 관련된, 그야말로 사건이죠, 사건. 그러나 언론 전체의 문제로 보면 그건 일회성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하여튼 이것은 독재정권이라는 건 어떻게 유지되는 거예요? 그 철권 폭력과 그 폭력을 처음에는 언론을 통해서 이렇게 퍼뜨리는 거 아니에요? 폭력적인 분위기나 법이나 이런 거를. 그건 정부가 이렇게 제대로 힘이 미치는 언론을 통해서 다 나간단 말이에요. 관영언론을 통해서 뭐 이렇게 공영방송이나 이런 걸로 나가고 또 정부가 직영하는 신문에를 통해서 나가고. 심지어 이제 사기업인 신문을 통해서도 나가고. 사기업은 거기에 기자,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도 있으니까 수용을 절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사기업인 언론에 종사하는 기자들이나 방송국의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이 저항을 했는데 그것도 대부분 다 굴복을 해버리고 동아일보에서 저렇게 유독 그랬단 말이죠. 그게 다른 언론에도, 사기업 언론에도 물론이지만 공기업에 있는 기자들이나 PD, 아나운서 이런 사람들도 충격을 받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걸 못한다고. 그런 거를 정부 당국에서는 다른 쪽으로 번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동아일보 내부만 이렇게 고립시키고 가둬놓으려고 그런 거죠.
▷(한동오 기자)
갈라치기를 하려고 했던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그렇죠. 74년 3월에 우리가 노조 만들기 전후에서, 그때 유신헌법 72년 말에 선포를 하고, 73년에 그 공방이 벌어지고 이랬을 때 일부 서울대생들이 10월 2일 데모를 먼저 시작했는데 그때 엄청나게 많이 잡혀갔어요. 그때는 우리도 난 동아방송 그때 사회부 경찰 기자를 할 때인데, 그 후배들이 문리대에 가서 미리 데모가 있다는 거 귀띔을 듣고 갔는데 경찰이 그냥 데모 시작하자마자 확 들어오더니 학생들 머리를 방망이로 때리니 딱딱 소리가 나더라고. 난 죽지 않을까 싶던데. 그리고 악! 도망가고 야단이고 끌려가고 그랬는데 그걸 보면서, 아이고 난 기자니까 데모를 못 하잖아. 기자가 어떻게 데모를 해요. 그 너무 안타깝고 후배들 맞고 그러는 걸 보고 그러는데, 그때 그걸 보고, 아 이게 심상치가 않구나, 유신헌법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국민들이 용납을 안 하겠구나, 그랬는데 그리고 74년이 됐잖아요. 그 얘기한 대로 장준환 선생, 백기완 선생이 그때 잡혀가고. 헌법,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문제를 놓고 막 국민들한테 이거 반대하라고 일종의 선동을 하고 이래 되니까 두 분이 잡혀가고. 그러고 3월 달부터 우리가 노조 만들고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되는 거예요. 수백 명, 학생 수백 명이 잡혀갔어요. 그리고 교수들, 그때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이런 사람들, 지학순 주교 이런 거 다 잡혀가고. (전북대) 문회루는 김지하 씨 이런 사람도 잡혀가고. 그리고 인혁당 사람들이 또 잡혀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인혁당 사람들이 이 학생들을 뒤에서 노농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라고 사주했다, 뒤에서 부추겼다, 이래서 그 사람들도 잡혀가고. 그러니까 이 4월 달부터 재판이 시작이 됐는데. 그땐 군사 재판을 하는 거예요. 군인이 판사고 검사도 군인이 검사예요, 검찰관. 판사는 군사 재판관. 심리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그냥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거예요, 그게. 그 가족들이 그런 걸 보고 기가 막혀서 뭘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막 사형, 무기, 20년, 15년 징역을 때리니까. 명동성당에 와서 기도회를 열어 달라고, 신부들한테. 김수환 추기경 계실 때인데. 거기 가니까 가족들이 재판정에 갔다 듣고 나온 얘기를 막 호소를 하고 그랬어요. 근데 성당 안에 경찰들이 들어갈 수가 없잖아, 그때만 해도. 우리가 그걸 취재를 해서 보도를 하려고 하니까 그것도 우린 또 취재를 한 게 그때만 해도 10.24 전 아니에요. 제대로 보도가 안 되잖아. 그 다음에 내가 또 기도회 가니까 그 인혁당 우홍선 씨 부인이라고 강순희 씨라는 아주머니가 내 멱살을 잡고 '당신 중앙정보부원 아니냐고'. '이거 왜 다 적어 왔는데 보도가 안 나오냐, 이게 하나도 동아일보에'. 그래서 내가 사정을 얘기하고 뭐 이랬더니 '우리가 그걸 믿을 수가 있냐고'. 내가 동아일보 기자라는 걸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확인하고, '저 사람들을 애쓰고 있는 거라고'. 그래서 나중에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그랬는데 그런 일을 겪었다고. 근데 이건 참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때는 동아방송 동아일보 기자만 그 현장에 오지, 딴 기자들이 나타나질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걸 취재를 했단 말이에요. 그런 게 다 찍힌 일이지, 다. 정보부 쪽이나 이런 데서는. 그러고 학생들이 데모가 다시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10월 23일에 서울농대에서 김상진 학생이 할복자살을 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일이 계속 조금씩 조금씩 계속됐고. 