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 역사 속으로 ②

'거산' 김영삼 전 대통령, 역사 속으로 ②

2015.11.26. 오후 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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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궂은 날씨 속에서도 엄숙한 분위기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국가장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모습을 저희가 계속해서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안장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운구차량과 유족들을 태운 그리고 조문객들을 태운 대형버스까지 완전히 정차를 하고 준비가 되면 안장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개식 선언을 시작으로 해서 안장식이 진행이 될 예정입니다.

[앵커]
가족이 2남 3년이지 않습니까. 장남인 은철 씨가 오늘 참석을 했죠. 현철 씨가 주로 상주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기자]
그렇습니다. 특히 은철 씨 같은 경우는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얼굴이 드러났고.

[앵커]
국내에 머물고 있습니까?

[기자]
현재는 국내에 머물고 있죠. 원래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것으로 알고 있고요. 아까 영결식 때도 보면 표정이 상당히 무표정으로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아보이기는 하더라고요.

[앵커]
까만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 그것도 건강상의 이유로 착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태극기에 쌓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관이 운구차에서 나오기 직전입니다.

[앵커]
봉송이라는 단계인데요. 안장식장 주차장에서 제단으로 옮기는 모습입니다. 천천히 운구차량에서 유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자]
차남 김현철 씨 같은 경우는 아까 영결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관련 영상이 나오고 이런 게 나왔을 때, 그 이후에 특히 오열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앵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안장식이 거행되고 있습니다.

[기자]
김현철 씨 같은 경우는 김영삼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 동지 역할을 했던 거거든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도 전략을 짠다든지 인적 구성을 꾸린다든지 할 때 상당히 역할을 했었고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상당히 많이 조력을 했습니다마는 결국은 마지막에 비리에 연루돼서 대통령 아들로는 처음으로 영어의 몸이 되는, 그런 수모를 겪기도 했었는데요.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정치적 역정이 현재의 여당에서 또 지난 대선 과정에서는 야당 문재인 대표를 지지하는 그런 것도 있었고요. 지난해 재보선에서 동작에서 출마하는 준비하는 그런 모습도 있었죠.

[앵커]
의장대가 지금 봉송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앵커]
군악대의 조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국가장 마지막 순서, 안장식이 잠시 후에 거행되겠습니다.

[인터뷰]
전직 대통령 묘역, 이런 것은 해외에서는 관광 상품이기도 하거든요. 유명한 대통령의 묘지다 하면 거기를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앞으로 우리가 제도화하고 잘 가꾸고 또 시민들이, 국민들이 접근할 수도 있게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냥 멀리 구중궁궐에 있어서 접근이 안 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와서 여기가 어디다, 좀 가까이 갈 수 있게.

[인터뷰]
홍 의원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제가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한번 가봤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혁명열사묘를 가봤는데요. 다 달라요, 우리 현충원하고. 세 군데가 느낌이 달라요. 야스쿠니 신사를 가면 사람 머리카락까지 흥분시키는 약간 그런 묘한 느낌이 있어요.

대동아전쟁을 찬송한다든지. 그런데 중국 혁명의사묘를 가면 열사들의 생전에 책을 좋아하면 책을 보는 모습을 한다든지 그래서 사람들이 저분이 생전에 저렇게 살았구나, 이걸 느끼게 할 수 있는데 우리 동작동 현충원을 가면 너무 음습하고 기가 죽는 이런 분위기가 됩니다. 그런 부분은 앞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
관리하는 방법을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앵커]
유족과 조문객 등 모두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지금 안장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지금은 안장식장 주차장에서 제단까지 운구를 이동하는 봉송 단계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잠시 뒤에 안장식 개식선언을 시작으로 고인에 대한 경례와 헌화 및 분향 그리고 묘소 예정지까지 다시 운구를 하는 과정들이 진행이 될 예정입니다.

오늘 안장식은 최고의 예우를 갖춰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오전에 서울대병원 빈소를 출발해서 국회의사당에서 오후 2시부터 영결식을 진행을 하고 그리고 상도동 사저를 들른 뒤 지금 국립현충원에 도착해서 안장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추모객들, 조문객들의 애도와 함께 안장식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국가장을 이번에 처음으로 하게 되는데 저런 의식의 순서라든가 내용, 이런 것들을 저런 것도 세계 시민들이 다 쳐다보고 있잖아요. 한국적인 위엄과 특징을 잘 갖추고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데 현재까지는 굉장히 엄숙한 분위기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대통령께서 돌아가시면 육체의 죽음은 슬퍼하지만 저승에서의 새로운 출발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를 재미있게 하면서 한국의 전통사상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돼야죠. 그게 문화의 창달이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이 전해졌을 때 외신들도 많은 관심들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아마 오늘 첫 국가장의 모습도 많은 세계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
국격에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묘지를 어떻게 하고 이전을 어떻게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우리가 이렇게 잘 살게 되고 발전하게 된 것은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과를 자꾸 부각시켜서 폄하하고, 어떻게 보면 거덜내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런 풍토를 긍정적으로 방향으로. 그래서 우리 김영삼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해서 우리 지도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되고 역사적인 교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마지막 행사가 지금 진행이 되고 있는데요. 5일 동안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이 3만 6000명. 그리고 국회, 서울 광장 등 전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은 추모객을 합하면 15만명 정도가 애도를 했다고 그래요.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 시민들이 가장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대통령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여러 가지 말씀이나 억양이나 또는 다른 행동, 이런 것을 통해서 약간 허점 같은 것도 보여주면서 유머를 많이 생산해냈잖아요.

