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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행 : 호준석 앵커
■ 출연 :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라이브]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1953년에 6.25전쟁이 정전되고 그 이후에 한미상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미동맹이 공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올해가 70년 되는 해입니다. 10월이 바로 70년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주한미군 공보관으로 44년 동안 일을 했고 이번 달에 퇴임을 마침 합니다.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을 오늘 초대했습니다. 한미동맹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퇴임이 다음 주?
[김영규]
네, 10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앵커]
소회가 어떠십니까?
[김영규]
아직은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44년 동안 일해왔던 그 프레임, 일상의 프레임들을 이제는 바꿔야 된다 하는 것을 조금씩 이제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은퇴 생활과 그다음에 44년 동안의 공보관 생활이라는 게 완전히 다르니까 그거에 대한 기대감 또는 설렘도 있지만 또 걱정도 많이 앞서고요.
[앵커]
지금 저 사진에서는 왼쪽 저분인가요, 공보관님이?
[김영규]
네.
[앵커]
아까 젊은 시절부터니까 44년의 세월을 사진으로 쭉 봤는데 처음 시작하신 게 몇 년도인 거죠?
[김영규]
그러니까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카투사로 입대해서 배치를 미 2사단에 배치를 받았죠. 미 2사단에 배치를 받아서 거기서 인디언헤드신문이라고 2사단 기관지가 있어요. 거기 기자를 했고 기자를 하다가 제대 3개월 남겨놓고 미 측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앵커]
기자를 얼마나 잘하셨기에 그런 제의를.
[김영규]
제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좋은 미군 전우라 그럴까, 같은 기자인데. 친구를 만나서 사회적인 관심사, 예를 들어서 혼혈인 문제라든지 나병 환자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루는데 같이 항상 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기사들이 상당히 문제화가 되고 또 그러다 보니까 미 2사단에서도 혼혈인협회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게 인연이 돼서 저는 혼혈아들을 50명, 한 2년간 가르친 적도 있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미 측에서 아마 높이 사서 채용을 한 것으로. 그래서 다음 해 3월에 정식으로 1979년 3월에 정식으로 주한미군 미 2사단 공보관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죠.
[앵커]
1979년부터 2023년까지. 그야말로 대한민국도 격변했고 한미 관계도 여러 부침이 있었던 그런 세력들을 한결같이 함께하셨군요. 주한미군 공보관은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김영규]
일단 미2사단 공보관으로 있다가 1985년부터 주한미군 공보관을 했는데요. 제가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이지만 사실은 세 가지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주한미군의 역할이라든지 이런 것을 알려야 되는 입장이고 또 UN군 사령관으로서 판문점을 담당을 했고 그다음에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서 한미연합훈련을 담당해서 언론인들의 취재를 맡고 그랬는데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은 주한미군 또는 국방 안보와 관련된 기사들, 우리 신문에 어떻게 보도됐는지를 지휘부에 알려서, 그러면 지휘부로 하여금 가능하면 한국에 대한, 또 한국 사회에 대한 이런 인식을 올바르게 심어주기 위한 거죠. 그것을 매일 보고서를 올리는 겁니다. 그런 것 하고 그다음에는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것, 주한미군 관련해서 질문을 받으면 그걸 또 해당 부서에 넘겨서 답변이 나오면 또 기자분들한테 전달해 주고, 그다음에 훈련 때는 기자분들하고 같이 현장에 가서 취재해서 해당 부대와의 지원활동을 하고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앵커]
주한미군 사령관만 해도 몇십 명을 경험하셨겠는데요.
[김영규]
제가 수는 안 세어봤지만 그렇죠. 79년부터니까 많은 분들을.
[앵커]
제일 기억에 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한미군사령관 중에?
[김영규]
라포트 사령관이 기억이 많이 나요.
[앵커]
몇 년도쯤?