우리는 더 이상 못 참겠어서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하면서 그게 터져 나온 거지. 그리고 우리가 웬만한 걸 다 쓰고, 명동성당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벌어지는 기도회도 보도하기 시작한 거예요. 사진까지 곁들여서. 그러니까 10.24 이후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쟤네들도. 뭐 기관원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취재하는 것도 막을 수도 없고 막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근데 다른 언론에서 안 싣는 거예요. 동아일보가 '절해고도' 같아. (절해고도: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딴섬) 섬에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백지광고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백지광고 사태: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던 기업들을 압박해 광고계약을 무더기로 해약시킨 사건) 백지광고라는 건 뭐냐면 광고로 압력을 가해서 경제적으로 수입이 줄어들잖아요. 없다시피 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동아일보 사주 쪽하고 자유언론하는 기자들하고 갈라놓으려는 이간책이거든. 그런데 점점 11월 달 되니까 논설위원, 부차장 이런 간부들까지 이쪽 지지를 하고 나선 거예요. 사주들이 급했지, 이제. 간부들을 불러놓고 협박을 한 거지. '너희들, 평기자들이 야단인데 너희들까지 거기 부화뇌동을 하고 나서냐', 이렇게 된 거죠. 그래서 12월 25일 그때가 완전히 광고가 끊어지면서 부차장들이 다 흔들리는 거예요, 그때는. 이러다 나까지 목이 다 달아나겠구나.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말리기 시작하고 이런 분열이 일어난 거지, 그때부터. 그래서 결국 우리가 처음에는 한 134명이 나와서 쫓겨나왔단 말이에요. 그때 쫓겨나올 때도 우리하고 같이 시노트 신부라고 있었어요. 그 신부가 우리하고 같이 농성을 할 때 있으면서, 우리 농성자들이 다 양심선언을 써서 우리가 잡혀가든지 뭐하든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우리 뜻하고 관계가 없다고, 우린 지금 쓰는 것이 이것이 진심이고 자유언론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겠다는 심경을 그대로 한다, 그 전부 다 동아일보 안에서 그때 농성했던 사람들, 밑에서 2층에서 단식농성하는 친구들까지 다 양심선언을 써서 신부님한테 맡겨서 내보내서 그분이 나중에 그걸 가지고 또 책을 냈어요. 증인이죠, 증인. 그때 우리가 쫓겨날 동안에 그땐, 지금 사람들은 모르지만 12시서부터 4시까지 통행금지였어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공격해오기 시작한 게 아침 새벽 3시쯤이에요. 깡패들하고. 2층, 3층 편집국으로. 2층 공장에서 활자 문선하고 그런 거기서 농성을 하고, 3층 편집국에서 농성을 했는데 우리가 잠가 놓은 것을 전부 다 함마, 용접기, 쇠 끊는 거. 다 문도 끊고 들어왔다고, 몽둥이 들고. 그래서 막 들어와서 막 두들겨 패고 이러는 거 잠깐 기다려라. 우리가 나가지 말래도 나간다, 그래놓고 거기서 의식을 하고 자유언론실천선언이라고 쓴 족자 이런 것을 떼서 다 말아서 가지고. 그런데도 그 놈들은 또 저희들이 또 할 일이 있잖아. 때려서 내쫓았다는 것은 또 보고해야 되니까. 우리를 다 내쫓고. 4층에 방송국에도 가서 또 다 들이부수고 끌어내고 여자 아나운서도 치마도 들치고 이 짓들을 하면서 끌어냈다고. 그래서 끌려 나오니까 밖에 천관우 선생, 정일형 선생, 이태영 여사, 윤보선 대통령 부인이었던 윤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뭐 이런 분들 나와서 우리들 새벽에 맞이하더라고요. 우리를 쫓아내자마자 동아일보 앞에 있는 지하차도 있잖아요. 그걸로 다 몰아세워서 쫓겨나가서. 일단은 뭐 거기서 막 구호를 외치고 그러니까 경찰들이 또 우리 바깥에서 경찰들이 또 쫓아내더라고요. 그래서 9시에 맞춰서 우리가 언론회관으로 들어가서 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라는 것을 결성해요. 자유언론을 수호하겠다는 다짐을 쫓겨나자마자 이렇게 했죠. 그것까지 우리가 다 시나리오를 세웠었어요. 쫓겨나고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서부터는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뜻을 전하고 같이 합류하라고 하겠다고. 여섯 달 동안 그 뒤에 동아일보 앞에서 도열 시위를 한 거예요. 나는 그때 아까 처음에 얘기한 대로 6월 7일인가 6월 9일 날, 9일 날 성유보 씨하고 나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내 경우에는 외국인에게 국가, 국가 체제, 대통령이나 정부를 비난했다고 국가 모독죄라는 게 있었다고. 헌법 104조 2항에. 그것까지 해가지고 정보부에 잡혀갔다고. 신문회관 앞에서, 지금 프레스센터 앞에서 성유보하고 같이. 그래서 우리들이 그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뒤에서 조직을 해서 동아투위를 만들고 혼란을 조장했다, 이런 뒤집어 씌워서 그렇게 갔죠. 그런데 우리들은 학교에서부터 서클을 같은 과이고 서클도 하고 그런 여러 가지 얘기를 하는데 동아일보에 동기생으로 같이 들어왔고. 우리들하고 같이 했던 선배들 몇 사람하고 같이 그런 걸로. 우리들 그걸 되게 많이 캔 것 같아요, 보니까. 학교 한 그때만 해도 우리가 졸업을 한 지 상당히 상당히 오래 됐는데 그걸 다 뒤에서 캐가지고 했으니까.
