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2019.01.04. 오전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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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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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전쟁영웅 김백일 장군, 독립군 토벌한 간도특설대 부대장.

3.1운동 100주년의 해, 2019년을 앞둔 12월.
경남 거제 포로수용소 공원에 김백일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 김백일의 동상을 철거하라! 철거하라!"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북한 함경남도 흥남에서 피난민 10만여 명을 부산과 거제로 피난시키는 데 공을 세운 김백일 장군. 그는 전쟁 영웅이 맞습니다.

시민단체는 왜 전쟁영웅의 동상을 철거하라고 외치는 걸까요?

김백일 장군 동상에 빼곡히 적힌 약력. 1917년 독립투사의 손자로 태어났고, 이후 1946년 육군 중위 임관 후 행적, 전쟁 영웅으로 추대받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의 약력은 빠져있습니다. 당시 그의 가장 대표적인 행적은 간도특설대 활동.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 요원으로 배속돼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활동하며 부대장까지 올랐고, 복무 중 '가네자와 도시미나미'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도 했습니다.

[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사진설명)일제 강점기의 행적은 빠져있는 김백일 장군의 약력


간도특설대는 조선인은 조선인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친일파 이범익의 주장에 따라 만들어진 특수 부대입니다.

하사관을 포함한 사병은 모두 조선인,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었는데 100차례가 넘는 독립군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등 일제의 전쟁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독립군을 잔혹하게 토벌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독립군이 있었던 마을의 민간인까지 학살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김백일 장군 외에도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신현준 장군, 한국 전쟁의 살아 있는 역사 백선엽 장군도 간도특설대 출신입니다.

친일 과거로 김백일 장군이 세운 한국전쟁 당시 공을 깎아내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경남 거제에는 흥남철수작전 때 무사히 피난 온 사람들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김백일 장군은 전쟁 영웅이고 생명의 은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친일 행적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빠뜨리는 것은 역사 앞에 떳떳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현충시설로 지정된 전남 장흥 육군보병학교 김백일 동상,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흉상도 마찬가지로 친일 기록은 없습니다.

백선엽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주 임진각에는 백선엽 장군의 부조물이 지난 2011년 설치됐습니다. 시민사회단체의 반대로 동상 설치는 부조물 설치로 바뀌었지만, 간도특설대 활동 기록은 공개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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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파주 임진각에 설치된 백선엽 장군 부조물


■친일파, 존경받는 교육자로…기념 동상 수두룩

친일 행적 감추기는 교육계로 가면 더 심각합니다. 고려대 김성수, 이화여대 김활란, 휘문고등학교 민영휘, 부산 경남고 안용백 등…

YTN 취재진이 확인한 교육기관에 세워진 친일파의 기념물은 전국 15곳이나 됐습니다. 대학의 친일파 동상은 3.1절 또는 광복절마다 철거 시도가 있긴 했습니다. 그 때마다 언론에서 크고 작은 기사로 다뤘지만, 결국 동상을 세운 재단과 학교 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현행법상 허가를 받고 설치한 동상 등 기념물은 설치한 단체나 개인의 허락 없이 다시 철거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처음 설치를 막는 것 말고는 전국 곳곳의 유명 교육자로 소개되는 친일파의 동상이나 기념비의 철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사진설명)서울 휘문고등학교에 설치된 민영휘 동상


사실 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동상이나 기념물의 철거가 아닙니다. 취재 중 만난 휘문고등학교 1학년 3명의 학생은 "친일파의 좋은 업적이고 나쁜 업적이고 모든 업적을 다 써주는게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전쟁영웅이나 존경받는 교육자로 알려진 친일파, 그들의 친일 행적은 덮어두는 게 과연 옳은 걸까요?

친일의 행적 또한 공적과 똑같이 기록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친일파의 기념물은 하나같이 친일 행적이 기록돼 있지 않았습니다.

