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쑨원, 장제스..." 우리나라 1등급에 외국인 5명? '서훈' 속 숨겨진 비밀

"쑨원, 장제스..." 우리나라 1등급에 외국인 5명? '서훈' 속 숨겨진 비밀

2022.12.23. 오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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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라디오(FM 94.5) [YTN 뉴스FM 슬기로운 라디오생활]

□ 방송일시 : 2022년 12월 23일 (금요일)
□ 진행 : 이현웅 아나운서
□ 출연: 김재원 역사학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이현웅 아나운서(이하 이현웅): 쑨원, 장제스, 쑹메이링, 천치메이, 천궈푸.. 언뜻 듣기에도 우리나라 인물의 이름은 아닌 것 같죠. 그런데 이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만 7664명 가운데서도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을 받은 외국인이라는 겁니다. 최고등급 서훈을 받은 유공자는 총 33명인데요, 놀랍게도 외국인이 5명이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서훈 안에는 어떤 역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요? 우리 일상에서 보훈 문화가 자리잡을 때까지 국가보훈처와 함께 하는 특별기획 <슬기로운 보훈생활>, 오늘은 5번째 시간이고요. 역사학자 김재원 선생님과 함께합니다. 안녕하십니까?

◆ 김재원 역사학자(이하 김재원): 안녕하십니까.

◇ 이현웅: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육모방망이 얘기도 재밌게 풀어주셨던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스튜디오 직접 또 나와주셨네요. 우리 청취자분들께 인사 한마디 부탁드리겠습니다.

◆ 김재원: 네, 안녕하십니까. 역사 공부하고 있는 김재원이라고 합니다.

◇ 이현웅: 일단 이 얘기부터 해볼게요. 제가 앞서서 5명의 외국인 이름을 말했는데, ‘우리나라 독립유공자에게 주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외국인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 김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독립유공자분들한테 드리는 거니까요. 제도 자체가 독립을 위해서 활동하신 분들한테 모두 다 드리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포함되신 분들이 있고. 53년에 일단 장제스, 제 또래분들에게나 윗 세대분들한테는 ‘장개석’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 그분 같은 경우는 거의 초기에 받으셨어요.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으셨고요. 그런데 전사가 조금 있어요. 임시정부와의 어떤 연관성 때문인데,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만들 때 ‘창군 선언문’이라는 것을 쓰거든요. 거기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선언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면, 장제스의 허락으로 중국이라고 하는 땅 안에서 광복군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거죠.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광복군이 역할을 한 거니까요. 또 있을 수 있게 했었던 사람이 장제스였기 때문에 독립에 영향을 미친 사람인 거죠. 그러다 보니까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었던 거죠.

◇ 이현웅: 그렇군요. 이렇게 서훈을 받게 되면 본인 혹은 그 직계가족 후손에게 국가 차원의 예우를 다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이런 외국인분들도 동일하게 적용을 받습니까?

◆ 김재원: 동일하게 적용을 받지만 안 받는 부분도 있는 거죠. 그게 사실은 돈 문제라서. 연금 문제인데, 외국인 독립유공자분들에게는 처음부터 연금 수령 혜택은 제외가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죠. 환율 문제도 있을 수 있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애초에 연금 수혜 대상자에서 제외가 되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사실 다 동일하게 적용을 받고 있습니다.

◇ 이현웅: 그렇군요. 그러면 앞서서 1953년에 장제스에게 포상을 했다고 했는데 이게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이 된 겁니까?

◆ 김재원: 장제스가 받았을 때 독립유공자 포상은 지금 저희가 알고 있는 서훈 등급이나 이런 거에 딱딱 맞춰서 줬었던 건 아니고요. 최초로 주게 된 것은 62년인데, 일단 등급이 있어요. 사실 등급에 대한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논란이 있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독립운동을 한 거를 얼마나 했는지, 이게 애매하잖아요. 아무튼 등급은 있습니다. 1등급이 대한민국장, 2등급이 대통령장, 3등급이 독립장, 4등급이 애국장, 5등급이 애족장. 이렇게 해서 5등급이 있는데 애초에 62년도에 208명을 서훈을 올리거든요. 그때 누구나 이름을 다 들어보셨을 김구 선생님이나 안창호, 안중근 이런 선생님들이 18명 1등급을 받으셨고요. 신채호, 신돌석, 이위종, 이상설 이런 분들이 2등급. 유관순, 김마리아, 장지영, 이회영 이렇게 132명이 3등급. 이렇게 받으셨어요. 그런데 이거 듣고도 좀 애매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그런데 이거 심사를 할 때, 사실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역사서를 계속 써요. 그때 당시의 현대사였으니까. 그래서 조선독립운동 혈사라든지 이런 독립운동사 관련된 자료 작업을 계속적으로 했거든요. 그거를 바탕으로 이걸 한 건데, 문제가 되는 건 사실 예외 규정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어’라고 하는 예외 규정이 있는데 이게 굉장히 애매해요. 뭔가요 첫 번째는 국시 위배.