YS는 못말려 하는 유머집까지 나올 정도로 그런 것들이 오히려 인간적인 면모로 국민들한테 다가올 수가 있었고 그래서 대통령에 대해서 친근감을 느끼고 그래서 사랑을 받는 거잖아요.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 같은 사람도 통일 과정에 있었던 큰 업적을 남겼지만 많은 유머를 남겼습니다. 거구로부터 비롯되는. 그래서 정치인이 국민들과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생각이 들고. 그런 분 중의 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직관과 통찰력, 이런 부분에서 아주 뛰어난 대통령이다 보니까 어록들이 많은 거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김영삼 전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빅데이터를 찾아보니까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조깅이랍니다. 그다음 두 번째가 칼국수. 조깅, 칼국수 그리고 마지막이 닭이랍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79년에 의원직 제명당하면서 성명서에서 이렇게 얘기했다는 거 아닙니까. 일반인이 느끼기에는 이런 것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거니까. 결국 그만큼 친근함을 주는 대통령인 것이고. 김영삼 대통령이 지금까지 해 왔던 업적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게 사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저렇거 보면 공이 70%, 과가 한 30% 정도 이렇게 되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사실 김영삼 대통령이 했던 업적은 지금 생각했을 때는 놀라운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나회 척결이라든지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실시한 것이라든지 공직자 재산공개한 거라든지 지방자치 부활, 이런 것이 하나하나 큰 업적인데 IMF를 맞았다는 것 때문에 그런 업적들이 다 가려버렸죠. 그런데 아까 의원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IMF는 그 당시 한국 사회의 부조리나 불합리가 총체적으로 모여서 IMF를 맞은 것이고 그당시에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IMF 비슷한 환란을 겪었었거든요. 그 이후에 우리가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을 했고 IMF를 통해서 한국 경제와 사회가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됐거든요, 많은 고통을 겪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런 면에서는 높이 평가할 부분이 많다...

[앵커]
안장식이 시작되겠습니다.

[인터뷰]
희망을 준 대통령. 대한민국 민주헌정사에 영원히 빛나실 고 김영삼 대통령님의 안장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먼저 고인에 대한 경례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을 향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인께 대하여 경례. 바로.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헌화 및 분향이 있겠습니다. 헌화병 입장. 먼저 유가족들께서 함께 나오셔서 참배드리겠습니다. 헌화 및 분향은 유가족 대표께서 하시겠습니다.

[앵커]
고인에게 예를 갖추는 헌화 및 분향 순서입니다.

[인터뷰]
유가족들께서도 뒤에 함께 서셔서 참배 드리겠습니다.

[앵커]
손명순 여사의 모습은 여기서는 보이지 않군요. 현철 씨가 대표로 헌화하는 모습입니다.

[기자]
상당히 건강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1시간 반 정도 되는 영결식에 계시기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앵커]
영결식은 아까 참석을 하셨지만 발인 예배는 참석하지 못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고령에 몸이 좋지 않다고 하죠.

[앵커]
유족 대표의 헌화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다음 조문객 대표들께서 함께 나오셔서 참배드리겠습니다. 헌화, 분향은 정의화 국회의장께서 대표로 하시겠습니다.

[앵커]
다음은 조문객 대표의 헌화 및 분향입니다.

[기자]
정의화 국회의장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인 거죠.

[인터뷰]
이번에 독일 정부 초청으로 독일을 갔다가 일정을 중단하고 돌아왔습니다.

[앵커]
정의화 국회의장이 조문객 대표로 헌화와 분향을 했습니다.

[앵커]
안장식에는 유족 125명, 조문객 125명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250명이 참석을 했고요.

[인터뷰]
다음은 정부 대표들께서 함께 나오셔서 참배드리겠습니다. 헌화, 분향은 정종섭 장례집행위원장께서 대표로 하시겠습니다.

[기자]
안장식에 참석한 정치인들 보면 상도동계뿐만 아니라 동교동계, 권노갑 고문도 보이시고요. 한광옥 위원장도 보이고요.

[앵커]
이번에 상도동계과 동교동계가 서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김대중 대통령때도 그렇게 했다면서요? 빈소를 지키고 상주처럼 서로 했다면서요.

[인터뷰]
그래서 이런 분위기를 여야 정치권이 잘 지켜나가야 될 텐데 특히 야당에서 잘 확산될 수 있도록.

[인터뷰]
야당은 지금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앵커]
정종섭 장관은 지난 번에 사의를 표명했는데 수리가 안 돼서 행자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계시죠. 장례집행위원장이십니다, 정종섭 장관.

[인터뷰]
이상으로 헌화 및 분향을 마치겠습니다. 다음은 운구가 있겠습니다. 운구는 국방부 의장대 장병들이 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앵커]
이제 헌화 및 분향에 이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안장식 이제 영면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앵커]
안장식이 진행된 제단에서 묘소 예정지로 운구가 됩니다. 이 뒤를 상주와 유족들이 운구행렬을 뒤따르게 됩니다.

[앵커]
군 의장대가 묘소 예정지로 운구를 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한 40~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터뷰]
저기 관을 들고 운반하는 군인들은 지금 육해공이 다 모여서 하는 거죠. 운구 시작.

[앵커]
묘역에 도착하게 되면 간단한 예배를 보고 그리고 하관을 하게 되죠.

[기자]
그렇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예배는 수원중앙침례교의 고명진 목사가 집전하게 되는데요. 예배 시간은 20여 분 될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앵커]
대통령의 묘역 규모와 봉분 그리고 묘비 크기 등 모두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에 따라 정해지게 되는데 역대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이번에 만들어졌죠?

