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일] 빈곤 노인 45만 명은 기초연금을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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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3. 오후 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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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일] 빈곤 노인 45만 명은 기초연금을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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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생입니다” 할아버지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집안은 신문들로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1972년부터 1990년 3월까지 18년 동안 신문사에서 활자판 배열하는 '문선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도 손에서 신문을 놓지 못하고 있으며, 신문은 읽어서 좋을뿐만 아니라 휴지로도 쓸 수 있고 바닥에 깔면 장판도 된다고 뿌듯해 했다. 벽에는 빨간 펜으로 어지럽게 밑줄 그어진 신문 기사들이 떨어지지 못한 가을 낙엽처럼 매달려 흔들렸다. 냉장고에는 798회 로또 당첨 번호가 붙어있었다. “3월이었던가... 혹시나 해서 사봤는데...” 할아버지는 또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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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모가지 자르려고 도끼 들고 국회에 갔었죠." 노인의 분노는 때때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극하게 치닫는다. 노인 기초연금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한 달에 최저 생계비 49만 원을 받는다. 이 중 절반인 25만 원은 노인 기초연금이고, 24만 원은 기초생활보장법에 따라 지급되는 생계급여다. 지난 9월 기초연금이 5만 원 오르기 전에는 기초연금 20만 원, 생계급여 29만 원을 받았다. 정부는 기초연금을 5만 원 올려주는 대신, 생계급여를 5만 원 깎았다. 기초연금이 인상돼 노인 복지가 강화됐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할아버지가 손에 쥐는 돈은 여전히 한 달 49만 원이다. 할아버지는 분노했다. 기초연금 받아도 생계급여 줄이지 않겠다고 말한 국회의원 명단을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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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삼모사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특성 때문이다. 정부는 인간다운 삶이 '겨우' 가능한 '최저 생계비'를 정해 놓고, 모자란 부분만 생계급여로 채워준다. 기초연금을 받으면 그만큼 보충할 필요가 줄어드니 생계급여는 딱 그만큼 깎인다. 이것이 정부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충성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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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기준 기초생활 수급자는 158만 명. 이 중 65세 이상 노인이 45만 명이다. 이들은 사실상 기초연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초연금 받고서 보충성 원리 탓에 그만큼 생계급여를 뺏긴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 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부도 정치권도 이런 문제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2014년 9월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서울 관악구에 있는 노인 복지관을 찾아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해,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를 기초연금 수혜에서 배제하는 것은 형식 논리에 경도된 비합리적 처사"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총선 당시 "최빈곤층 어르신 40만 명에게 실질적인 기초연금 혜택을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변한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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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는 지난 7월 '기초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TF를 만들어 관계 부처와 협의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역대급 슈퍼 예산'이라는 내년 정부 예산안에 관련 내용은 없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10일 국정감사에서 "기초연금액 일부라도 기초생활수급 노인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재정당국과 논의했지만, 관철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가 먼저 돌봐야 할 계층인 (생계급여) 비수급 빈곤층부터 먼저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득이 전혀 없어도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을 못 받는 비수급 빈곤 노인은 9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돈이라면 이들을 먼저 도와야 한다는 게 정부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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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돈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말한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위원장은 "가장 가난한 노인과 조금 덜 가난한 노인 사이에서 누구를 도울지 저울질 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가 말한 복지 국가의 모습인가?"라고 되묻는다. '줬다 뺏는 기초연금'은 기초연금법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기초연금법 1조는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여 안정적인 소득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노인의 생활안정을 지원하고 복지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돼있다. 여기서 말하는 '안정적인 소득기반'이 왜 기초생활 수급 노인에게만 '최저 생계비'로 국한되는지 정부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기초생활 수급 노인에게 굳이 기초연금을 지급하고 생계급여에서 깎는 '행정 낭비'는 이 때문에 발생한다.

정말 재원 부족 때문인지도 따져봐야 할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에 따라 지난 9월 기초연금이 20만 원에서 25만 원으로 올랐고, 앞으로 5만 원 더 오를 예정이다. 올해 기초연금 수급자가 502만 명이니까, 이들이 5만 원씩 더 받으면 한 해 3조 원이 들어간다. 기초생활 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주기 위해 필요한 예산은 1조3천5백억 원으로 공약 이행 재원의 절반에 불과하다. ‘기초연금 사각지대’를 방치하는 건 결국 돈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6일부터 유류세가 인하됐다. 그 영향으로 세수는 6개월 간 2조 원 감소한다. 유류세를 내리는 건, 차 많이 모는 고소득층에게 유리한 역진성이 명확한 정책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소득 분배 강화’라는 정책 기조에 역행해 2조 원이라는 세금을 경기 부양이라는 명목으로 대부분 고소득층을 위해 사용한다. 기초생활 수급 노인에게 기초연금으로 1조3천5백억 원을 주게 되면, 그 돈은 대부분 소비된다. 관점을 달리하면 경기 부양을 위한 유류세 인하와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 유치원 총연합회는 ‘사립 유치원 사태’에도 굴하지 않는다. 사유재산을 지키겠다며 국회에 로비하고, 이른바 '유치원3법'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킬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칠 힘이 있다. 그들의 행동이 여론의 지탄을 받을지언정, 민주주의가 결국 이해 집단들의 의사 결정 과정이라는 점에서 불법적이진 않다. 기초생활수급 노인 45만 명은 조직적인 힘이 없다. 언론에 박탈감을 호소해도 그 뿐이다. 정치권은 선거 때만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정부와 정치권이 유류세는 내려도 '줬다 뺏는 기초연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다.

고한석[hsgo@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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