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포인트] 나무 그늘 아래로, 서울 둘레길을 걷다

[산행포인트] 나무 그늘 아래로, 서울 둘레길을 걷다

2020.09.14. 오후 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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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포인트] 나무 그늘 아래로, 서울 둘레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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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긴 장마

모처럼 햇빛을 보니 마음이 밝아진다. 올해 장마는 5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을 오르내리면서 엄청난 비를 뿌렸다. 그 장마로 재산피해는 물론이지만 고귀한 인명도 많이 희생되었다. 우리를 그처럼 괴롭히던 긴 장마도 이제 멀리 달아났나 보다. 올해 여름은 햇빛이 그리운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계절이었다. 그런데 며칠 사이 강한 햇빛으로 폭염이 발생하다 보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을 한다. 그 짧은 순간이지만 이젠 강한 햇빛이 싫어진다. 여자의 마음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남자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비가 그치니 그동안 쉬고 있던 다리 근육에 영양분을 공급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멀리 이동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가까운 곳의 나무 그늘 아래로 걷기로 한다. 관악산 언저리에 있는 서울 둘레길을 걸었다. 이 코스는 4년 전에도 걸었던 길이라 그리 낮설지 않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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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미들의 합창

사당역에서 관음사 방향으로 올라가면 둘레길이 연결된다. 여기서부터 나무 아래로 걷기 때문에 햇빛이 비치지 않아서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나무 그늘로 들어서자마자 매미 소리가 귓등을 때린다. 6년 동안 땅속에서 묵언(默言)의 긴 수행을 마치고 딱딱한 껍질을 벗고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강한 햇빛이 신호인 양 한 나무에 여러 마리의 수매미가 암매미를 불러대는 소리가 쉬이 가는 여름날이 아쉬운 듯 울어댄다. 허물을 벗고 채 한 달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짝을 만나 후손을 번식하고 자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이미 알고나 있는 듯 열심히 배필을 찾는 소리가 한 편으로 측은하게 들린다.

이곳 관악산은 돌이 많은 산이라서 평상시는 계곡에 물이 없다. 하지만 많은 비가 내린 탓으로 모든 계곡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매미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함께 들리니 선경이 따로 없는 듯 새로운 세상에 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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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장마 기간 동안 땅속에 머물고 있던 습기가 햇빛이 비치니 제 한 몸 가벼이 하려고 작은 먼지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다. 나무뿌리는 평상시에 흙과 함께 빈 틈새를 만들어 비가 내리면 그 공간에 물을 채운다. 비가 그치면 채워진 물은 천천히 바깥으로 내보내면서 모든 생물에게 수분을 공급한다. 나뭇잎도 50여 일 동안 잎 속에 흠뻑 저장해 두었던 수분을 서서히 뿜어내고 있으니 숲은 자연적인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삼림(森林)을 거대한 녹색 댐이라 부르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상황인데 외부의 습도마저 높으니 걷는 것이 땀으로 목욕을 하는 기분이다. 흐르는 계곡물에 간간히 손과 얼굴을 씻어보지만 잠시뿐이다. 땀으로 목욕을 하다 보니 옷은 금방 세탁을 마친 듯 물이 흐른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도 나무 그늘 아래로 걸으면서 자연과 함께하니 이열치열(以熱治熱)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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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 장군과 낙성대

낙성대(落星垈)에 도착한다. 고려군이 거란군을 맞아 싸울 때 맹활약을 했던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나그네는 우리 역사상 3대 명장을 꼽으라면 강감찬 장군과 고구려 때 수나라와 싸웠던 을지문덕 장군, 그리고 조선 시대 일본군과 싸웠던 이순신 장군을 꼽고 싶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다.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장군 같은 분이 계셨기에 한국은 이토록 발전하여 지금껏 잘살고 있노라 감사의 예를 올린다.

큰 길을 건너면 다시 나무 그늘 아래로 걷는다. 서울 둘레길은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계속 걷다 보면 중간 중간에 길안내 표지판이나 주황색 리본이 눈에 띈다.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이 둘레길이다. 처음 걸을 때는 이 표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오는데 한 개 코스만 걷고 나면 금방 익숙해진다. 이 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둘이 걸어도 좋다. 힘든 코스가 없어서 도란도란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친구와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둘레길을 걸으라 권하고 싶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면서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는 길이다.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도 없다. 새소리, 매미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나뭇잎이 서로를 포옹하면서 내는 소리까지 들으면 아무리 힘든 이야기를 쏟아놓아도 모든 것을 녹여낼 수 있는 것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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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하는 길

그 길은 나의 길이며, 함께한 친구의 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은 달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우리는 함께라는 일심동체가 되는 길이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을 함께 걸으면 동지(同志)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흘리는 땀방울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된다. 가슴이 열리는 길이다. 그래서 혼자 걸으면 빨리 가지만 둘이 걸으면 멀리 갈 수 있다고 했다. 길이란 그런 것이다. 그 길에서 나를 찾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길이다. 누구나 걷는 길이지만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고,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라 했다. 이렇게 길을 걸으면 운명의 돌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깨우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걷는 것이다. 걸으면 눈으로 보이는 것도 많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길이다.

그렇게 걷다 보니 관악산 일주문을 지나고 호압사까지 왔다. 몸에서는 계속 땀이 흐르고 배낭은 허리 아래로 처지지만 마음은 가벼워진다. 그것이 길이다. 내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배우는 것이 길이다. 고려말 화옹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말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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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압사의 전설

호압사(虎壓寺)는 조선 초 경복궁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풍수지리설에 의해 창건한 사찰이다. 전국에서 뽑혀 온 유명한 목수들이 경복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건물의 뼈대를 세워 놓으면 한밤중에 무너지곤 했다. 결국에는 삼성산(三聖山)의 호랑이 꼬리 형국에 절을 지어 이것을 눌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호압사이다.

호압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천주교 삼성산 성지가 있다. 조선말 기해박해로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분의 성인 유해를 조선인 신자들이 아무도 모르게 선산에 묻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분 성인의 안식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는 마음의 믿음 때문에 지금은 성지로 변모한 것이다.

세상사 모든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하여야 하는 일 모두가 즐거운 것이다. 그런 마음은 종교로 터득할 수도 있고, 수도자처럼 길을 걸으면서 깨우칠 수도 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이런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땀방울을 흘리면 그 땀방울 속에 마음의 믿음도 함께 하게 된다. 그것이 길이다.

제공 = 국내유일 산 전문채널, 마운틴TV (명예기자 김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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