[김영규]
그게 한 10몇 년 됐을 텐데. 그분이 상당히 한국 언론을 이해하려고 많이 했어요. 그래서 언론인들하고의 간담회도 하고, 또는 우리 인터넷 독자들하고도 간담회를 할 정도로 상당히 한국 언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보는 관점이 작전이 어쩌고 이런 것보다는 공보 업무에서 얼마큼 친화력 있게 해 줬나, 그런 데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앵커]
44년 해오시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어떤 때였습니까?
[김영규]
44년 동안 일하면서 항상 긴장된 상태인 건 맞고요. 매일 어떤 기사가 나올까 이런 걸 보니까.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좀 어렵고 했던 일들이 2002년도에 두 여중생, 효순이, 미선이 사망 사건이 가장 기억에도 남고 오래 남죠. 왜냐하면 물론 두 여중생이 사망했을 때 해당 부대가 캠프 하우즈라는 데서 촛불 추모를 먼저 했어요, 거기서. 그러니까 장병들이 다 모여서 두 개의 영정을 앞에 놓고 그다음에 추모회가 끝나니까 들고 있던 촛불들을 다 영정 앞에 놓고 그다음에 나오면서 모금함을 하나 만들어서 모금함에다 돈 넣고. 그래서 그 모금함으로 두 여중생에 대한 비를 세웠거든요.
그런 과정이 있었는데 이게 우리 언론에는 보도가 별로 안 됐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해 이게 상당히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됐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문제가 될수록 저는 언론으로부터의 질문이라든지 주한미군의 입장이 어떤 거라든지 전달해야 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그때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가 크게 벌어지고 하기 전에 미군 장병들이 먼저 촛불 집회를 했단 말씀이시죠?
[김영규]
그러니까 저는 촛불 시위라는 것보다도 촛불 추모라고 해야 되겠죠. 또하고
[앵커]
촛불 추모. 그때 왜 잘 보도가 안 됐습니까?
[김영규]
글쎄요, 그때 제가 기억하기로 너댓 명의 기자가 왔었고 그다음에 그날이 뭐였냐 하면 월드컵, 한국하고 미국이 경기 한 날이에요. 그래서 기억을 합니다.
[앵커]
그때 사실은 한국인이시면서 또 미군의 입장을 대변해야 되고 양측에 서로 입장이 다른 부분도 있고. 마음고생 무척 많이 하셨겠군요.
[김영규]
그렇죠. 우연치 않게 저 같은 경우는 두 명의 미군들을 군사재판하는 데까지 참석을 했었어요. 군사재판 과정도 다 봤죠. 좀 안타까운 일인데, 하여튼 우리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줬지만 이 두 여중생 사건이 미군들에게도 큰 변화를 줬어요.
[앵커]
어떤 점에서요?
[김영규]
미군들도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이것을 또 바꿔야 되고 또 가능하면 한국 사회하고 친하게, 좀 더 친숙하게 지내야 되겠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주한미군에서는 군 네이버 프로그램, 그러니까 좋은 이웃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을 이해하고 또는 주한미군을 또 어떻게 한국인에게 인식시킬까.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을 하면서 인식들이 상당히 바뀌었죠.
[앵커]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증인 같은 현장들을 직접 보셨는데 1976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그것도 현장에 계셨다면서요?
[김영규]
그때 군에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미 2사단 기자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그 사건이 나니까. 8월 15일 났잖아요. 8월 21일날 카메라 주고 방탄조끼 입고 헬기 타고 취재 가라.
[앵커]
어디로 취재라는 가라는 겁니까?
[김영규]
판문점으로요. 나하고 미군하고 같이 간 건데 헬기 타고 밖을 나가는데 보니까 2사단의 전력들, 탱크라든지 이런 게 전부 다 밖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쪽을 향해서. 그래서 겁을 상당히 냈죠, 사실. 그런데 막상 갔을 때 현장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현장이 위험하니까. 거기는 출입이 안 됐죠. 멀리서 지켜만 봤고. 그래서 일단 어떻든 간에 그 현장을 지켜봤다는 게. 그러고 그날 저녁엔가, 그 자른 미루나무를 가져온 게 하필이면 우리 사무실 옆으로 가져놨어요.