[기자]
그런 것으로 알고 있고요. 지금 현재 국립현충원에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 이렇게 안장이 되어 있고요. 그리고 대전 국립현충원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 묘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윤보선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고향인 충남 아산에 안치를 했고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시다시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안장이 되어 있는데. 원래는 대통령 묘역이 대전 국립현충원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원래는 묻히는 것이 순리인데 본인이 원할 경우에는 다른 곳에 묻힐 수 있는 게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윤보선 대통령 이야기인데요. 그분은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풍수를 굉장히 신봉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선양을 명당으로 생각하셔서 일부러 거기로 가셨습니다. 저는 그것도 하나의 좋은, 왜냐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고 많은 사람이 거기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윤보선 대통령의 고향이 여기구나, 이것도 하나의 좋은 참배이면서 관광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김영섬 전 대통령은 어떻게 보면 서울현충원이 상도동 자택과 가깝기 때문에 더 의미를 담고 있어서 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인터뷰]
저는 개인적으로 거제도 생가 거기가 참 좋습니다. 군기호란인데. 거기로 가셨다면 거제도가 또 하나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는데 아마 자택과 굉장히 가까운 것 같아요. 아마 그래서 선호하셨던 것 같습니다.

[앵커]
거제 생가도 기념관처럼 운영이 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찾을 수 있는 그런 장소이기도 하죠. 한걸음 한걸음 정성을 다해서 운구를 하고 있습니다.

[앵커]
국립서울현충원에도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낮부터 시작한 흰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뿌리고 있고요. 조명을 좀 밝혀놨죠.

[앵커]
지금 예정 시각보다 한 20분 넘게 지연이 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덧 현충원은 어둠이 깔리고 있습니다. 대통령 묘역에는 위에 무궁화가 그려진 나무판이 덮여지게 되죠?

[인터뷰]
가문의 전통에 따라 달라지는데요.

[앵커]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영결식장에서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그래요.

[인터뷰]
참 고단한 생애이면서 또 영광된 삶을 살았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은 그런 지도자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사에서 그런 얘기를 했죠.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하셨는데 그만큼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워낙 번민과 고뇌가 많은 자리다 보니까 더군다나 임기 말에 IMF를 겪었고 아들, 측근비리라든지 이런 것이 터지면서 아마 상당히 충격과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앵커]
영면에 들기 직전인데요. 김영삼 전 대통령, 정치인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면 언제였을까요?

[인터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민주화 투쟁의 과정 속에서 정말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까? 신민당 현판식을 할 때, 그때가 가장 영광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인터뷰]
신민당 총재 또 원내대표 이런 것을 DJ와의 경쟁 관계 속에서 항상 해오면서 때로는 협력도 하고 때로는 경쟁도 하고 그러는 과정들이 사실 지금 돌이켜 보면 낭만적인 모습도 보이고 정치에 있어서 여유와 낭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 지금 너무 각박한 것 같습니다.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통합과 화합이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정치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었던 정치에 비하면 시쳇말로 째째하게 정치를 한다,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오히려 정치를 통해서 소통이나 화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점점 양산해나가는 그런 행태가 꽤 많은 것이 누구나 알고 있는 거거든요.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해서 우리 정치도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무엇보다도 국가 발전과 민생, 이런 것을 챙기는. 또 그런 경쟁이 돼야만 사회와 국가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아마 이번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해서 국민들 사이에서도 아마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요. 정치권도 그런 부분은 많이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
우리 대한민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보내주시고 또 김영삼 대통령도 보내주셔서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또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한 것은 참 행운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분들은 그분들의 몫을 하고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더 재도약시키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 화두가 통합과 화합, 이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특히 홍일표 의원이 잘 해야 되겠습니다, 여당이 잘해야 되겠습니다.

[인터뷰]
지금은 3김시대와는 사회적, 시대적 과제나 이슈도 달라졌거든요. 그당시에는 민주화 이것 하나면 다 통할 수 있었고 최상의 가치였는데 지금 민주화된 시대고 어떻게 우리가 정책적인 선택을 잘 해서 우리나라를 잘 운영해 나갈 수 있느냐. 지금 저성장에 양극화에 저출산, 고령화. 엄청난 커다란 과제가 있는데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하고 우리가 선진국 대열로 잘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런 고민을 해야죠.

[앵커]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앵커]
수원 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의 주재로 예배를 보겠습니다. 하관 및 부활대망 예배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어요.

[인터뷰]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대권, 임금은 하늘이 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낼 때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임금이나 대통령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이나 김영삼 대통령이나 다 그분들이 자기가 해결해야 될 문제를 다 하셨고 그래서 공과 사는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요.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 봉황 토란, 알로 다 감써써 함께 계시잖아요. 그게 저는 아름답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 나중에 부활하는 것이 되겠고요.

[앵커]
부활이라는 게 신체적인 부활도 있을 수 있지만 정신을 이어받는 것, 그로 인해서 역사 속에 스며드는 것,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인터뷰]
그래서 아무리 좋은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선조의 정신이 후손의 마음의 자리에 잡지 못하면 명당이 아니라는 말을 하거든요. 그 정신을 부활시킬 때. 그게 풍수의 금과옥조입니다.

[앵커]
2남 3녀 자녀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잠시 후에 하관 및 부활대망 예배가 시작이 되겠습니다. 막내딸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해요. 신민당 총재였던 때가 가장 정치력이 있었던 때가 아니었나. 그때가 가장 아버지가 제일 멋있었다, 이런 의미겠죠.

