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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수환, 한국권투위원회 회장
[앵커]
권투를 잘 모르는 분들도 무하마드 알리를 전설의 복서, 영원한 챔피언으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단순히 권투를 잘해서만이 아닐 겁니다.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던 권투선수 알리를 회고해 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리틀 알리 또 전세계적인 리틀 알리로 유명한 분이죠. 한국권투위원회 홍수환 회장을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권투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회장님도 상심이 크셨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너무 아깝습니다. 조의를 표하고요. 저의 우상이었죠. 아니면 우리 세계 복서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앵커]
리틀 알리로도 많이 불리셨잖아요.
[인터뷰]
저는 그분의 원투를 흉내를 잘 내가지고 저도 74년도에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 그때 리틀 알리라는 별명을 제가 얻었었죠.
[앵커]
직접 무하마드 알리, 우상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를 직접 만나뵌 적이 있으신가요?
[인터뷰]
1970년도에 일본에서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사람하고 레슬링 선수인데 그 사람과 시합 끝나고 나서 대한민국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앵커]
한국에 왔었군요.
[인터뷰]
네, 그때 제가 봤었죠.
[앵커]
그때 무하마드 알리가 태권도 보여주고 그랬다고요?
[인터뷰]
그때 당시에 복싱에서 우리나라 태권도에 매료돼가지고 태권도 펀치를 복싱에 써봐야 되겠다고 해서 미국에 있으면서 태권도 복싱을 많이 배웠죠. 그래서 그때 제 기억으로는 이준기 태권도 회장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한국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무하마드 알리, 원래 이름이 캐시어스 클레이입니다. 미국에서 12살 때 권투에 입문했는데요. 권투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요?
[인터뷰]
제가 그분의 전기도 읽었습니다마는 자기 친구하고 영화를 봤었는데 그때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맡겨놓고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까 없어졌어요. 그래서 자전거가 없어졌는데 그때 순경이 하는 말이 경찰이 하는 말이 네가 주먹이 셌다면 네 자전거를 안 건들였을 것 아니냐.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주먹이 센 권투를 배워야 되겠다고 해서 이 권투를 배운 게 권투를 맨처음에 입문하게 된 동기라고 들었습니다.
[앵커]
자전거 도둑 혼내주려고 권투를 배우기 시작해서 이렇게 큰 선수가 됐다. 그리고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또 1964년 때 첫 챔피언이 되던 그 장면을 많은 분들이 잊지 못하실 것 같아요. 그때 당대 최고의 주먹이라고 불리던 소니 리스턴을 꺾었어요.
[인터뷰]
당대 캐시어스 클레이가 소니 리스턴을 이긴다는 거는 바위에 계란던지기 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앵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런데 클레이가 링을 자기 방 안방처럼 돌아다니면서 완전한 아웃복싱으로 소니 리스턴의 주먹을 무형화시켰어요.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앵커]
그때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그 녀석을 화성 너머 목성까지 날려버리겠다. 이 말과 함께 또 유명하게 남긴 말이 있었죠?
[인터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사실 그렇게 된 거죠.
[앵커]
실제 경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많이 연출이 됐다고 해요. 소니언 선수는 워낙 강주먹으로 유명해서 초반에 경기를 다 끝내는 패턴이었는데 계속 피하다가 6회 말부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고요? 그때 경기를 설명해 주시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6회전까지 정말 나비처럼 뛰면서 잽을 많이 날리면서 잘 시합을 이끌었는데.
[앵커]
그러면 상대의 체력이 많이 소진되겠어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데 6회전 끝에 가서, 6회전 초반전에 가서 눈을 못 뜨는... 우리 권투선수들이 몸에 바르는 기름이 있는데 그게 아마 눈에 들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걸 아주 어려운 고비를 6회전을 넘겼죠. 그것이 알리가 리스턴을 이기게 됐던 아주 정말 뭐라고 그럴까요, 극적인 동기였습니다.
[앵커]
그래서 7회 시작 전 TKO승.
[인터뷰]
못 일어났죠. 안 나왔습니다.
