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돌 맞은 KIST...산 증인에게 듣는다

50돌 맞은 KIST...산 증인에게 듣는다

2016.02.25. 오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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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옥 / KIST 초대 연구원

[앵커]
대한민국의 산업화 그리고 경제발전을 이끈 견인차 중 하나죠. 한국과학기술연구원 KIST가 올해 반 백년, 설립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산 증인 초대 연구원입니다. 안영옥 박사를 초대했습니다. 그때 얘기, 회고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앵커]
나오셔서 반갑습니다. 건강하시고요? 연세를 좀 여쭤봐도 실례가 아닐까요?

[인터뷰]
여든이 넘었습니다.

[앵커]
그러시군요. 그런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셔서. 그래서 제가 여쭤봤습니다.

[인터뷰]
고맙습니다.

[앵커]
벌써 50년을 맞았다는데 그때 생각하시면 50주년이라니까 감회가 남다르시겠습니다.

[인터뷰]
그렇죠. 그때는 아주 굉장한 결심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지금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연구소에서 일했던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을 합니다.

[앵커]
그러니까 그때 미국에 계시다가 오시게 된 것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어떻게 누가 권유를 해서 오기게 되었습니까?

[인터뷰]
제가 듀폰에 있을 때 초창기에 바텔 연구소라는 곳이 한국의 연구소를 만드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그렇다면 제가 갈 의향이 있다라고 하고 편지를 보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편지가 아마 계기가 돼서 박정희 대통령의 부탁을 받고 최형섭 박사가 워싱턴 DC에 오셔서 저에게 뵙자고 해서 갔습니다.

[앵커]
최형섭 박사님이 초대 연구소장을 맡으셨었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지금은 작고 하셨습니다.

[앵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직접 어떤 부탁을 했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우리가 월남전에 참전을 한 고마움의 표시로 존슨 대통령이 호닉 박사라는 과학특보를 보내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의논을 했어요.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요? 그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가 연구소가 없으니까 현대적인 연구소를 한번 만드는 데 도와달라. 그래서 그때 65년이죠, 최형섭 박사가 초대 소장의 임무를 띠고 워싱턴에 오셨습니다.

[앵커]
그래서 당시에 박 대통령이 지금 박사님께 와서 도와달라고 하신 겁니까?

[인터뷰]
그렇지는 않고요. 그러니까 최형섭 박사가 전권을 가지고 구라파, 일본, 미국을 다니시면서 약 69명 정도의 한국의 과학자를 한국에 오도록 권유를 했어요.

[앵커]
그때만 해도 사실 대한민국이 빈국이었을 때고 그래서 좋은 대우를 받고 듀폰 연구소, 아주 유명한 연구소에서 연봉도 높으셨을 테고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결정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어떻게 결정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제가 있던 듀폰중앙연구소는 사실 미국 사람들도 어려운 굉장히 힘든 연구소였어요. 총 인원이 2000명 되는데 그중에 1300명이 박사급입니다. 1300명이 월밍턴 델라웨어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연구를 하니까 아주 큰 영광이죠. 그러나 최 박사께서 우리나라가 이렇게 현대연구소를 만드는 데 와서 한몫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거절을 못했습니다.

[앵커]
거절하실 수가 없었군요.

[인터뷰]
네.

[앵커]
그런데 월급은 어떻습니까? 월급이 더 좋아졌습니까?

[인터뷰]
월급은 제가 그때 보니까 8만 1000원을 받았어요. 8만 1000원이라는 월급이 그때 제가 듀폰에서 받고 있던 월급의 한 30%, 25% 정도일 겁니다. 그런데 그 월급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월급이 제 기억으로 7만원이었었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박 대통령보다 1만원을 더 받은 것이죠.

[앵커]
저희가 지금 보여드리고 있는 것이 계약서입니다. 고용계약서라고 되어 있고 한자로 옆에 안영옥, 박사님 성함도 써 있고요. 그러니까 월급이 대통령보다 많았지만 그래도 받으시던 것보다 3분의 1밖에 안 되는데 1억원 연봉을 받던 사람이 3000만원 줄테니까 와서 일해라 하면 참 요즘 같으면 과연 그렇게 많이 할까 싶네요.

[인터뷰]
그렇죠. 그러니까 그때 많은 분들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왔는데. 친구들이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정신이 나갔다가 돌아왔냐고.

[앵커]
가족은 없으셨습니까?