[인터뷰]
그러니까 그때는 온국민이 다 민주화 열망 속에서 YS가 하는 것을 지지하고 성원하고 이랬을 때죠.

[앵커]
1985년이라고요?

[인터뷰]
1990년도에 3당 합당을 하지 않았습니까? 1992년도에 집권을 했는데 우리가 김영삼 대통령을 후배 정치인들이 볼 때는 결단의 정치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용기가 정말 전광석화와 같은 그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92년도에 집권하고 난 뒤에 전광석화처럼 하나회 척결 문제,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 공개, 전광석화처럼 해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다시 오늘 생각해 보면 박근혜 대통령께서 지난 2년 반 동안 한 것 가운데 역사적으로 크게 남을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또 이명박 대통령이 전광석화처럼 한 것이 뭐가 있을까, 4대강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정권을 잡고 난 뒤에는 개혁을 하기 위한 것이고 나라를 부강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때 멈칫거리면 안 된다.

특히 남북문제 같은 것도 김영삼 대통령이 조금만 더 일찍 진행했으면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이게 아주 일상화될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의 하관과 이것이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남북 고위급 실무 회담이 열리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것들을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다. 김 대통령의 그런 결단과 과감한 개혁과 노력 같은 것을 남북 문제에서도, 개혁에 있어서도 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요. 당연히 야당이 옆에서 열심히 돕겠습니다.

[인터뷰]
야당이 그런 문제는 열심히 도와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 국내 문제, FTA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을 풀어주셔야 또 그런 데로 나아갈 수 있는데 남북문제는 우리의 결단도 중요하지만 북한 반응이라든가 국제관계 속에서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 나아가야 할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 쉽게 결정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체로 개성공단 문제라든가 이번 목함지뢰로 인한 8.25 합의, 이런 과정에서 상당히 우리의 주도권을 회복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기자]
아까 정의화 국회의장 나왔었습니다마는 한중 FTA 비준과 관련해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오전에 김정훈, 윤상직 산업통상부 장관을 만난 데 이어 여야의 합의를 조속히 전했다고 합니다. 국회의장 차원에서도 FTA 비준 같은 경우는 국익이 달린 문제니까 빨리 처리해 달라 이렇게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앵커]
이제 하관이 진행되겠습니다.

[앵커]
대통령의 관 같은 경우에는 일반적인 관과는 다른 겁니까?

[인터뷰]
그 옛날 왕들은 관을 굉장히 두껍게 했는데요. 요즘은 굉장히 간소화하기 때문에 아마 현충원에서 정한 것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앵커]
안에 들어가는 물건 같은 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인터뷰]
옛날에는 많이 넣었는데 도굴 이런 것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대통령 같은 경우는 굳이 넣지 않고 성경을 넣는다는지 평소 좋아했던 것, 그런 것을 넣겠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시죠?

[인터뷰]
장로를 맡고 있습니다. 충암교회를 다니셨고요.

[앵커]
오늘도 평소에 친분이 깊은 수원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가 부활대망 예배를 주재할 예정입니다.

[앵커]
땅에도 혈이 있다고 해서 저기게 좋은 기가 응축되어 있는 대명혈이라고 하는데요.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인터뷰]
땅마다 성격이 다 다르죠. 군인이 나올 터, 예술인이 나올 터, 다 다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는 없고요.

[앵커]
천천히 하관을 하고 있습니다. 눈발이 여전히 날리고 있는 가운데 이제 완전히 어둠이 찾아들었고요. 조명에 의지해서 하관을 하고 있습니다.

[앵커]
간간이 들리는 소음은 취재경쟁하는 상황에서 조금씩 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기자]
예배 이후에 허토라고 해서 흙을 뿌리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고향인 신안에서 흙을 가져와서 일부 뿌렸다고 하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경우는 그런 절차 없이 고향인 거제도에서 흙을 가져오거나 그런 것 없이 그대로 현충원에 있는 흙으로 한다고 합니다.

[인터뷰]
아마 그것도 풍수적인관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풍수를 굉장히 신뢰하셨어요. 그래서 이장도 하시고, 하의도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장로이시기 때문에 전혀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번에 장례 절차에서도 노제나 이런 것을 안 지냈잖아요. 그래서 국민 부담을 최소한으로 하겠다. 간소화하고 검소하게 하자, 그래서 그랬던 것으로 보여지고 저런 관도 특별한 것은 아닐 겁니다. 대통령 문장만 새겨져 있을 뿐이지.

[앵커]
형식보다 마음을 우선시하시는 평소의 성격이 드러난 것 같은데요. 김현철 씨의 모습입니다.

[앵커]
차남 김현철 씨의 모습입니다.

[앵커]
장남이 있기는 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빈소를 지키지 못했고 빈소를 거의 상주처럼 내내 지키다시피 했죠, 차남 김현철 씨가요.

[기자]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 아마 김현철 씨가 만감이 교차할 것 같습니다. 본인도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의지가 상당히 강했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아들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싶었던 열망이 강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부분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앵커]
아직도 정치에는 뜻이 있는 건가요?

[기자]
정치에 뜻은 아직도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민주화 운동 하는 과정속에서 가족들이, 또 자식들이 겪어야 되는 고통이 굉장히 컸죠. 김대중 대통령 같은 경우에도 김홍일 의원 같은 분의 건강도 안 좋고 또 여러 가지 정치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고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큰아들 건강상의 문제, 작은아들의 정치적인 문제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지 않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김 대통령이 서거를 하셨기 때문에 김현철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기자]
김영삼 대통령이 물러나고 김대중 대통령이 됐을 때 그때 약속을 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김현철 씨를 사면복권해 주겠다, 약속을 했는데 그당시에 박상천, 얼마 전에 타계하셨죠. 박상천 당시 법무장관이 결사반대를 하셨답니다. 박상천 전 장관도 고집불통 스타일이기 때문에.