[앵커]
그래서 심판이 결국 알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리고 남긴 말이 또 유명해요. 나는 위대하다. 내가 왕이다. 알리가 좀 쇼맨십이 있었던 선수였나봐요?
[인터뷰]
사실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선수였지만 자기를 확실하게 나타낸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제껏 권투선수의 이미지를 무하마드 알리, 캐시어스 클레이로부터 바꿔버렸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있고 권투도 잘하고 그다음에 자기가 예언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로 몰아갔기 때문에 정말 TV 시청률을 가장 높인 권투선수의 주가를 무하마드 알리가 올려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앵커]
소니 리스턴을 꺾고 이변을 일으키면서 챔피언이 됐고 프로복서가 된 지 20년 동안 전적이 61전 56승 5패. 이거는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요?
[인터뷰]
그러면 10번 시합하면 8번이나 9번 이긴다는 승률이죠.
[앵커]
90% 이상. 실제로 이 정도의 전적을 가진 권투선수가 또 있습니까?
[인터뷰]
전승도 많습니다. 제가 본 무하마드 알리는 때릴 때도 멋있고 맞고 쓰러질 때도 참 멋있었어요. 그분의 몸 자체가 정말 멋있었던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앵커]
홍 회장님도 무하마드 알리의 대단한 팬이신 것 같은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알리에게 징집 영장이 날라옵니다. 베트남전에 참가하라고 영장이 날아왔는데 이걸 알리가 거부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무하마드 알리로서는 자기가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도 불구하고 켄터키 주에서 관세를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 그러니까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흑인이라고 멸시도 안 하는데 내가 왜 그들과 싸워야 되느냐. 내가 권투시합 끝나서 많이 번 돈, 국가에 내는 세금이 얼마인데 내가 우리를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할 이유가 없다고 해서 그래서 완강히 거부했죠.
[앵커]
그렇게 평화라는 신념을 지킨 대가로 찾아온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고요. 선수 자격도 정지됐고요. 실형 5년을 선고받기도 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것이 주마다 주법이 다르니까 주법에서 무하마드 알리의 시합을 인정하는 시합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조지 추발로나 백인 선수들을 상대로 권투시합을 했죠.
[앵커]
이렇게 법정에 불려다니다 보니까 3년 넘는 세월을 허송세월로 보내게 됐는데 알리는 결국 30대 가까이 접어들게 됐습니다. 권투선수에게 30대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죠?
[인터뷰]
글쎄요, 지금 알리가 돌아가신 나이, 70 이상으로 봐야 되겠죠. 권투선수로서 30대라면.
[앵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챔피언벨트를 가지고 왔고요 어떤 경기였죠?
[인터뷰]
그 사람이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것은 그 자이르의 킨샤샤에서 시합했던 그 당시 25살 조지 포먼을 32살의 알리가 8회전에 이기는 거죠. 기적입니다.
[앵커]
혈기 왕성한 권투선수로서는 70대라고 볼 수 있는 30대의 알리가 이겼다. 그것도 7회까지 버티다가 8회에. 어떤 경기였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조지 포먼을 무하마드 알리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하마드 알리의 뜻이 컸는지 그 킨샤사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링 줄이 너무 처진 거예요. 그건 고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로프 어 도프(Rope-a-Dope)라고 무하마드 알리하고 조지 포먼하고 시합할 때 링 줄이 너무나 처졌기 때문에.
[앵커]
그 정도로 거셌다.
[인터뷰]
여러분들이 보시면 그 링줄이 얼마나 처져 있는지. 헤비급 선수들이 어깨에 안 하고 허리에 와닿을 정도로 링 줄이 처져 있으니까 정말로 링 줄을 뒤로 피하면서 많은 조지 포먼의 주먹을 무력화할 수 있었죠. 그래서 로프 어 도프(Rope-a-Dope)라는 신생어도 생겼습니다마는.
[앵커]
어떤 거죠, 그게?
