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활약한 6천 독립군...'승리의 역사' 봉오동·청산리

간도에서 활약한 6천 독립군...'승리의 역사' 봉오동·청산리

2020.08.15. 오전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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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출병사> 1920년 봉오동 전투 이후 작성한 일본군 기밀자료
"섬멸적 타격 불가능"…’간도 초토화’ 실패 시인
日, 독립군 대신 한인촌 공격…민간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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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오늘로 꼭 광복 75주년인데,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1920년 일본군이 작성한 기밀문서를 보면, 당시 간도에서 활약한 우리 독립군 규모가 6천 명에 이르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장아영 기자가 우리 선조들의 항일 무장독립 투쟁의 의미를 되짚어봤습니다.

[기자]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 패전 이후 일본 조선군사령부가 육군성에 보고한 '간도출병사'입니다.

간도에 있는 불령선인, 즉 우리 독립군의 분포와 규모, 가지고 있는 무기까지 세세히 적고 있습니다.

가장 동쪽의 훈춘에 한민회를 중심으로 1,400명, 봉오동이 있는 북간도 중간 지역에는 김좌진 장군의 군정서 600명,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1,000명을 비롯해 광복단과 신민단 등 모두 1,850명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청산리가 포함된 서쪽, 가장 넓은 지역에는 기독교도 중심의 국민회 300명 등 모두 2,800명이 분포해 있습니다.

6천여 명은 그간 알려진 독립군 규모의 2배가 넘는 것으로, 일본은 무관학교를 통해 훈련된 독립군이 총기도 4,600자루 넘게 보유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 3위 군사 강국인 일본군은 10월부터 '간도 초토화'를 목표로 만 명 넘는 군대를 투입하지만, 보고서에서 "섬멸적 타격은 불가능했다"며 실패를 시인합니다.

독립군이 일주일 동안 청산리와 어랑촌 골짜기를 누비며 신출귀몰하는 동안, 일본군은 주력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도 힘들어했던 사실이 지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일본군은 독립군 대신 한인촌을 공격해 민간인 학살을 벌였고, 이를 전과로 올렸습니다.

당시 간도 지역에 있던 우리 동포는 28만여 명으로, 배후에서 물자와 정보, 잠자리를 제공하는 등, 지원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연옥 / 육군사관학교 교수·<간도출병사> 번역 : (일본군 한인촌 소탕의) 중요한 증거로, 군자금을 누가 얼마를 어떻게 내고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됐다는 게 빼곡히 나와 있는 기록이 있어요. 군자금을 위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이…. 모두가 사실은 독립군이었다.]

독립군의 무장투쟁과 일본군의 한인촌 학살은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 여론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0년 이후 독립군과 간도의 한인촌은 자유시 참변과 민생단 사건 등 슬픈 역사를 더 겪어야 했지만, 봉오동·청산리에서 얻은 승리의 기억은 1945년 오늘,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됐습니다.

YTN 장아영[jay24@yt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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