◇ 이현웅: 국시 위배. '국시'가 뭐예요?

◆ 김재원: 국가의 정책에 위배된 어떤 그런 것들. 그다음 두 번째가 정치적 과오. 납북, 변절, 해방 후 월남하지 않은 자, 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이렇게 예외 규정을 뒀는데. (아나운서님) 표정을 보니까, 그런 거죠. 애매하죠.

◇ 이현웅: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하고요?

◆ 김재원: 그렇죠. 정치적 과오라고 하는 것을 판단을 누가 할 것이냐. 이런 문제들이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겁니다.

◇ 이현웅: 앞서서 어떤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이런 등급들을 심사한다고 했는데. 이걸 마치 소설로 본다면 주연한테는 출연료 더 주고 주연한테는 덜 주고 그런 걸 텐데, 독립하는 데 있어서 누가 주연이고 조연인가, 이런 좀 애매한 부분이 확실히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가 독립한 지가 벌써 8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보니까 올해에도 계속해서 독립유공자분들이 추가가 되고 있더라고요, 수백 명씩. 서훈제도 만들었을 그 당시에 아무래도 자료가 더 많이 살아 있고 가까우니까요, 그때 좀 많이 확보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드는데. 한편에서는 지금까지 그 노력을 다하고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 김재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보훈처라든지 국가 입장에서는 새로운 자료라고 하는 건 계속적으로 발견될 수 있어요. 그때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주목받는 자료가 발굴된다거나 이러면 또 드릴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렇게만 얘기하면 너무 좋은 얘기니까, 사실은 기본적으로 분단 상황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상황이 영향을 많이 미쳤고요. 그러다 보니까 이념에 따른 어떤 정치적인 잣대. 아까 예외 규정이 여기서 드러나는 거죠. ‘정치적 과오’라는 게 뭐냐라고 하면, 사회주의 계열과의 연계성이라든지 이런 문제들도 영향을 미쳤고요. 그다음에 또 독재정권이 오래 유지가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기억과 서사들이 잊혔던 측면도 조금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 자체가 애매하다 보니까 차일피일 미뤄졌었던 거고. 제대로 된 서훈을 꽤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런 역사적인 과정들이 있었던 거죠.

◇ 이현웅: 새로 자료가 발굴됨에 따라서 독립 유공을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그동안의 행적이나 이런 것들이 재해석되면서 다시 드리는 경우도 있고, 그런 거네요.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 앞서서 5명의 외국인 이름을 제가 언급했었는데,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름도 있고 낯선 이름도 있을 거예요, 청취자분들이 느끼시기에. 앞서서 장제스 얘기는 잠깐 해봤고. 쑨원, ‘중국의 혁명의 아버지’다, 이렇게 불리는 인물인데 우리나라에 어떤 영향을 준 겁니까?

◆ 김재원: 그러면 쑨원에 대해서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원래 역사학자들이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할 때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필요하니까. 그래야 이해가 되니까요. 일단 쑨원은 굉장히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중국인들에게. 여기서 말하는 중국인이라면 이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있겠지만, 중국과 지금의 대만에서 양쪽 모두에서 국부로 인정받는. 이건 굉장히 특별한 거죠. 왜냐하면 지금 사실 한국도 분단국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국부가 없습니다. 국부가 없는데 중국은 대만과 중국 모두에서 국부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게 굉장히 특이한 거죠. 그만큼 독특한 위치인 사람이고요. 혁명 지도자이면서, 정치가이면서, ‘공화제’라고 하는 것을 중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요. 교육자이자 사상가였습니다. 지금 중국과 대만 양쪽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총괄적인, 중국인들을 묶어낼 수 있는 사상을 만들어낸 사람인데, 그 사상이 그 유명한 삼민주의라고 하는. 삼민주의가 뭐냐면.