[인터뷰]
그러니까 링 줄이 팽팽하지 않고 처져 있으니까 얼마든지 뒤로 제쳐서 피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조지 포먼의 스태미나를 다 뺏었고 결국은 다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앵커]
홍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계속 알리의 경기장면이 화면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알리 하면 이렇게 링 위를 통통통 뛰어다니는 현란한 발동작 또 빠른 주먹이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직접 어떤 주먹을 쓰는지 한번 시범을 보여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보시고 계시지만 항상 자기는 스트레이트만큼 빠른 주먹은 없다. 보십시오. 댄싱 알리였어요. 정말 춤을 잘 추고 몸을 이렇게 뒤로 잘 제치고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오히려 저것이 위험한 복싱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러분이 지금 보시고 계시지만 저때의 링 줄을 보시면 이 헤비급 허리에 거의 와닿는 걸 보시죠. 저만큼 뭐라고 할까요. 알리에게는 유리한 링 줄이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이 말 딱 알리의 권투법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런 얘기가 많았죠. 또 알리가 이렇게 보통 권투선수들이 가드를 올리고 공격을 하는데 알리는 가드를 올리는 대신에 팔을 길게 늘어뜨렸어요. 한번 시범을 보여주시죠.
[인터뷰]
그러니까 팔을 늘여뜨렸지만 알리의 위대한 점은 뭐냐. 눈이 좋았다는 거예요.
[앵커]
가드를 올리지 않고 팔을 늘어뜨리고 상대를...
[인터뷰]
그만큼 눈이 빠르니까 오는 걸 다 피할 수 있었고 자기 그 상태에서 손을 때릴 수 있었고 아주 정말 획기적인 선수였죠.
[앵커]
그러니까 상대를 유인해서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게 한 다음에 길게 주먹을 치는 그런 권투법이군요.
[인터뷰]
너무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가드가 여기 있으면 여기서부터 거리를 잴 텐데 이렇게 내려와 있으니까 더 가까이 올 수 있죠. 그러나 팔 길이는 똑같으니까 다 맞힐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앵커]
또 복싱이 이렇게 스타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인파이터, 아웃복싱 이렇게 스타일 두 개로 나뉜다고 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고 알리는 어떤 유형의 선수였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인파이터의 대표적인 선수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타이슨 선수. 그런 선수는 파고 들어가는 선수고. 알리는 완전히 밖에서, 밖의 일만 보는.
[앵커]
거의 링 전체를 다 썼다고 해요, 알리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래서 타이슨 얘기를 하셨는데 핵주먹으로 불리는 타이슨과는 또 어떤 점이 달랐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타이슨은 들어가서 때리는 선수고 알리는 들어오는 선수를 때리는 선수인데 많은 분들이 타이슨이 이길까 알리가 이길까,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아마 알리를 맞히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홍 회장님은 어떤 스타일의 복서셨나요?
[인터뷰]
저는 원래 아마추어 아웃복싱 스타일이었는데요. 저는 아웃복싱을 하다가 찬스를 잡으면 들어가서 때리는 그걸 겸비한.
[앵커]
두 가지를 다 겸비한 훌륭한 선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많이 사랑받았던 알리가 은퇴를 한 뒤에 1996년에 애틀랜타올림픽 개막식 때 우리가 알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어요.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었는데요. 파킨슨병 때문이었죠?
[인터뷰]
그때 이미 파킨슨병, 그러니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이미 앓고 있었는데 유명한 의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조 프레이저하고 시합하고 나서부터 이미 알츠하이머병이 알리에게는 있었다.
[앵커]
그때가 복귀전이었잖아요. 조 프레이저 경기는.
[인터뷰]
그렇죠. 지고 나서 다시 이기고 그 시합도 지고 나서 이긴 거예요. 그런데 의사가 말씀을 하셨는데 알리의 주특기가 바로 아주 빠른 스피드였지만 그 병 기운이 이미 선수 생활할 때 있었기 때문에 점점 퇴보된 선수생활을 했다. 그래서 제가 같은 권투선수로서도 좀 안타까운 것이 뭐냐하면 너무나 선수들에게 매를 너무 많이 허용했어요. 여러분들이 헤비급 복싱 주먹 파워가 얼마냐, 이렇게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는 경량급이라 밴텀급이지만 헤비급은 2톤의 철강이 1m 위에서 떨어지는 위력입니다.
[앵커]
2톤의 철강이 내 몸으로 떨어진다.