▷(한동오 기자)
기자들이 자유언론선언을 실천하기 시작하자 정권에서는 동아일보 광고를 끊는 식으로 압박을 했었는데, 그래서 백지 광고가 나갔었는데, 시민들이 각자 한푼 두푼 돈을 내서 광고를 싣었잖아요. 그때 위원장님 어떤 마음이 드셨었나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백지광고가 나가면서 처음에는 별안간 백지광고가 나간 게 아니라 하나둘 (광고주가) 없어졌잖아요. 그러다 12월 20일 전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싹 사라져버린 거예요.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던 회사들이, 제약회사나 은행이라든지 여러 고정광고를 내던 회사들이 꽤 많았는데 그 회사들이 일시에 광고 동판이라고 그랬는데. 그 전에 활판 인쇄였잖아요. 이게 광고도 이렇게 그 밑에다 갖다 놓고 그걸 납으로 이렇게 그 연판을 찍어서 신문을 돌리는 건데. 그걸 싹 다 가져가 버리니까 '왜 가져가냐'고 그랬더니 '묻지 말아달라고'. 그 광고주들이 그 회사에서 와서 그걸 맡겨놓고 일정하게 한 달에 세 번 돌리시오, 우린 다섯 번 돌리시오 이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제 나중에 뭐 석 달 뒤에 돈을 일시로 다 갚는다든지 이런 식이란 말이죠. 싹 다 가져가 버리는 거예요. 왜 가져가냐고 그러니까 '우리들 묻지 말아라', '우리도 기업에 지금 존폐가 걸려 있다'. 그럼 가져가요.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쯤 크리스마스 선물 아주 굉장한 걸 준 거죠. 싹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걸 백지로 내기 시작하니까 그 다음날부터 요만한 광고들이 들어오는 거예요. '동아야 힘내라', '동아 보는 재미에 산다'. 기사들도 이제 제대로 다 나간 거야, 동아일보에는. 딴 신문들은 안 나가. 학생들 시위하는 거 뭐 그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이런 것들. 다른 데는 나가지 않아요. 여기만 나가지. 그러니까 거기에 어떤 광고가 들어오냐면 아까 얘기한 것처럼 '동아야 너 보는 재미에 산다', 또 '동아야 너마저 배신하면 나 이민 갈 거야'. 몇몇 아주머니가 장바구니 들고 시장에 갔다가 자기들 장 보려고 가지고 나왔던 돈 가지고 와서 광고 내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죠?' 그리고 의문 부호를 찍고. 우리 기자들이 가서 밥먹는 집 밥집 아줌마가 '밥집 아줌마가 여러분들 싸우는데 한 푼 보태러 왔습니다'. 그런 서민들에서부터 아줌마, 중고등학생들, 또 서울대 법대생들이 '배운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을 이렇게 부끄럽게 광고합니다'. 그런 게 수만 건이 들어온 거예요. 아... 역시 자유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이렇게 뜨겁구나. 우리는 절대로 앞으로 이분들에게 등을 돌릴 수가 없을 것이다. 저런 마음을 봤는데 그런 마음에 우리가 등을 돌리면 우리가 원래 기자를 했던 사람일 수가 있냐. 인간도 아니다. 우리가 오늘까지 버티고 있는 일은 이것은 50여 년을 버티는 것은 그 독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이거를 우리가 뒤돌린, 등을 돌리는 한 우리는 기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게 되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의 그 뜨거운 마음을 봤거든요. 나는 역시 그때 동아일보 백지광고에 나왔던 그 많은 문구 이런 걸 보면서 촛불 시민이 그때 나타났다고 생각해요. 그건 조금 더 올라가면 4.19 때 대중들, 3.1운동 때 대중들,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 국민들 속에 나라를 지키자든지 언론을 지키자든지 이런 거는 3.1운동 때부터 쭉 이어져온 그 맥락에서 봐야 올바르게 본다고 봐요. 최소한 우리는 신문기자를 한다고 그랬다 어떻게 그 마음을 읽게 된 거예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절대로 등 돌릴 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10.24 자유언론 선언을 할 때는 그렇게 폭발적으로 이걸 지원하고 응원하는 줄은 몰랐다고. 백지광고가 생기며 어떻게 나타난 거예요.
