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르헨띠노, 반세기의 신화 - 안전선 밖으로

꼬르헨띠노, 반세기의 신화 - 안전선 밖으로

2015.11.01. 오후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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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에 새로운 세대가 떠오르고 있다.

정치, 문화,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이민 2세대들이다.

이들은 경제적 풍요에 안주하지 않는다.

전문적 지식을 쌓아 키워준 나라에 보답하고 그 사회의 주류로 진입하기를 원한다.

"부모님들을 따뜻하게 포옹해준 나라고 그리고 나에게 무료로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게 한 나라고..."

"전문인이 돼서 이렇게 사회에 아르헨티나 사람들하고 뭉쳐서 같이 이끌어 나가면 조금 더 인식이 좋아지겠죠."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는 한인사회를 벗어나 주류사회의 경쟁에 뛰어든 신세대 '꼬르헨띠노'들을 만나본다.

배우 김창성 씨는 아르헨티나 동포사회에서 괴짜로 통한다.

안정된 의류업을 버리고 30대 중반에 배우가 되겠다며 연극공부를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김창성, 동포 배우]
"배우는 또, 다 나이 먹어서 한 거야. 나도 옷 장사 몇 년 했어요. 옷장사하면 그래도 살기는 밥은 먹고 사는데 근데 한 서른다섯 살 때 야! 난 이렇게 옷 장사 하면서 계속 살기 싫다 그렇게 생각이 나요."

일곱 살 때 이민 온 그는 열 살 때부터 한인 사회와 떨어져 지내 한국말이 서툴다.

가족이 한인 타운에서 중산층 거주지로 이사한 뒤 자주 한인들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아내도 친구들도 모두 현지인이다 보니 스페인어는 거의 아르헨티나 토박이 수준이다.

순발력이 필요한 텔레비전 시트콤 배우로 성공한 것은 그 덕분이다.

[김창성, 동포 배우]
"공부 안 끝나도 벌써 일하고 그러니까... 야! 이거 가지고 밥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생각이 나. 그래서 거기서부터 계속 하는 건데, 그런데 그것도 내가 거의 제일 맨 처음에 텔레비전 프로그램 한 게 이 나라에서 히트 쳤어."

영화배우로도 승승장구하며 현지 사회의 유명인사가 됐지만 쉰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부쩍 동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이민 50주년을 기념하는 '50번째 추석'이라는 다큐멘터리도 제작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올 여름에는 이민 후 처음으로 제작팀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알아보면서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아버지 세대 이민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다.

[김창성, 동포 배우]
"진짜 맨 처음에 온 분들이... 야! 일 많이 했어. 일만 많이 한 게 아니고 말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뭐가 뭔지도 몰랐잖아. 그렇게 해가지고 얼마나 열심히 했어. 그것 땜에 이 다큐멘터리 하는 거예요. 그분들한테 감사합니다. 그거예요."

[따마에 가라떼구이, 영화감독]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창성 씨는 4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찾은 거였죠."

아르헨티나 사회의 계층간 빈부격차는 크지만 사회주의 영향 때문에 직업별 임금격차는 작은 편이다.

이 때문에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직이 돼도 임금 수준이 타직군에 비해 그리 높지 않다.

교육열이 높은 한인 사회가 전문직 2세들을 길러내도 많은 수가 의류업으로 돌아오는 이유다.

주류사회 진출이 시급한 한인사회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바람직한 일만은 아니다.

[이병환, 한인회장]
"이 나라에 의사가 돼가지고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면 미화로 환산하면 천 불 정도 되겠습니다. 그러면 한화로 치면 백이십만 원, 그러니까 일단은 수익이 적고 상대적으로 섬유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을 보면 열배씩 이렇게 수입이 되니까..."

올해 28살인 동포 변호사 변겨레 씨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1번지에서 경력을 쌓고 있다.

내년 연방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인 마우리시오 마끄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장의 최측근인 이반 뻬뜨렐라 시의원이 그의 정치 스승이다.

부모님을 따뜻하게 받아준 나라, 자신을 무료로 교육시켜준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변겨레, 변호사·시의원 보좌관]
"아직 이 나라가 발전할 점들이 많거든요. 근데 발전할 점들 중에서 한국에서 본을 받을 수 있는 점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다리 역할을 하면 어떨까 싶어서 정치 쪽에서 계속 종사하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국립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로스쿨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국비로 독일과 미국에 유학해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

어느 분야에서든 탐낼 만한 경력이다.

[이반 뻬뜨렐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원]
"겨레는 출발점에 서 있는 게 아닙니다. 출발점은 한참 지났습니다. 아마 그 나이 또래 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집권당인 프로당에서 가장 존중받는 인물일 겁니다."

변겨레 씨 가족도 의류업을 하고 있지만 변 씨는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민 2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적 지식을 쌓고 주류사회에 파고들어 현지인과 직접 경쟁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겨레, 변호사·시의원 보좌관]
"이민 사회 내에서 계속 의류업 쪽에 종사를 하게 되면 거기서 잘 벗어날 수가 없어요. 영어로 말하자면 컴포트 존 (안전지대)이라고 그러죠. 컴포트 존에서 빠져나와가지고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동등하게 경쟁을 해서 경쟁해서 이겨서 이민 사회를 좀 더 빛낼 수 있는 그런 2세나 3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과전문의인 신문영 씨는 1984년 아홉 살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다.

노벨상 수상자를 세명이나 배출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레지던트 단계에서 수련을 중단했다.