[앵커]
그때 미루나무를 왜 자른 거죠? 그때 그 상황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김영규]
그건 뭐냐 하면 연례적으로 미루나무가 굉장히 크잖아요. 그러면 여기를 4초소라고 그러면 4초소에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여기는 설명하기가 길어지는데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이에요. 그 다리 건너편에는 북한군이 있고. 그래서 위험해요. 그래서 여기는 우리 병력을 운용을 안 해요. 그래서 3초소로, 언덕 위에 있는 3초소가 있어요. 거기서 내려다보면서 4초소를 감시했거든요. 그런데 연례적으로 해오던 가지치기예요. 그러니까 한국인 노무자들이 올라가서 가지를 치는 거죠. 그때 북한군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해서 2명의 미군 장교에게만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고, 그래서 2명의 미군 장교가 살해된 거죠.
[앵커]
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역사의 부침을 보시면서 또 한미동맹도 부침이 있었지 않습니까? 어떨 때는 공고하고 어떨 때는 위기이기도 하고 그런 상황들 보시면서 어떠셨습니까?
[김영규]
물론 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위기 때는 힘들고 또 잘 풀릴 때는 기분이 좋은 게 많고 그렇죠.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미군의 역할 자체, 한반도에서의 역할 자체가 90년대 초반에 오면서 바뀌어요, 많이. 그러니까 미군이 지금까지 한반도의 안보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 리딩롤을 해왔다면 90년 넘어갔다면 서포팅롤, 지원적인 역할로 바뀌거든요. 그 한 예가 평시작전권이 한국 합참으로 넘겨졌고 그다음에 비무장지대에서의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한 게 91년 10월 1일입니다. 그다음에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미군이 쭉 맡다가 한국군 장성으로 바뀌었죠. 이런 것 말고 작전적으로도 엄청 많죠. 그런 것들이 많은 부분이 한국으로 넘어와요. 그러니까 한국군이 이제는 리딩 역할을 하게 되는 그런 역할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지켜봤다는 게 저로서는.
[앵커]
그러니까 한미 간의 관계, 또 한미 군 간의 관계도 역학관계 그렇고 서로의 역할도 그렇고 굉장히 계속 변화해 나갔고,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김영규]
그렇죠. 변화해나갔고 지금은 잘 알다시피 한미동맹 관계는 동반자적 관계라고 해서 많이 발전되고 있죠, 굉장히.
[앵커]
미군들이, 사령관 비롯해서 미군 장병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느끼는 태도나 감정이나 이런 것들도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다릅니까?
[김영규]
그럼요, 굉장히 다르죠. 일단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이나 또는 문화적으로 많이 발전됐잖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가장 많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한국전쟁 때 참가했던 미군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됐을 때 다 놀란다 그러잖아요. 그만큼 경제적인 발전이라든지 문화적인 발전과 아울러서 미군들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죠.
[앵커]
주한미군 장병들 우리가 직접 만나볼 기회가 사실 없고, 거의 없죠. 그리고 가끔씩 어떤 일탈행위들, 범죄라든가 이런 것이 있을 때 우리가 사건 기사로 보고 하거든요. 주한미군들은 대체로 어떤 생각들을 많이 하고, 또 어떤 마음이고 또 어떻게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그런 거 공보관님 입장에서 소개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영규]
우선은 주한미군은 한국에 근무하게 되는 게 정해져 있단 말이에요. 몇 년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1년 내지 2년 이렇게 근무를 하기 때문에 제가 아는 많은 미군들은 그 1년 동안에 한국의 문화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배우려고 노력을 하고, 심지어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 물론 그런 중에는 아까도 말씀하신 것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는 거고요. 어떻든 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지고 또 인식들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 제가 같이 근무하면서 뼈저리게 느끼죠.