[앵커]
부인인 손명순 여사가 오셨군요. 마지막 영면에 들어가는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앵커]
아마 유족들이 탄 차량에 계속해서 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앵커]
차 안에 잠시 머물다가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 왔는데요.

[앵커]
아무래도 손 여사도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계속 차 안에 대기를 하고 있다가 남편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영면에 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이렇게 모습을 보였습니다.

[앵커]
고령에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 발인 예배는 불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결식은 참석을 했고요. 이제 마지막 영면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1살 차이죠, 김영삼 전 대통령과는.

[인터뷰]
65년을 사셨다죠. 의대 약대 3학년 때 결혼을 하셨죠.

[앵커]
맞선을 보고 그 이후에는 전혀 맞선을 보지 않고 오로지 손 여사님만 봤다고 하는데 정말 손 여사도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기자]
당시 이화여대 같은 경우는 결혼을 하면 그만둬야 하는 교칙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한 사실을 숨겼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그런데 손명순 여사도 참 고생을 많이 하신 게 그때는 정치하는 후배들이 매일 아침 상도동 집에 몰려들거든요. 그러면 다 식사를 집에서 대접을 해야 하니까. 요즘에는 그런 분위기는 없어졌습니다. 당대표 집에 우르르 몰려가는 일도 없고. 그런데 그때만 해도 그것을 몇십 년을 했으니 그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기자]
매일 쌀을 한 말을 가지고 밥을 지었다고 해요. 시래기갈치조림을 해서 집에 찾아온 기자라든지 이런 분들 다 매일 갈치 한 토막씩 시래기와 함께 대접을 했다는 거죠.

[앵커]
손명순 여사의 내조는 사실 그동안에 대외적으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보다는 조용히 뒤에서 묵묵히 내조를 하는 스타일이셨잖아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일부 성분을 하고 나서 예배가 시작을 할 것 같죠?

[앵커]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관이 이루어졌고 선분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허토인 것 같은데요.

[앵커]
허토를 하고 있는 거군요.

[앵커]
가족들이 이번에 서거하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난 번에도 한번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오랫동안 투병 또 퇴원한 적도 있고 해서 이번에도 훌훌 털고 일어설 줄 알았다, 이렇게 되실 줄은 몰랐다면서...

[인터뷰]
김홍조옹,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의 아버지가 굉장히 장수하지 않았습니까, 98세까지 사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김영삼 대통령도 십여 년을 더 살지 않을까 예상을 했는데요.

[앵커]
김현철 씨도 아버님의 영면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앞서 영결식장에서도 상당히 오열을 했었는데 아버님을 보내는 이 순간 울음이 터졌습니다.

손명순 여사도 건강이 좋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남편의 가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11월 22일 새벽 0시 22분에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서거하셨는데요. 향년 88세로 서거하셨습니다.

[기자]
11월 22일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날이었거든요. 11월 22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아주 여러 가지로 참 의미가 깊은 그런 날이라고 볼 수가 있겠죠.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 묘역에 대해서 뉴스에 풍수 관련해서 소문이 떠도는데 하나는 뱀이 똬리를 튼 형상이다,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기는 대통령이나 이런 왕은 용이나 봉황으로 터를 잡아야지 뱀이라고 하는 것은 하찮은 동물인 것이죠. 아무리 영가를 동물에 비유하는 것도 좀 그렇고 뱀은 모사꾼의 의미입니다.

저걸 누가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봉황터가 맞다, 봉황이 알을 품은 형상. 알은 새로운 부활을 의미하니까.

[앵커]
그러면 지관을 써서 대통령이나 이런 분들이 좋은 터를 잡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국가적으로도 좀더 뒤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염원을 담아서 하는 가서

[인터뷰]
당연하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집안이나 국가에서 훌륭한 분들이 가실 때는 이미지, 철학을 담는 터를 잡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줘야죠.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이건 격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되겠죠.

[앵커]
차남 김현철 씨가 오열하는 모습이 조금 전에 잡혔는데요. 가족들이 상당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기자]
묘지 터를 정한 분이 황영웅 교수라고.

[앵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도 정한 분이죠.

[기자]
영남대 환경보건대학교 시간강사이신데이분 얘기로는 YS묘지터가 그냥 터가 아니라 대명당이다, 현충원 봉황이 품었다는 쌍알의 전설이 내려오는데.

[앵커]
봉황의 양날개 끝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가 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이 있죠.

[인터뷰]
지관들이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대명당 자리다, 이렇게 표현을 했다는 겁니다.

[인터뷰]
이승만 대통령도 좋고 박 전 대통령도 다 좋습니다. 좋다 나쁘다는 소용 없고요. 전체가 다 안에 있으니까.

[앵커]
가족과 유족과 일부 조문객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하관 및 부활 예배가 진행이 될 텐데요. 앞서서 영결식 한 1만 명 정도 초청을 해서 추운 날씨 때문에 많은 분들이 못올 것 같았는데 7000명 정도가 오셔서 고인의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앵커]
손명순 여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고 있습니다.

[기자]
낮에도 영하 2도, 3도 그랬는데 눈발까지 날리고.

[앵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체감 온도는 더 떨어졌을 겁니다.

[인터뷰]
옛날에 같이 운동하시고 하던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상당히 힘드셨을 거예요, 아마. 추운 날씨에. 고령자들이 많다 보니까.