[인터뷰]
있었습니다.

[인터뷰]
결혼했었습니다.

[앵커]
부인께서 반대하시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안 했었습니다.

[앵커]
부모님께서는요?

[인터뷰]
부모님은 제가 공부할 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14년 살았는데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아서 한 번도 그런 큰일이 있을 때도 돌아오지 못 할 때 였었습니다.

[앵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셔서 좋은 직장 남들 다 부러워하는 곳에 들어갔었는데 조국의 부름을 받고 연봉을 3분의 1로 깎으면서 조국을 위해서. 그래서 오셔서 일하시다가 괜히 왔구나, 이거 아닌데, 그렇게 생각을 하신 적은 없습니까?

[인터뷰]
그런 적은 없고요. 저희가 책임연구원으로 돌아왔는데. 책임연구원이 아마 18명쯤 되고 선임연구원이 한 7명 정도 돼서 연구실은 한 25개 있었어요. 그래서 연구를 하는데 큰 일이었죠. 왜냐하면 KIST라는 연구소가 미국에 있는 바텔 기념연구소쪽에서 용역을 받고 바텔연구소식으로 연구소를 운영을 했습니다. 게 뭐냐하면 결국은 계약연구라고 해서 실장이 밖에 나가서 산업계에서 연구 용역을 타다가 연구를 하면서 직원들을 먹여살려야 해요.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고생 많았습니다.

[앵커]
그러면 연구 환경도 당연히 좋지 않았을 테고, 미국에서 하시는 것에 비해서는.

[인터뷰]
그렇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그때 저희가 미국에서 무상으로 받은 돈이 한 7억불 정도됩니다. 그리고 유상으로 저희가 지원을 받은 게 한 2억 5000만불. 그러니까 지금 단위로 생각하면 큰 것 같지 않아도 그때는 아주 큰 돈이고.

[앵커]
지금이어도 큰 돈이죠.

[인터뷰]
큰 돈이죠. 그래서 우리쪽에서 임업시험장, 연구소 장소로 정하고. 지금도 잘 서 있습니다마는 굉장히 큰 연구동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저희가 아마 미국보다 2배는 썼을 겁니다.

[앵커]
그 당시 연구원들은 물론 월급은 줄었지만 최상의 우대를 해 주고, 국가에서. 그래서 경찰한테 잡혀도 그냥 통과되고 그러셨다면서요?

[인터뷰]
그렇죠. 왜냐하면 그때 이제 KIST라는 데가 선전이 잘 되고 또 사실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경찰교통에 잡힐 때 잘 봐주었습니다. 그래 봤자 저희가 몰던 차가 퍼블리카라고 해서 2기통 차였어요. 그러니까 사실 큰 사고는 날 것도 없죠.

[앵커]
2기통 차라는 게 무엇입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퍼블리카라는 자동차를 신진에서 만들었는데.

[앵커]
모델 이름이 퍼블리카?

[인터뷰]
퍼블리카. 그러니까 이건 자동차가 아니라 오토바이에다 씌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차도 그때는 사기가 어려울 때입니다.

[앵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하셨습니까? 휴일에도 일하셨습니까?

[인터뷰]
휴일에도 많이 일을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왔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한국 대학에서는 연구를 한다는 게 이제 작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고 그런 거였지 않습니까? 그러나 KIST의 목적이 산업연구기 때문에 저희는 산업이 필요로 하는 아주 큰 프로젝트들을 했어요.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그때는 우리가 밸브 하나를 못 만들 때였습니다. 밸브 하나를 제대로 못 만들 때 저희가 공장을 크게 하나 지었어요. 시범공장을. 그러니까 박달조 박사님이라고 돌아가셨지만 세계적인 권위의 불소화학자가 계셔서 박달조 박사도 듀폰에서 일했고 저도 듀폰에서 일했고. 그래서 우리 둘이 공장을 하나 세우자. 그래서 산업은행이 투자를 해서 울산화학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이 후성으로 돼 있지만 지금도 잘하고 있어요.

[앵커]
그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를 하셨던 것이 실제 산업현장으로 이어졌고 지금도 생산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죠?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박사님 가지고 오신 자료들 몇 개를 시청자 여러분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훈장이군요. 훈장, 과학기술연구소 KIST 안영옥 박사님. 1976년 9월에 당시 대통령, 국무총리 그리고 총무처 장관, 이렇게 돼 있는 훈장입니다. 이때가 귀국하시고 한 10년 지났을 때 받으신 거죠?