[인터뷰]
그렇죠. 그만큼 이 주먹이 몸을 돌리면서 때릴 때는 엄청난 타격인데 그거를 무하마드 알리는 너무나 많이 허용을 했어요.
[앵커]
참아내고 또 이겨내고.
[인터뷰]
네. 그래서 그것이 알츠하이머병의 아주 더 나쁜 계기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그 병에 의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애틀랜타 올림픽 때 그때 미국에서 마지막 성화불을 붙이는 그 성화봉 주자로서 알리를 인정했을 때 참 같은 권투인으로서 행복했습니다.
[앵커]
알리가 흑인 차별 때문에 처음 로마올림픽에서 받았던 메달을 던졌는데 이때 또다시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알리의 그런 영웅으로서의 인식을 하게 됐다는 얘기도 저희가 알고 있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알리가 휠체어 탄 모습을 보면서 많은 권투팬들이 가슴 아파했는데요. 또 알리가 장애인들을 위해서 많은 좋은 일을 하기도 했다고요. 이후에는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뿐만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킹보다는 오히려 무하마드 알리의 저 씩씩한 몸으로 흑인을 대표하고 백인 선수를 이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정말로 많은 흑인들이 자기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정신적인 교훈을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을 겁니다.
[앵커]
앞서서 제가 알리의 본명이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했는데 이름을 바꿨어요, 무하마드 알리. 이것도 흑인 차별이랑 관련이 있죠?
[인터뷰]
그렇죠.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거는 그 클레이는 백인 주인의 노예라는 뜻이었대요. 그래서 캐시어스 클레이를 바꾼 이유가 뭐냐하면 자기가 로마올림픽 때 금메달을 따가지고 식당에서 받은 그 괄세 때문에 그때 흑인운동가에게 받은 감명 때문에 무하마드 알리. 즉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바꾸는 그런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바꾸는 그렇게 이름을 바꿨어요. 솔직히 여기에 왔을 때도 제발 클레이로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무하마드 알리로 불러달라.
[앵커]
그래서 알리가 더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인권수호가로서 또 평화 수호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알리가 앓았던 병이 파킨슨병인데요. 손목부터 시작해서 온 몸이 전체적으로 굳어가는 병이라고요? 어떻습니까? 알리의 투병하는 모습도 많이 지켜보셨다고요?
[인터뷰]
네, 제가 88년도 멕시코에서 마지막으로 본 무하마드 알리, 그분의 모습은 참 부자연스러웠어요.
[앵커]
거동이 아예 불편하신 거죠? 지금 화면에서도 나오고 있는데요.
[인터뷰]
제가 조금 약이 오른 게 그때 당시에 아주 인기 있었던 마이크 타이슨하고 돈 킹은 잘 챙겨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러다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한국 쪽이 더 아름답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한국 복싱 이야기, 끝으로 나와주셨으니까 해 보겠습니다. 지금 많이 한국 권투가 침체기라고 하는데요. 앞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한국권투위원회 회장님으로서 끝으로 한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 대한민국 복싱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체질, 체력, 체격이 우리 한국인들이 참 복싱을 잘 할 수 있는 체격입니다. 조금 침체되어 있는데 정말 거기에 하나 이렇게 좌절하지 않고 이럴수록 더 한국 복싱을 옛날의 인기대로 한번 그렇게 이끌어갈 그런 욕심이 있습니다.
[앵커]
홍수환 회장님 많이 응원해 주시고요. 저희도 매우 응원하겠습니다.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건 바로 꿈이다. 알리가 회고록에서 남긴 말이라고 하는데요. 전설의 복서 알리, 우리가 많이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권투위원회 홍수환 회장님과 함께 전설의 복서 알리를 추억해 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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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권투를 잘 모르는 분들도 무하마드 알리를 전설의 복서, 영원한 챔피언으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단순히 권투를 잘해서만이 아닐 겁니다. 무언가 특별함이 있었던 권투선수 알리를 회고해 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리틀 알리 또 전세계적인 리틀 알리로 유명한 분이죠. 한국권투위원회 홍수환 회장을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안녕하세요.