[인터뷰]
올해 들어서 제일 추운 날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내린 눈은 아마 가뭄 해소에 도움이 되는 눈 아니겠습니까.

[앵커]
어제까지 비도 내리고.

[인터뷰]
눈이 내리니까 영남에도 내리고 호남에도 내리고 여당 의원들한테도 내리고 야당 의원들한테도 내리고. 저 눈이 녹으면 또 가뭄 해소가 되는 치수가 될 것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뜻을 가지고 있는 그런 눈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
가뭄이 심한 충청도에 가장 많이 눈이 왔습니다마는 전 대통령께서 가시면서 충청도에 많은 비를 주고 가신 것 같습니다.

[기자]
영결식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으셨더라고요. 이명박 전 대통령 부부하고 권양숙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오늘 영결식에 참석을 안 한 것 같습니다.

[앵커]
어제 조문한 것으로 대신한 거죠.

[기자]
상당히 오랜 기간 악연이 있지 않았습니까? 35년 정도 악연이 있었는데요.

[인터뷰]
제가 법원에 있다 보니까 그당시에 5. 18민주화 관련된 특별법을 만들었잖아요. 그게 사실 법조인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예외적인 겁니다. 소급표를 인정해서 당시에는 법이 없었는데 나중에 법을 만들어서 옛날 행위를 처벌한다, 이것은 사실은 법치주의 원칙과는 안 맞는 것인데 그러나 그때의 취지라든가 이런 것들이 사실은 국민들이 다 찬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처벌을 하는 재판을 하기도 했었는데 12. 12사태에 관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기록이 캐비넷으로 10개가 넘었습니다. 그것을 다 보고서 판단을 해서 판결문을 쓰고.

[앵커]
평소 친분이 깊은 수원침례교회 고명진 목사의 주재로 부활대망 예배가 시작이 됐습니다. 당초 5시 2분에 원래 예정이 되어 있었던 것인데 30분 정도 지연이 된 가운데 고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안장식이 지금 거행이 되고 있습니다.

[앵커]
보통 묘비명도 적고 묘비명에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까? 글귀들은 어떻게 정하게 되나요?

[인터뷰]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고인이 평소 자기가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그분을 이해했던 후손이 글을 쓸 수도 있겠고요. 그래서 그것도 어떤 원칙은 없습니다. 대통령의 자기 철학, 이런 것이 가장 드러난 게 가장 좋겠죠.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 집권 초기 지지율이?

[인터뷰]
93% .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마는.

[앵커]
그리고 뒤로 가면서 지지율이 조금 떨어졌습니다마는 지지율이 역동적인 개혁 조치를 할 수 있었던 힘 아니었겠습니까?

[인터뷰]
그런 개혁을 하니까 지지율이 나왔던 것이고요.

[앵커]
선순환이 일어났겠죠.

[인터뷰]
그런 지지율은 아마 전무후무할 거예요. 어느 대통령도 그런 지지를 받기는, 그 시기에. 일정한 시기라 할지라도.

[앵커]
취임사에서 말씀하신 대로 실천을 하셨잖아요. 가운 정권초기에 질풍노도의 개혁을 하셨는데

[기자]
그 개혁에 대해서 국민들이 엄청난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것이죠. 왜냐하면 올바른 개혁이었으니까요. 하나회 척결이라든지 공직자 재산공개라든지 금융실명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는 올바른 방향의 개혁이었기 때문에. 특히 정권 초기에는 사정바람도 많이 불었거든요.

전 정권 비리에 대해서 엄청나게 수사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런 사정바람도 어떻게 보면 국민들에게 쾌감을 주는 거죠. 비리 정치인이라든지 아니면 재산 축적을 이상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부동산 투기를 했다든지 이런 공직자들이 많았었는데 부동산 공개와 재산 공개를 통해서 그런 분들이 많이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당시에 박 국회의장이라든지 김덕준 위원장이라든지 실세 정치인은 물론이고 고위 법관이라든지 고위 공무원들엄청나게 많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거든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러면서 대통령 지지율이 90%를 넘어서는 그런 기염을 토했던 것인데요. 그런 부분을 계속 유지하지 못한 측면은 있습니다마는 아마 그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앵커]
국내 정치적으로도 그렇겠습니다마는 외교적으로도 보면 조선총독부를 폭파시키지 않았습니까? 한일정상회담도 하고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일본과의 관계, 역사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위안부 소녀상 철거 문제도 그렇고요.

일본에서 요구하고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조선총독부를 과감하게 폭파를 시키셨잖아요. 그런 부분들도 아마 평가를 받아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인터뷰]
일부에서의 반대도 있고 또 그것을 잘 보존을 해서 잘 해야 한다는 견해는 있습니다마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그게 진행됐기 때문에. 그리고 군수독재 시대를 청산을 하고 문민시대로 가는 과정에서의 역사적인 단죄, 이것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했기 때문에 그것도 아마 국민의 지지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기자]
그와 관련해서 JP가 이런 것을 보존해야 된다는 여론도 많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더니 쓸데 없는 소리,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는 겁니다.

[인터뷰]
김영삼 전 대통령은 평생을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은 아주 그냥 강력하게 실행으로 옮기면서 호연지기, 이런 것을 많이 강조했잖아요.

그러니까 대도무문 이런 것들도 내가 옳은 길을 가는데 무슨 다른 것이 있겠느냐. 나는 이것을 위해서 가면 나한테 어떤 고통이나 이런 것들이 와도 참아낼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또 올바른 길이다, 이런 것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뒤의 개혁조치들도 그런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저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룩한 두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있는데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서 김대중 대통령이 했잖아요.

