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기업 '신호등 입찰', 울며 겨자 먹는 사람들

단독 대기업 '신호등 입찰', 울며 겨자 먹는 사람들

2017.05.24. 오전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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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 재벌 계열의 대규모 물류회사가 이른바 '신호등 입찰' 방식으로 업체에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운송계약 체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불만 제기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 물류회사의 지분 상당수는 소유주 재벌 4세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병용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기자]
한 물류 단체에 접수된 회원사들의 피해 호소 사례입니다.

LG그룹 계열 물류회사인 '판토스'의 과도한 운송료 인하 요구에 대해 '갑의 횡포'라는 불만으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문제는 이른바 '신호등 입찰'입니다.

입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참여 업체들이 제시한 운송료의 등급을 미리 알려줘 압박하는 방식입니다.

판토스가 원하는 운송료보다 낮으면 초록색을 주고, 비슷하면 빨간색, 높으면 검은색으로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물량을 따내야 하는 입찰 참여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로 낮은 가격을 써낼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어렵게 계약을 따내도 계약 내용이 언제든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는 운임뿐 아니라 기간과 물량을 계약서에 쓰는 게 국제적인 관례지만, 판토스가 체결한 계약서에는 달랑 운임만 적혀 있는 경우도 발견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판토스는 계약 기간과 물량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손쉽게 뜯어고쳤다는 주장입니다.

[중소 물류업체 관계자 : 판토스는 우리나라 해상 수출입 물동량의 15%를 차지하고 있는 재벌기업의 물류 자회사입니다. (중소 물류업체들은) 불합리한 입찰에 응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한국선주협회 관계자 :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아예 거래를 끊어버리니까 (중소 물류업체들은) 함부로 얘기를 못 합니다. '갑질' 당하는 '을'들이 자기 입으로 얘기를 못 꺼내요.]

이렇게 얻은 이득의 상당액은 총수 4세들에게 배당으로 돌아갔습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남으로 그룹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는 (주)LG 구광모 상무 등 4세 5명이 판토스의 지분 20%가량을 소유한 주요 주주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 회사를 계열사로 편입한 뒤 지난해에만 배당금으로 20억 원가량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판토스 측은 강제적으로 운임을 낮추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판토스 관계자 : 글로벌 시장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입찰 방식입니다. 입찰 참여 업체들의 담합 방지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강합니다.]

또 국내 선사에 물량을 주려고 노력해 왔고, 주주들의 배당 규모 역시 다른 기업과 비교해 많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YTN 김병용[kimby1020@ytn.co.kr]입니다.

[앵커]
LG뿐 아니라 상당수 대기업은 물류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는데요.

주요 주주들이 재벌 3세와 4세들이어서 경영권 승계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김세호 기자입니다.

[기자]
국내 주요 그룹이 계열사로 둔 물류회사 현황입니다.

현대글로비스는 현대차그룹 계열사들로부터 물류업무의 상당 부분을 위탁받고 있고, LG상사에 편입된 판토스는 그룹 주요 계열사의 해외 물류를 맡고 있습니다.

또 롯데와 GS, 한화, 대림, 동국제강도 물류업체를 계열사로 두고 있습니다.

판매량 등 영업비밀의 외부 노출을 막고 물류비용을 아끼기 위한 것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들 물류업체의 주요 주주는 총수와 그 자제들입니다.

현대글로비스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부자가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고, 한익스프레스는 김승연 한화 회장의 누나인 김영혜 씨와 아들 이석환 씨가 절반가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운전기사 '갑의 횡포' 논란을 부른 이해욱 부회장과 아버지 이준용 명예회장은 대림그룹 물류사의 지분 90%를,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부인과 아들도 그룹 물류사의 주주 명단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대기업들이 물류회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특히 궁극적으로는 회사 몸집을 불려 배당을 통해 종잣돈을 마련한 뒤 경영권 승계에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오일선 / 한국2만기업연구소 소장 : 총수 일가는 그룹 내 알짜사업인 물류회사에 대한 높은 지분을 보유하고 일감 몰아주기로 많은 이득을 얻고 있습니다. 이는 승계를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국내 물류산업이 골고루 성장하는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황진회 /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운산업연구실장 : '2자 물류'(관계사 물류를 주로 취급하는 형태)가 득세하다 보니 '3자 물류'(전문업체에 위탁하는 형태) 성장이 저해되고 있습니다. 국내 물류시장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기업 물류업체의 그룹 의존도를 줄이고, 협력업체에 대한 '갑의 횡포'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대기업 계열 물류회사들의 저가입찰 강요가 하도급법 위반일 가능성이 크다며 필요할 경우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혔습니다.

YTN 김세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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