[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그래픽)교육기관에 설치된 친일파 관련 기념물 현황


■문화재로 둔갑한 친일파의 집…세금 들여 보호

친일 행적 지우기는 비단 친일파의 기념물뿐만이 아닙니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22호 북촌 백인제 가옥. 하루 평균 500여 명이 찾는 관광 명소입니다.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 선생과 부인이 마지막 소유자라 해서 백인제 가옥이라 이름 붙였는데, 사실 집을 짓고 처음 거주한 사람은 영화 암살에서 배우 이경영 씨가 연기한 친일파 한상용입니다. 을사오적 이완용의 외조카로 창씨개명에 앞장섰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관료들을 초대해 연회를 열던 곳이 현재 백인제 가옥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관광객들은 그저 잘 지어진 고택, 한국과 일본의 생활상이 잘 녹아든 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설사조차 서울시의 입장을 이유로 친일 관련 역사를 소개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12호 부암동 윤웅렬 별장, 강원도 문화재 66호 춘천 민성기 가옥, 국가 민속문화재인 전북 부안의 김상만 고택 역시 모두 친일파와 관련된 문화재입니다.

문화재청은 건축적 가치를 인정해 문화재로 지정한 것일 뿐, 정치적이나 특정 인물의 영향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숨기고 문화재로 지정해 홍보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국민을 속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방학진 씨는 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 자기 지역의 이미지가 훼손되고 관광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해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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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백인제 가옥에서 단체 사진을 찍는 학생들


■친일 기념물, 철거 대신 단죄문 설치

친일파의 친일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단죄문입니다.

전국 수백 곳에 달하는 친일 관련 기념물을 철거하기보다는 그들의 악행을 기록해 후세에게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단죄문 설치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2012년 친일파 윤치호의 기념비 옆에 그의 친일 행적을 기록한 단죄문을 설치했습니다. 독립협회 활동을 한 지식인이었지만, 결국 변절해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 윤치호의 부끄러운 과거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찾아간 단죄문은 관리하는 사람 이 없어 훼손된 채 방치돼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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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방치돼 있는 친일파 윤치호의 단죄문/전북 진안


농민학살과 약탈을 자행했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 앞장선 친일파 이두황.

전북 전주시 기린봉에는 그의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길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이두황 이라고 적힌 푯말을 누군가 곳곳에 설치했습니다. 지난 2016년 단죄문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무덤과 300m 넘게 떨어진 도로에 세워 유명무실합니다. 이두황의 무덤과 주변은 그의 후손들의 땅이라 단죄문을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충북 제천의 박달재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소양강 처녀',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로 유명한 반야월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충북 제천시가 박달재를 관광 명소화 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했고 그의 노래비까지 설치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제 침략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 과거를 기록한 단죄문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제천시는 불법 시설물이라며 시민단체에 철거 요청 공문을 보냈고 그의 단죄문은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불법 시설물 신세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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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충북 제천 박달재에 설치된 반야월의 단죄문


■단죄문 설치 7년 동안 7곳이 전부…정부는 나 몰라라

단죄문은 앞서 언급한 세 곳과 강원도 정선과 춘천 이범익의 기념비, 국립국악원에 설치한 함화진과 김기수 흉상, 충남 천안 홍난파 기념비에 설치했습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친일파의 기념물은 수백 곳에 달합니다. 하지만 사유지라는 이유로 혹은 지역 명소에 흠집을 낸다는 이유로 단죄문을 설치할 때마다 반대에 부딪혔고, 7년 동안 고작 7곳에 설치됐습니다.

단죄문 설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제 포로수용소 공원의 김백일 동상 철거를 외친 시민단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동상 앞에 단죄문을 설치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친일 행적 알리기는 여전히 정부가 아닌 시민 단체의 손에 맡겨져 있고, 친일 청산은 3.1절이나 광복절 즈음해서 한번 살펴보는 일이 됐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 김재호 씨는 단죄문 설치가 민간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며 정부와 자치단체가 막중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나서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은, 우리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친일의 역사를 덮어두고 조용히 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되새길 때입니다.

[와이파일] 친일 행적 지우고 전쟁영웅·교육자로 '신분 세탁'

(그래픽)친일파 기념물 단죄문 설치 현황





홍성욱 [hsw0504@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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