김영삼 대통령 때의 그런 개혁조치들이 바탕이 되어서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문제에 집중하고 이럴 수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대에 이르러서는 사실 김영삼 대통령대에 있었던 그런 개혁 조치 같은 것들이 크게 기억나지 않지 않습니까. 남북과 관련된 큰 업적을 남기셨지만. 그래서 저는 그런 점에서 터를, 정말 실질적인 중요한 작업들을 많이 이루어 놓은 분이다, 이렇게 기억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
그 말씀하시니까 조선총독부 폭파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풍수에서 굉장히 논쟁이 많이 붙었었습니다. 이것을 폭파하는 것이 그게 길하다, 흉하다라고 했는데 그건 정답이 없습니다.

그건 대통령의 의지,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거든요. 그것은 저는 잘했다고 봅니다.

[인터뷰]
여러 가지 업적이 있습니다마는 김대중, 김영삼이라는 두 지도자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민주화를 이끌었고 또 지역적으로도 양 지역을 대표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의 지도자였지만 아까 원내총무를 5번 하시고 그다음에 신민당 총재를 2번인가 하시고 여러 가지 야당의 황태자와 같은 그런 위치에 있었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당신이 평민당을 만들어서 총재할 때까지는 당 총재를 한 번도 못했고요.

원내대표도 제대로 못한 그런 여러 가지 소수라고 할까, 소수계파의 그런 게 있었고요. 또 어쨌든 김영삼 대통령이 영남, 그리고 부산이라고 하는 아주 강대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데서 출발을 했고 또 김대중 대통령에 비해서는 조금 보수 지역인, 중도적인 그런 입장을 가지셨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성향으로 볼 때는 상당히 지평이 넓었다, 입지가 컸다, 그런 것을 볼 수 있겠습니다.

[기자]
결단의 정치인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게 85년 총선 있지 않습니까.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당시 민추협 총재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2대 총선에 참여하지 말자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강력하게 이 총선에 참여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해서 그 당시에 사실상 여당의 이중대 역할을 했던 민한당을 누르고 제2당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면서 군부정권이 점점 위협을 느끼고 군부정권이 위축이 되는 그런 기점이 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결단력이 있었던 거죠.

[인터뷰]
야키노 상원 의원이 암살을 당했고요, 필리핀에서 암살이 된 게 1985년 상황인데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에 있다 귀국을 하는 것을 미국 정치인들이 말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귀국을 하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힘을 합쳐서 2. 12 총선인데 그게. 이민우 총재를 세워서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 그것이 정권교체의 아주 큰 전환점이 됐는데 거기에 김대중, 김영삼이 힘을 합친 것이 하나의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그런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을 합니다.

[인터뷰]
안타까운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왔을 때 국민들은 양김이 단결을 해서 단일화를 하면 당연히 우리가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때 두 분께서 그걸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7년 정도의 군부독재 시절이 돼서 십 몇 년이 늦어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죠. 그건 참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경우에는 야당 당수를 3번 했고요. 야당 원내총무도 5번을 하셨죠. 그러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리더십도 연구대상 아닐까요?

[인터뷰]
그것도 있고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의 황태자 같은 분이셨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말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태의 비주류,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유진호 박사가 1900 몇 년 제가 기억을 못하는데 대표로 지명이 돼서 원내대표를 지명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표를 원내대표로. 똑똑하고 하니까 국회의원도 1번인가 2번밖에 못한 상태아니었습니까?

했는데 국회의원들이 투표를 해서 부결을 시켰어요. 그래서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실의에 빠지고 그렇게 해서 아, 도저히 나는 원내대표 경선에 나가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나가야겠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이 72년 전당대회에서 이기게 되는 그런 결과가 됐고 역사에서 김대중이 부상하는 그런 계기가 됐던 것이죠. 반대는 언제나 소수파였어요.

[인터뷰]
그런 당직 경력을 보면 정말 연구대상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평생 의회주의자였다, 이렇게 우리가 평하는 것도 의회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나가는, 싸워도 의회중심으로 싸워야 된다는 그런 철학에 기초한 것인데 요즘에 당에서 원내대표 선출 한번 하려면 얼마나 어렵습니까?

한 번 되기도 어렵거든요. 이렇게 여러 번씩 원내대표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카리스마나 리더십을 타고 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도 있고 또 그당시 제가 낭만의 시대였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임기 말에 DJ 비자금 사건이 부상을 했잖아요.

그것을 수사하느냐 안 하느냐는 정국의 풍향을 가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김태정 장관하고 상의를 하면서 법조계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말씀으로 했지만 결국 그것을 하지 않는 결정을 해 준 거죠. 그런 것들은 정말 요새 생각하기 어려운, 그냥 상대방 약점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당내에서 싸울 때도 심지어 그렇게까지 하는 그런 각박한 것에 비춰보면 정말 통큰 정치인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되고 우리가 지금 되살려야 될 게 그런 문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기자]
어떻게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겠죠.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 당시 김대중 비자금 터졌을 때 그것을 수사를 했으면 아마 그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판도라의 상자가 돼서 한국이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는데 그것을 그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한테 수사하지 말라고 지시를 하죠.

상당히 김대중 후보한테 유리하게 굴러갔던 것이고 또 하나는 이인제 당시 후보가 출마를 하는데, 국민신당으로 출마를 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부추기고 방조한 측면이 있죠. 그당시에 이회창 당시 후보하고 워낙 갈등을 빚다 보니까. 그것이 어쨌든 선거에서는 구도가 제일 중요한데 양자구도였을 때는 아마 김대중 당시 후보가 상당히 어려웠을 겁니다. 3자구도가 되니까 김대중 후보가 당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데.