[앵커]
아까 김영규 공보관님 젊을 때부터 사진 있지 않습니까? 그거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70년대?
[김영규]
80년대.
[앵커]
80년대. 그러니까 공보관으로 일 시작하신 지 몇 년 정도 됐을 때.
[김영규]
이것은 비무장지대 안에 남아있는 기차통이죠. 이거는 판문점에서 찍은 거고요.
[앵커]
저때가 무슨 중요한 일이 열리고 있을 때인가요?
[김영규]
저 같은 경우는 판문점에 행사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북대화. 모든 남북 대화가 있을 때마다 유엔사 공보관으로서 판문점을 가게 돼 있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벌써 사십몇 년을 다니다 보니까 판문점의 산증인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앵커]
상도 많이 받으셨네요?
[김영규]
미군은 상들을 많이 줘요. 이건 기자회견할 때 이것은 샤프 사령관하고.
[앵커]
이름 많이 기억하는데요, 샤프 사령관. 저기는 지금?
[김영규]
판문점에서 정전위 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얘기. 초록색 완장을 찬 게 북한 기자들이거든요. 북한 기자들하고 항상 얘기를 하고 .
[앵커]
북한 기자들하고 무슨 얘기를 하시나요?
[김영규]
저 같은 경우는 오래 했기 때문에 상당히 친하다고 볼 수 있어요.
[앵커]
그쪽도 사람이 계속 정해져 있나요?
[김영규]
거의 정해져 있죠. 그러다 보니까 많은 서로에 대한 비방을 않지만, 그것은 안 하지만 서로 개인적으로 얘기까지 많이 해요. 기억에 남는 일도 많고요.
[앵커]
마침 참으로 공교롭게도 2023년 10월 마지막 날 퇴임을 하시고 한미동맹의 산증인 같은 분이신데, 한미동맹이 올해 10월로 70주년을 딱 맞이했단 말입니다. 앞으로도 한미는 동반자로 앞으로 나아가야 될 텐데 앞으로 한미 관계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라든지 또는 이런 점들은 서로 조심을 해야 되겠다든지 그런 게 있으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김영규]
저는 앞으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것보다는 벌써 그렇게 지금 나가고 있다고 봐요. 상당히 발전적으로, 동반자적 관계가 유지되면서. 알다시피 요즘에 현 정부 들어서서 미국 정부하고 여러 가지 협의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전략자산 전개라든지. 제가 보는 건 안보적인 면에서만 보니까. 그런 면에서는 아주 잘 돼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잘돼 나갈 것으로 저는 믿고 있고요.
[앵커]
44년 이제 퇴임하시는데 가족들은 뭐라고 하십니까?
[김영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실감 나지 않으니까 아직도 퇴임한다. 가끔 언론하고 인터뷰를 해서 아, 퇴임하나 보다 하는데 일단은 퇴임 바로 하면 좀 쉬어야 되겠죠.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좀 쉬면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생각을 해보라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앵커]
제일 어디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습니까?
[김영규]
제가 고향이 제주도입니다. 일단은 시간이 되는대로 바로 제주도에 가서 며칠 지내볼까 합니다.
[앵커]
오늘 한미동맹의 44년 동안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그리고 10월 31일이 퇴임이라고 합니다. 김영규 주한미군 사령부 공보관을 만나봤습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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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연 :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인용 시 [YTN 뉴스라이브]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1953년에 6.25전쟁이 정전되고 그 이후에 한미상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미동맹이 공식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올해가 70년 되는 해입니다. 10월이 바로 70년 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인물의 한 사람이라고 할까요. 주한미군 공보관으로 44년 동안 일을 했고 이번 달에 퇴임을 마침 합니다. 김영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을 오늘 초대했습니다. 한미동맹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퇴임이 다음 주?
