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은 일제시대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이야기" [YTN FM]

"'친일인명사전'은 일제시대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이야기" [YTN FM]

2009.11.04. 오전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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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은 일제시대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이야기" -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YTN FM '강성옥의 출발 새아침' (오전 06:00~08:00)

강성옥 앵커 ( 이하 앵커 ) : 민족문제연구소가 8년 동안 편찬작업을 진행한 '친일인명사전'이 오는 8일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손들의 이름을 빼 달라는 가처분 신청이 잇따르고 있는데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의 후손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습니다. 이 외에도 이번 '친일인명사전'에는 다수의 유명 인사들이 포함돼 있어서 발간 이후에도 더욱 큰 논란이 예상되고 있는데요,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연결해서 이야기 듣겠습니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 이하 박한용 ) : 네, 안녕하세요?

앵커 : 네, 반갑습니다. 먼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문제를 좀 짚어봤으면 하는데요, 이번에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등재하기로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박한용 : 잘 아시다시피 저희 사전에는 수록 기준과 수록 자격이 있습니다. 일본군, 또는 만주국 출신의 위관 이상의 장교가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예비역 소위, 그리고 만주국 중위로 근무했습니다. 여기에 따른 수록 기준에 의해서 수록이 되었습니다.

앵커 :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지만 씨는 박 전 대통령이 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적이 없고요,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엄연한 별도의 만주국 만주군대에 근무했기 때문에 친일 인사로 이름을 등재하는 것은 안 된다, 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이 같은 주장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박한용 : 예, 사실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일본, 또는 만주국의 직업 군인이 된다는 점은 한 마디로 얘기해서 자발적이고 확신에 찬 자기 선택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나 장교가 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직업군인으로 간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그러한 이익을 위해서 군인으로서 복무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군인이라서 그에 따른 어떠한 근무나 어떠한 직책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굳이 생계 이전에 그러한 선택 자체가 중요한 핵심 행위라고 말 할 수가 있겠고요, 두 번째, 만주군이기 때문에 이를 빼내는 것은 도저히 학계에서 수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만주국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괴뢰정권이었고요, 만주군 또한 일본 괴뢰정권 겸 하수인이었습니다. 오히려 만주나 이런 쪽은 독립운동가들도 더 많았고,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무하던 30년대 말이나 40년대의 경우에는 만주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함께 연합군으로 함께 싸웠던 곳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 자체에서 연합군에 대한 적대행위는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포함이 되겠죠?

앵커 : 지만 씨 측은 또 한 가지요, 전체적으로 조국에 이바지한 것은 고려하지 않고 사소한 행적을 가지고 친일인사로 규정하는 것은 이건 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라는 주장을 하던데요.

☎ 박한용 : 그러나 우리가 이번의 '친일인명사전'은 바로 어떠한 한 인물이 일제 식민지시대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이야기지 해방 이후라든지 그 평생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삶 자체는 그 내용대로 나오겠지만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한 이야기이고, 해방된 이후에는 그것이 과거의 친일을 반성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도 있고, 더 나쁘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과정에서 우리가 평가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방 고유의 과정을 가지고서 일제 식민지라는 사실까지 고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앵커 : 또 한 가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항일 논설로 유명한 언론인, 위암 장지연도 포함이 됐는데요, 이유가 무엇입니까?

☎ 박한용 : 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위암 장지연 선생의 경우에는 1910년부터 매일신보에 객원 논설위원으로서 활동을 했습니다. 다수의 친일시하고 친일 논설을 주로 썼습니다. 불과 1년에서 2~3년 만에 바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항일 논설에서 친일 논설로 바뀌게 됐고, 그러한 잘못이 적지 않기 때문에 수록이 되었습니다.

앵커 : 그러니까 장지연이 1905년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대표적인 항일 논설을 썼지만 그 이후에 이토 히로부미 추모시, 일왕 메이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시 등을 개재하는 등, 논설의 내용이 좀 바뀌었다, 이렇게 보고 계시는 거죠?

☎ 박한용 : 예, 그렇죠.

앵커 : 하지만 지금 제가 말씀을 드렸던 일왕 메이지의 생일 축하시, 또 일본 총독 관련시가 일종의 반어법을 쓴 것이다, 이렇게 후손들이 주장하고 있는데요.

☎ 박한용 : 예, 물론, 문학작품이라는 것은 해석하기 나름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말한 천장절, 즉 일본 메이지의 생일에 관한 시는 본인이 직접 썼다고 얘기할 수는 없고요, 그것은 신문 자체를 집필할 때, 그러한 대단히 친일적 시가 나올 수 있었던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하고, 그러한 신문에 몸담았다는 것도 있고, 매일신보는 조선총독 기관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항일 언론에서 뛰어났던 분이 바로 불과 몇 년 뒤에 일제의 조선총독 기관지에서 대표적인 논설가로서 나온다는 것도 사실은 대단히 부적절하고, 무엇보다도 매일신보에 실은 그 분의 시하고 산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산문으로서 친일도 많고, 이번에 말한 친일시의 경우에는 시는 전체적으로 다 같이 있는데 전체적으로 친일시이고, 일본의 바로 하세다 총독, 3.1운동 때, 탄압했던 총독이죠. 그에 대한 부임을 찬양하는 이런 시들이 있는데 전체적인 친일시들 가운데 왜 그것만 유독, 단 한 편만 반어법으로 얘기해서, 예를 들면 10편 중에 9편이 친일시인데 그 중 한 편만 친일시가 아니라고 굳이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해서. 자연스럽게 해석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일제의 통치를 찬양하고 총독의 업적을 치하하는 것입니다.