[앵커]
권투계의 큰 별이 졌습니다. 회장님도 상심이 크셨을 것 같은데요.
[인터뷰]
너무 아깝습니다. 조의를 표하고요. 저의 우상이었죠. 아니면 우리 세계 복서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앵커]
리틀 알리로도 많이 불리셨잖아요.
[인터뷰]
저는 그분의 원투를 흉내를 잘 내가지고 저도 74년도에 세계챔피언이 됐을 때 그때 리틀 알리라는 별명을 제가 얻었었죠.
[앵커]
직접 무하마드 알리, 우상이었던 무하마드 알리를 직접 만나뵌 적이 있으신가요?
[인터뷰]
1970년도에 일본에서 안토니오 이노키라는 사람하고 레슬링 선수인데 그 사람과 시합 끝나고 나서 대한민국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앵커]
한국에 왔었군요.
[인터뷰]
네, 그때 제가 봤었죠.
[앵커]
그때 무하마드 알리가 태권도 보여주고 그랬다고요?
[인터뷰]
그때 당시에 복싱에서 우리나라 태권도에 매료돼가지고 태권도 펀치를 복싱에 써봐야 되겠다고 해서 미국에 있으면서 태권도 복싱을 많이 배웠죠. 그래서 그때 제 기억으로는 이준기 태권도 회장님으로부터 초청을 받아서 우리나라에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한국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던 무하마드 알리, 원래 이름이 캐시어스 클레이입니다. 미국에서 12살 때 권투에 입문했는데요. 권투에 입문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요?
[인터뷰]
제가 그분의 전기도 읽었습니다마는 자기 친구하고 영화를 봤었는데 그때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 자전거를 맡겨놓고 들어갔는데 나와 보니까 없어졌어요. 그래서 자전거가 없어졌는데 그때 순경이 하는 말이 경찰이 하는 말이 네가 주먹이 셌다면 네 자전거를 안 건들였을 것 아니냐.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내가 주먹이 센 권투를 배워야 되겠다고 해서 이 권투를 배운 게 권투를 맨처음에 입문하게 된 동기라고 들었습니다.
[앵커]
자전거 도둑 혼내주려고 권투를 배우기 시작해서 이렇게 큰 선수가 됐다. 그리고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또 1964년 때 첫 챔피언이 되던 그 장면을 많은 분들이 잊지 못하실 것 같아요. 그때 당대 최고의 주먹이라고 불리던 소니 리스턴을 꺾었어요.
[인터뷰]
당대 캐시어스 클레이가 소니 리스턴을 이긴다는 거는 바위에 계란던지기 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앵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런데 클레이가 링을 자기 방 안방처럼 돌아다니면서 완전한 아웃복싱으로 소니 리스턴의 주먹을 무형화시켰어요.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앵커]
그때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그 녀석을 화성 너머 목성까지 날려버리겠다. 이 말과 함께 또 유명하게 남긴 말이 있었죠?
[인터뷰]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사실 그렇게 된 거죠.
[앵커]
실제 경기에서도 그런 장면이 많이 연출이 됐다고 해요. 소니언 선수는 워낙 강주먹으로 유명해서 초반에 경기를 다 끝내는 패턴이었는데 계속 피하다가 6회 말부터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고요? 그때 경기를 설명해 주시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6회전까지 정말 나비처럼 뛰면서 잽을 많이 날리면서 잘 시합을 이끌었는데.
[앵커]
그러면 상대의 체력이 많이 소진되겠어요?
[인터뷰]
그렇죠. 그런데 6회전 끝에 가서, 6회전 초반전에 가서 눈을 못 뜨는... 우리 권투선수들이 몸에 바르는 기름이 있는데 그게 아마 눈에 들어갔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걸 아주 어려운 고비를 6회전을 넘겼죠. 그것이 알리가 리스턴을 이기게 됐던 아주 정말 뭐라고 그럴까요, 극적인 동기였습니다.
[앵커]
그래서 7회 시작 전 TKO승.
[인터뷰]
못 일어났죠. 안 나왔습니다.
[앵커]
그래서 심판이 결국 알리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그리고 남긴 말이 또 유명해요. 나는 위대하다. 내가 왕이다. 알리가 좀 쇼맨십이 있었던 선수였나봐요?