[김영규]
네, 10월 31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앵커]
소회가 어떠십니까?
[김영규]
아직은 실감이 나지는 않지만 44년 동안 일해왔던 그 프레임, 일상의 프레임들을 이제는 바꿔야 된다 하는 것을 조금씩 이제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은퇴 생활과 그다음에 44년 동안의 공보관 생활이라는 게 완전히 다르니까 그거에 대한 기대감 또는 설렘도 있지만 또 걱정도 많이 앞서고요.
[앵커]
지금 저 사진에서는 왼쪽 저분인가요, 공보관님이?
[김영규]
네.
[앵커]
아까 젊은 시절부터니까 44년의 세월을 사진으로 쭉 봤는데 처음 시작하신 게 몇 년도인 거죠?
[김영규]
그러니까 주한미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6년 카투사로 입대해서 배치를 미 2사단에 배치를 받았죠. 미 2사단에 배치를 받아서 거기서 인디언헤드신문이라고 2사단 기관지가 있어요. 거기 기자를 했고 기자를 하다가 제대 3개월 남겨놓고 미 측에서 제의가 들어왔어요.
[앵커]
기자를 얼마나 잘하셨기에 그런 제의를.
[김영규]
제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좋은 미군 전우라 그럴까, 같은 기자인데. 친구를 만나서 사회적인 관심사, 예를 들어서 혼혈인 문제라든지 나병 환자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다루는데 같이 항상 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기사들이 상당히 문제화가 되고 또 그러다 보니까 미 2사단에서도 혼혈인협회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게 인연이 돼서 저는 혼혈아들을 50명, 한 2년간 가르친 적도 있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미 측에서 아마 높이 사서 채용을 한 것으로. 그래서 다음 해 3월에 정식으로 1979년 3월에 정식으로 주한미군 미 2사단 공보관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죠.
[앵커]
1979년부터 2023년까지. 그야말로 대한민국도 격변했고 한미 관계도 여러 부침이 있었던 그런 세력들을 한결같이 함께하셨군요. 주한미군 공보관은 어떤 일을 하는 겁니까?
[김영규]
일단 미2사단 공보관으로 있다가 1985년부터 주한미군 공보관을 했는데요. 제가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이지만 사실은 세 가지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주한미군의 역할이라든지 이런 것을 알려야 되는 입장이고 또 UN군 사령관으로서 판문점을 담당을 했고 그다음에 한미연합사 사령관으로서 한미연합훈련을 담당해서 언론인들의 취재를 맡고 그랬는데 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은 주한미군 또는 국방 안보와 관련된 기사들, 우리 신문에 어떻게 보도됐는지를 지휘부에 알려서, 그러면 지휘부로 하여금 가능하면 한국에 대한, 또 한국 사회에 대한 이런 인식을 올바르게 심어주기 위한 거죠. 그것을 매일 보고서를 올리는 겁니다. 그런 것 하고 그다음에는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것, 주한미군 관련해서 질문을 받으면 그걸 또 해당 부서에 넘겨서 답변이 나오면 또 기자분들한테 전달해 주고, 그다음에 훈련 때는 기자분들하고 같이 현장에 가서 취재해서 해당 부대와의 지원활동을 하고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앵커]
주한미군 사령관만 해도 몇십 명을 경험하셨겠는데요.
[김영규]
제가 수는 안 세어봤지만 그렇죠. 79년부터니까 많은 분들을.
[앵커]
제일 기억에 나는 분들이 있습니까, 주한미군사령관 중에?
[김영규]
라포트 사령관이 기억이 많이 나요.
[앵커]
몇 년도쯤?
