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N팩트] 평생 그리워하다가...마지막 황세손비 줄리아 리 별세

[취재N팩트] 평생 그리워하다가...마지막 황세손비 줄리아 리 별세

2017.12.07. 오후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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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황세자인 영친왕 이은의 유일한 생육, 이구 씨의 전 부인 줄리아 리가 별세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이혼해야 했고 마지막까지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얘기들이 전해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는데요.

취재기자 연결해 관련 얘기 들어보겠습니다. 김정회 기자!

어제 줄리아 리 여사 별세 소식으로 인터넷이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별세한 건 지난달이라고 하죠?

[기자]
그렇습니다. 소식을 전한 이남주 전 성심여대 교수, 줄리아 리 여사의 전 남편인 이구 씨의 9촌 조카의 얘기에 따르면 줄리아 리 여사는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의 한 요양병원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향년 94세로 최근 들어서는 기력이 너무 약해져서 손을 쓰지 못해 휴대전화도 지닐 수 없었고, 외부와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미국에 다시 들어갈 때 입양한 딸이 있었지만, 임종을 지키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앵커]
줄리아 리 여사, 이구 씨를 처음 만난 게 미국이었다는데 어떻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기자]
줄리아 리 여사는 독일계 미국인입니다.

이구 씨와는 뉴욕의 한 건축사무소 동료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나이 어린 동양의 남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든 건 아니었다는데 어쨌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1958년 결혼을 했습니다.

이구 씨가 왜 미국에 있었을지 궁금하실 수도 있을텐데요.

이구 씨는 14살 때, 일본에서 광복을 맞게 된 뒤 귀국이 허용되지 않아 당시 맥아더 사령부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대학은 MIT 건축학과를 다녔는데 졸업 후 직장을 잡은 곳이 줄리아 리 여사와 함께 일한 곳이었습니다.

결혼 후 5년간 두 사람은 미국에서 계속 일을 하며 신혼을 보냈는데 1963년 옛 황실 인사들 귀국이 허용되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요청으로 귀국한 뒤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삶이 고됐다고 합니다. 서양인이라는 점, 후사가 없었던 점 등이 종친회와 계속 갈등을 빚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혼 요구를 받았다는 얘기도 많고요.

그래도 시아버지인 영친왕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주변인에게 따뜻하고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 줄리아 여사였는데 끝내 별거를 하게 됐고 결혼 24년 만에 이구 씨와 이혼했습니다.

[앵커]
적응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겠죠.

[기자]
별세 소식을 전한 이남주 전 교수도 같은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보시죠.

[이남주 / 전 성심여대 교수 (이구 씨 9촌 조카) : 미국에 그냥 계셨으면 잘 사셨을 거예요. 문화가 다른 한국에 왔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죠.]

나이가 8살이나 더 많고 서양인이었던 줄리아 여사에게 남편 이구 씨는 점잖고 평범한, 줄리아 여사를 사랑해주는 동양 남자였겠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이구는 마지막 왕세손, 평범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점차 깨닫게 됐을 겁니다.

[앵커]
헤어진 뒤 줄리아 리 여사의 또 다른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어요.

장례식 참석을 못 하고 멀리서 지켜봐야 했다는 얘기였는데요.

[기자]
먼저 화면 보시죠.

2005년 이구 씨의 장례식 장면입니다.

당시 낙선재에서 영결식이 열렸고 뒤이어 돈화문에서 종묘까지 노제가 치러졌습니다.

줄리아 리 여사는 이구 씨와 이혼을 한 상태라 당시 종친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장례식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제가 진행되는 종묘 거리 건너편에서 휠체어를 타고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습니다.

YTN이 당시 이 모습을 단독으로 촬영했는데요.

줄리아 리 여사는 카메라에 자신이 잡힌 사실에 당황해하며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들어보시죠.

[故 줄리아 리 여사 (2005년 7월 25일 YTN 단독 화면) : 제발 돌아가 주시겠어요?]

[앵커]
줄리아 리 여사, 이혼 뒤에도 한동안 한국에 머물렀다고 하죠?

[기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곳이니 쉽게 떠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죽기 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재회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편 못지않게 남편의 나라 한국에 대한 사랑도 컸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줄리아 리 여사는 이혼 뒤 서울의 한 호텔에 의상실을 열어 디자이너로 일하며 봉사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분이셨다고 합니다.

이남주 전 교수가 어제 YTN에 공개한 줄리아 여사의 유품이 있는데, 동물 모양 자수 장식으로 직접 디자인한 치마와 앞치마가 눈에 띕니다.

그림도 한 점 있는데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이어서 엄마가 되고 싶었던, 아픈 마음을 그린 게 아닌가 추측하게 합니다.

줄리아 리 여사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생전에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재의 일부라도 한국에 뿌려달라는 것이었다는데 바람대로 되진 못했습니다.

[앵커]
마지막까지 남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한 줄리아 리 여사, 알게 될수록 가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문화부 김정회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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