[인터뷰]
사실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선수였지만 자기를 확실하게 나타낸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제껏 권투선수의 이미지를 무하마드 알리, 캐시어스 클레이로부터 바꿔버렸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있고 권투도 잘하고 그다음에 자기가 예언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로 몰아갔기 때문에 정말 TV 시청률을 가장 높인 권투선수의 주가를 무하마드 알리가 올려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앵커]
소니 리스턴을 꺾고 이변을 일으키면서 챔피언이 됐고 프로복서가 된 지 20년 동안 전적이 61전 56승 5패. 이거는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가요?
[인터뷰]
그러면 10번 시합하면 8번이나 9번 이긴다는 승률이죠.
[앵커]
90% 이상. 실제로 이 정도의 전적을 가진 권투선수가 또 있습니까?
[인터뷰]
전승도 많습니다. 제가 본 무하마드 알리는 때릴 때도 멋있고 맞고 쓰러질 때도 참 멋있었어요. 그분의 몸 자체가 정말 멋있었던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앵커]
홍 회장님도 무하마드 알리의 대단한 팬이신 것 같은데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알리에게 징집 영장이 날라옵니다. 베트남전에 참가하라고 영장이 날아왔는데 이걸 알리가 거부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무하마드 알리로서는 자기가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도 불구하고 켄터키 주에서 관세를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자기네들, 그러니까 베트남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흑인이라고 멸시도 안 하는데 내가 왜 그들과 싸워야 되느냐. 내가 권투시합 끝나서 많이 번 돈, 국가에 내는 세금이 얼마인데 내가 우리를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할 이유가 없다고 해서 그래서 완강히 거부했죠.
[앵커]
그렇게 평화라는 신념을 지킨 대가로 찾아온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고요. 선수 자격도 정지됐고요. 실형 5년을 선고받기도 했어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래서 미국이라는 것이 주마다 주법이 다르니까 주법에서 무하마드 알리의 시합을 인정하는 시합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조지 추발로나 백인 선수들을 상대로 권투시합을 했죠.
[앵커]
이렇게 법정에 불려다니다 보니까 3년 넘는 세월을 허송세월로 보내게 됐는데 알리는 결국 30대 가까이 접어들게 됐습니다. 권투선수에게 30대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죠?
[인터뷰]
글쎄요, 지금 알리가 돌아가신 나이, 70 이상으로 봐야 되겠죠. 권투선수로서 30대라면.
[앵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챔피언벨트를 가지고 왔고요 어떤 경기였죠?
[인터뷰]
그 사람이 다시 세계챔피언이 된 것은 그 자이르의 킨샤샤에서 시합했던 그 당시 25살 조지 포먼을 32살의 알리가 8회전에 이기는 거죠. 기적입니다.
[앵커]
혈기 왕성한 권투선수로서는 70대라고 볼 수 있는 30대의 알리가 이겼다. 그것도 7회까지 버티다가 8회에. 어떤 경기였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조지 포먼을 무하마드 알리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하마드 알리의 뜻이 컸는지 그 킨샤사에 단 하나밖에 없는 링 줄이 너무 처진 거예요. 그건 고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로프 어 도프(Rope-a-Dope)라고 무하마드 알리하고 조지 포먼하고 시합할 때 링 줄이 너무나 처졌기 때문에.
[앵커]
그 정도로 거셌다.
[인터뷰]
여러분들이 보시면 그 링줄이 얼마나 처져 있는지. 헤비급 선수들이 어깨에 안 하고 허리에 와닿을 정도로 링 줄이 처져 있으니까 정말로 링 줄을 뒤로 피하면서 많은 조지 포먼의 주먹을 무력화할 수 있었죠. 그래서 로프 어 도프(Rope-a-Dope)라는 신생어도 생겼습니다마는.
[앵커]
어떤 거죠, 그게?
[인터뷰]
그러니까 링 줄이 팽팽하지 않고 처져 있으니까 얼마든지 뒤로 제쳐서 피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조지 포먼의 스태미나를 다 뺏었고 결국은 다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는 영광을 가질 수 있었다.