[김영규]
그게 한 10몇 년 됐을 텐데. 그분이 상당히 한국 언론을 이해하려고 많이 했어요. 그래서 언론인들하고의 간담회도 하고, 또는 우리 인터넷 독자들하고도 간담회를 할 정도로 상당히 한국 언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무래도 보는 관점이 작전이 어쩌고 이런 것보다는 공보 업무에서 얼마큼 친화력 있게 해 줬나, 그런 데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앵커]
44년 해오시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어떤 때였습니까?
[김영규]
44년 동안 일하면서 항상 긴장된 상태인 건 맞고요. 매일 어떤 기사가 나올까 이런 걸 보니까.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좀 어렵고 했던 일들이 2002년도에 두 여중생, 효순이, 미선이 사망 사건이 가장 기억에도 남고 오래 남죠. 왜냐하면 물론 두 여중생이 사망했을 때 해당 부대가 캠프 하우즈라는 데서 촛불 추모를 먼저 했어요, 거기서. 그러니까 장병들이 다 모여서 두 개의 영정을 앞에 놓고 그다음에 추모회가 끝나니까 들고 있던 촛불들을 다 영정 앞에 놓고 그다음에 나오면서 모금함을 하나 만들어서 모금함에다 돈 넣고. 그래서 그 모금함으로 두 여중생에 대한 비를 세웠거든요.
그런 과정이 있었는데 이게 우리 언론에는 보도가 별로 안 됐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해 이게 상당히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됐지 않습니까? 사회적인 문제가 될수록 저는 언론으로부터의 질문이라든지 주한미군의 입장이 어떤 거라든지 전달해야 되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굉장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앵커]
그러니까 그때 광화문에서 촛불 시위가 크게 벌어지고 하기 전에 미군 장병들이 먼저 촛불 집회를 했단 말씀이시죠?
[김영규]
그러니까 저는 촛불 시위라는 것보다도 촛불 추모라고 해야 되겠죠. 또하고
[앵커]
촛불 추모. 그때 왜 잘 보도가 안 됐습니까?
[김영규]
글쎄요, 그때 제가 기억하기로 너댓 명의 기자가 왔었고 그다음에 그날이 뭐였냐 하면 월드컵, 한국하고 미국이 경기 한 날이에요. 그래서 기억을 합니다.
[앵커]
그때 사실은 한국인이시면서 또 미군의 입장을 대변해야 되고 양측에 서로 입장이 다른 부분도 있고. 마음고생 무척 많이 하셨겠군요.
[김영규]
그렇죠. 우연치 않게 저 같은 경우는 두 명의 미군들을 군사재판하는 데까지 참석을 했었어요. 군사재판 과정도 다 봤죠. 좀 안타까운 일인데, 하여튼 우리 사회에 상당한 변화를 줬지만 이 두 여중생 사건이 미군들에게도 큰 변화를 줬어요.
[앵커]
어떤 점에서요?
[김영규]
미군들도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이것을 또 바꿔야 되고 또 가능하면 한국 사회하고 친하게, 좀 더 친숙하게 지내야 되겠다는 그런 식으로 해서 주한미군에서는 군 네이버 프로그램, 그러니까 좋은 이웃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을 이해하고 또는 주한미군을 또 어떻게 한국인에게 인식시킬까. 그런 프로그램을 진행을 하면서 인식들이 상당히 바뀌었죠.
[앵커]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증인 같은 현장들을 직접 보셨는데 1976년에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그것도 현장에 계셨다면서요?
[김영규]
그때 군에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미 2사단 기자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얼마 안 됐을 때인데 그 사건이 나니까. 8월 15일 났잖아요. 8월 21일날 카메라 주고 방탄조끼 입고 헬기 타고 취재 가라.
[앵커]
어디로 취재라는 가라는 겁니까?
