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국가대표의 병역과 특례

[취재후] 국가대표의 병역과 특례

2018.10.26. 오후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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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국가대표의 병역과 특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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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과 ‘특례’

이제는 정말 진부한 주제가 돼 버렸습니다.
뉴스에 이 두 단어가 나오면 안 좋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단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민한 단어(병역)에 ‘특별한 예외’를 붙여놨으니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우리 일반인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특별한 만큼 더 많은 관심과 견제를 받는 게 오히려 정상적인 일일 겁니다.

이번 사건을 접한 제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병역 특례를 받은 선수는 병역법에 따라 사회복무요원, 그중에서도 체육요원 신분을 얻게 됩니다. 만 27세 이전이라면, 일반인으로 살다가 본인이 원할 때 아무 때나 시작할 수 있고,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4주를 제외하고는 이동의 제한도 없습니다. 체육요원 신분이 유지되는 34개월 동안 외국으로 나갈 때 병무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는 정도입니다. 이마저도 소속사나 팀에서 행정 처리를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최소한 외국 프로구단과 장기계약이나 개인 기량 유지에 방해되는 걸림돌은 모두 제거된 셈입니다.

체육요원에게 부과된 사실상의 유일한 의무 규정, 그게 바로 ‘봉사활동’입니다.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544시간을 재능 기부 형식의 봉사활동으로 채워야 합니다. 544시간.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23일이 채 안 되는 시간입니다. 기본 근로 시간 8시간으로 잡아도 68일에 불과합니다. 몰아서 하든 나눠서 하든, 시간만 채워 증빙서류를 내면 됩니다. 관점에 따라 많게도 적게도 느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 허용된 ‘특별한’ 자유에 비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취재후] 국가대표의 병역과 특례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고 체육요원이 된 축구선수 A 씨는 봉사활동을 위해 모교를 찾았습니다. 감독기관인 국민체육진흥공단에 제출한 위의 서류를 보면 2017년 12월 18일부터 이듬해 1월 9일까지 3주 동안 매일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빨간 날(1월 1일, 일요일)만 제외하고, 토요일도 했습니다. 19일 동안 무려 196시간을 채웠습니다. 하루 평균 10시간 넘게 후배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봉사활동 시간으로 인정되는 이동 시간을 빼더라도 하루 8시간 이상의 강행군입니다.

▶관련기사: https://www.ytn.co.kr/_ln/0107_201810260621025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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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사진이었습니다. 훈련 사진을 500여 장이나 제출했는데,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사진들이 발견됐습니다. 1월 3일부터 9일까지 엿새 동안 찍은 사진이 마치 하루에 찍은 것처럼 너무나 비슷했던 겁니다. 옷, 신발, 양말, 운동장 상태, 운동기구 위치까지 일치합니다. 특히 하늘의 구름까지 똑같은 3일과 6일 사진이 결정타였습니다. 문제가 불거지자 국민체육진흥공단이 급하게 A 선수의 모교를 찾아 사실 확인에 나섰고, 학교 축구부 감독은 봉사활동마다 매번 사진을 찍지 못했을 뿐 봉사활동을 허위로 한 건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사진이 가짜인 건 맞지만, 봉사활동은 다 했다는 주장입니다. 사진이 없는 이상 남은 증거는 축구부가 직접 작성한 훈련일지 정도가 전부입니다. A 선수와 축구부 감독이 근거 자료를 제출하기로 했으니 지켜봐야겠습니다. 또 다른 안타까움은 적발이 돼도 경고 처분을 받아 복무 기간이 5일 늘어날 뿐 실질적인 불이익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내에서 통제받으며 생활하는 군복무 기간이면 몰라도 체육요원 신분이 5일 늘어나는 걸 처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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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급식은 안 되고 사인회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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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수들은 어떨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구심이었습니다. 확인해보니 현재 공단의 관리․감독을 받고 있는 체육요원은 30명이고, 자격을 확보한 선수까지 합하면 60명에 달했습니다. 한 선수만의 문제가 아닐 것 같았습니다. 확보한 일부 인원의 봉사활동 확인서를 살피던 중 또 다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이번엔 ‘사인회’라는 단어가 문제였습니다. 사진 속 현수막엔 ‘000선수 사인회’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었습니다.(사진 3, 4) ‘사인회 및 원포인트 레슨 12시간.’ 설마 사인회를 열고 봉사활동을 인정받은 걸까?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인회 개최 단체와 장소, 해당 지자체에 확인하니 이 선수가 인정받은 봉사활동 12시간 중 ‘무료 레슨’에 할애된 시간은 겨우 1시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300명이나 몰려 사인회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는 답변이 중복됐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사인회를 하는 게 국민에 대한 봉사일까요? 영화 대사가 떠오릅니다. "납득이 안 가. 납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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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선수뿐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선수도 사인회를 열고 15시간의 봉사 시간을 인정받았는데 이 선수 소속사는 기자에게 오히려 억울하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선수가 무료 급식 봉사를 신청하고 국민체육진흥공단에 문의했더니, 봉사활동은 선수 특기를 활용해야 한다며 공단 측이 먼저 사인회를 안내해줬다는 겁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아 사인회가 봉사활동이 맞느냐고 수차례 되물었지만, 해당 종목을 알릴 수 있고, 체육 저변을 확대하는 공익 캠페인에 해당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인회를 연 것이 선수가 의도한 편법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공단 측은 사인회만 하면 안 되고, 레슨 등 다른 활동을 병행해야 봉사활동으로 인정된다는 원칙적인 해명을 늘어놨습니다. 봉사시간 중 사인회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 레슨이 병행됐는지 등은 따로 확인하지 않은 채 말이죠. 애매한 규정도, 그 규정을 놓고 행정 처리에만 골몰하는 관리 기관도 모두 문제였습니다. YTN 보도 이후 공단 측은 문제점을 보완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다시 병역과 특례로 돌아옵니다.
병역에서 특례로 분류된 선수들은 봉사활동이 사실상 군 복무나 다름없습니다. 남보다 가벼운 짐을 지는 만큼 더 특별하고 꼼꼼한 감시를 받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또 더욱 철저히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역 특례’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지만 가볍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특’보다 ‘일반’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천 원 더 준 사실을 매번 후회하게 되는 곰탕처럼 말이죠.

양시창 [ysc08@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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