[앵커]
홍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계속 알리의 경기장면이 화면으로 나가고 있었는데 알리 하면 이렇게 링 위를 통통통 뛰어다니는 현란한 발동작 또 빠른 주먹이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직접 어떤 주먹을 쓰는지 한번 시범을 보여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보시고 계시지만 항상 자기는 스트레이트만큼 빠른 주먹은 없다. 보십시오. 댄싱 알리였어요. 정말 춤을 잘 추고 몸을 이렇게 뒤로 잘 제치고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 볼 때는 오히려 저것이 위험한 복싱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러분이 지금 보시고 계시지만 저때의 링 줄을 보시면 이 헤비급 허리에 거의 와닿는 걸 보시죠. 저만큼 뭐라고 할까요. 알리에게는 유리한 링 줄이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이 말 딱 알리의 권투법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런 얘기가 많았죠. 또 알리가 이렇게 보통 권투선수들이 가드를 올리고 공격을 하는데 알리는 가드를 올리는 대신에 팔을 길게 늘어뜨렸어요. 한번 시범을 보여주시죠.
[인터뷰]
그러니까 팔을 늘여뜨렸지만 알리의 위대한 점은 뭐냐. 눈이 좋았다는 거예요.
[앵커]
가드를 올리지 않고 팔을 늘어뜨리고 상대를...
[인터뷰]
그만큼 눈이 빠르니까 오는 걸 다 피할 수 있었고 자기 그 상태에서 손을 때릴 수 있었고 아주 정말 획기적인 선수였죠.
[앵커]
그러니까 상대를 유인해서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게 한 다음에 길게 주먹을 치는 그런 권투법이군요.
[인터뷰]
너무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가드가 여기 있으면 여기서부터 거리를 잴 텐데 이렇게 내려와 있으니까 더 가까이 올 수 있죠. 그러나 팔 길이는 똑같으니까 다 맞힐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앵커]
또 복싱이 이렇게 스타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해요. 하나는 인파이터, 아웃복싱 이렇게 스타일 두 개로 나뉜다고 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고 알리는 어떤 유형의 선수였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인파이터의 대표적인 선수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타이슨 선수. 그런 선수는 파고 들어가는 선수고. 알리는 완전히 밖에서, 밖의 일만 보는.
[앵커]
거의 링 전체를 다 썼다고 해요, 알리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그래서 타이슨 얘기를 하셨는데 핵주먹으로 불리는 타이슨과는 또 어떤 점이 달랐나요?
[인터뷰]
그러니까 타이슨은 들어가서 때리는 선수고 알리는 들어오는 선수를 때리는 선수인데 많은 분들이 타이슨이 이길까 알리가 이길까,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아마 알리를 맞히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홍 회장님은 어떤 스타일의 복서셨나요?
[인터뷰]
저는 원래 아마추어 아웃복싱 스타일이었는데요. 저는 아웃복싱을 하다가 찬스를 잡으면 들어가서 때리는 그걸 겸비한.
[앵커]
두 가지를 다 겸비한 훌륭한 선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많이 사랑받았던 알리가 은퇴를 한 뒤에 1996년에 애틀랜타올림픽 개막식 때 우리가 알리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어요. 거동이 불편한 모습이었는데요. 파킨슨병 때문이었죠?
[인터뷰]
그때 이미 파킨슨병, 그러니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이미 앓고 있었는데 유명한 의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조 프레이저하고 시합하고 나서부터 이미 알츠하이머병이 알리에게는 있었다.
[앵커]
그때가 복귀전이었잖아요. 조 프레이저 경기는.
[인터뷰]
그렇죠. 지고 나서 다시 이기고 그 시합도 지고 나서 이긴 거예요. 그런데 의사가 말씀을 하셨는데 알리의 주특기가 바로 아주 빠른 스피드였지만 그 병 기운이 이미 선수 생활할 때 있었기 때문에 점점 퇴보된 선수생활을 했다. 그래서 제가 같은 권투선수로서도 좀 안타까운 것이 뭐냐하면 너무나 선수들에게 매를 너무 많이 허용했어요. 여러분들이 헤비급 복싱 주먹 파워가 얼마냐, 이렇게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은데 우리는 경량급이라 밴텀급이지만 헤비급은 2톤의 철강이 1m 위에서 떨어지는 위력입니다.
