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1/3쪽·배 1/4쪽"...황당한 수발 매뉴얼

"사과 1/3쪽·배 1/4쪽"...황당한 수발 매뉴얼

2019.03.15. 오후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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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이광연 앵커
■ 출연 : 차정윤 기획이슈팀 기자

[앵커]
이 사건 취재한 기획 이슈팀 차정윤 기자와 함께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학생들의 시험지를 비전공자 조교에게 홀로 맡겼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어떤 시험지를 조교에게 맡긴 건가요?

[기자]
취재진이 만난 전직 조교들은 단답형 문제뿐만 아니라 영어 서술형 시험까지 대리 채점한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시험지 채점은 교수가 조교를 연구실로 불러 방 안에서만 진행됐다고 하는데요.

지난해 근무했던 조교는 시험감독부터 채점, 포탈에 성적 입력까지 모든 과정을 다 혼자 맡아서 했다고 폭로했습니다.

특히 이 조교는 해당 학과의 전공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밤새워 공부해서 낸 시험지를 전공 지식이 없는 자신이 채점해도 되는지,

학생들의 노력을 평가할 자격이 있는지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털어놨습니다.

이 밖에 지난 2011년 대학원생으로 입학해 조교로 일했던 또 다른 졸업생도 교수의 지시로 기말고사 수백 개의 시험지를 홀로 채점했다고 말했습니다.

연말까지 성적 입력을 끝내놔야 했기 때문에 성탄절 밤에도 혼자 시험지를 채점해야 했다고 하는데요.

더 황당했던 건 점수를 정정해달라며 학생들이 교수를 찾아올 때마다 교수는 "채점은 네가 했으니 네가 책임을 져야 한다" 라는 식의 압박까지 했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학생들의 실망감도 클 텐데요.

해당 학과 전공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기자]
물론 대형강의의 경우, 교수들이 종종 시험문제를 조교들과 함께 채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전공자인 조교에게 채점을 맡기거나, 특히 서술형까지 조교에게 혼자 맡겨서는 당연히 안 됩니다.

해당 교수의 대리채점 문제는 수년 전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추정되지만, 최근에서야 학생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들이 이용하는 익명 커뮤니티에서도 개강을 앞두고 지난달부터 문제 제기가 나왔는데요.

취재진이 만난 재학생들은 교수가 채점을 다른 사람한테 맡긴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400만 원이 넘는 등록금이 아깝다고 말했습니다.

[앵커]
또 이 교수가 조교들을 상대로 갑질을 했다던데, 매뉴얼 까지 있다고요?

[기자]
대리 채점을 지시했던 교수는 조교에게 과일을 종류별로 정확하게 몇 쪽씩 깎아놓으라고 요구하는 등 상식 밖의 갑질을 해 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YTN 취재진이 해당 교수의 조교 업무 지침이 담긴 매뉴얼을 입수했는데요.

A4용지 9장으로 정리된 매뉴얼 안에는 일반 학사 조교가 맡기엔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수업 한 시간 전에는 냉장 보관한 저지방 우유를 연구실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하고요.

껍질 벗긴 오렌지 반쪽과 사과 1/3쪽, 배 1/4쪽 등 정량을 지켜 교수님께 가져가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식사를 챙기기 위한 교수의 단골 식당 리스트까지 정리돼 있었습니다.

교수의 식사를 주문한 뒤에는 포장을 풀어 연구실 책상에 세팅해놔야 했고, 뚜껑까지 직접 열어드려야 했다고 하는데요.

매뉴얼은 교수가 직접 만든 건 아니지만, 교수를 담당했던 조교 중 한 명이 만들어 인수인계 파일로 전해져 왔다고 합니다.

YTN 취재진과 만난 성신여대 전직 조교도 매뉴얼 문서를 교수가 직접 건넸다고 밝혔는데요.

조교 근무 첫날, 학과 사무실에서 교수가 이대로만 하면 된다면서 허드렛일 등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앵커]
수년 동안 갑질이 이뤄졌을 것 같은데, 왜 그동안 폭로가 되지 않았던 걸까요?

[기자]
문제가 된 학과는 특성상 학생들의 취업과 진로에 교수들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합니다.

이 때문에 전직 조교들은 교수의 지시가 부당하고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해당 교수는 지난해 4월부터 학과장을 맡고 있는데요.

학과장의 권한이 크기 때문에, 졸업 작품과 논문 심사를 앞둔 학생들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이번에 YTN 취재진에 폭로를 결심하게 된 학생들도 학과 진로와 상관이 없는 비전공자 학생이거나 이미 졸업한 지 오래된 전직 조교들이었던 겁니다.

[앵커]
교수와 학교 측의 해명은 어떻습니까?

[기자]
해당 교수는 대리채점과 갑질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일단, 조교와 함께 채점한 적은 있어도 점수를 매기는 걸 모두 맡긴 적은 없다며 모두 부인했고요.

교수에게 매뉴얼을 보여줬는데, 자신은 처음 본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과일 준비 같은 허드렛일도 시키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

앞서 해당 학과에서는 소속 교수 4명이 대리 강의 문제 등으로 징계를 받아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요.

대리강의 논란에서 빠져있었던 교수마저 갑질과 대리 채점 등 비위 의혹에 휘말리게 된 겁니다.

성신여대 측은 지난 2월부터 내부 감사에 착수했다며, 조만간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교수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전직 조교들은 이미 지난해 12월 이 같은 교수의 갑질을 학교에 알렸습니다.

학교 측은 신빙성 검토에 시간이 걸렸다고 해명했지만,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차정윤[jycha@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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