[김영규]
판문점으로요. 나하고 미군하고 같이 간 건데 헬기 타고 밖을 나가는데 보니까 2사단의 전력들, 탱크라든지 이런 게 전부 다 밖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북쪽을 향해서. 그래서 겁을 상당히 냈죠, 사실. 그런데 막상 갔을 때 현장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현장이 위험하니까. 거기는 출입이 안 됐죠. 멀리서 지켜만 봤고. 그래서 일단 어떻든 간에 그 현장을 지켜봤다는 게. 그러고 그날 저녁엔가, 그 자른 미루나무를 가져온 게 하필이면 우리 사무실 옆으로 가져놨어요.
[앵커]
그때 미루나무를 왜 자른 거죠? 그때 그 상황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김영규]
그건 뭐냐 하면 연례적으로 미루나무가 굉장히 크잖아요. 그러면 여기를 4초소라고 그러면 4초소에 미루나무가 있었는데 여기는 설명하기가 길어지는데 바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이에요. 그 다리 건너편에는 북한군이 있고. 그래서 위험해요. 그래서 여기는 우리 병력을 운용을 안 해요. 그래서 3초소로, 언덕 위에 있는 3초소가 있어요. 거기서 내려다보면서 4초소를 감시했거든요. 그런데 연례적으로 해오던 가지치기예요. 그러니까 한국인 노무자들이 올라가서 가지를 치는 거죠. 그때 북한군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해서 2명의 미군 장교에게만 집중적으로 공격을 했고, 그래서 2명의 미군 장교가 살해된 거죠.
[앵커]
이 많은 일들을 겪으시면서 역사의 부침을 보시면서 또 한미동맹도 부침이 있었지 않습니까? 어떨 때는 공고하고 어떨 때는 위기이기도 하고 그런 상황들 보시면서 어떠셨습니까?
[김영규]
물론 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위기 때는 힘들고 또 잘 풀릴 때는 기분이 좋은 게 많고 그렇죠.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미군의 역할 자체, 한반도에서의 역할 자체가 90년대 초반에 오면서 바뀌어요, 많이. 그러니까 미군이 지금까지 한반도의 안보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 리딩롤을 해왔다면 90년 넘어갔다면 서포팅롤, 지원적인 역할로 바뀌거든요. 그 한 예가 평시작전권이 한국 합참으로 넘겨졌고 그다음에 비무장지대에서의 주한미군이 완전 철수한 게 91년 10월 1일입니다. 그다음에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를 미군이 쭉 맡다가 한국군 장성으로 바뀌었죠. 이런 것 말고 작전적으로도 엄청 많죠. 그런 것들이 많은 부분이 한국으로 넘어와요. 그러니까 한국군이 이제는 리딩 역할을 하게 되는 그런 역할들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걸 지켜봤다는 게 저로서는.
[앵커]
그러니까 한미 간의 관계, 또 한미 군 간의 관계도 역학관계 그렇고 서로의 역할도 그렇고 굉장히 계속 변화해 나갔고,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김영규]
그렇죠. 변화해나갔고 지금은 잘 알다시피 한미동맹 관계는 동반자적 관계라고 해서 많이 발전되고 있죠, 굉장히.
[앵커]
미군들이, 사령관 비롯해서 미군 장병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 느끼는 태도나 감정이나 이런 것들도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다릅니까?
[김영규]
그럼요, 굉장히 다르죠. 일단은 우리나라가 경제적이나 또는 문화적으로 많이 발전됐잖아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가장 많이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한국전쟁 때 참가했던 미군들이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됐을 때 다 놀란다 그러잖아요. 그만큼 경제적인 발전이라든지 문화적인 발전과 아울러서 미군들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죠.
[앵커]
주한미군 장병들 우리가 직접 만나볼 기회가 사실 없고, 거의 없죠. 그리고 가끔씩 어떤 일탈행위들, 범죄라든가 이런 것이 있을 때 우리가 사건 기사로 보고 하거든요. 주한미군들은 대체로 어떤 생각들을 많이 하고, 또 어떤 마음이고 또 어떻게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그런 거 공보관님 입장에서 소개를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영규]
우선은 주한미군은 한국에 근무하게 되는 게 정해져 있단 말이에요. 몇 년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1년 내지 2년 이렇게 근무를 하기 때문에 제가 아는 많은 미군들은 그 1년 동안에 한국의 문화라든지 또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배우려고 노력을 하고, 심지어는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고. 물론 그런 중에는 아까도 말씀하신 것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는 거고요. 어떻든 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지고 또 인식들도 많이 달라졌다는 것. 제가 같이 근무하면서 뼈저리게 느끼죠.