노력에 비해 수입이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문영, 안과 전문의]
"같이 졸업을 했고 저는 안과로 레지던트를 여기 들어오고 그때 그분이 이비인후과로 시험을 봐서 들어갔는데 몇 개월을 하더니 자기 적성에 안 맞고 뭐 그러더라고요. 부모님이 가게를 하셨어요. 의류 가게, 그거로 해야 되겠다. 그래서 그냥 그거로 해요."

신문영 씨가 전문직을 택한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한국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아버지와 교사 출신인 어머니는 돈 버는 일보다 자녀 교육에 더 공을 들였다.

[신상현, 전 한국학교 이사장]
"내가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애들한테 물려줄 것도 없는 이런 상황에서 얘들은 적어도 자립할 수 있는 어느 기술이나 어느 전문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다가 이 나라는 공부, 지가 공부만 잘하면 무슨 돈이 많이 든다든지 학비의 구애를 거의 안 받아요."

109촌 한인 타운의 옛 한인회 건물에서 사물놀이팀이 연습을 하고 있다.

30년 가까운 전통을 자랑하는 누리패 단원들이다.

1980년대 동포 1세들이 출범시킨 누리패는 1990년대 말부터 동포 2세들의 단체로 모습을 갖추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유엘리, 누리패 부팀장]
"우리 그룹을 보시면, 제 오빠.언니들이 있고 제 동생.친구들이 있어요. 일단 제일 오래된 분들은 몇 년 동안 벌써 하신 친구들이고 오빠고 언니고 그분들은 옛날부터 팀장이셨고 부팀장이셨고 그만큼 제일 막내인 임원들을 다 교육 시킨 선배들이에요."

전문지도자 없이 선배들의 가르침과 인터넷을 통해 익힌 것 치고는 대단한 실력이다.

요즘은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은 현지인들까지 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아르헨티나의 아마추어 댄스팀이 총출동했다.

한인 이민 50주년 기념 K-pop 경연대회 현장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연은 평생 잊지 못할 10대 시절의 추억이 된다.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는 사만타 파리아스 씨는 어려서 듣던 미국 보이 그룹의 노래를 추억하며 K-pop을 듣기 시작했다.

아시아 음악 전문 블로거로 활동하다 아예 시아팝 (Xiahpop)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하루 5천명이 방문하는 이 사이트는 중남미 각국의 한류 팬들이 직접 운영자로 참여해 한류 확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사만타 파리아스, 시아팝 (xiahpop.com) 운영자 "현재 홈페이지에는 25명의 운영자가 참여하고 있어요. 저와 동생은 관리자로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고 칠레, 스페인, 브라질, 에콰도르, 중남미의 편집자들이 있습니다. 멕시코 출신이 상당이 많고요."

한국 음식문화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현지 식당을 운영하는 하비에르 씨는 10년 전 뉴욕의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김치 맛에 반해 자신의 식당에서 그 맛을 재현했다.

배추를 절이고 숙성시키는 기본과정은 같지만 여름에는 망고, 겨울에는 사과를 양념으로 쓴다.

[하비에르 우론도, 우론도 바 대표]
"사실 김치를 한국식이 아닌 아르헨티나인 입맛에 맞게 담급니다. 저희는 마른 고춧가루보다 신선한 고추로 만드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한국 고추는 쓰지 않고 구하기 쉬운 할라피뇨 고추를 사용합니다."

네덜란드 출신인 처남과 함께 수백 번 실험한 끝에 그들만의 독특한 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코르 반 리어, 우론도 바 요리사]
"인터넷과 책을 보고 만들었죠. 김치에 대해선 5년 전부터 알았지만 어떻게 만드는지는 몰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한인 타운 근처에 있는 플로레스 대학교에서는 올해 2월부터 한국어 초.중급과정 특별강좌를 개설했다.

한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대학측은 아직까지 유럽언어 위주인 외국어 교육의 비중에 균형을 잡을 때가 왔다고 보고 있다.

[네스또르 블랑코, 플로레스 대학교 학장]
"중남미에 한국, 중국, 일본, 태국, 인도 등 아시아 각국의 커뮤니티가 확장되면서 아시아 지역과의 문화 정치 경제 교류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오늘은 한국 이민자들이 먼저 이민 온 아르헨띠노들에게 한턱내는 날이다.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지난 50년의 우정을 되새기고 앞으로의 50년을 기약한다. 포용의 땅 아르헨티나에 감사하고 한민족의 후예들이 이 땅의 번영을 이끄는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한다.

지난 반세기, 성공 신화를 써온 꼬르헨띠노의 이민 역사에 새 장이 시작됐다.

1965년 10월, 13가구 78명으로 시작한 아르헨티나 동포 인구는 현재 3만 명을 헤아린다.

4천3백만 아르헨티나 인구의 1%도 안 되는 숫자지만, 한인사회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단기간에 경제적 자립을 이뤘고 정치 문화 과학 분야의 인재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추종연, 주 아르헨티나 대사]
"우리 동포사회가 향후 50년 미래를 내다본다면 조금 더 투명하게, 이 나라 사회와 더불어 산다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사회활동에도 참여하고 문화 예술 활동도 넓혀가면서 우리의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한반도의 13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에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경제적 부침이 크긴 하지만 남미 대륙에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 중 하나다.

연간 곡물 생산량 1억 톤인 농업대국으로 공업국가인 우리나라와 상호 보완의 필요성이 높다.

지구 반대편의 두 나라를 이어주는 한인 동포들의 역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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