[앵커]
2톤의 철강이 내 몸으로 떨어진다.
[인터뷰]
그렇죠. 그만큼 이 주먹이 몸을 돌리면서 때릴 때는 엄청난 타격인데 그거를 무하마드 알리는 너무나 많이 허용을 했어요.
[앵커]
참아내고 또 이겨내고.
[인터뷰]
네. 그래서 그것이 알츠하이머병의 아주 더 나쁜 계기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그 병에 의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애틀랜타 올림픽 때 그때 미국에서 마지막 성화불을 붙이는 그 성화봉 주자로서 알리를 인정했을 때 참 같은 권투인으로서 행복했습니다.
[앵커]
알리가 흑인 차별 때문에 처음 로마올림픽에서 받았던 메달을 던졌는데 이때 또다시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알리의 그런 영웅으로서의 인식을 하게 됐다는 얘기도 저희가 알고 있고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알리가 휠체어 탄 모습을 보면서 많은 권투팬들이 가슴 아파했는데요. 또 알리가 장애인들을 위해서 많은 좋은 일을 하기도 했다고요. 이후에는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그리고 장애인뿐만 아니라 무하마드 알리,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킹보다는 오히려 무하마드 알리의 저 씩씩한 몸으로 흑인을 대표하고 백인 선수를 이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정말로 많은 흑인들이 자기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정신적인 교훈을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을 겁니다.
[앵커]
앞서서 제가 알리의 본명이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했는데 이름을 바꿨어요, 무하마드 알리. 이것도 흑인 차별이랑 관련이 있죠?
[인터뷰]
그렇죠.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거는 그 클레이는 백인 주인의 노예라는 뜻이었대요. 그래서 캐시어스 클레이를 바꾼 이유가 뭐냐하면 자기가 로마올림픽 때 금메달을 따가지고 식당에서 받은 그 괄세 때문에 그때 흑인운동가에게 받은 감명 때문에 무하마드 알리. 즉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바꾸는 그런 캐시어스 클레이에서 무하마드 알리로 바꾸는 그렇게 이름을 바꿨어요. 솔직히 여기에 왔을 때도 제발 클레이로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무하마드 알리로 불러달라.
[앵커]
그래서 알리가 더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인권수호가로서 또 평화 수호자로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알리가 앓았던 병이 파킨슨병인데요. 손목부터 시작해서 온 몸이 전체적으로 굳어가는 병이라고요? 어떻습니까? 알리의 투병하는 모습도 많이 지켜보셨다고요?
[인터뷰]
네, 제가 88년도 멕시코에서 마지막으로 본 무하마드 알리, 그분의 모습은 참 부자연스러웠어요.
[앵커]
거동이 아예 불편하신 거죠? 지금 화면에서도 나오고 있는데요.
[인터뷰]
제가 조금 약이 오른 게 그때 당시에 아주 인기 있었던 마이크 타이슨하고 돈 킹은 잘 챙겨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러다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한국 쪽이 더 아름답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한국 복싱 이야기, 끝으로 나와주셨으니까 해 보겠습니다. 지금 많이 한국 권투가 침체기라고 하는데요. 앞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한국권투위원회 회장님으로서 끝으로 한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터뷰]
우리나라 대한민국 복싱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체질, 체력, 체격이 우리 한국인들이 참 복싱을 잘 할 수 있는 체격입니다. 조금 침체되어 있는데 정말 거기에 하나 이렇게 좌절하지 않고 이럴수록 더 한국 복싱을 옛날의 인기대로 한번 그렇게 이끌어갈 그런 욕심이 있습니다.
[앵커]
홍수환 회장님 많이 응원해 주시고요. 저희도 매우 응원하겠습니다.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건 바로 꿈이다. 알리가 회고록에서 남긴 말이라고 하는데요. 전설의 복서 알리, 우리가 많이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권투위원회 홍수환 회장님과 함께 전설의 복서 알리를 추억해 봤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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