[인터뷰]
그렇죠. 그때 응용연구를 잘 했다고 나라에서 받은 동백장입니다.

[앵커]
이것은 과기연 소식, 이것도 70년 12월에 나온 과학기술연구소 소식지 같은 것인데요.

[인터뷰]
제일 오른쪽에 있는 게 저입니다.

[앵커]
이분이 박사님이시군요? 이분이 그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님 인가요?

[인터뷰]
최규하, 그때 국무총리입니다.

[앵커]
이때 훈장 받으시는 장면인가요?

[인터뷰]
네.

[앵커]
박사님이 연구를 하신 것 중에 제일 큰 성과는 조금 전에 말씀을 하신건가요?

[인터뷰]
프레온 냉매, 에어컨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앵커]
그걸 또 우리나라에서 못 할 때였군요.

[인터뷰]
물론이죠. 우리가 그것을 했다고 그랬는데 청와대에서 믿지 않았어요. 이 사람들이 와서 그럴 감이 되느냐, 그래서 저희가 프레온 12을 만들어서 청와대에 갖다 드리고 에어콘에 한번 넣어보시라고. 그러니까 정말 되기는 되는구나. 그래서 그때만 해도 우리는 물론 호남비료와 유공이 61, 63년도부터 가능했지만 우리 힘으로 공장을 짓는 것이 어려울 때입니다. 대림엔지니어링이 지은 공장이 사실은 울산화학이 첫 케이스입니다.

[앵커]
박사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지금 우리는 그냥 아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에어콘 냉매, 그런데 월급이 3분의 1로 깎이면서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조국을 선택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얼마나 더 늦어졌을까 하는 이야기를, 생각을 하게 되면서 새삼 감사한 일이구나라는 걸 느낍니다.

[인터뷰]
그러니까 KIST는 연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두뇌의 역술, 카운터 브레인이라고 합니다마는. 그러니까 외국에 나가있던 과학기술자들을 고국에 돌아오게 하는 아마 첫 시도일 거예요. 그래서 저희와 같은 과학기술하는 사람들이 외국에서 저희를 봤죠. 2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아 남느냐. 그런데 다행히 한 사람도 안 돌아가고 살아갔습니다.

[앵커]
지금도 만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인터뷰]
저희가 4월회라고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옛날 이야기도 합니다.

[앵커]
지금 이 사진인가 봅니다.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정정하시고 건강해 보이시는데요.

[인터뷰]
나이 많은 분들도 계시죠.

[앵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에 부를 때 공 들여서 부르셨는데 그 다음에 잘 챙겨주시던가요?

[인터뷰]
그렇죠. 나중에 또 하나 공장을 크게 지은 것이 프레온 공장보다 좀더 크게 지은 것이 가발, 섬유공장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나라가 워낙 수출 상품이 없어서 우리나라에 수출 상품의 양대 산맥이 합판과 가발이에요. 가발을 수출해서 우리가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때 돈으로 거의 3, 4억을 들여서 제가 한 프레온 공장보다 더 큰 공장을 지었어요.

[앵커]
그러니까 대통령이 이야기를 하셨단 말이죠?

[인터뷰]
그렇죠. 경제기획원에서 비용을 주고. 성공적으로 파일럿 플랜트를 만들었을 때 대통령님께서 오셔서 저랑 악수하고 너무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감개무량합니다.

[앵커]
선친께서는 독립운동가셨다고 들었고요. 우리 안 박사님은 우리 영옥이는 미국에서 공부시켜라라고 말씀하셔서 미국으로 가셨다고요.

[인터뷰]
맞습니다.

[앵커]
그렇게 어렵게 해서 가셨는데 다시 조국을 위해서.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 그 정신을 받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습니다.

[인터뷰]
그렇죠. 그러니까 제가 낳기 전에 저희 아버지가 미국 콜롬비아에 가서 공부를 하셨거든요. 그렇게 10년을 계시다가 돌아오셨는데 공교롭게도 돌아온 18명을 보면 그 집안이 천진이니, 홍콩이니 상해니 이런 데서 활동하신 분들이 많아요.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 포함해서. 그래서 우리가 가끔 만나서 웃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한국과학기술원, KIST 50주년입니다. 저희가 초기에 증인에게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오늘 나와 주셔서 감사하고요. 저희가 어떻게 해야 되겠다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잘들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인터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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