◇ 이현웅: 유명한데 저는 잘 모르네요.

◆ 김재원: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이거 3개를 묶어서 삼민주의라고 하는데 이게 중국 공화주의 시작을 알렸었던 시내 혁명 당시에 가장 배경이 됐었던 사상이거든요. 이걸 처음으로 만드셨던 분이기도 하고. 공화국이라고 하는 거를 만든 사람이에요. 이게 좀 의아할 수 있거든요.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도 이 사람을 국부로 모신다고 하는 게, 왜 그러냐면 제1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었던 사람이라서 굉장히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 거죠. 왜 그런데 그렇게 중국에서 유명한 사람이 한국과 인연이 있냐면, 국민당 정부를 만들어내고 활동을 할 때 1921년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랑 인연이 조금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본적으로 활동을 중국 땅에서 했어요,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만들어질 때도 상해니까 그쪽에 있었던 거죠. 그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국무총무 대리, 외무총장 이런 걸 역임하셨던 분이 한 분 계세요. 그분이 신규식 선생님이신데, 신규식 선생님이 쑨원과 만남을 가지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 그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때는 나라가 없는 상태잖아요. 그래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임시정부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게 그냥 국내에서 ‘임시정부가 있구나’라고 한다고 영향력이 생기지 않아요. 이건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되거든요, 임시 정부라고 하는 걸. 그때 쑨원에게 찾아가서 인정을 해달라고 하는 것을 타결을 해낸 거죠. 승인을 해 줍니다. 승인을 해 주고, 태평양 회의라고 당시에 미국, 영국, 중국, 일본 이런 동아시아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이 국제회의를 해요. 여기 안에서도 한국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일본이 껴 있음에도. 그런데 쑨원이 그걸 받아들이고 이 안에서 임시정부라고 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적인 정부는 아니지만, 여기서 독립운동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라고 하는 걸 알리는 데 역할을 했었던 거죠.

◇ 이현웅: 갑자기 이렇게 들으면서 궁금한 게, 도와줬다고 하니까 고맙긴 한데. 왜 도와준 건지가 궁금하거든요. 예를 들어 그게 발각되면 공격이 올 수도 있는 거고. 왜 도와준 겁니까?

◆ 김재원: 입장이 비슷하잖아요. 일단 중국 같은 경우에도 이 시기에 열강의 침탈로 인한 기본적인 많은 것들을 빼앗기는 상황이었고. 그 가운데서 한국이라고 하는, 그때는 조선이었죠. 식민지 조선을 바라봤을 때 비슷한 똑같이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열강과 싸워 나가는 그런 모습들, 공동 전선을 형성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공감대가 아마 형성이 됐을 거고요. 그 가운데서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데까지도 이어졌었다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이현웅: 알겠습니다. 쑨원도 공부하실 때는 그러면 ‘손문’인가요?

◆ 김재원: 그렇죠. 보통 ‘손문’으로 공부를 했는데 최근에는 중국어 발음을 그대로 쓰는 거를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하니까.

◇ 이현웅: 청취자분들 중에서도 ‘보면 누구 같은데 내가 알고 있던 이름하고 달라’ 이러실까 봐 잠깐 언급을 했고요. 장제스와 백범과의 일화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어떤 얘기가 있습니까?