▷(한동오 기자)
해직 기자가 되신 후에 월급이 끊겼는데 생활인으로서 이런 건 어떻게 충당하셨었나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나 같은 경우에는 6월 9일날 잡혀갔으니까 아주 초기에 잡혀간 거 아니에요, 지금으로서는 재판도 막 받고. 그 초기에는 우리 권영자 선배가 동아투위 1기인데 그분이 첫 동아투위 위원장을 했어요. 여성인데. 이분이 기독교계, 천주교계, 여성계 이쪽에 굉장히 발이 넓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동아일보의 광고를 좀 하고 했던 사람 중에 지위도 있고 이런 사람들, 몰래 몰래 그런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권영자 선배를 통해서 많이 희사금(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돈)을 내서 아마 100여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았어요. 나와보니까 그랬더라고. 근데 그게 74년이 지나면서 점점 줄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들 안에서 번역실도 내고 또 심지어는 복덕방도 내고 또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장사도 하고. 이렇게 생계들을 이어갔어요. 왜냐하면 어느 직장에 가면 꼭 정보부에서 와서, 저런 불순한 사람들 해서 당신들 무슨 피해를 당하냐고. 다 쫓겨나는 거예요, 다시. 아무데도 못 들어갔어요.
▷(한동오 기자)
지금 같은 경우에는 잘리면 사실 다른 방송사 들어가거나 신문사 갈 수가 있었는데 그때는 아예 그걸 막은 거군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원천적으로 막아서 동아투위 사람들이 어디 가서 명함을 내려놓고 뭘 할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옷 장사도 하고 김밥 장사도 하고 와이셔츠 맞춤집 이런 것도 하고. 무슨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요. 무슨 뭐 뒤에 그 배경이 있어. 그러니까 금방 털어먹고 뭐 이렇게 됐지. 고생들을 참 많이 했어요.
▷(한동오 기자)
위원장님은 그때 뭐 하셨어요?
▶이부영 / 동아투위 위원장
난 감옥 안에 앉아 있고 2년 반 동안을 쭉 살아야 되니까. 집사람이 금방 애를 둘 낳았다고. 내 아들애가 그때 낳은 지 사흘 만에인가 구속이 된 거야. 그 첫 애는 한 살 조금 넘었고. 집사람이 이제 우리 장모님이 부산에서 대학 교수를 하셨는데 그 양반이 다 생활을 뒷바라지 했죠. 그 양반도 홀로 딸 둘 다 시집 보내고 혼자 사는 어른인데 토요일 날 올라와서 일요일 오후까지 애들하고 놀아주고 그리고 또 기차 타고 가시고. 그런 분들이, 그런 헌신적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던 거죠. 난 지금 이런 암살자(들) 같은 저런 영화가 나오는 것도 참 고맙고 그런 일인데. 그런 것도 창작 영화 같은 걸로 그렇게 내고. 이쪽에 다큐멘터리에 거의 비슷한 버금가는 영화인데. 그런 것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 사람들이 잘리고 고문당하고 감옥 가서 감옥 살고 그리고 또 복덕방도 하고 뭐 라면집도 하고 이러면서 살았던 그런 얘기들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초지를 꺾지 않고 그대로 견디고 동아통위를 지켜온 이런 일들, 이런 얘기를 정말 거의 사실에 가깝게. 그건 무슨 언론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까지 하고 사냐 말이에요. 그냥 나 안 한다고, 그러고 정보부한테 야 나 취직 좀 지켜줘 그러면 좋은데 막 들어가고 그럴 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고 이렇게 버텨낸 거를 이런 걸 얘기로 좀 했으면 어떨까. 다 기록들이 있어요, 그런 거. 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록 쓴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오히려 사람들한테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일 아니냐. 자유언론 선언한다고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그 밑에서 그걸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리고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52년을 버텨왔다는 것을.
▷(한동오 기자)
이 위원장님의 말씀을 보고 영화를 만드시는 창작자분께서 영감을 받으셔서 어느 분께서 꼭 만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YTN 한동오 (hdo86@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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