[앵커]
아까 김영규 공보관님 젊을 때부터 사진 있지 않습니까? 그거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게 70년대?
[김영규]
80년대.
[앵커]
80년대. 그러니까 공보관으로 일 시작하신 지 몇 년 정도 됐을 때.
[김영규]
이것은 비무장지대 안에 남아있는 기차통이죠. 이거는 판문점에서 찍은 거고요.
[앵커]
저때가 무슨 중요한 일이 열리고 있을 때인가요?
[김영규]
저 같은 경우는 판문점에 행사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남북대화. 모든 남북 대화가 있을 때마다 유엔사 공보관으로서 판문점을 가게 돼 있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벌써 사십몇 년을 다니다 보니까 판문점의 산증인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앵커]
상도 많이 받으셨네요?
[김영규]
미군은 상들을 많이 줘요. 이건 기자회견할 때 이것은 샤프 사령관하고.
[앵커]
이름 많이 기억하는데요, 샤프 사령관. 저기는 지금?
[김영규]
판문점에서 정전위 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얘기. 초록색 완장을 찬 게 북한 기자들이거든요. 북한 기자들하고 항상 얘기를 하고 .
[앵커]
북한 기자들하고 무슨 얘기를 하시나요?
[김영규]
저 같은 경우는 오래 했기 때문에 상당히 친하다고 볼 수 있어요.
[앵커]
그쪽도 사람이 계속 정해져 있나요?
[김영규]
거의 정해져 있죠. 그러다 보니까 많은 서로에 대한 비방을 않지만, 그것은 안 하지만 서로 개인적으로 얘기까지 많이 해요. 기억에 남는 일도 많고요.
[앵커]
마침 참으로 공교롭게도 2023년 10월 마지막 날 퇴임을 하시고 한미동맹의 산증인 같은 분이신데, 한미동맹이 올해 10월로 70주년을 딱 맞이했단 말입니다. 앞으로도 한미는 동반자로 앞으로 나아가야 될 텐데 앞으로 한미 관계가 어떻게 됐으면 좋겠다라든지 또는 이런 점들은 서로 조심을 해야 되겠다든지 그런 게 있으면 말씀을 해 주십시오.
[김영규]
저는 앞으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것보다는 벌써 그렇게 지금 나가고 있다고 봐요. 상당히 발전적으로, 동반자적 관계가 유지되면서. 알다시피 요즘에 현 정부 들어서서 미국 정부하고 여러 가지 협의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전략자산 전개라든지. 제가 보는 건 안보적인 면에서만 보니까. 그런 면에서는 아주 잘 돼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잘돼 나갈 것으로 저는 믿고 있고요.
[앵커]
44년 이제 퇴임하시는데 가족들은 뭐라고 하십니까?
[김영규]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실감 나지 않으니까 아직도 퇴임한다. 가끔 언론하고 인터뷰를 해서 아, 퇴임하나 보다 하는데 일단은 퇴임 바로 하면 좀 쉬어야 되겠죠. 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좀 쉬면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생각을 해보라고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앵커]
제일 어디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었습니까?
[김영규]
제가 고향이 제주도입니다. 일단은 시간이 되는대로 바로 제주도에 가서 며칠 지내볼까 합니다.
[앵커]
오늘 한미동맹의 44년 동안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그리고 10월 31일이 퇴임이라고 합니다. 김영규 주한미군 사령부 공보관을 만나봤습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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