◆ 김재원: 비슷합니다. 장제스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장제스 같은 경우에는 쑨원 다음으로 중국 국민당의 수장 역할을 했었던 사람이었고, 그 가운데서 임시정부와의 연결이 있었던 거죠. 초기에는 사실 항일보다는 장제스 같은 경우 국공 내전에 치우쳤던 측면이 강했었어요. 특히 3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공 내전에 치우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중국 국내에서 비판이 굉장히 많았었습니다. ‘지금 일본이랑 항의를 해야 되는데 국내에서 이런 문제들이 있으면 안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속에 엄청나게 큰 사건이 중국 내부에서 터졌어요. 그게 윤봉길 선생님의 상해 ‘홍커우 의거’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게 사실 1년 전에 이봉창 선생님께서 덴노에게 던졌었던 그 폭탄은 국내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심금을 울렸다면, 윤봉길 선생님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어떤 움직임을 도모하고자 했었던 측면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왜냐면 지금 일본과 싸우지 않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우리 같이 싸워서 크게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되지 않아?’라고 하는 걸 애초에 백범 김구 선생님도 노렸고, 윤봉길 의사도 거기에 같이 활동을 했었던 거였거든요. 그랬을 때 윤봉길 선생님이 그 폭탄을 던지고 난 다음에 장제스가 감화된 게 좀 있었던 거죠. ‘중국 군인 몇만 명도 못 하는 일을 한 명이 해낸 쾌거’라고 평가를 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거기에 감화가 돼서. 이게 왜 그때 거기서 던졌냐면, 그때 상하이가 일본에게 점령이 돼요. 그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거든요. 그 가운데서 조선인이 점령되어 있는 상해 땅에서 폭탄을 던진 거니까요. 당연히 배후에 있었던 김구 선생님이 도망을 다녀야 되는 상황에 몰렸었던 거죠. 그때 장제스 같은 경우에 백범 선생님을 많이 도와주십니다. 많이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피난 생활을 해야 될 때 도와주시기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아까 처음에 말씀드렸었던 것처럼 임시정부 활동 자체를 굉장히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 주세요. 그리고 군 활동에서도 지원도 많이 해주고. 그런 과정들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 이현웅: 머릿속에서 따로따로 있던 인물들이 선생님 얘기로 이렇게 섞여서 나오니까 굉장히 흥미로운 것 같은데. 앞서서 1등급을 받은 외국인이 5명이었고, 이게 2등급까지 포함하면 중국인이 15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근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보면 미국인 교사나 선교사가 도와주는 모습들도 나오거든요. 그러면 중국인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서훈을 받은 다른 외국인은 없나요?

◆ 김재원: 있습니다.

◇ 이현웅: 몇 명이나 되나요?

◆ 김재원: 숫자를 제가 정확하게 다 파악할 수는 없는데, 제일 유명하신 분이 헐버트 박사라고,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처음. 들으시나요?

◇ 이현웅: 이름은 어떻게 보면 흔한 이름이니까 들어봤는데, 어떤 인물이죠?

◆ 김재원: 개항 이후 초기부터 활동을 했었던 인물이고요. 조미 통상조약,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는 조약을 맺었을 때 고종 입장에서는 근대화라고 하는 것을 빠르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에 미국에게 교육자들을 보내달라, 추천을 해달라고 요청을 할 때 처음 들어오셨던 분이 헐버트 선생님이고요. 혹시 육영공원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공원이 아니고요, 학교입니다. 최초의 근대식 학교. 여기에서 영어 선생님, 지리 선생님 이런 걸 하시는데. 한국어에 관심이 굉장히 많으셨어요. 한국어가 굉장히 좀 독특하게 보였나 봐요. 그래서 한국어를 자기가 개인 돈 써가면서 개인 교사 붙여서 한국어를 배우고 교과서를 본인이 한국어로 지필을 합니다. 그런 활동도 하셨고. 그런데 이제 나중에 육영공원이 좀 축소가 되면서 미국으로 가셨다가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오세요. 근데 다시 오셨을 때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죠.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었고. 왜냐하면 저희가 역사적 과정들은 다 알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을사조약, 을사늑약이라고도 부르는 게 벌어졌을 때, 조약이 불법적인 거라고 하는 것과 무효에 대한 이야기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역할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라고 1907년, 이거를 고종이 할 때 같이 도움을 많이 주셨던 거죠. 기본적으로 외국 분이시기도 하니까 그런 도움을 많이 주셨고.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일본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쫓겨나세요. 미국으로 돌아가시는데 미국에서도 계속적으로 그런 활동은 계속적으로 합니다. 미국 내에서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걸 지속적으로 미국 언론에다가도 많이 말씀을 하셨고.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독립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독립 훈장을 받게 됐었던 거죠.

◇ 이현웅: 보니까 독립신문 영문판 주필도 맡았다고 하는데, 이렇게 우리나라를 위해서 힘쓴 외국인이 많은 지는 제가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 서훈과 관련해서 사실 준비된 내용들이 더 많은데 시간이 다 돼서 오늘은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될 것 같고. 오늘 못 다한 얘기는 다음에 한 번 더 모셔서 한번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재미있고 유익하게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학자 김재원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YTN 이은지 (yinzhi@ytnradi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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