앵커 : 예, 이 밖에도 우리가 평소에 애국자로 알고 있던 여러 인물과 유명 인사들도 이번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됐는데요, 주로 어떤 인물들이 등재가 됐습니까?

☎ 박한용 : 이번 인명사전의 가장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 사회 각 분야에서 존경받는 교과서에 실렸던 인물들, 이러한 분들이 상당수가 실렸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까운 게 또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음악에서의 홍난파나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님이라든지, 또 문학에서는 너무 대표적인 이광수나 김동인, ‘국경의 밤’을 지은 김동환이라든지, 또 그 다음에 정치적으로서는 뭐 지금은 다릅니다만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 이런 식으로 해서 사실 각 분야마다 저희가 만든 명단을 나중에 한 번 보시면 너무나도 많아서 손에 꼽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앵커 :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사람들도 많이 포함됐다고 하더군요.

☎ 박한용 : 예.

앵커 : 모두 몇 명 정도나 해당이 되는 겁니까?

☎ 박한용 : 저희들이, 보훈처의 경우에는 완전히 서훈이 끝난 경우는 명단을 공개하지만 중간에 있는 과정은 공개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최근에 또 저희도 모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원을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 다만 저희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다시 검토를 하고 있지만 적어도 10여 분에서 20여 분 사이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부분은 저희들이 아마 따로 구체적으로 사전이 출판, 보고될 때 저희들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 그러면 이 분들의 독립 유공자 지정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취소해야 되는 겁니까?

☎ 박한용 : 예, 현재로서 보면 우리나라 서훈규정에는, 예를 들어서 선 친일을 하다가, 먼저 친일을 하다가 후에 항일을 한 경우에는 개과천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경우에는 서훈이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선 항일, 먼저 항일하다가 후 친일 한 경우에는 서훈이 취소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중에서 친일파로서 악랄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부적절하고 흠결사항이 있는 경우도 서훈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저희들이 사전에 나온 명단에서 독립 유공자들의 경우에는 관계기관에서 적절히 검토해 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 이번에 발간 예정인 인명사전의 분량은 모두 어느 정도나 되는 겁니까?

☎ 박한용 : 가나다라 순으로 총 3권인데 합쳐서 약 2,800페이지 정도 됩니다.

앵커 : 모두 몇 명의 이름이 등재되는 겁니까?

☎ 박한용 : 약 4,370여 명으로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앵커 : 예, 향후 추가적으로 또 발간할 계획은 있는 겁니까?

☎ 박한용 : 예, 현재 사실은 이번에도 많이 빠져 있습니다. 지방의 유력한 친일파라든지 해외 친일파들의 경우에는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 포함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이 좀 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이번에 명단에 선정되었지만 보류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들이 가급적이면 빠진 사람들에 대한 보류와 추가 조사에 따른 추가 수록 같은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그러한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 예, 편찬 기간이 8년으로 상당히 길었는데요, 작업에 참여한 분들이 상당히 많으실 것 같고요, 또 엄청난 자료를 검토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땠습니까?

☎ 박한용 : 예, 사실 편찬위원회가 만들어진 것은 8년이 됐고,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된 지 18년이 됩니다. 그 사이에 많은 분들이 참여했지만 그 이름을 다 말할 수 없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집필진, 친일사전 편찬 위원들이 한 150명이고, 집필에 참여하신 분이 180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학계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앵커 : 예, 참고자료의 분량만도 엄청나겠죠?

☎ 박한용 : 예, 참고자료만 하더라도 사실은 작은 책 한 권 정도 됩니다. 목록만.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관한 정보가 약 25만 개 정도가 됩니다. 25만 개를 취합해서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앵커 : 지금도 연구소 활동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보는 시각이 적지 않은데요, 활동하는데 겪는 어려움이 많으시죠?

☎ 박한용 : 사실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해방 직후라든지 아니면 이승만 정권 초기에 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때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60년대에 우리가 돌아가신 친일파는 물론이고, 그 후손 분들하고, 60년대에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자체가 과거가 청산이 안 된 것인데, 마땅히 이러한 일이 사실 필요한 일이라고 격려하는 분들도 많지만 안타깝게도 전화로 대단히 강압적인 표현을 하시거나, 또는 법적인 소송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또 심지어는 폭언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 자체는 사실은 친일 청산조차 힘든 오늘날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앵커 : 예, 실장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 박한용 : 예, 고맙습니다.

앵커 :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연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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