[인터뷰]
그 부분은 과오로 기록되어야 되지 않나.

[앵커]
지금 뿌리는 것은 뭡니까? 국화꽃잎을 아버지의 관에 뿌리고 있는 차남 김현철 씨입니다.

[앵커]
무궁화가 새겨진 상판이 덮였고요. 그 위에 고인의 관을 꽃잎으로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남 김현철 씨가 허토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추운 날 아버지를 데려가시는지 모르겠다면서 눈물을 보였던 차남 김현철 씨가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에 흙을 고이 뿌려드리고 있습니다.

[앵커]
유족과 조문객 250명 정도가 참여한 가운데 수원 중앙침례교회 목사의 주재로 부활대망 예배가 거의 마무리되고 김 전 대통령과 이별을 고하기 직전입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무궁화가 새겨진 상판이 고인의 관을 덮의 상태에서 흙으로 차곡차곡 메워지면서 김 전 대통령은 영면에 들어가게 됩니다.

[앵커]
몸이 좋지 않은지 휠체어에 의지를 하고 있는 손명순 여사. 끝까지 의자에 앉아 있는 손명순 여사의 모습도 보이는데요. 끝까지 남편의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첫 국가장으로 진행되고 있는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식 모습입니다. 안장식을 저희가 계속해서 전해 드리고 있는데요. 지금은 부활대망 예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차남 김현철 씨는 계속해서 오열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정치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 남다른 감정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터뷰]
제일 상처가 깊고 고통스러워 할 것 같습니다.

[앵커]
하루종일 내리던 눈도 이제 많이 그쳐가고 있습니다. 간간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는데요.

[인터뷰]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하셨던지도자분들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잖아요. 그럴 때 가족들이 느끼는 고통이 그보다 더한 순간도 많았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현철 씨 같은 경우도 그런 과정 또 그 뒤에 대통령 되는 과정에 조언해 주는 이런 것들이 이 순간 다 떠오르겠죠.

[앵커]
관 위에 흙을 뿌리고 있습니다.

[기자]
사실 현재 정치권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분들이 96년 15대 총선에서 들어오신 분들이 많거든요.

[인터뷰]
제가 그때 들어왔습니다.

[기자]
우리 김영환 의원뿐만 아니라 그 당시 홍준표, 이재오, 김문수 이런 분들이 대부분이 그때 들어오신 분이고요. 그당시에 특히 여당 같은 경우는 김현철 씨가 아마 영입을 하고 전국의 표를 짜는 데, 공천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공천개혁을 했던 것이죠.

[인터뷰]
그때 정의화 국회의장도 YS가 발탁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때 뒷얘기 보니까 여론조사를 그 당시 부산에서 허삼수라는 분이 나오는데 그것을 꺾을 신인을 찾자 해서 여론조사를 10번인가를 했대요. 그래서 정의화를 찾아내서 지금까지 크게 만들었죠.

[앵커]
끝으로 오늘 김영환, 홍일표 두 의원 나오셨는데 오늘 전체적으로 닷새간의 국가장이 잠시 후 흙으로 메워지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원한 이별, 영면에 들어가게 되는데 느끼신 소회가 있다면 한마디 해 주시죠.

[인터뷰]
이제 한시대가 저물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저분들은 우리의 유산으로 또 정신으로 계승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그렇게 나를 따르라식의 거대한 거암 같은 지도자는 앞으로 어렵지 않겠는가.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새로운 소통 방식을 만들고 또 새로운 지도력을 만들어서 국민들한테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되는 책임이 정치권에 있지 않나. 특히 여야 간의 소모적인 정쟁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앵커]
홍일표 의원님.

[인터뷰]
고인께서 평생 추구해 왔던 그런 가치나 철학, 이런 것을 우리가 계속 계승해서 발전시켜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민주화를 생각하셨다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덜 민주화된 부서, 이런 것을 우리가 찾고 또 정당민주화도 실현을 해야 되고 그런 과제를 안고 있고 또 마지막에 가시기 전에 화합과 통합을 말씀하셨다면 그야말로 진짜 우리가 실현시켜야 될 가치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여야를 넘어서 모두 추구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제발 이제 정치권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스케일이 큰 정치를 하도록 우리도 같이 지도자급에 안 있더라도 같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그렇게 하도록 나아가야 한다. 국민들의 박수받는 정치문화를 만들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김두규 교수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인터뷰]
우리 시대 이런 지도자가 좋은 땅에 안장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지도자들의 장묘문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은 미이라가 되어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화장을 하셨고 또 일부 대통령들은 매장을 하시고. 그런데 일반 사병들은 화장하거든요.

상당히 정체성의 혼란, 문화의 혼란인데 앞으로 차후 대통령들부터 뭔가 원칙을 정해서 화장을 한다든지 매장을 한다든지 일정한 묘역을 만든다든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국가적 화합, 그게 풍수가 원하는 바입니다. 구국의 융성을 위해서는 차별 없는 것, 이러한 것들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앵커]
이동우 부국장님.

[기자]
이번에 어쨌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남긴 메시지가 통합과 화합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메시지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통합과 화합의 길로 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됐으면 하고요.

또 뿐만 아니라 김영삼 대통령이 지금까지 저평가되어 왔던 부분들이 이번 서거를 계기로 해서 많은 업적들이 새롭게 재조명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앵커]
지금까지 김영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홍일표 새누리당 의원, 풍수지리 전문가이신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이동우 YTN 부국장이었습니다. 네 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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